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흄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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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흄 지음, ChatGPT & 정동욱 옮김, "나의 생애". 원문 : David Hume, "My Own Life", in The History of England, from the Invasion of Julius Cæsar to the Revolution in 1688, 8 vols. (London, 1778), Vol. 1. https://jacklynch.net/Texts/humelife.html


나의 생애


데이비드 흄(David Hume)

ChatGPT & Zolaist 옮김


자랑하고 싶은 마음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오래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나는 간단히 하겠다. 내가 내 삶을 글로 쓰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자랑의 한 예로 생각될 수 있겠지만, 이 글은 내 저술들의 역사 외에는 거의 다루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의 거의 모든 삶은 저술가로서의 열망과 작업(literacy pursuits and occupations)에 바쳐졌다. 내 글 대부분의 첫 성공은 그리 자랑거리가 되지 못했다.

나는 옛 달력으로 1711년 4월 26일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 모두 좋은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 쪽 가문은 흄 백작가(Earl of Home's or Hume)의 한 갈래이고, 나의 조상들은 현재는 내 형이 소유한 영지를 여러 세대에 걸쳐 소유해왔다. 어머니는 대법원장(President of the College of Justice)인 데이비드 팔코너 경(Sir David Falconer)의 딸이며, 할커턴 경(Lord Halkerton)의 작위는 어머니의 형에게 계승됐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부유하지 않았고, 나는 장남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 유산은 우리나라의 방식에 따라 매우 적었다. 인재로 통하던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릴 때, 나와 형, 그리고 여동생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떠났다. 아주 특출했던 어머니는 젊고 아름다웠지만 오로지 자녀들의 양육과 교육에 헌신했다. 나는 정규 교육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일찍이 문필에 대한 열정을 품게 되었는데, 이는 내 삶의 주된 동기(ruling passion)이자 즐거움의 큰 원천이었다. 내 학구적인 성향, 냉정함, 그리고 근면함 때문에 가족들은 법률이 나에게 알맞은 직업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철학과 교양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심각한 혐오감을 느꼈다. 가족들은 내가 보에트(Voet)와 비니우스(Vinius)를 열심히 읽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때 나는 몰래 키케로(Cicero)와 베르길리우스(Virgil)를 탐닉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매우 적은 재산은 이러한 삶의 계획과 맞지 않았고, 나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건강이 좀 나빠지자, 보다 활동적인 삶의 방식에 아주 살짝 발을 담그려고 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1734년, 여러 저명한 상인들에 대한 추천을 받고서 브리스틀로 갔지만, 몇 달 만에 그런 방식의 삶은 나와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나는 프랑스로 건너가 조용한 시골에서 학문을 계속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인생 계획을 세웠고, 나는 그 계획을 지금까지 꾸준히 성공적으로 추구해왔다. 나는 매우 엄격한 절약으로 재산의 부족을 보충하고, 독립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유지하며, 저술가로서의 내 재능을 향상시키는 것 외에는 모든 대상을 경멸할 만한 것으로 간주하기로 결심했다.

프랑스에서 조용히 있는 동안, 처음에는 랭스(Reims)에 있었지만 주로 앙주(Anjou)의 라 플레쉬(La Fleche)에서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집필했다. 그 나라에서 3년을 매우 즐겁게 보낸 후, 1737년에 런던으로 돌아왔다. 1738년 말에 나는 《논고》를 출판했고, 즉시 어머니와 형이 사는 시골집에 내려갔다. 형은 자신의 재산을 매우 현명하고 성공적으로 증대시키고 있었다.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만큼 불운한 저술은 없었다. 그 책은 열성적인 독자들 사이에서조차 소란을 일으키지 못하고 출판사에서 사산된 듯이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원래 명랑하고 낙관적인 성격이어서 곧바로 그 충격에서 회복하여 시골에서 열정적으로 학문을 계속했다. 1742년에 나는 에든버러에서 《에세이》의 1부를 출판했다. 이 작품은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고, 곧 나는 이전의 실망을 완전히 잊게 되었다. 나는 시골에서 어머니와 형과 함께 지내며, 어린 시절 너무 소홀히 했던 그리스어 지식을 회복했다.

1745년, 애넌데일 후작(Marquis of Annandale)으로부터 잉글랜드로 와서 그와 함께 지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 젊은 귀족의 친구들과 가족들도 그의 정신과 건강 상태가 나의 보살핌과 지도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여 나에게 맡기고자 했다. 나는 그와 함께 12개월을 살았다. 그 기간 동안 받은 급여 덕분에 나의 적었던 재산은 상당히 증가했다. 그 후 나는 세인트 클레어 장군(General St. Clair)으로부터 그의 원정에 비서로 동행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 원정은 처음에는 캐나다를 목표로 했으나, 결국 프랑스 해안을 습격하는 것으로 끝났다. 다음 해인 1747년, 나는 장군의 비서로서 비엔나와 토리노 궁정으로 가는 군사 사절단에 동행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때 나는 장교의 제복을 입고 해리 어스킨 경(Sir Harry Erskine)과 그랜트 대위(Captain Grant), 현재의 그랜트 장군과 함께 그의 부관으로서 이 궁정들에 소개되었다. 이 두 해는 내 인생 동안 학문이 중단된 거의 유일한 시기였다. 나는 그 시기를 즐겁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보냈으며, 절약과 함께 받은 급여 덕분에 독립적이라고 부를 만한 재산을 모았다. 비록 내가 그렇게 말할 때 대부분의 친구들은 미소를 지었지만 말이다. 요컨대, 나는 이제 천 파운드에 가까운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나는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의 출판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내용보다는 방식에 있다고 항상 생각해왔고, 너무 일찍 출판을 시도하는, 아주 흔한 경솔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 작품의 앞 부분을 새로이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로 개작하여 투린(Turin)에 있을 때 출판했다. 그러나 이 작품도 처음에는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미들턴 박사(Dr. Midleton)의 《자유 탐구(Free Enquiry)》로 인해 잉글랜드 전역이 들끓고 있는 가운데, 내 작품은 완전히 무시되고 방치된 것을 발견하고 큰 실망을 느꼈다. 런던에서 출판된 내 《도덕과 정치에 관한 에세이》의 개정판도 크게 나아진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런 게 천성적인 기질의 힘인지, 이러한 실망들은 나에게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1749년에 나는 시골집에 돌아가서 형과 함께 2년을 지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는 《정치 담론(Political Discourses)》이라고 부른 《에세이》의 2부를 집필했고, 또  《논고》의 뒷부분에 대한 개작인 《도덕 원리에 관한 탐구》도 집필했다. 그동안 나의 출판사인 밀러(A. Millar)는 이전의 출판물들(불운한 《논고》를 제외한)이 대화 주제가 되기 시작했으며, 판매가 점차 증가하고 있고, 새로운 판본이 요구된다고 알려주었다. 매년 두세 권씩 목사와 주교의 반론이 나왔고, 워버튼 박사(Dr. Warburton)의 비난을 통해 내 책들이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평가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누구에게도 답변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게 지켰고, 성격상 쉽게 화를 내지 않아서 모든 저술적 논쟁에서 벗어나 있었다. 높아지는 명성에 대한 이러한 징후들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는데,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일의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일 년에 만 파운드를 버는 토지를 물려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마음가짐이다.

1751년, 나는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했다. 이는 저술가의 진정한 무대였다. 1752년, 내가 당시 살고 있던 에든버러에서 《정치 담론》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초판에서 성공한 유일한 내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국내외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같은 해 런던에서 《도덕 원리에 관한 탐구》가 출판되었는데, 이는 내 의견으로는 (그 주제에 대해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내 모든 저작 중에서 역사적, 철학적, 문학적으로 비교할 수 없이 최고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별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세상에 나왔다.

1752년, 변호사 협회(Faculty of Advoctes)는 나를 사서로 선택했는데, 이 직책에서는 거의 또는 전혀 보수를 받지 못했지만, 큰 도서관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영국사》를 집필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700년의 기간을 서술하는 생각에 겁을 먹고, 나는 스튜어트 왕가의 즉위 시점부터 시작했다. 나는 이 시기가 주로 파벌의 왜곡이 시작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작품의 성공을 낙관적으로 기대했다. 나는 현재의 권력, 이익, 권위, 그리고 대중의 편견을 모두 무시한 유일한 역사가라고 생각했고, 이 주제가 모든 계층에 적합하므로 그에 비례한 찬사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실망은 참담했다. 나는 비난, 반대, 심지어 혐오의 소리에 시달렸다. 잉글랜드인, 스코틀랜드인, 아일랜드인, 휘그당과 토리당, 성직자와 종파주의자, 자유사상가와 종교인, 애국자와 궁정인 모두가 찰스 1세와 스트래포드 백작(Earl of Strafford)의 운명에 대해 관대한 눈물을 흘린 저자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그들의 첫 분노가 가라앉은 후 더 모욕적인 것은 그 책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었다. 밀러 씨(Mr. Millar)는 1년 동안 단 45부만 팔렸다고 말했다. 사실, 나는 세 왕국에서 지위나 학문적 성과로 유명한 단 한 사람도 그 책을 견딜 수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다만, 잉글랜드의 대주교 헤링 박사(Dr. Herring)와 아일랜드의 대주교 스톤 박사(Dr. Stone)만이 예외였다. 이 존경받는 두 주교는 각각 나에게 낙담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나는 낙담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 당시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프랑스의 어느 지방 도시로 은퇴하여 이름을 바꾸고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당시 실현 불가능했고, 후속 권도 상당히 진전된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용기를 내어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이 기간 동안 나는 런던에서 《종교의 자연사》와 몇몇 작은 작품들을 출판했다. 그 작품들은 대중적으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허드 박사(Dr. Gurd)가 이에 반대하는 소책자를 썼다. 그 소책자는 워버턴 학파 특유의 편협한 성급함, 오만함, 그리고 상스러움이 가득했다. 이 소책자는 내 작품이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것에 대한 약간의 위안을 주었다.

1756년, 첫 권이 출판된 지 2년 후, 《영국사》의 2권이 출판되었다. 이 2권은 찰스 1세의 죽음부터 혁명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있었다. 이 작품은 휘그당에게 덜 불쾌감을 주었고, 더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작품은 스스로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불운한 1권도 함께 부상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경험을 통해 휘그당이 국가와 저술계의 모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의 무의미한 소란에 굴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추가적인 연구, 독서, 또는 숙고로 인해 처음 두 스튜어트 왕(찰스 1세와 찰스 2세)의 통치 기간에서 100곳 이상의 수정 작업을 하게 되었지만, 나는 모든 수정을 변함없이 토리당 쪽으로 했다. 그 시기 이전의 잉글랜드 헌법을 자유의 정규 계획(regular plan of liberty)으로 간주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1759년, 나는 《튜더 왕가의 역사》를 출판했다. 이 작품에 대한 소란은 처음 두 스튜어트 왕의 역사에 대한 소란과 거의 같았다.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기간이 많은 반감을 샀다. 그러나 나는 이제 공공의 어리석음에 대한 영향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였고, 에든버러에서 매우 평온하고 만족스럽게 은거하며, 잉글랜드 역사의 초기 부분을 두 권으로 완성했다. 이 작품은 1761년에 출판되어 나쁘지 않은, 하지만 딱 그만큼의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내 저작들이 다양한 역경과 시련에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꾸준한 진전을 거둠으로써, 출판사들이 제공한 원고료는 이전에 잉글랜드에서 알려진 어떤 것보다 훨씬 초과했다. 나는 이제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부유해졌다. 나는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다시는 그곳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고, 한 번도 저명인사(great man)에게 부탁을 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친분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만족감을 유지했다. 내가 이제 50세를 넘겼을 때, 1763년에 전혀 알지 못했던 허트퍼드 백작(Earl of Hertford)으로부터 파리 대사에 동행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나는 대사관의 비서로 임명될 가능성이 높았고, 그동안 그 직무를 수행할 예정이었다. 이 제안은 매우 매력적이었지만, 처음에는 그런 저명인사와의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꺼려졌고, 파리의 예의와 화려한 사람들이 나의 나이와 성격에 맞지 않을까 두려워서 거절했다. 그러나 백작이 초청을 반복하자, 나는 이를 수락했다. 이분과의 관계와 이후 그의 형제인 콘웨이 장군(General Conway)과의 관계는 모든 면에서, 즉 기쁨과 이익 모든 면에서 나를 행복하게 했다.

태도의 이상한 효과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내가 파리에서 모든 계층과 지위의 남녀로부터 받은 환대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들의 과도한 예의를 피할수록, 더 많은 예의를 받았다. 그러나 파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적이고, 박식하며, 예의 바른 사람들이 모여 있어 그곳에서 사는 것에 진정한 만족감이 있다. 나는 한때 그곳에 평생 정착할 생각도 했다.

나는 대사관의 비서로 임명되었고, 1765년 여름, 허트퍼드 경(Lord Hertford)은 아일랜드 총독으로 임명되어 나를 떠났다. 나는 그해 말 리치먼드 공작(duke of Richmond)이 도착할 때까지 대사대리(charge d'affaires)로 있었다. 1766년 초 나는 파리를 떠났고, 이듬해 여름에는 에든버러로 갔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철학적 은거 생활을 하려는 생각이었다. 나는 에든버러로 돌아올 때, 더 부유해지지는 않았지만, 허트퍼드 경의 우정 덕분에 훨씬 더 많은 돈과 더 큰 수입을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예전에 적당한 생활을 실험해본 것처럼, 이번에는 여유로운 생활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1767년, 나는 콘웨이 씨(Mr. Conway)로부터 차관보가 되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 사람의 성격과 허트퍼드 경과의 관계 때문에 나는 이 초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1769년에 매우 부유하게(연 1000파운드의 수입을 얻게 되었기 때문), 건강하게, 그리고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오랫동안 편안함을 즐기고 명성이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전망을 가지고 에든버러로 돌아왔다.

1775년 봄, 나는 장에 이상이 생겼다. 처음에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이후 이 질환이 치명적이고 치료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제 나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나는 이 질환으로 인해 거의 고통을 겪지 않았고, 더 이상한 것은 내 몸이 크게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도 내 기운이 줄어드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내가 다시 살고 싶은 삶의 시기를 선택해야 한다면, 이 후반기를 선택할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학문에 대한 열정과 사람들과의 교제에서 같은 명랑함을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65세의 남자가 죽으면 몇 년의 허약함만을 잘라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내 저술적 명성이 마침내 더 큰 빛을 발하는 많은 징후를 보이지만,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지금의 나는 삶에 거의 집착하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 자신의 성격에 대해 역사적으로 결론을 내리자면, 나는(am), 아니 지금까지의 나는(was) (표현을 이렇게 쓰니, 나에 대해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온화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고, 성격을 잘 통제했으며, 개방적이고 사교적이며 쾌활한 유머를 가지고 있었다. 애착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적대감을 잘 느끼지 않았고, 모든 열정에서 큰 절제를 보였다. 나의 주된 열정인 저술적 명예에 대한 사랑조차도, 빈번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내 성격을 쓰라리게 만들지 않았다. 나와의 교제는 젊고 무심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학구적이고 문학적인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졌고, 겸손한 여성들과의 교제를 특히 즐겼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받은 환영에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요컨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똑똑한 저명인사조차) 비난의 이유를 찾았지만, 나는 한 번도 악의적인 이빨에 전혀 닿지 않았다. 내가 사회와 종교 영역 양쪽에서 엄청난 분노를 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의 태도에 분노를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내 친구들은 내 성격과 행동의 어떤 면에 대해서도 변호할 일이 없었다. 광신자들은 내게 불리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퍼뜨리기를 기뻐했겠지만, 그들은 결코 개연적 수준(face of probability)의 이야기를 찾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나 자신에 대한 이 추도사를 쓰는 데 허영심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것이 잘못된 얘기는 아니길 바란다. 이는 쉽게 명확히 확인될 수 있는 사실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