트리메이트

PhiLoSci Wiki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Virginia Morell, "Called 'Trimates,' Three Bold Women Shaped Their Field," Science 260 (16 April 1993): 420-425.

번역

'트리메이트'라 불리는 세 명의 대담한 여성들이 자신이 몸담은 분야를 형성하다


버지니아 모렐 지음, 김명진 옮김

 


예일대학 박사과정 학생인 멜리사 레미스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3년간의 저지대 고릴라 연구를 마치고 막 귀국했다. 3년의 연구 기간 중에는 끔찍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레미스의 목표는 고릴라들이 그녀의 존재에 "길들여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그녀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님을 설득하게 되면 고릴라들의 정상적인 행동 패턴을 연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저지대 고릴라들은 이방인의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몸무게가 18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수컷이 그녀를 공격하려 들었고 허파 깊숙이에서 길어올린 듯한 비명을 질러댔다. 이에 대해 레미스는 순종하는 태도로 몸을 웅크리고 나무등걸에 달라붙어 도망치지 않도록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만약 달아난다면 여러 달에 걸친 끈기있는 연구가 허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마치 소리의 벽이 내게로 다가오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 움직이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하지요. 나무를 끌어안고, 안내인을 끌어안고[그가 고릴라에게 도전하지 않도록], 그러면서 자신에게 계속 되뇌는 거죠. '움직이지 마, 움직이지 마, 움직이지 마'."

이러한 시련을 겪으면서(이런 일은 여러 번 되풀이해 일어났다), 레미스는 마음 속에 힘을 주는 두 가지 원천에 의지했다. "난 내가 해낼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하고 그녀는 말한다. "내가 이 일을 하기 전에 제인하고 다이앤이 이미 해냈는 걸요." 제인과 다이앤은 제인 구달과 다이앤 포시를 가리킨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동료 비루테 갈디카스와 함께 일명 "트리메이트(Trimate)"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의 현장 영장류학을 창시한 여성 학자들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난 이 엄청난 일을 해내리라곤 꿈도 꿔보지 못했을 거예요"라고 레미스는 덧붙였다.

구달, 포시, 갈디카스를 보면서 "엄청난 일을 꿈꾸게" 된 것은 레미스 혼자만이 아니다. 20년 전만 해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북미의 영장류학은 오늘날 여성의 비율이 50%가 넘는다. 그러나 세 명의 여성들이 자신이 몸담은 과학 분야에 미친 엄청난 영향은 단지 숫자에만 그치지 않는다. 영장류들과 함께 생활하는 그들의 연구 방법(구달은 침팬지, 포시는 고릴라, 갈디카스는 오랑우탄을 연구했다)은 남성 동료들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이런 사실을 알아두셔야 합니다"라고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의 인류학 명예교수인 셔우드 워시번은 설명한다. "당시[1960년대]에는 과학 논문을 쓸 수 있는지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동물을 한 마리라도 구경이나 해볼 수 있는지가 문제였지요. 제인 이전에는 덤불 속으로 사라지는 동물의 팔이나 등만 봐도 흥분하곤 했습니다. 그녀가 했던 것처럼 동물들이 달아나지 않게 하면서 그 사이에 같이 앉아 있는 건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이런 방법을 써서 트리메이트는 대형 유인원 사회에 대해 획기적인 통찰을 제공했다. 이 분야의 연구자들 중 일부는 남성적인 접근법을 써서는 이런 통찰이 얻어질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들 세 사람이 얻어낸 결실은 연구대상과 공감하는 여성의 능력에서 나왔다. 그들은 [영장류] 개체들을 그들 각각의 생활사가 집단의 구조에 영향을 주는 존재로 이해했다. 당시 남성 영장류학자들은 이런 방법을 써서 얻어진 결과들이 여성의 감상적 태도가 낳은 산물이라며 즉각 무시해 버렸다. 오늘날에는 수많은 논쟁을 거친 끝에 영장류 무리 내에서 개체들의 개성이 지닌 중요성이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세 명의 여성은 선구자로 간주되고 있다. "그들은 개척자들이었어요" 하고 앤 아버에 있는 미시건대학의 영장류학자인 존 미타니는 말한다. "바로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이런 동물들을 연구하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그들이 했던 연구를 살펴봐야 하게 되었지요."

과학은 공감할 수 있는가?

세 명의 여성들의 연구를 후원했던 저명한 고인류학자 루이스 리키는 트리메이트가 두 가지 미덕을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그 중 어느 누구도 전문적인 훈련을 많이 받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구달은 그녀가 처음으로 쓴 대중서인 『인간의 그늘에서 In the Shadow of Man』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마음 속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지 않고 이론으로 편향되어 있지 않은 사람을 원했다. 오직 지식에 대한 진정한 욕구라는 이유만으로 연구를 할 사람을 원했던 거였다."

리키가 보기에 그들의 두 번째 미덕은 그들의 젠더(gender)였다. 리키는 야생 영장류 연구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다고 메리 스미스는 말한다. 그녀는 리키와 세 명의 유인원 여성들과 긴밀하게 공동 작업을 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선임 편집자이다. 리키는 "인내심, 끈기, 지각능력을 갖춘 여성들을 신뢰했어요. 이런 특성들 때문에 여성들이 영장류의 행동을 더 잘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라고 스미스는 말한다.

리키 자신이 가진 예민한 지각능력은 트리메이트 각각에서 이러한 자질들을 찾아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1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세 명의 여성들을 차례로 만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온 것은 구달이었고, 그녀가 24세 되던 1957년에 영국에서 케냐로 온 직후였다. 그녀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나이로비의 코린던 자연사박물관(지금은 케나국립박물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의 큐레이터로 있던 리키에게 연락을 해왔다. 리키는 그녀에게 비서 일자리를 제안했으나, 이내 자신이 좀더 큰 일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녀가 갈 생각이 있다면 탄자니아로 가서 침팬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연구자금을 주선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1960년에 그녀는 탕가니카 호수변의 곰베 강에 있는 숲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이곳에서 그녀의 굳은 의지와 관찰 기술은 얼마 안 가 결실을 맺었다. 연구를 시작한 지 불과 3개월만에 그녀는 이전까지 어떤 연구자도 보고한 적이 없는 행동들을 관찰했다. 침팬지들이 사냥한 야생 새끼돼지를 포식하는 모습, 침팬지들이 원숭이를 사냥하는 모습, 침팬지들이 흰개미들을 개미집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작은 가지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는 모습이 그런 것들이었다.

이 중 마지막 발견은 영장류, 그리고 인간에 대해 인류학자들이 갖고 있던 개념을 산산조각내 버렸다. "난 1962년 런던 학회 때 그 자리에 있었어요. 제인이 처음 영국으로 돌아와 침팬지가 야생에서 도구를 만든다는 놀라운 발표를 했던 때였죠"라고 프린스턴대학의 영장류학자 앨리슨 졸리는 말한다. "그녀는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본질적으로 다시 정의했어요. 우리는 모두 '도구 제작자로서의 인간'이라는 관념을 믿으며 성장했는데, 그녀의 발표는 바로 그걸 박살내 버렸지요. 이제는 그 어떤 것도 예전과 같을 수 없음을 모두가 깨닫게 되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장류학은 남성 지배의 아성이었고, 구달은 공격을 받았다. 이 분야를 지배하고 있던 동물행동학자들은 동물들의 숫자를 세고 이들을 "수컷"이나 "암컷"과 같은 일반적인 범주에 넣는 연구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 대신 구달은 침팬지들 개체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방법을 택했다. "난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고, '개체'니 '감정'이니 '개성'이니 하는 단어들을 썼지요"라고 그녀는 회고한다. 이는 그녀가 사용한 방법의 핵심이었다. 구달은 [침팬지 개체들의] 생활사가 전개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러한 생활이 ― 이론이나 실험이 아니라 ― [침팬지들의] 사회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를 쥐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물을 포함한 자연이 제 갈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 난 이것이 좀더 여성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말입니다"라고 졸리는 지적한다.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뭔가를 참고 견디기 위해서는 특정한 종류의 인내심이 요구되지요."

이 분야의 지도적인 과학자들은 이러한 경향을 비과학적이고 감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포시와 갈디카스가 그랬던 것처럼, 구달은 다른 연구자들의 적대적인 태도에 직면했다. 트리메이트는 "모두 일하면서 때때로 조용히 왕따를 당했어요"라고 영장류학자이면서 워싱턴 D.C.에 기반을 둔 침팬지보호보존위원회(Committee for Care and Conservation of Chimpanzees)의 의장을 맡고 있는 게자 텔레키는 말한다. "그리고 때때로 그런 태도가 공개적으로 드러나기도 했지요. 어떤 학술회의에서는 과학자들이 트리메이트를 불쾌한 방식으로 공격하면서 그들이 하고 있는 건 제대로 된 과학이 아니라는 암시를 주곤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구달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정말 "제대로 된 과학"임을 다른 영장류학자들에게 설득시켰다. 이는 그녀 자신이 다소 교훈을 배운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을 지도했던 케임브리지대학의 로버트 힌디는 이렇게 말한다. "제인에 대해 내 역할은 과학을 어떻게 하는지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나에 대해 그녀의 역할은 개체들의 특성을 볼 수 있도록 내 눈을 뜨게 해 주고 이런 특성이 동물들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함을 알려 주는 것이었지요." 심지어 가장 "여성적"인 특질인 공감(empathy)도 야생 영장류를 관찰할 때의 중요한 측면 중 하나로 남성 영장류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공감은 영장류학에서 정말 중요합니다"라고 애틀란타에 있는 여키스 지역 영장류 연구센터(Yerkes Regional Primate Research Center)의 동물학자 프란츠 드 발은 말한다. "당신이 질문을 던지고 동물들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도록 도와 주지요."

남아 있던 과학계 내의 비판자들 대부분은 1986년에 구달의 책 『곰베의 침팬지 The Chimpanzees of Gombe』가 나오면서 입을 다물었다. 25년간에 걸친 연구의 요약판으로 도표와 그래프로 가득찬 이 책은 그녀도 침팬지에 대한 "객관적" 일반화를 할 수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한 연구의 핵심은 여전히 영장류 무리 내에서 개체들의 개성을 인지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일부 여성 연구자들이 그녀를 특히 존경하는 이유도 그녀가 남성적인 과학 문화의 적대적 태도에 맞서 "여성적" 접근법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과학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여성은 남성이 하던 일을 똑같이 잘 하거나 그보다 더 잘 해야 합니다. 여성들이 좀더 여성적인 방식으로 과학 분야에 접근하는 걸 대단히 꺼리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죠"라고 앤 아버에 있는 미시건대학의 영장류학자 바버라 스무츠는 말한다. "제인은 훌륭한 예외였지요. 그녀는 침팬지들의 감성적 성격을 다루는 일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고, 자신이 관찰한 결과를 곧장 써냈습니다."

복합적인 심리를 가진 여성

1966년에 리키가 다이앤 포시를 두 번째 트리메이트로 낙점했을 때, 구달은 이미 명성을 날리고 있었고 리키는 고릴라를 연구할 제 2의 제인 구달을 찾던 중이었다. 그가 찾아낸 것은 심리적으로 좀더 복합적인 어떤 인물이었다. 33살의 포시는 켄터키의 아동병원에서 일하던 물리치료사였고 아프리카의 야생생물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루이스빌에 있는 켄터키대학에서 강연을 마친 리키에게 접근해 자신이 구달의 훌륭한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 만남이 있은 지 8개월 후, (구달을 후원했던) 윌키 재단에서 자금을 얻어낸 포시는 콩고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것은 재난이었다. 그녀의 연구는 내전으로 엉망이 됐고, 그녀는 포로로 잡혀서 우리에 갇힌 채 대중 앞에 전시되었고 강간을 당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포시는 이에 굴하지 않고 르완다에서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그녀는 이곳에 카리소케 마운틴고릴라 연구센터(Karisoke Center for Mountain Gorillas Research)를 설립했다. 포시는 구달이 곰베에서 보고한 것만큼 세상을 놀라게 한 행동을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이전까지 영장류학자들이 한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을 관찰했다. 암컷 고릴라가 무리들 사이에서 이동한다는 것, 수컷이 암컷을 흥분시키기 위해 새끼를 죽이기도 한다는 것, 고릴라는 영양분의 재활용을 위해 자신의 똥을 먹기도 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발견들은 포시가 1976년에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받은 박사논문 ― 구달과 마찬가지로 힌디의 지도를 받은 ― 의 근간이 되었다. 당시에는 고릴라에 대해 알려진 것이 너무나 적었기 때문에 그녀의 논문은 이 종에 대한 영장류학자들의 이해에서 "진정한 기준선을 설정했다"고 조지 샬러는 말한다. 그는 1959년에 야생 마운틴고릴라에 대한 최초의 연구를 했던 저명한 동물학자이다. 여기에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의 생물인류학자 필리스 제이 돌리나우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유인원 종에 대해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그녀의 패러다임은 최신 유행을 따른 것도 아니었고 정량적인 것도 아니었지만, 그건 문제가 안되었어요. 그녀는 정확한 보고자였고 그 일을 잘 해냈지요."

구달과 마찬가지로 포시에게도 유인원의 개체성은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 것이었다. 케임브리지에 있을 때 포시는 데이터를 정해진 통계적 틀에 맞추어 제시해야만 했는데, 그녀에게 이는 괴로운 경험이었다. 그녀가 학위논문을 마친 후에 쓴 과학 논문은 단 4편에 불과했다. 객관적으로 관찰을 하는 대신, 자신의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포시는 고릴라 무리의 생활에 더욱 몰입했다. 나중에 그녀는 동물들의 행동을 흉내내는 방식으로 그들을 완전히 길들여서, 마치 그녀 자신이 고릴라인 것처럼 무리 가운데 앉아 있을 수도 있었다.

이처럼 고릴라 무리의 일부로 통합된 것은 구달과 포시의 작업을 가능케 했던 공감의 직접적인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포시가 냉정한 관찰자에서 고릴라의 사회생활에 대한 참여자(새끼들을 간질이거나 고릴라가 자신의 소지품을 뒤지고 그녀를 쓰다듬게 내버려두는 식으로)로 가는 선을 넘으면서, 과학에 대한 그녀의 관심은 줄어들었다. 그녀를 바꿔놓은 마지막 계기는 고릴라들(당시 개체수가 250마리에 불과했던)이 밀렵꾼과 문명 그 자체에 의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연령 집단을 분석하고, 동물들의 활동 범위를 지도로 그리고, 배설물 샘플을 수집하고, 선호하는 먹이의 목록을 만드는 등 포시가 그간 해왔던 모든 일들은 고릴라 그 자체가 사라져버릴 위험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는 무의미해 보였다.

결국 포시는 자신이 "적극적 보존"이라고 불렀던 활동, 즉 덫을 제거하고 밀렵꾼을 감시하는 공원 순찰을 위해 데이터 수집을 완전히 포기했다. 그녀의 캠프에 머무르는 연구 보조원들 중 이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비난을 받았다. 캘리포니아대학 데이비스 캠퍼스의 영장류학자이면서 카리소케에서 포시와 함께 연구했던 켈리 스튜어트는 이렇게 회고한다. "누군가 밀렵 방지 순찰을 나가는 외에 다른 일을 하려고 하면 그녀는 이기적이라는 딱지를 붙였어요. 그녀에 비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기 연구에 더 관심이 많았고 보존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지요. 하지만 그건 그녀의 인생 전부였어요."

1977년에 밀렵꾼들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고릴라인 디지트를 죽였다. "그 비극은 사실상 그녀를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어 놓았어요"라고 메리 스미스는 말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도, 르완다 사람들에게도 위험한 존재가 되어버렸죠. 그녀의 불같은 성질과 밀렵꾼이라며 붙잡혀 온 사람들을 심문하는 방식 때문에요." 1979년에 르완다 정부는 그녀에게 출국을 명령했다. 그녀는 1983년에 르완다로 다시 돌아왔지만 2년 후 정체를 알 수 없는 암살자에 의해 카리소케에서 살해당했다.

구달의 사례가 공감이 과학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포시의 사례는 과학자들이 어떤 가치를 따라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많은 연구들은 남성과 여성간에 핵심적인 차이가 존재함을 보여 주었다. 남성들은 종종 이론적 가치 ― 지식 추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 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반면, 여성들은 지식을 그 유용성에 따라 평가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포시의 사례에서는 두 가지 유형의 가치들이 처음부터 뒤섞여 있었다. 고릴라에 대한 과학적 관심이 야생생물에 대한 열정과 세상을 바꾸려는 욕구에 의해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결국에 가서는 그녀가 고릴라에 대해 품은 우려가 그녀가 지닌 과학적 가치를 압도했다. 이런 경험은 멸종 위기에 처한 종들을 연구하는 일이 잦은 현장 영장류학자들 사이에 드물지 않다. "이것은 현재 많은 과학자들에게 딜레마가 되고 있어요. 세상을 위해 뭔가 쓸모있는 일을 할 의무가 있는지, 아니면 순수한 이론의 영역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말입니다"라고 텔레키는 말한다. 샬러도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그녀가 동원했던 방법과 그녀의 세웠던 목표에 찬성하건 그렇지 않건, 포시가 고릴라들이 처한 곤경을 세상에 알려준 사람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녀의 헌신은 고릴라들이 살아남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논문을 발표하거나 망하거나

어떤 면에서 비루테 갈디카스는 세 명의 트리메이트 중에서 가장 어려운 과학적 과업을 맡았다. 침팬지나 고릴라와는 달리, 오랑우탄은 혼자 사는 동물이다. 오랑우탄끼리의 상호작용을 관찰하는 것은 엄청나게 까다로운 일이다. 동물들끼리 섞이는 일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높은 나무 위에서 살면서 땅 위 ― 종종 늪지인 ― 로는 거의 내려오지 않는다. 갈디카스는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에 1주일 동안 잠복한 후에야 처음으로 오랑우탄(어미와 새끼)을 볼 수 있었다. 유인원들은 머리 위 높은 곳의 숲 꼭대기에 있었다. "오랑우탄을 따라가려면 목까지 잠기는 늪 속에서 펄쩍 뛰어올라야 했을 거예요. 그때 '이런, 이거 정말 어렵겠는걸'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갈디카스는 시간과 인내심, 그리고 오랑우탄을 연구하려는 열정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1969년에 리키를 만나기 오래 전부터 그 꿈을 키워 왔다. 리키가 캘리포니아대학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에 강연을 하러 왔을 때 그녀는 인류학과 대학원생이었다. 갈디카스는 강의가 끝난 후 리키를 만났고, 그녀가 지닌 열정은 리키에게 그녀가 구달과 포시가 세운 계보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인상을 분명히 심어 주었다. 리키가 자금을 모으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그는 결국 여러 지원기관들에서 충분한 자금을 확보해 갈디카스와 당시 남편이던 사진가 로드 브린다모어를 인도네시아의 탄중푸팅 보호지역으로 보낼 수 있었다.

일단 그곳에 도착하자 연구를 어렵게 한 것은 홀로 지내는 오랑우탄의 습성만이 아니었다. 오랑우탄의 일생은 느리게 전개된다. 암컷은 15살 이후에야 첫 새끼를 가졌고, 이는 빠른 논문 발표를 상상할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유인원들은 그녀를 반기지 않았다. 대신 유인원들은 그녀가 접근하면 나뭇가지를 집어던지고 그녀 위에 배설물을 갈겼다. 그러나 갈디카스는 서두르지 않았다. "난 유인원들에게 압박을 주지 않았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난 멈춰서서 내가 정말 위험한 존재가 아님을 볼 수 있게 했고, 그 다음 번에 유인원들의 태도는 좀더 느슨해졌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오랑우탄 한 마리를 길들여 그녀의 존재에 익숙해지게 하는 데는 12년의 세월이 걸렸다.

구달과 포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갈디카스의 끈기있는 노력은 중대한 과학적 성과로 이어졌다. 트리메이트 중에서 가장 학계지향적인 인물이었던 갈디카스는 현대적인 데이터 수집 기법이나 통계처리를 회피하지 않았고, 1978년에 UCLA에서 크게 찬사를 받은 박사논문에서도 그것에 의존했다. 학위논문에서 갈디카스는 이전까지 오랑우탄에 대해 알려져 있던 얼마 안되는 지식과 크게 차이가 나는 상호작용의 양상을 기록했다. 그녀는 젊은 오랑우탄들이 무리지어 여행하는 것, 아직 성체가 못된 오랑우탄이 때로 암컷과 강제로 교미를 하는 것, 수컷과 암컷이 장기간에 걸친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관찰했다. 그녀는 또한 박사논문을 통계적 상관관계로 가득 채웠고, 오랑우탄이 부르는 소리들을 구별해 내었으며, 오랑우탄이 먹는 모든 식물과 곤충들의 목록을 만들었다.

이는 과학계의 경력을 위한 대단히 전도유망한 출발점처럼 보일 것이다. 실제로 갈디카스의 연구는 그녀에게 전통적인 대학에서의 교수직을 손쉽게 보장해 주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는 그녀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녀가 밴쿠버에 있는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 자카르타 국립대학에서 겸임교수직을 가진 적이 있긴 했지만, 갈디카스의 경력은 ― 구달이나 포시, 그리고 몇몇 다른 여성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 수많은 남성 연구자들에 비해 좀더 이단적이고 주변적인 것이었다. 갈디카스는 포시처럼 점차 보존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현재는 그녀의 연구센터인 캠프 리키를 주류 과학 단체들로부터 얻은 자금이 아니라 주로 환경보호 단체인 어스와치(Earthwatch)의 도움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이것이 전적으로 갈디카스가 선택한 결과는 아니었다. 과학 지원기구들은 그녀의 연구를 지원하기를 점차 꺼리게 되었다. 최근들어 그녀가 많은 논문을 발표하지 않았고, 발표한 논문들도 종종 초기의 연구에서 얻은 데이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 항상 그녀의 연구비 신청을 밀어 주었습니다"라고 캘리포니아대학 데이비스 캠퍼스의 생물인류학자 피터 로드먼은 말한다. "하지만 이 동물들의 생활사에 관해 그녀가 우리에게 공유해 주었으면 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녀의 학위논문 이후로 우리는 그런 얘기를 접해보지 못했어요." 갈디카스는 그런 종류의 불평에 대해 화를 낸다. "내가 논문을 발표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겨드랑이까지 빠지는 늪에 한번도 들어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예요. 게다가 논문에서 중요한 건 양이 아니라 질이 되어야 해요." 그녀는 오랑우탄들의 출산 간격에 관한 자신의 최근 연구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갈디카스의 반박 ― 논문의 질이 양보다 더 중요하다는 ― 은 남성 연구자들과 여성 연구자들이 과학에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뿌리깊은 차이점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몇몇 연구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발표하는 논문 편수가 더 적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에 대해 견해차이가 있긴 하지만, 많은 여성 연구자들 ― 일부 남성 연구자들도 포함해서 ― 은 그 이유가 여성들이 논문의 전체 편수를 늘리는 것보다는 각각의 논문에서 좀더 완벽성을 기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데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포시나 구달과 흡사한 갈디카스의 과학자로서의 궤적은 과학 연구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나타나는 또다른 핵심적 차이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사실상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를 직업적 성공이라는 측면에서 사고하도록 조건지어져 온 남성들은 그런 기대를 과학으로 가지고 들어온다. 그들은 연구 주제, 협력 관계, 일자리를 빠른 경력의 상승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전도유망한 젊은 남성 연구자가 단 한 마리의 오랑우탄을 길들이기 위해 12년의 시간을 기꺼이 투자하려 들 가능성은 낮다. 엄청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한 그의 경력은 완전히 망가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갈디카스의 느린 논문 발표 속도 ― 그녀가 통상적인 학계의 기준에 사실상 전혀 무관심했던 것 ― 는 과학계에서 그녀의 성공을 가능케 해준 원동력이었다.

여성적 방식

제인 구달, 다이앤 포시, 비루테 갈디카스의 성공이 그들의 젠더 때문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루이스 리키가 그랬듯, 여성들이 끈기있고 남다르게 지각력이 뛰어난 관찰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혹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단지 리키 자신이 가졌던 남성적 편견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트리메이트가 현장에서 보여준 성질들은 그들이 여성이었다는 것보다는 과학계의 국외자였다는 점과 더 관계가 많은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사실이건 간에, 트리메이트는 영장류학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을 따라 현장으로 가서 영장류학의 주요 연구자가 되려는 학생들을 숱하게 양산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해낸 초기 연구들은 오늘날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의 핵심을 제공해 주고 있다. 조지 샬러에 따르면,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대형 유인원들이 "진정한 개체들"임을 트리메이트가 과학계에 가르쳐 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샬러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족 관계인 동물들과의 공감을 제공해 주었어요. 이것이야말로 종국에 가서 이 동물들을 멸종 위기에서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힘일 겁니다."

관련 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