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맬서스와 진화론자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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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영 지음, 권오형, 김영식 옮김, {{장|[[맬서스와 진화론자들 : 생물학 이론과 사회 이론의 공통된 맥락]]}}, 김영식 편, 『과학과 근대사회』 (서울: 창비, 1989), 205-245쪽. 원문 : Robert Young, {{"|Malthus and Evolutionists: The Common Context of Biological and Social Theory}}, ''Past and Present'' 43 (1969), 109-145; reprinted in Robert Young, ''[http://www.psychoanalysis-and-therapy.com/human_nature/darwinmet/dar.html Darwin's Metaphor: Nature's Place in Victorian Cul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pp. 23-55.
로버트 영 지음, 권오형, 김영식 옮김, {{장|[[맬서스와 진화론자들 : 생물학 이론과 사회 이론의 공통된 맥락]]}}, 김영식 편, 『과학과 근대사회』 (서울: 창비, 1989), 205-245쪽. 원문 : Robert Young, {{"|Malthus and Evolutionists: The Common Context of Biological and Social Theory}}, ''Past and Present'' 43 (1969), 109-145; reprinted in Robert Young, ''[http://www.psychoanalysis-and-therapy.com/human_nature/darwinmet/dar.html Darwin's Metaphor: Nature's Place in Victorian Cul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pp.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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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I. 페일리 : 조화로운 자연 ===
=== III. 페일리 : 조화로운 자연 ===


맬서스주의는 사회적·생물학적 관념들이 그 공통된 지적 맥락의 일부를 이루는 논쟁에서 중심 역할을 하였다. 스미스는 『쿼털리』(Quarterly)와 『에딘버러 리뷰』(Edinburgh Reviews)의 거의 매 호가 맬서스에 대한 논쟁에 관련된 논문이나 언급을 싣고 있다고 지적했다. 맬서스 전기 작가는 맬서스에 대한 논박이 30년 동안이나 빗발치듯 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여기저기서 논쟁이 벌어졌다. …  
맬서스주의는 사회적·생물학적 관념들이 그 공통된 지적 맥락의 일부를 이루는 논쟁에서 중심 역할을 하였다. 스미스는 『쿼털리』(Quarterly)와 『에딘버러 리뷰』(Edinburgh Reviews)의 거의 매 호가 맬서스에 대한 논쟁에 관련된 논문이나 언급을 싣고 있다고 지적했다. 맬서스 전기 작가는 맬서스에 대한 논박이 30년 동안이나 빗발치듯 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여기저기서 논쟁이 벌어졌다. …
 
월러스, 고드윈, 콩도르세 그리고 심지어 페일리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구와 식량공급 사이의 어떤 잠재적 불균형 형태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시각은 그들이 이 불균형의 문제를 인류에 대한 진짜 가능성으로서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하지는 못했다. 이 문제는 일반적인 낙관의 분위기 속에 흡수되어버렸고 계속해서 제기되던 의문들은 장애가 생겨나면 그것을 극복하게 될 진보의 약속과 함께 잠재워졌던 것이다.  
월러스, 고드윈, 콩도르세 그리고 심지어 페일리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구와 식량공급 사이의 어떤 잠재적 불균형 형태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시각은 그들이 이 불균형의 문제를 인류에 대한 진짜 가능성으로서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하지는 못했다. 이 문제는 일반적인 낙관의 분위기 속에 흡수되어버렸고 계속해서 제기되던 의문들은 장애가 생겨나면 그것을 극복하게 될 진보의 약속과 함께 잠재워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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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찰머스 : 심판자로서의 신 ===
===IV. 찰머스 : 심판자로서의 신 ===


비록 원래의 신정론(神正論, thedcy: 악의 존재를 신의 섭리라고 하는 주장-역자)이 계속 작용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긴 하지만, 맬서스는 『인구론』 제2판에서 자연신학에 관한 장들을 삭제했다. 또한 자기가 저자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분량을 여러 배로 늘렸으며 부제를 바꾸었다. 1판의 부제는 ‘고드윈 씨, 콩도르세 씨, 그리고 다른 저자들의 생각에 대한 비판과 함께, 미래 사회의 개선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서의’ 인구의 원리였다. 2판(1803)은 “인구가 낳는 해악을 미래에 제거 또는 완화시킬 전망에 대한 탐구와 함께 인간의 행복에 대한 인구의 과거와 현재의 효과들에 관한 견해”를 언급했다. 맬서스는 인간과 사회의 완성 가능성에 관한 생각에서 인구의 원리의 효과에 관한 자료의 집적과 인구에 대한 새로운 제한—악이나 불행으로 취급되지 않는—으로 관심을 옮겼다. 그는 결혼의 ‘도덕적 절제’라는 요소를 포함시킴으로써 1판의 가혹한 결론을 완화했다. 자연신학의 제외가 그렇듯이 1판과 2판 사이의 구분은 완전하지 않았다. 아내와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때까지 결혼을 도덕적으로 또는 신중하게 절제해야 한다는 원칙은 1판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강조되지는 않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맬서스가 2판을 “새로운 저작”이라고 구별한 것은 타당했다. 2판과 그 이후의 판에서의 또다른 중요한 변화는 『인구론』의 개인적·논쟁적 소론으로서의 성격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고드원과 콩도르세에 대한 비판들은 남아 있었으나, 1789년의 『인구론』에서 부차적이었던 빈민구제법에 대한 공격이 완성 가능성에 대한 공격을 대체했다. ‘도덕적 절제’의 원칙과 공공자선에 대한 비판은 맬서스에 대한 아주 다른 해석—이신론(deism)에 기초한 페일리의 조화된 자연관 대신 신을 준엄한 구약성서의 심판관으로 보는 칼뱅주의의 해석으로 바꾼—의 원천을 제공했다.  
비록 원래의 신정론(神正論, theodicy: 악의 존재를 신의 섭리라고 하는 주장-역자)이 계속 작용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긴 하지만, 맬서스는 『인구론』 제2판에서 자연신학에 관한 장들을 삭제했다. 또한 자기가 저자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분량을 여러 배로 늘렸으며 부제를 바꾸었다. 1판의 부제는 ‘고드윈 씨, 콩도르세 씨, 그리고 다른 저자들의 생각에 대한 비판과 함께, 미래 사회의 개선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서의’ 인구의 원리였다. 2판(1803)은 “인구가 낳는 해악을 미래에 제거 또는 완화시킬 전망에 대한 탐구와 함께 인간의 행복에 대한 인구의 과거와 현재의 효과들에 관한 견해”를 언급했다. 맬서스는 인간과 사회의 완성 가능성에 관한 생각에서 인구의 원리의 효과에 관한 자료의 집적과 인구에 대한 새로운 제한—악이나 불행으로 취급되지 않는—으로 관심을 옮겼다. 그는 결혼의 ‘도덕적 절제’라는 요소를 포함시킴으로써 1판의 가혹한 결론을 완화했다. 자연신학의 제외가 그렇듯이 1판과 2판 사이의 구분은 완전하지 않았다. 아내와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때까지 결혼을 도덕적으로 또는 신중하게 절제해야 한다는 원칙은 1판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강조되지는 않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맬서스가 2판을 “새로운 저작”이라고 구별한 것은 타당했다. 2판과 그 이후의 판에서의 또다른 중요한 변화는 『인구론』의 개인적·논쟁적 소론으로서의 성격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고드원과 콩도르세에 대한 비판들은 남아 있었으나, 1789년의 『인구론』에서 부차적이었던 빈민구제법에 대한 공격이 완성 가능성에 대한 공격을 대체했다. ‘도덕적 절제’의 원칙과 공공자선에 대한 비판은 맬서스에 대한 아주 다른 해석—이신론(deism)에 기초한 페일리의 조화된 자연관 대신 신을 준엄한 구약성서의 심판관으로 보는 칼뱅주의의 해석으로 바꾼—의 원천을 제공했다.  


… [맬서스의 법칙에 심취해 있던 에딘버러 대학의 신학부 교수] 찰머스(Chalmers)는 종교적 교리와 자유방임경제 이론의 통합을 그의 필생의 작업으로 보았다. 그의 저술들은 자연신학, 정치경제학 그리고 지질학을 포함했다(당시로선 유별난 결합이 아니었다). 『정치경제학』(1832)에서 그는 “대중의 정당한 경제적 상태는 그들의 정당한 도덕적 상태에 기인하고, 인격은 편안함의 원천이며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적어도 1808년부터 그는 맬서스의 이론에 근거하여 특히 국가의 자선행위를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국가의 자선행위가 개인의 성실성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자선행위가 보다 많아질수록 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해서 그것을 탕진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구체적 예들이 없었어도 맬서스의 이론이 자신에게 확신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처럼 명백히 역설적인 공론이 가장 성공적인 예증들에 의해서 그렇게 잘 뒷받침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 [맬서스의 법칙에 심취해 있던 에딘버러 대학의 신학부 교수] 찰머스(Chalmers)는 종교적 교리와 자유방임경제 이론의 통합을 그의 필생의 작업으로 보았다. 그의 저술들은 자연신학, 정치경제학 그리고 지질학을 포함했다(당시로선 유별난 결합이 아니었다). 『정치경제학』(1832)에서 그는 “대중의 정당한 경제적 상태는 그들의 정당한 도덕적 상태에 기인하고, 인격은 편안함의 원천이며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적어도 1808년부터 그는 맬서스의 이론에 근거하여 특히 국가의 자선행위를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국가의 자선행위가 개인의 성실성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자선행위가 보다 많아질수록 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해서 그것을 탕진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구체적 예들이 없었어도 맬서스의 이론이 자신에게 확신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처럼 명백히 역설적인 공론이 가장 성공적인 예증들에 의해서 그렇게 잘 뒷받침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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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이 진화의 문제를 머릿속에 지닌 채 6년 동안 현장연구로부터 돌아왔던데 반하여 월러스는 진화가 일어난다는 확신을 갖고 이 분야로 들어갔으며 진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발견하고자 했다. ...1844~45년의 같은 시기에 월러스는 맬서스의 『인구론』도 읽었다. 그 시기에 관해서 월러스는 그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윈이 진화의 문제를 머릿속에 지닌 채 6년 동안 현장연구로부터 돌아왔던데 반하여 월러스는 진화가 일어난다는 확신을 갖고 이 분야로 들어갔으며 진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발견하고자 했다. ...1844~45년의 같은 시기에 월러스는 맬서스의 『인구론』도 읽었다. 그 시기에 관해서 월러스는 그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용|그러나 아마도 내가 읽은 가장 중요한 책은 맬서스의 『인구로』일 것이며 나는 사실들의 탁월한 요약과 결론으로의 논리적인 추론 때문에 이 책에 매우 탄복했다. 그것은 그 당시까지 읽은 것 중 철학적인 생물학의 어떤 문제를 취급하 첫 번째 책이었으며, 그 주요 원리들은 영원히 내 것으로 남게 되었고 20년 후 생물 종의 진화의 유효한 작인에 대해 오래도록 찾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인용|그러나 아마도 내가 읽은 가장 중요한 책은 맬서스의 『인구론』일 것이며 나는 사실들의 탁월한 요약과 결론으로의 논리적인 추론 때문에 이 책에 매우 탄복했다. 그것은 그 당시까지 읽은 것 중 철학적인 생물학의 어떤 문제를 취급하는 첫 번째 책이었으며, 그 주요 원리들은 영원히 내 것으로 남게 되었고 20년 후 생물 종의 진화의 유효한 작인에 대해 오래도록 찾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월러스는 그때 20대 초반이었다. 몇 장 뒤에서 그는 맬서스를 읽은 것이 자기 인생의 전환점을 형성한 두 가지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하면서 {{"|그 저술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자연선택 이론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것의 독자적 발견에 대한 완전한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 월러스가 실제로 최적자 생존이라는 개념을 생각했을 때, 껏은 말레이 군도에서의 인류의 기원에 관한 인종학적인 연구의 맥락에서였다. 우리는 월러스의 이에 대한 네 가지 언급을 알 수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맬서스 이론을 인간 종에 응용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다른 종들로 확대되는 특징을 보인다.
월러스는 그때 20대 초반이었다. 몇 장 뒤에서 그는 맬서스를 읽은 것이 자기 인생의 전환점을 형성한 두 가지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하면서 {{"|그 저술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자연선택 이론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것의 독자적 발견에 대한 완전한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 월러스가 실제로 최적자 생존이라는 개념을 생각했을 때, 그것은 말레이 군도에서의 인류의 기원에 관한 인종학적인 연구의 맥락에서였다. 우리는 월러스의 이에 대한 네 가지 언급을 알 수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맬서스 이론을 인간 종에 응용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다른 종들로 확대되는 특징을 보인다.


{{인용|다시 종의 기원의 문제를 고려하고 있는 동안 무엇인가가 나로 하여금 맬서스의 『인구론』(이것은 내가 10년쯤 전에 읽었는데)과 모든 야만인들의 수를 거의 정체 상태로 유지시켜준다고 그가 내세운 '적극적 제한' -- 전쟁・질병・기아・사고 등 -- 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때 이 제한들은 동물에도 틀림없이 작용하여 그 수를 작게 유지토록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인간보다 매우 빠르게 증가하기 때문에 ... 그것들에게는 이 제한이 훨씬 강력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했다. ... 이것이 어떤 종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를 어렴풋이 생각하는 동안 '''최적자 생존'''이라는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인용|다시 종의 기원의 문제를 고려하고 있는 동안 무엇인가가 나로 하여금 맬서스의 『인구론』(이것은 내가 10년쯤 전에 읽었는데)과 모든 야만인들의 수를 거의 정체 상태로 유지시켜준다고 그가 내세운 '적극적 제한' -- 전쟁・질병・기아・사고 등 -- 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때 이 제한들은 동물에도 틀림없이 작용하여 그 수를 작게 유지토록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인간보다 매우 빠르게 증가하기 때문에 ... 그것들에게는 이 제한이 훨씬 강력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했다. ... 이것이 어떤 종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를 어렴풋이 생각하는 동안 '''최적자 생존'''이라는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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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에 기록된 두 번째 언급도 역시 효과의 정도에 있어 동물과 인간을 대조시키고 있다. 그 이론에 대한 월러스의 입장을 보여주는 고전적 출처는 그의 자서전에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맬서스의 이론을 상기한 것이 자기 자신의 가설의 형성에 결정적인 경험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1903년에 기록된 두 번째 언급도 역시 효과의 정도에 있어 동물과 인간을 대조시키고 있다. 그 이론에 대한 월러스의 입장을 보여주는 고전적 출처는 그의 자서전에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맬서스의 이론을 상기한 것이 자기 자신의 가설의 형성에 결정적인 경험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3년 후(처음 읽은 지 64년 후)에 월러스는 맬서스의 『인구론』 6판을 다시 읽고 그가 기억하기에 그에게 가장 감명깊었던 장들에 대한 회고를 남겼다. 그것은 2권에서의 자연법칙에 관한 구절이나 개선 가능성에 대한 비난들이나 {{'|도덕적 절제}}의 작용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1권의 3장에서 12장, 특히 3장에서 8장까지의 누적적 효과였다. ... 그것은 짐승 같은 생활, 병, 허약, 열악한 음식, 어린아이를 돌볼 능력의 결핍, 부족한 자원 기아, 유아살해, 전쟁, 학살, 약탈, 노예제도, 추위, 배고픔, 질병, 전염병, 역병, 그리고 낙태에 관한 자세한 언급이었다. 월러스는 계속해서 특히 그에게 충격을 주었던 구절을 열거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3년 후(처음 읽은 지 64년 후)에 월러스는 맬서스의 『인구론』 6판을 다시 읽고 그가 기억하기에 그에게 가장 감명 ㄹㄲㄲ깊었던 장들에 대한 회고를 남겼다. 그것은 2권에서의 자연법칙에 관한 구절이나 개선 가능성에 대한 비난들이나 {{'|도덕적 절제}}의 작용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1권의 3장에서 12장, 특히 3장에서 8장까지의 누적적 효과였다. ... 그것은 짐승 같은 생활, 병, 허약, 열악한 음식, 어린아이를 돌볼 능력의 결핍, 부족한 자원 기아, 유아살해, 전쟁, 학살, 약탈, 노예제도, 추위, 배고픔, 질병, 전염병, 역병, 그리고 낙태에 관한 자세한 언급이었다. 월러스는 계속해서 특히 그에게 충격을 주었던 구절을 열거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인용|거기서 나는 인간 사이에서의 전쟁・약탈・대학살이 동물들 사이에서는 초식동물에 대한 육식동물의 공격과 약한 동물에 대한 힘센 동물의 공격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다. 기아, 가뭄, 홍수, 그리고 겨울폭풍들은 사람에게보다 동물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동물은 인간보다 두 배 내지 천 배의 번식 능력을 갖고 있지만 항상 존재하는 연례적 파괴 또한 몇 배는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내게 번뜩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인용|거기서 나는 인간 사이에서의 전쟁・약탈・대학살이 동물들 사이에서는 초식동물에 대한 육식동물의 공격과 약한 동물에 대한 힘센 동물의 공격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다. 기아, 가뭄, 홍수, 그리고 겨울폭풍들은 사람에게보다 동물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동물은 인간보다 두 배 내지 천 배의 번식 능력을 갖고 있지만 항상 존재하는 연례적 파괴 또한 몇 배는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내게 번뜩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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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러스의 이후의 견해들은 생물학과 사회 이론에 대한 맬서스의 영향의 부정적인 면을 보여줄 수도 있다. 인간과 종의 기원에 관한 월러스의 관심이 자연선택의 메커니즘의 공동 발견으로 이끌었지만 인간의 완성 가능성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최적자 생존이 전적으로 충분하다는 것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였다. 그는 인간의 두뇌와 미적・도덕적 능력들에 관해 예외를 두게 되었고 점점 더 자연을 초월하는 어떤 힘에 의한 인간 욕구의 예견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는 효용의 원리가 인간의 진화에 대한 적절한 설명임을 이미 거부하였으므로 더 나가가서 맬서스에게서 그것이 기원했음을 거부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881년 월러스는 다윈에게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 그에게 맬서스의 법칙이 인간의 진화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음을 확신시켜주었다고 편지했다. 조지는 자연의 풍요로움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데 인간이 실패한 것 때문에 자연이 비난받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월러스의 생각으로는 자발적인 협동과 개혁이 사회변혁의 메커니즘으로서 경쟁을 대체했다. 그는 맬서스의 이론이 {{"|그것에 의존해서 뒷받침되고 있는 광대한 사회적・정치적 문제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데에서 조지와 의견을 같이하게 되었다. 그는 『진보와 빈곤』이 {{"|아담 스미스에 의해 한 세기 전에 이루어진 것과 동등한 진보를 정치과학과 사회과학에서 이룩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조지는 {{"|자신의 세대에서 가장 강력한 사회주의적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주장할 만하다}}고 이야기 되었다. 1898년 『경이의 세기』를 쓸 때쯤에는 미래사회에 대한 월러스의 사회주의적 희망들이 그로 하여금 사회적 경쟁을 완전히 거부하게 하였고 어떤 메커니즘도 규정되지 않은 채 필연적인 지보에 대한 신념을 갖게 했다. 말년에 와서 월러스가 {{"|자연은 잔인한가?}}라는 물음을 다시 생각하고 고통의 목적과 한계를 논의하게 되었을 때 그는 동물세계에서의 맬서스적 경쟁을 인간의 진보에 대한 비맬서스적 견해와 양립시키는 교묘한 방법을 제공해주었다. 그의 해결은 그 단순함에 있어 거의 데카르트적이었다. 동물은 인간보다 고통을 아주 적게 느끼거나 거의 느끼지 않으며 실제로 문명화되지 않은 종족들은 문명화된 종족보다 (고통을) 적게 느낀다는 것이었다.
... 월러스의 이후의 견해들은 생물학과 사회 이론에 대한 맬서스의 영향의 부정적인 면을 보여줄 수도 있다. 인간과 종의 기원에 관한 월러스의 관심이 자연선택의 메커니즘의 공동 발견으로 이끌었지만 인간의 완성 가능성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최적자 생존이 전적으로 충분하다는 것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였다. 그는 인간의 두뇌와 미적・도덕적 능력들에 관해 예외를 두게 되었고 점점 더 자연을 초월하는 어떤 힘에 의한 인간 욕구의 예견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는 효용의 원리가 인간의 진화에 대한 적절한 설명임을 이미 거부하였으므로 더 나가가서 맬서스에게서 그것이 기원했음을 거부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881년 월러스는 다윈에게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 그에게 맬서스의 법칙이 인간의 진화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음을 확신시켜주었다고 편지했다. 조지는 자연의 풍요로움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데 인간이 실패한 것 때문에 자연이 비난받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월러스의 생각으로는 자발적인 협동과 개혁이 사회변혁의 메커니즘으로서 경쟁을 대체했다. 그는 맬서스의 이론이 {{"|그것에 의존해서 뒷받침되고 있는 광대한 사회적・정치적 문제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데에서 조지와 의견을 같이하게 되었다. 그는 『진보와 빈곤』이 {{"|아담 스미스에 의해 한 세기 전에 이루어진 것과 동등한 진보를 정치과학과 사회과학에서 이룩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조지는 {{"|자신의 세대에서 가장 강력한 사회주의적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주장할 만하다}}고 이야기 되었다. 1898년 『경이의 세기』를 쓸 때쯤에는 미래사회에 대한 월러스의 사회주의적 희망들이 그로 하여금 사회적 경쟁을 완전히 거부하게 하였고 어떤 메커니즘도 규정되지 않은 채 필연적인 지보에 대한 신념을 갖게 했다. 말년에 와서 월러스가 {{"|자연은 잔인한가?}}라는 물음을 다시 생각하고 고통의 목적과 한계를 논의하게 되었을 때 그는 동물세계에서의 맬서스적 경쟁을 인간의 진보에 대한 비맬서스적 견해와 양립시키는 교묘한 방법을 제공해주었다. 그의 해결은 그 단순함에 있어 거의 데카르트적이었다. 동물은 인간보다 고통을 아주 적게 느끼거나 거의 느끼지 않으며 실제로 문명화되지 않은 종족들은 문명화된 종족보다 (고통을) 적게 느낀다는 것이었다.


=== VII. 스펜서 : 진보에 대한 믿음과 라마르크주의 ===
 
===VII. 스펜서 : 진보에 대한 믿음과 라마르크주의 ===


맬서스와 진화 및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더 캐고 들어가기 전에 가장 뛰어난 세 명의 진화론자 가운데 나머지 한 사람 쪽으로 화제를 돌려보자.  
맬서스와 진화 및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더 캐고 들어가기 전에 가장 뛰어난 세 명의 진화론자 가운데 나머지 한 사람 쪽으로 화제를 돌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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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에 스펜서는, 비록 그 자신이 획득형질의 유전을 계속하여 믿는다고 크게 비판을 받아왔지만, 월러스도 인간의 진화 메커니즘으로서 최적자 생존을 버렸고 다윈도 후기 저작에서 동물들의 진화에 있어서 자연선택 이외의 메커니즘들에 대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다윈은 정신과 사회에 가까워질수록 획득형질의 유전을 적용하였던 것이다. 스펜서는 1887년에 따로 출판된 책의 서문에서 그가 생물학 이론에서 획득형질의 유전에 그렇게 끈질기게 집착하나 이유는 그것이 심리학, 윤리학 그리고 사회학에 대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러써 그는 {{장|유기체의 진화의 요소들}}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쓰게 되었다. 그는 맬서스적인 요소가 더 단순한 종류의 정신 현상에 작용할지도 모른다고 인정하였으나, 그에게는 용불용(use and disuse)이 인간과 사회의 발전에 주된 요인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사회 전체가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렇게 빨리 진보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고 그는 지적하였다. 맬서스 모델에서의 진보는 너무 간접적이고 너무 느렸던 것이다. 확고한 진화적 진보에 대한 스펜서 특유의 낙관적인 신념은 맬서스를 응용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맬서스로 하여금 『인구론』의 논쟁적인 초판을 쓰도록 유도했던 이론들을 상기시켜준다. 스펜서의 자유방임적 낙관주의는 맬서스보다 루소, 콩도르세, 고드윈과 훨씬 가까웠다. 물론 스펜서도 투쟁의 역할을 인정했지만 그것은 진보의 빛을 받고 있었다. 이것이 자연의 에너지의 진정한 근원임에 틀립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스펜서의 진화이론은 부정적인 예였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반맬서스적이었던 것이다. ...
1886년에 스펜서는, 비록 그 자신이 획득형질의 유전을 계속하여 믿는다고 크게 비판을 받아왔지만, 월러스도 인간의 진화 메커니즘으로서 최적자 생존을 버렸고 다윈도 후기 저작에서 동물들의 진화에 있어서 자연선택 이외의 메커니즘들에 대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다윈은 정신과 사회에 가까워질수록 획득형질의 유전을 적용하였던 것이다. 스펜서는 1887년에 따로 출판된 책의 서문에서 그가 생물학 이론에서 획득형질의 유전에 그렇게 끈질기게 집착하나 이유는 그것이 심리학, 윤리학 그리고 사회학에 대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러써 그는 {{장|유기체의 진화의 요소들}}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쓰게 되었다. 그는 맬서스적인 요소가 더 단순한 종류의 정신 현상에 작용할지도 모른다고 인정하였으나, 그에게는 용불용(use and disuse)이 인간과 사회의 발전에 주된 요인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사회 전체가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렇게 빨리 진보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고 그는 지적하였다. 맬서스 모델에서의 진보는 너무 간접적이고 너무 느렸던 것이다. 확고한 진화적 진보에 대한 스펜서 특유의 낙관적인 신념은 맬서스를 응용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맬서스로 하여금 『인구론』의 논쟁적인 초판을 쓰도록 유도했던 이론들을 상기시켜준다. 스펜서의 자유방임적 낙관주의는 맬서스보다 루소, 콩도르세, 고드윈과 훨씬 가까웠다. 물론 스펜서도 투쟁의 역할을 인정했지만 그것은 진보의 빛을 받고 있었다. 이것이 자연의 에너지의 진정한 근원임에 틀립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스펜서의 진화이론은 부정적인 예였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반맬서스적이었던 것이다. ...


=== VIII. 사회주의 : 다윈과 맬서스의 분리 ===
===VIII. 사회주의 : 다윈과 맬서스의 분리 ===


맬서스의 이용에서 나타나는 이같은 과정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가장 명백한 것은 호프스태터의 『미국 사상 속에서의 사회 다윈주의』의 영국판을 시도해 보는 것이겠다. 맬서스, 다윈, 스펜서는 미국의 {{'|도둑귀족들}}(19세기 미국의 악덕자본가들을 가리킴 - 역자)뿐 아니라 영국 제국주의에 합리화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정연한 해결은 맬서스와 진화의 메커니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견해를 상기해보는 것이다. 1860년 마르크스가 다윈의 『종의 기원』을 처음 읽었을 때, 그는 엥겔스에게 {{"|비록 조잡한 영국식으로 개진되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우리의 견해를 위한 자연사의 기초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 편지하였다. 사실 마르크스는 1880년에 다윈에게 편지를 써서 『자본론』의 영어판 헌정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다윈은 자신의 견해가 기독교와 유신론에 대한 공격에 연관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하였다.
맬서스의 이용에서 나타나는 이같은 과정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가장 명백한 것은 호프스태터의 『미국 사상 속에서의 사회 다윈주의』의 영국판을 시도해 보는 것이겠다. 맬서스, 다윈, 스펜서는 미국의 {{'|도둑귀족들}}(19세기 미국의 악덕자본가들을 가리킴 - 역자)뿐 아니라 영국 제국주의에 합리화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정연한 해결은 맬서스와 진화의 메커니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견해를 상기해보는 것이다. 1860년 마르크스가 다윈의 『종의 기원』을 처음 읽었을 때, 그는 엥겔스에게 {{"|비록 조잡한 영국식으로 개진되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우리의 견해를 위한 자연사의 기초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 편지하였다. 사실 마르크스는 1880년에 다윈에게 편지를 써서 『자본론』의 영어판 헌정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다윈은 자신의 견해가 기독교와 유신론에 대한 공격에 연관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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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례연구가 과학사에서 영향을 미치는 관계들이 정치사・사회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양하게 추구될 수 있고 {{'|객관적인}} 자연과학과 {{'|애매모호한}} 사회과학이 점차적으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진화이론의 역사에서는 뒷받침될 수 없다는 명제들에 어느 정도 증거를 제공하기를 바란다. 이제 과학사와 역사의 다른 측면들의 통합이 17세기 연구에서는 이루어져 있다. 19세기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도 이 접근법을 그들의 시대에 적용해서 비슷한 흥미로운 결과들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이 사례연구가 과학사에서 영향을 미치는 관계들이 정치사・사회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양하게 추구될 수 있고 {{'|객관적인}} 자연과학과 {{'|애매모호한}} 사회과학이 점차적으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진화이론의 역사에서는 뒷받침될 수 없다는 명제들에 어느 정도 증거를 제공하기를 바란다. 이제 과학사와 역사의 다른 측면들의 통합이 17세기 연구에서는 이루어져 있다. 19세기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도 이 접근법을 그들의 시대에 적용해서 비슷한 흥미로운 결과들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관련 항목 ==
==관련 항목==
* 정세권, [[19세기 다윈주의 진화론의 등장과 그 사회적 함의]]
*정세권, [[19세기 다윈주의 진화론의 등장과 그 사회적 함의]]
* 낸시 레이즈 스테판, [[인종과 젠더: 과학에서 유비의 역할]]
*낸시 레이즈 스테판, [[인종과 젠더: 과학에서 유비의 역할]]
* 피터 보울러, [[진화론의 사회적 함의들]]
*피터 보울러, [[진화론의 사회적 함의들]]


[[분류:과학사]]
[[분류:과학사]]
[[분류:진화론]]
[[분류:진화론]]
[[분류:로버트 영(Robert Young)]]
[[분류:로버트 영(Robert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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