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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론 판정의 기준 == | == 존재론 판정의 기준 == | ||
경쟁하는 존재론 사이의 판정은 무엇에 근거해야 할까? 의미론적 정식화는 각 이론이 채택한 존재론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그리고 불일치한 부분과 일치한 부분의 구분을 통해 의사소통의 기반도 제공), 존재론 사이의 판정 근거를 제공해주진 않는다. 존재론적 논쟁이 단순히 언어적 논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경쟁하는 존재론 사이의 판정은 무엇에 근거해야 할까? 의미론적 정식화는 각 이론이 채택한 존재론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그리고 불일치한 부분과 일치한 부분의 구분을 통해 의사소통의 기반도 제공), 존재론 사이의 판정 근거를 제공해주진 않는다. 존재론적 논쟁이 단순히 언어적 논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 ||
콰인에 따르면, 존재론의 수용은 과학 이론의 수용과 비슷한 일이다. "우리는 원래의 경험의 무질서한 단편들이 조정되고 정리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개념 체계를 채택한다. 일단 우리가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과학을 포용할 수 있는 전반적인 개념 체계에 정착하게 되면,�우리의 존재론도 결정된다." 개념 체계의 일부[분과과학]를 구성할 때의 고려사항은 개념 체계 전체[일반 존재론]를 구성할 때의 고려사항과 다르지 않다. 과학 이론의 채택이 언어의 문제인 정도 내에서만, 존재론의 채택도 그러하다. | |||
문제는 개념 체계 구성의 지침이 되는 단순성의 원리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에 대한 현상주의적 개념 체계와 물리주의적 개념 체계는 각자 장점이 있으며, 각자 나름의 단순성을 갖는다. 전자는 인식론적으로 근본적인 반면, 후자는 물리적으로 근본적이다. 물리주의적 개념 체계는 흩어진 감각 사건들을 단일한 대상들과 연결지음으로써 우리 경험에 대한 설명을 단순화시킨다. 그러나 실수 체계가 유리수만으로 이루어진 기초 산술학의 개념 체계의 관점에서 일종의 편리한 신화인 것처럼, 물리적 대상 역시 현상주의적 입장에서는 일종의 편리한 신화이다. | |||
그렇다면 집합이나 속성은? (물리적 대상이 현상주의 체계에서는 신화인 것처럼) 이런 플라톤적 존재론은 엄격한 물리주의 개념 체계에서 신화에 불과하다. 집합과 속성 등의 고차원적 신화는 그것이 물리학에 대한 우리의 설명을 단순화해주는 한 유용한 것이다. 수학은 고차원적 신화의 필수 성분이기에, 이 플라톤적 신화의 유용성은 명백하다. 이를 신화로 보는 관점은 형식주의적 태도와 같다. 그러나 플라톤적 신화에 대한 이런 형식주의적 태도가 정당하다면, 물리적 신화에 대한 현상주의적 태도도 정당하다. | |||
콰인에 따르면, 현재 수학적 존재론의 판정은 여전히 열려 있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용과 실험 정신이다. 물리주의적 개념 체계가 현상주의적 개념 체계로 얼마나 환원될 수 있는지 온갖 방법으로 살펴보는 동시에, 물리학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자연과학이 플라톤적 수학과 독립적으로 (얼마나) 이루어질 수 있을지 살펴보는 동시에, 수학도 추구하면서 그 플라톤적 기초도 파헤치자. "현상주의적 개념 체계 내에서 볼 때, 물리적 대상과 수학적 대상의 존재론은 신화이다. 그러나 신화의 질은 특정한 관점에 의존적인데, 즉 여기서는 인식론적 관점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 관점은 우리의 다양한 관점 가운데 하나로서, 이는 다양한 관심과 목적 가운데 하나와만 대응될 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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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6일 (월) 00:30 판
W.V.O. Quine, "On What There is"
존재론적 검약 vs. 설명적 단순성?
이름이 존재를 함축하는 듯한 인상이 있음. 다행히 러셀의 한정기술구 이론은 이름이 등장하는 문장을 그 이름이 명명하는 대상의 존재를 함축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석하게 해줌으로써, 이름으로부터 존재를 추론하는 망상에서 벗어나게 해줌.
러셀의 한정기술구 이론을 통한 해석은 추상적 대상, 일반적 대상을 언급하는 문장을 그것들의 존재에 의지하지 않고도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며, 이는 검소한 존재론의 가능성을 보여줌.
콰인 역시 이러한 검소한 존재론을 선호함. 수학에서도 형식주의(유명론에 포함) 존재론 선호. 그러나 러셀식의 문장 해석 방법이 가능하다는 것으로부터 수학에서의 반실재론이 실재론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일 수는 없음.
일상 또는 과학의 영역에서도, 현상주의가 실재론보다 검소한 존재론이고, 수많은 일상적, 과학적 문장드에 대해 현상주의적 해석이 가능하지만, 책상이니, 원자니 하는 일상적, 과학적 대상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해석이 더 현상의 (기술과 설명에서) 간편함. 그리고 바로 그 이유에서 우리는 일상적, 과학적 대상들을 존재하는 것으로 취급함.
수학에서도 수나 집합 등이 추상적 존재자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해석이 현상의 (기술과 설명에서) 간편함. 따라서 과학적 대상들의 존재를 인정한 이유와 동일한 이유로, 수학적 대상들도 존재하는 것으로 취급하면 안 되는 걸까?
플라톤의 수염
철학자들 사이의 존재론에 대한 불일치를 정식화하고자 할 때, 어떤 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편이 옹호하는 편보다 불리함을 보여주는 것 같은 사고방식이 있다. '플라톤의 수염'이란 사고방식에 따르면, 비존재는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비존재에 관한 진술들은 무의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반면 부정하는 편이 옹호하는 편보다 유리함을 보여주는 사고방식으로는 '오컴의 면도날'이 있음). [이는 아마도 의미와 지칭을 밀착시키는 견해에 기인]
페가수스
이런 사고방식을 따라, McX는 페가수스가 존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페가수스가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단어를 사용할 때 어떤 것에 관해서 말하고 있지 않게 될 것"이고, "따라서 페가수스가 없다고 말하는 것조차 무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McX에게 페가수스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케물었을 때, 그는 페가수스가 관념으로서 존재한다고 해보자. 그러나 "이 정신적 존재는 사람들이 페가수스를 부정할 때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파르테논과 파르테논-관념을 혼동해선 안 되는 것처럼, 페가수스와 페가수스-관념을 혼동해서도 안 되며, 전자의 비존재와 후자의 비존재를 혼동해서도 안 된다. 즉 McX는 플라톤의 수염식 사고방식 때문에 혼란에 빠진 것 같다.
이번엔 좀더 세련된 와이만의 해석을 생각해보자. "와이만은 페가수스가 일종의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성으로서의 존재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페가수스가 없다는 생각은 "페가수스가 현실성이라는 특별한 속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현실성을 가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기 위해 "실존(existence)"이라는 용어를 도입할 수도 있다. 그래서 와이만에 따르면, 페가수스는 분명히 있긴 하지만, 실존(exist)하진 않는다.
콰인은 문제의 책임이 존재 관련 용어의 애매성에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콰인은 용어 '실존'에 대해서는 와이만에 양보하고, '있다'라는 용어만 사용하겠다고 한다.
와이만식 존재론의 난점들
와이만의 우주에 존재하는 가능자들의 슬럼은 여러 문제들을 야기한다. 가능자들에게는 동일성의 원리가 적용되기 어렵다.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다른 것과는 서로 구별된다는 것을 의미 있게 말할 수 없는 실재에 관해 말하는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한 양상 논리의 분석도 상당히 어려운 일로 보인다.
"둥근 사각 지붕"과 같은 모순적 대상은 단지 현실화되지 않는 가능자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면 와이만은 현실화되지 않은 불가능자들도 존재하는 것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와이만은 "둥긍 사각형 지붕"과 같은 모순이 애초에 무의미하다고 말함으로써 불가능자의 존재라는 난점을 회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콰인은 이러한 대응이 (와이만도 사용하고 있는) 귀류법의 사용을 부정하게 만들고, 이는 결국 문자열의 유의미/무의미 검사법 고안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플라톤의 수염에 대한 러셀식 대응
러셀의 단칭 기술구 이론은 임의의 이름이 등장하는 문장을 그 이름을 가진 것이 있다고 가정하는 않고도 의미있게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함으로써, 플라톤의 수염식 사고를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이에 따르면, "웨이벌리의 저자는 시인이었다"라는 문장은 "어떤 것이 웨이벌리를 썼고 시인이면서, 그 외의 어느 것도 웨이벌리를 쓰지 않았다"라는 동일한 뜻의 문장으로 바꿔 쓸 수 있으며, 변경된 문장에서는 그 문장이 웨이벌리의 저자가 존재한다는 함축을 가지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단칭 기술구 이론은 동일한 방식으로 "둥근 사각 지붕"이나 "페가수스"가 등장하는 문장들도(그 어떤 단칭 용어가 등장하든), 그 단칭 명사에 대응하는 대상의 존재나 무의미를 가정하지 않고도, 그 문장들을 의미있게 해석할 수 있다. 특히, "페가수스는 없다."는 문장도 환원불가능한 속성 "페가수스임"(P)에 호소하여 "~(Ex)Px"식으로 분석될 수 있으며, 때문에 이처럼 명사를 포함하는 진술의 유의미성에 기초하여 그 명사에 의해 명명된 것의 존재를 전제하는 망상에 빠질 필요가 없게 된다.
이러한 해법은 의미와 명명(지칭)의 구별에 의존한다. 이 구별은 하나의 대상을 지칭하는 '샛별'과 '저녁별'이란 두 이름이 같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암시된다. 또한 McX 등의 동기도 의미와 명명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속성의 의미에 관한 문제로부터 보편자의 존재를 이끌어내려는 시도에 대해 검토해보자.
보편자의 존재론적 문제
속성, 관계, 집합, 수, 함수 등과 같은 것이 있을까? McX는 다음과 같이 그런 것들이 있다고 답할 것이다. "(1) 저기 붉은 집들, 붉은 장미, 붉은 황혼이 있다. ... 그리고 (2) 이들 집, 꽃, 황혼 등은 공통의 어떤 것을 갖고 있다. 이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그것이 곧 내가 속성 붉음으로 의미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McX의 개념틀에서는 속성들이 있다. 반면 다른 (아마도 콰인이 선호하는) 개념틀을 가진 누군가는 (1)에는 동의하지만, (2)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집'이란 일반 명사와 '붉음'이란 속성이 적용될 수 있는 개별적 대상은 있지만, '붉음'에 의해 명명되는 것은 없으며, '집', '장미', '황혼' 등이 명명하는 것도 없다. 이미 우리는 의미는 명명과 구별되기 때문에, 이름들을 포함한 문장이 의미 있기 위해 그 이름들이 무언가를 명명해야 한다는 식의 논증은 먹히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McX가 의미와 명명 사이의 구분법을 수용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면? 그래도 '~이 붉다(R)', '~이 페가수스이다(P)'와 같은 술어가 속성의 이름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부터 보편자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할 거라고. 이에 대한 콰인의 답변은 '~이 의미있다/없다'의 문제가 의미라는 어떤 추상적 존재에 의존하지 않는 궁극적/환원불가능한 문제라는 것이다.
존재론적 구속의 유일한 기준과 수학의 존재론
지금까지 보인 바에 따르면, 이름은 제거될 수 있기에 존재론적 구속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어떤 이름을 사용하고 사용하지 않고는 그 문장을 사용하는 사람의 존재론적 구속에 중립적이다. 반면 "There is something which ..."와 같이 속박 변항의 사용은 존재론적 개입을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고, 또한 유일하게 드러낸다. "있다는 것은, 결국, 변항의 값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Some dogs are white"라는 문장을 "There is something which is a white dog"로 변환할 수 있음을 보이는 순간, 이 문장이 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white dog에 해당하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일 뿐, whiteness나 doghood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님을 보일 수 있다.
수학의 존재론적 논쟁들도 이런 방식으로 명료해질 수 있다. 어떤 이론이나 논의 형식은 어떤 존재론에 얽매여 있는가? 한 이론은 그 이론 내 진술들이 참이 되기 위해 그 이론의 속박 변항이 지칭할 수 있어야만 하는 존재자에 그리고 그 존재자에만 얽매인다. 즉중세의 수학의 기초에 대한 현대의 관점들 사이의 근본적인 불일치는 아주 명백하게 속박 변항이 지칭할 수 있는 존재자의 범위에 대한 불일치로 귀결된다.
보편자에 대한 중세의 세 관점 실재론, 개념론, 유명론은 20세기 수학철학의 세 관점 논리주의, 직관주의, 형식주의로 재탄생했다. 보편자의 존재를 주장하던 실재론을 계승한 논리주의는 추상적 존재들을 지칭하도록 사용되는 속박 변항을 허용한다. 보편자가 마음의 구성물로서 존재함을 주장하는 개념론을 계승한 직관주의는 추상적 존재들이 미리 구체화된(specified) 구성요소들로부터 개별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그런 존재들을 지칭하는 데 속박 변항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다(논리주의에 따르면 집합은 발견된 것인 반면, 직관주의에 따르면 집합은 발명된 것 / 논리주의자는 무한의 여러 등급을 구분할 수 있는 반면, 직관주의자는 무한의 최저 등급만 얻을 수 있고 그에 따라 실수 법칙도 포기해야). 형식주의는 보편자 부정하지만, 추상적 존재를 마음의 구성물로서도 전혀 허용하지 않으려 할 수 있다. 그들에게 고전 수학은 의미 없는 기호들(notations)을 이용한 놀이이다. 수학적 용어와 문장들은 유용할 수 있으나, 그 유용성은 어떠한 문자적 의미에서도 유의미함을 함축하지 않는다. 수학자들 사이의 합의는 의미 없이도 가능한데, 구문론적 규칙만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존재론 판정의 기준
경쟁하는 존재론 사이의 판정은 무엇에 근거해야 할까? 의미론적 정식화는 각 이론이 채택한 존재론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그리고 불일치한 부분과 일치한 부분의 구분을 통해 의사소통의 기반도 제공), 존재론 사이의 판정 근거를 제공해주진 않는다. 존재론적 논쟁이 단순히 언어적 논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콰인에 따르면, 존재론의 수용은 과학 이론의 수용과 비슷한 일이다. "우리는 원래의 경험의 무질서한 단편들이 조정되고 정리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개념 체계를 채택한다. 일단 우리가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과학을 포용할 수 있는 전반적인 개념 체계에 정착하게 되면,�우리의 존재론도 결정된다." 개념 체계의 일부[분과과학]를 구성할 때의 고려사항은 개념 체계 전체[일반 존재론]를 구성할 때의 고려사항과 다르지 않다. 과학 이론의 채택이 언어의 문제인 정도 내에서만, 존재론의 채택도 그러하다.
문제는 개념 체계 구성의 지침이 되는 단순성의 원리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에 대한 현상주의적 개념 체계와 물리주의적 개념 체계는 각자 장점이 있으며, 각자 나름의 단순성을 갖는다. 전자는 인식론적으로 근본적인 반면, 후자는 물리적으로 근본적이다. 물리주의적 개념 체계는 흩어진 감각 사건들을 단일한 대상들과 연결지음으로써 우리 경험에 대한 설명을 단순화시킨다. 그러나 실수 체계가 유리수만으로 이루어진 기초 산술학의 개념 체계의 관점에서 일종의 편리한 신화인 것처럼, 물리적 대상 역시 현상주의적 입장에서는 일종의 편리한 신화이다.
그렇다면 집합이나 속성은? (물리적 대상이 현상주의 체계에서는 신화인 것처럼) 이런 플라톤적 존재론은 엄격한 물리주의 개념 체계에서 신화에 불과하다. 집합과 속성 등의 고차원적 신화는 그것이 물리학에 대한 우리의 설명을 단순화해주는 한 유용한 것이다. 수학은 고차원적 신화의 필수 성분이기에, 이 플라톤적 신화의 유용성은 명백하다. 이를 신화로 보는 관점은 형식주의적 태도와 같다. 그러나 플라톤적 신화에 대한 이런 형식주의적 태도가 정당하다면, 물리적 신화에 대한 현상주의적 태도도 정당하다.
콰인에 따르면, 현재 수학적 존재론의 판정은 여전히 열려 있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용과 실험 정신이다. 물리주의적 개념 체계가 현상주의적 개념 체계로 얼마나 환원될 수 있는지 온갖 방법으로 살펴보는 동시에, 물리학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자연과학이 플라톤적 수학과 독립적으로 (얼마나) 이루어질 수 있을지 살펴보는 동시에, 수학도 추구하면서 그 플라톤적 기초도 파헤치자. "현상주의적 개념 체계 내에서 볼 때, 물리적 대상과 수학적 대상의 존재론은 신화이다. 그러나 신화의 질은 특정한 관점에 의존적인데, 즉 여기서는 인식론적 관점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 관점은 우리의 다양한 관점 가운데 하나로서, 이는 다양한 관심과 목적 가운데 하나와만 대응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