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ton's Philosophy of Nature"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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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9일 (금) 11:22 판
뉴턴 역시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확실한 지식을 추구했으며 제1원리의 발견(또는 획득)을 매우 중요한 작업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지식을 현상들로부터 도출(deduce)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 지식은 오류불가능한 지식이 아니라, "가장 신뢰할만한 지식"일 뿐이다.[1] 즉 현상들로부터 도출된 지식이라 하더라도 다른 현상들과 충돌한다면 의심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이론과 관찰이 충돌할 경우 경험론자는 이론을 의심하겠지만, 선험론자는 관찰을 의심할 것이다. 뉴턴이 제안한 방법론은 오류불가능한 지식의 오랜 전통을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설의 배격
분명 뉴턴과 데카르트는 모두 제1원리의 발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제1원리를 선험적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뉴턴은 그것을 경험으로부터 귀납적으로 도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뉴턴은 그러한 귀납적 방법을 통하지 않고서 얻은 제1원리는 (근거없는) "가설"에 불과하다며 데카르트주의자들을 공격했다.[2]
뉴턴은 자신의 방법을 귀납적 방법이라 칭했다. 그의 귀납적 방법에 따르면, 관찰된 현상으로부터 귀납을 통해 '원리'를 이끌어내고, 다시 그 원리로부터 새로운 예측을 연역적으로 도출해낸다.
뉴턴 본인은 귀납적 방법에 충실했는가?
광학의 경우, 실험이 많이 등장하는 매우 경험적인 저술이다. 그러나 빛의 본질에 대해 추측하는 대목에서는 뉴턴이 부정적 의미로 쓴 "가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절들이 많이 등장한다. 예컨대 빛을 입자로 가정하는 것은, 관찰가능한 것에서 관찰불가능한 것으로의 비약이 발생한다. 이는 좁은 의미의 엄격한 귀납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이미 귀추적 추론의 단계로 넘어간 듯 보인다.
상당히 정연한 방식으로 쓰여진 프린키피아의 경우도 상황이 많이 다르지 않다. 관성, 힘 등의 개념과 그에 관한 법칙을 유도하는 과정은 귀납적으로 선명하지 않으며, 역시 관찰할 수 있는 것에서 관찰할 수 없는 것으로의 비약이 존재한다. 오히려 프린키피아는 귀납적인 저술이라기보다는 (가설)연역적인 저술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