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 Geoffrey Cantor, David Gooding and Frank A.J.L. James, Michael Faraday (New Jersey: Humanities Press, 1996).

Introduction

 
Alexander Blaikley's group portrait

도판 1: 1855-6년 겨울, 패러데이가 64살이 되었을 때 런던 왕립연구소에서 진행했던 강연 모습. 키가 크고, distinguished하고 authoritative함. 금속의 성질에 대해 가르치던 중(칠판?에 Gold와 Silver가 표시되어 있음). 대중에게 그는 최고의 실험가이자 'men of science' 중 하나로 인식. 강연가로서 고결한 성품(high integrity)을 가진 사람으로서 대중적 명성 최고.

  • 가난한 대장장이(blacksmith)의 아들로 태어나, 어떻게 왕립연구소에서 강연을?
  • 그의 배경은?
  • 어디서 그는 과학을 습득했을까?
  • 어떻게 그는 그의 이름을 단 발견들을 하게 되었을까?

패러데이의 개인적 배경

1791년 9월 22일, Elephant and Castle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출생하여 곧 West End의 Welbeck Street으로 이사. 그리고 다시 런던으로 이사. 아버지는 가난한 대장장이 일을 했고, 패러데이는 초등 교육밖에 받지 못해서 읽기, 쓰기, 산수만 하는 정도. 14살이 되던 해, 패러데이는 7년짜리 제본공 도제(수련) 과정에 들어가게 됨. 그는 강연을 들으면서 과학에 입문, 후에 영국을 대표하는 일류 과학자로 성장. 2장에서 다룰 내용.

패러데이와 기관

무엇보다도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 왕립연구소는 런던의 서민들에게 과학 지식과 기술 혁신을 전파하기 위해 18세기 말에 설립됨. 패러데이는 1813년에 험프리 데이비의 추천으로 왕립연구소의 화학 조수(Chemical Assistant)로 발탁. 패러데이는 왕립연구소에서 일뿐 아니라 먹고, 자고 생활까지 했음. 그와 그의 아내 사라(Sarah)의 방은 강연 극장 윗층에 있었고, 그의 실험실은 건물 지하에 있었다. 즉 도판에 등장하는 왕립연구소 강연 극장(lecture theatre)은 패러데이에게 집(home territory)과 같은 곳이었다.

그와 친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도 왕립연구소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brother와 조카는 극장을 밝히는 가스등을 제작하고 설치하는 일을 했으며, 그의 실험 조수 서전트 찰스 앤더슨(Sergeant Charles Anderson)은 위의 도판에서 그 바로 뒤에 있다. (샌더매니언 교파의 사람들...)

패러데이는 왕립연구소 외에도 왕립학회(Royal Society), 영국협회(British Association), 왕립군사아카데미(Royal Military Academy, 여기서 강연을 하기도 했음), 트리니티 하우스(Trinity House, 잉글랜드와 웨일스 해변의 등대를 관리하는 곳) 등과도 연결되어 있었음. 분명 많은 기관에 속하거나 조언을 해주었으며, 영국 과학자 사회의 존경받는 회원으로 인정받았음에도, 패러데이는 당대의 과학자들과 상당히 달랐다. 그는 상대적으로 혼자 연구했고, 학생을 받지 않았다. 그는 기관 활동이나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영국의 honor 시스템에 경멸적이던 그는 왕립학회와 왕립연구소 회장직을 모두 거부했다. 또한 그의 과학적 스타일도 꽤 독특했는데, 당시 물리학이 엄청나게 수학화되어 가던 때였음에도, 그의 논문에는 수식이 없었다.

패러데이와 대중

도판에 등장하는 청중들을 잘 보면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 강연이 패러데이가 1820년대 말에 설립한 연례 청소년 과학 강연 시리즈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현재도 우리는 이 같은 극장에서 매년 크리스마스에 열리는 강연을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다. 패러데이는 당대 최고의 과학 커뮤니케이터였다. 그는 과학자들이 자기들끼리만 얘기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발견을 더 넓은 대중에게 재밌게 알려야 한다고 믿었다. 이는 그가 생각하는 과학자의 사회적 책무였다. 그는 강연 프리젠테이션에 신중을 기했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 왕립학회는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에 공헌한 사람에게 패러데이 상(Faraday Award)이란 이름의 상을 주기로 했다.

패러데이 강연의 청중에는 여성도 많았으며, 저명한 사람도 꽤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현대 과학은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의 성스러운 활동으로 간주. 일반인과 문화와는 격리된 활동으로 간주. 그러나 도판의 그림에는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패러데이의 강연을 (문화로서 즐기기 위해) 보러 왔음. 실제로 당시 런던과 여러 지방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과학 강연이 꽤 있었음. 즉 19세기 영국은 현재보다 훨씬 과학이 대중과 밀접했음.

패러데이의 실험실과 강연 극장

도판의 테이블 위를 보면, 금속 샘플들과 실연 장치들이 있다. 아마 금속의 공통 성질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아마 다른 날에 강연을 보러 갔다면, 우리는 전기 장치를 볼 수 있었을 것이며, 1836년 1월의 어느날 강연을 보러 갔다면, 거대한 금속 케이지를 가지고 한 실험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 패러데이의 혁신적인 연구 실험은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지하실에서 이루어졌지만, 사적인 연구와 공적 강연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청중들에게 그의 최신 발견과 견해를 발표했다. 또 그가 관객 앞에서 수행한 아름다운 실험들은 대부분 강연 얼마 전 실험실에서 이루어진 작은 실험의 확장판이었다.

패러데이의 발견, 그리고 종교와 자연철학

전자기 유도, 전기화학 법칙, 반자성, 광자기 효과, 전자기 회전, 기체의 액화, 벤젠 발견... 이러한 것들은 패러데이를 '위대한 발견자'로 보여지게 함. 물론 패러데이에게 발견이 중요하긴 하지만, 발견만 강조하는 것은 패러데이의 과학 전체에 대한 오해를 줄 수도 있음. 그의 발견은 첫째, 종교와 자연철학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함. 패러데이는 자연을 신성하게 창조된 존재자로 이해했음. 그래서 그의 강연과 글 중에는 물리적 우주, 물질의 본성, 전기와 힘, 어떻게 서로 다른 물질의 힘들이 경제적인 시스템을 구성하는가 등의 문제에 대한 신의 관련성을 다루는 것이 있기도 했다. 또한 그 당시는 과학이 아니라 자연철학. 둘째, 그의 발견은 실험실 실천(laboratory practice)와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 실험실에서의 패러데이를 잘 관찰하면, 과학적 프랙티스에 대한 보다 예리한 관념을 얻을 수 있을 것.

패러데이의 영향

  • 기술적 영향. 전기 장치들...
  • 과학적 영향. 그의 장이론은 현대 물리학의 등뼈가 됨.
  • 까먹으면 안 되는 것. scientific communicator로서의 역할. 이는 우리가 전수받은 현대 과학의 개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

From Bookbinder to Scientist

CAREER

패러데이는 제본공 도제 시절 책을 통해 처음 과학을 접함. 그 책들은 그에게 (1) 놀라운 자연 현상들의 세계로 인도했고, (2) 또 그 현상들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신이 명한(divinely-ordained) 법칙을 따른다는 생각을 소개했다. 사실 당시 과학은 대중, 특히 돈 없는 아이에게 열려 있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그는 (1) 그가 찾을 수 있는 모든 책을 구해서 읽고, (2) City Philosophical Society 강연 참석하고, (3) 왕립연구소의 험프리 데이비 강연 4번을 들었다(제본소 고객이 사준 티켓으로). 또한 City Philosophical Society에서 만난 벤자민 애벗과 함께 자기 향상을 위해 서신교환을 했고, 이 때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그 당시 패러데이의 마음가짐, 글쓰기 스타일, 화학 지식 등을 알 수 있는데, 특히 그는 그가 들은 강연 스타일에 대해 꼼꼼하게 코멘트를 했다. 이는 이후 그의 훌륭한 강연 능력에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1812년 도제 과정을 수료한 패러데이는 맘에 맞지 않는 제본업자 밑에서 일을 하게 됨. 이런 상황에서 고상한 활동(noble activity)으로 생각된 과학에 종사하기로 마음 먹음. 패러데이는 당시를 회고하기를, "My desire [was] to escape from trade, which I thought vicious and selfish, and to enter into the service of Science, which I imagined made its pursuers amiable and liberal." 왕립학회 회장 조지프 뱅크스 경에게 보낸 편지에 응답이 없자, 험프리 데이비에게 자신이 필기하여 제본한 데이비 강연 노트를 함께 동봉해 편지를 보냈다. 데이비는 그의 성실성과 열정에 감명받은 데다, 실험중 눈에 사고를 입어 한동안 조수가 필요했던 상황이었기에, 패러데이를 개인 (임시) 조수로 기용. 1813년 초에는 왕립연구소 실험실 조수가 해고되면서 자리가 생겼는데, 데이비는 이 때 패러데이를 추천하였고, 이로써 패러데이는 정식 실험실 조수가 되었다. 데이비의 추천의 말: "well fitted for the situation. His habits seem good, his disposition active and cheerful, and his manner intelligent."

몇 개월 동안 데이비 조수로 열심히 일한 후, 그는 데이비의 대륙 여행(18개월)의 필기생으로 따라가게 됨. 패러데이의 과학 교육 톡톡. 데이비의 요오드 발견. 도도하고 오만한 데이비 부인 제인과의 다툼. '[she] endeavour[ed] to thwart me in all my views & to debase me in all my occupation'

영국으로 돌아온 패러데이 경력 쑥쑥.. 1815년 패러데이의 직함은 'Assistant and Superintendant of the Apparatus of the Laboratory and the Mineral Collection', 보수는 주 30실링. 1821년이 되면 'Superintendant of the house and laboratory', 1825년에는 'Director of the Laboratory' (보수는 연 100파운드).

패러데이의 당시 어떤 일? (1) 강연 보조로서 실연 준비, (2) 지시받은 연구소 연구 수행 (3) 지시 받은 일상적인 화학 분석 수행 (4) City Philosophical Society에서 강연 (5) (주로 화학 분야에서) 준-독립 연구자로서 인정받기 시작. 이 초기 연구의 결과들은 짧은 논문들로 출판됨.

데이비와의 관계 변화는 패러데이 경력에 심각한 위협이 됨. 데이비의 조수 vs. 독립 연구자. 독립연구자가 되기 위한 기회가 옴. 1821년 여름 외르스테드 발견에 대한 리뷰 논문 발표. 또 바로 직후 전자기 회전 발견하여 또 발표. 그러나 그로 인해 명예와 정직성 의심 받음. 데이비의 공헌에 대한 감사가 부족하고, 윌리엄 하이드 울러스턴(William Hyde Wollaston)의 결과를 언급 없이 도용했다는 것. 이 일로 인해 데이비와의 관계 급격히 안좋아짐.

1823년 왕립학회 회장 데이비는 전자기 회전 발견의 공을 울러스턴에게 돌리는가 하면, 패러데이의 왕립학회 회원 임명을 반대했다. 왜? 확실치는 않지만, 자기 본인의 연구는 기우는 상황에서 자기 조수가 선도적인 과학자 사회의 일원으로 추대받는 것을 불쾌하게 여긴 것일 수도. 어쨌든 패러데이는 1824년 1월 왕립학회 회원으로 임명됨. 나중의 회고에 따르면, 'I was by no means in the same relation as to scientific communication with Sir Humphry Davy after I became a Fellow of the Royal Society as before that period'. 그리고 어쟀든 이 사건은 패러데이가 독립 연구자, 과학자가 되기 위한 중요한 단계였다. 그리고 사실 1829년 데이비가 죽기 전까지 패러데이는 독립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추구하기 위한 완전한 자유와 자신감을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데이비의 유산 두 가지는 꼭 지적해야 한다. (1) 데이비의 조수로서의 경험을 통해 패러데이는 실험 화학자로서의 수많은 기술을 배웠다는 점. (2) 약간 비꼬는 얘기일 수 있지만, 왕립학회의 요청으로 광학 유리 제조 개선을 위해 수행했던 지루한 연구(데이비가 죽은 지 몇 달 후 1829년 말에야 연구 긴 결과보고서를 냈고, 실제로는 1831년 6월에야 완전히 마무리됨). 패러데이의 성숙하고 창조적인 연구가 바로 직후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

1831년 8월 12일 일기에 전자기 유도 시작된 것이 적힘. 그리고 1831년 11월 24일부터 시작되어 25년간 지속된 'Experimental Researches in Electricity' 시리즈 논문은 패러데이 연구의 핵심(central thread)을 구성. 이는 나중에 3권의 책으로 재출간됨.

1820년대 말, 1830년대 초, 패러데이의 강연 역할도 변화. 1825년 'Director of the Laboratory'에 임명되면서 패러데이는 '금요일 저녁 강연(Faraday Evening Discourses)' 개시. 1827-8년 겨울부터는 그 자신만의 강연을 만듦. 이것이 아마도 그 유명한 청소년을 위한 크리스마스 강연. 1820년대 말, 패러데이는 자신의 위치에 불만족스러워했지만, 왕립연구소에서의 자신의 일이 'duty', 'gratitude'로 여기고 그냥 일 계속함. 아마 자신이 왕립연구소에 많은 빚을 졌다고 생각했을 것. 데이비가 죽고 난 후에는 훨씬 홀가분한 마음으로 왕립연구소의 일에 임하게 됨. 1820년대 말 그가 강연만으로 버는 돈은 연 100파운드. 1833년에는 Fullerian Professor of Chemistry(사실상 패러데이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교수자리)에 임명되어 100파운드의 연봉 또 받게 됨.

데이비와의 차이점 : 데이비 또한 가난한 배경에서 출발하여 과학에서 성공한 후 사회적 경제적 이득을 온전히 누림. 그는 상류 사회에 입문하여 작위를 받고 돈 많은 미망인과 결혼하면서 점차 과학 연구에 손을 떼게 됨. 패러데이는 데이비의 이러한 타락(corruption)을 스스로의 반면교사로 삼음. 성경 구절 : 'Lay not up for yourselves treasures upon earth' (Mathew 6:19). 그렇다고 패러데이가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은 아님. 1830년대 중반, 패러데이는 연 수백 파운드의 돈을 벌었는데, 이는 정평난 런던의 의사의 수입과 같았다.

데이비와의 차이점 계속 : 데이비와 달리, 패러데이는 권력, 후원, 정치를 혐오. 작위와 같은 honours도 거부. 실은 영국에서 주는 것만 거부(?). 영국에서는 정치적 서비스로 상을 준다고 생각. 대신 능력에 따라 상을 준다고 생각되었던 프랑스, 프러시아 등에서 수여하는 honours는 승락. 1835년에는 Civil List 보조금 (무례한) 수여를 거부했다가 나중에야 수락. 왕립학회 회장직 거부. 왕립연구소 회장직도 거부. 'it is quite inconsistent with all my life & views.' 자신은 왕립연구소의 servant이지, master가 될 수 없다는 뜻.

앞과 연속되어 정치에 대한 혐오 : 패러데이는 동료들과 당시 사회적 정치적 사건에 대해 거의 언급 안함. 정치는 저속하다고 생각. 종교적, 도덕적 이상으로부터 떨어뜨리는 것. 사회적 동요에 대해 공포로 생각. 1848년 겨울 유럽을 휩쓸었던 혁명에 대해 패러데이는 그의 친구에게 'black passions and motives that seem now a days to urge men every where into action. What incredible scenes every where, what unworthy motives ruled for the moment, under high sounding phrases, and at the last what disgusting revolutions.' 그는 정치를 타락, 퇴보와 연결시켰지만, 과학적 발견은 인류의 진보와 진리의 원천으로 생각했음. science not only discovers the order in the universe but it is an activity conducive to human peace and order. 이는 패러데이가 과학에 심취한 중요한 동기중 하나.

1840년대 초 패러데이 아팠음. 극도의 피로, 현기증, 두통, 특히 기억상실. 1844년 회복됐으나 그 이후에도 가끔 기억과 관련된 문제를 호소. 왜? 그는 아마 중금속 중독이 원인일 듯. 아니면 강박적인 성격에 의한 심리적 문제에 기인한 것일 수도.

1840년대 중반 이후, 연구와 강연 재개. 물질과 힘에 대한 사색 전개하여 공개 강연. 1846년 'Thoughts on Ray-Vibrations' 전개. 세계가 역장으로 이루어졌다는 생각 전개. (구체적인 생각은 본문 참조). 이때가 되면 원숙한 자연철학자라고 할 수 있음.

전문가로서의 과학자의 사회적 역할 부문 : 당시 영국 과학자들은 철도의 안전, 공중 건강, 공장 굴뚝 배출 제한 등의 문제에 관여. 패러데이도 the Admiralty, the Home Office, various Royal Commissions 등에 관여. 예컨대 미술관(art gallery)의 가스등 문제, 등대 관리 등. 1844년에는 찰스 라이엘과 함께 Durham 근처 Haswell 광산 폭발 사고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 또하나는 Trinity house로부터 부탁받은 등대 디자인과 밝기 개선 일. 실제로 늙어서도 패러데이는 정력적으로 이러한 활동에 임했음.

1850년대 spiritualism 유행할 때, 그에 대항하는 공격 펼침. 1853년 6월 30일에는 The Times에 기고. 1854년 5월 6일에는 왕립연구소에서 또 공격. 대중에 대한 과학 교육 강조. spritualism에 반대하는 종교적 이유도 있었음. 그는 Word of God 반대하는 믿음 가졌기 때문.

RELIGION

글래사이트(Glasites) 또는 샌더매니언(Sandemanians)이라 불리는 매우 작은 교파에 속했음. 지금까지 한 번도 1000명이 넘은 적이 없고, 지금은 한 줌만 남아 있는 교파. 스코틀랜드의 John Glas가 1720년대 경에 설립, Glas의 사위(양자) Robert Sandeman이 잉글랜드와 미국에 전파. 특징 : 신이 성경에 명시적으로 적은 지시에 확고하게 기초한 순수, 순결한 기독교 신앙을 추구. 그리스도(의 도덕성)를 본받고자 함.

패러데이의 아버지는 교파의 지시(?)에 따라 런던으로 이사, 대장장이일 시작. 패러데이는 교회의 장로이자 은세공인 Edward Barnard의 딸 사라(Sarah)와 1821년 6월에 결혼. 패러데이는 1821년 7월 15일에 교파의 정식 회원이 됨. 1844년 잠시 제명되었을 때를 제외하곤 항상 교회와 함께 했다. 집사와 장로 역임.

샌더매니언 교회는 패러데이의 삶에 매우 중요. 안식일엔 꼭 교회에. 그래서 일 때문에 멀리 나갔다가도 토요일 저녁에는 꼭 런던에 돌아옴. 설교는 사실상 성경 구절 통째로.. 성경 지식 해박. ... 기부. 봉사 강조..

가족 관계에서도 샌더매니언 교회는 중요. 교파 내에서 결혼. 패러데이의 여동생은 Sarah의 남동생과 결혼. 교파의 조언에 의해 제임스가 런던으로 오게 된 것처럼, 패러데이는 교파의 벤자민 빈센트(Benjamin Vincent)를 왕립연구소의 Assistant Secretary의 post에 추천. 처음의 도판도 샌더매니언 화가 Alexander Blaikley에 의해 그려짐.

패러데이의 일시 제명에 관한 얘기.

죽음 앞에서도 종교적으로 신실. 1867년 8월 24일 사망.

종교와 과학 사이의 관계. 갈등? 패러데이는 종교와 과학 사이에 아무런 갈등 못느낌. 'the natural works of God can never by any possibility come in contradiction with the higher things that belong to our future existence.' 그렇다고 이러한 패러데이에서 보이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일반화할 수는 없음. 패러데이는 특별한 경우. 특이하게고 패러데이는 문자중심주의 교파에 속했음에도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갈등 못 느꼈음. 패러데이의 연구는 전기, 자기, 화학에 국한되었고, 지질학이나 생물학엔 관여 안했음. 아마 문자중심주의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과학 갈등 일으키지 않은 이유는 거기에 있을 수도. 어쨌든 패러데이는 liberal 신앙의 경우에만 과학과 종교가 양립가능하다는 논제에 대한 반례임.

그의 과학과 종교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스스로 얘기하곤 했지만, 사실 그의 종교적 통찰은 그의 과학에도 영향을 줌. 1846년 강연에서 '[the properties of matter] depended on the power with which the Creator has gifted such matter' The word power played an important role in Faraday's mature science since he conceived physical bodies to be a collection of powers. 어떤 물체를 구성하는 힘은 신이 창조 때 창조된 것. 힘의 창조와 소멸은 'only within the power of Him who has created' 우주의 힘의 총량은 보존된다는 원리에 기초하여 전기와 자기 연구. 전기와 자기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존재하고 힘의 총량이 보존된다는 믿음하에서 전기와 자기의 관계 탐구하였고, 이는 전자기 유도 발견 촉진했을 것. (또한 경제 원리도 종교적 믿음과 관련)

CHARACTER

패러데이는 simple man으로 묘사되곤 함. 분명 교활하거나 속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단순하다고 말하긴 힘듦. 그는 relaxed이자 driven하며, 또 사람들과 친하면서 멀다. 그의 공적 성격과 개인적 성격은 매우 다르다. 헬름홀츠의 평가 : 'the privilege of his obliging help and the pleasure of his amiable society. The perfect simplicity, modesty, and undimmed purity of his character gave ...'. 허셜의 평가 : 'blameless seer'. 한 목사의 평가 'humility and modesty'. 분명 매력적인 사람임에 틀림 없음.

위에 나열된 성격 목록은 대체로 종교적 함축 있는 것들. 즉 패러데이는 종교의 도덕적 가르침에 충실.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샌더매니언의 관점과 과학자 공동체에 대한 패러데이의 관점 많은 부분 유사. 과학 공동체를 일컬어 'band of brothers'로 지칭하기도. 또 'When science is a republic, then it gains: and though I am no republican in other matters [being a loyal subject of Queen Victoria], I am in that.' 과학자는 기독교인처럼 서로 협동하는 사명 가져야.

공개 강연에서는 매우 친절하고 친밀. 그러나 그는 개인적인 학생을 받지 않음. 사람들에게 과학을 권하면서도, 스스로의 연구는 오직 조수 앤더슨과만 수행. 아마 데이비와의 악연이 관련이 있을 것.

매우 친절한 패러데이, 그러나 inner strength 가졌음. 틴달이 1853년 말하길, 'There was no trace of asceticism in his nature. He preferred the meat and wine of life to its locusts and wild honey.' 패러데이는 수용과 거부의 경계가 확실. 정치 권유하면 매우 공격적으로 반응. 또 많은 면에서 distant person. 과학과 샌더매니언의 이상한 세계에 사는 딴세계 사람 같은... While science provided him with a subject of general interest, his religion imposed an unbridgeable gulf between himself and his non-Sandermanian contemporaries.

가까운 친구만이 알고 있는 deep anxieties. 자신이 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사람일까봐 두려워 함. 혁명적 정치에 의해 세상이 혼란에 빠질까봐 두려워 함. 왜? 자신에게 자연 탐구라는 신이 부여한 임무가 있는데 그것을 다하지 못할까봐 두려워 한 것? 왕성한 연구자, 사회적으로도 매우 바쁜 사람... 그러나 신이 그에게 준 시간은 제한되어 있음. 해군의 연구 요청 거절하면서 'my time is my only estate'. sicial frippery 참석 거절하면서 그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 젊은 과학자들에게 'the secret is comprised in three words - work, finish, publish' 패러데이는 고도로 directed person이었음.

이와 관련된 특성... '그가 부여한 질서'. 신이 완강한 법칙을 통해 우주를 창조했다면, 과학자는 그 법칙들을 이해하기 위해 질서잡힌 환경을 창조할 의무가 있음. 패러데이는 '과학이 정치와 달리 평화와 질서의 분야'라는 이유로 과학에 심취했었음. 그의 일기는 30년간 1번부터 16041번까지 문단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고, 그의 'Experimental Researches in Electricity'의 30개 논문 시리즈는 25년간 쓰여진 3361개의 번호 매겨진 문단으로 이루어져 있음.

These sequences of ordered paragraphs produced two remarkable linear structures which recorded on the one hand Faraday's laboratory practice and, on the other, his polished communication with the scientific community. Both sequences presume that scientific knowledge is cumulative, that the results of different investigations will cohere over time and produce a major synthesis of knowledge. To aid this synthesis Faraday made extensive cross-references between paragraphs so as to draw on the wealth of earlier materials. There were also references to the investigations of his contemporaries which he drew into his research but both of these works are principally accounts of how this one man ordered his universe.

Faraday in the World

The Royal Institution

Other Clubs and Societies

  • The City Philosophical Society
  • The Royal Society of London
  • The Athenaeum
  • The Society of Arts
  • British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Faraday's Role in Civic and Military Science

Faraday in the World

"패러데이는 종종 밖의 세상과 떨어져 있는 고독한 연구자로 그려지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부정확한 관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패러데이는 그의 연구와는 연관이 없더라도 당대 사회의 관심들과 밀접하게 연관된 활동에 삶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 "패러데이에게 과학은 연구실 안에만 가두어져서는 안되며, 더 넓은 세계로 나와야 했다."

From Chemistry to Electricity

이 챕터에서는 그의 실험 연구와 그것과 연관된 세계관을 검토할 것이다.

Chemistry

패러데이의 물리학에 대한 엄청난 공헌에 비해, 그가 애초에 화학에 관심을 가졌고 과학자로 훈련받았다는 점은 간과되곤 한다. 패러데이의 젊은 시절, 전기는 화학의 일부로 간주되었는데, 이는 볼타의 전지 발명 때문. (볼타의 전지는 화학적 방법을 통해 전기 생산) 독일의 유기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는 다음과 같이 코멘트 하기도.

패러데이가 자신의 연구에 대해 남긴 보고서는 읽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일기장에서 발췌한 것 같다는 수리 물리학자들의 비난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잘못은 그들에게 있지 패러데이에 있지 않다. 화학의 길을 통해 물리학에 접근한 물리학들에게, 패러데이의 논문은 경탄스럽게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린다.

즉 패러데이는 도제 화학자 기간 배운 화학적 방법을 이용해 물리 연구를 했다는 것! (화학적 방법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

패러데이가 화학 연구의 최첨단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 사례 : 벤자민 애보트(Benjamin Abbott)에게, 산소-염산 기체(oxy-muriatic acid gas)라 불린 물질에 대한 데이비의 견해 옹호하는 패러데이의 편지. 산소+무언가로 여겨졌지만, 데이비는 그 물질에 산소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그것 자체가 화학 원소라고 주장하고 그에 대한 근거 제공. 즉 화학적으로도 역학적으로도 분해 안됨. 그는 그것을 염소(chlorine)로 명명. 이는 프랑스 화학자들(특히 라부아지에)에 의해 제기된 산의 정의를 반박하는 것. 데이비는 패러데이가 들었던 1812년 봄 강연에서 그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즉 화학은 패러데이를 과학의 세계로 이끈 주된 문제였음.

다른 과학에 비해 화학은 패러데이의 관심과 능력에 이상적으로 잘 맞음. 당시 프랑스 물리학과 달리, 화학은 비-수학적이고, 단지 자료 수집(자연사가 그랬음)을 넘어서는 이론이 있으며, 자연 현상에 대한 능동적인 실험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영국의 과학적 발견의 최전선에 있었다. 데이비와의 대륙 여행 당시, 자신의 실험적 화학연구에 대한 자부심 강했음. '그들[프랑스 화학자들]은 실험적으로 데몬스트레이트하지 않은 채 이론적으로만 추론한다. 그래서 errors are the results.' 데이비와 패러데이에게, 실험은 화학의 실천에 필수적. 이론은 도그마가 되면 안 되며, 실험의 엄격한 시험에 복종해야 했다.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이론은 수정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 패러데이가 화학자로서 훈련받으면서 전기와 자기 연구 시에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실험적 태도.

1815년 영국에 돌아온 이후, 패러데이는 몇 년 간 더 과학적 도제 생활 지속. 주로 한 일은? 왕립연구소의 강연에 필요한 재로를 준비하고 강연을 돕는 일. 특히 화학 교수 윌리엄 토머스 브랜드(William Thomas Brande)를 도움. 패러데이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지만 간과된 인물인 듯. 1826년 브랜드은 패러데이에게 조수일을 덜어주고 관리자(Manager)로 추천. 이 기간 동안 패러데이는 영국의 다양한 지역에서 얻은 물 샘플을 가지고 화학 분석 수행했고, 데이비의 연구도 도왔다. 그중 가장 지적할만한 것으로는 1815-16년 사이의 데이비의 광부 안전등(miners' safety lamp) 발명과 불꽃(flame) 이론 연구였다. 패러데이의 도움은 데이비의 논문에서 잘 인정되지 않았다.

패러데이의 초기 독창적인 화학 연구에는 토스카나 지방에서 가져온 생석회 분석을 들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첫 논문 주제가 되었고, 여기서 그는 두 가지 염화 탄소를 발견하고 1/3의 존재를 입증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화학적 발견은 기체의 액화였다. 1823년 3월 5일, 데이비를 위해 클로린 하이드레이트(chlorine hydrate)를 분석하고 있었다. 밀봉된 튜브 안에서 가열하던 중, 하이레이트가 분해되면서 압력이 4-5 기압으로 증가했는데, 이는 염소를 액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자 그는 튜브 속 염소의 압력을 증가시킴으로써 염소를 직접 액화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데이비는 염화수소를 액화시켰고, 패러데이는 여러 다른 기체를 가지고 이를 반복했다. 그들을 몰랐지만, 사실 이는 토머스 노스모어(잘 알려지지 않은 데본셔 시인)가 몇 년 전 했던 작업을 반복했던 것. (그럼에도) 패러데이가 기체의 액화의 발견자로 간주된다는 것은 패러데이의 명성을 암시하는 것임.

패러데이의 화학 연구의 많은 부분은 그의 자문일에서 왔음. 1820년대 초, 패러데이는 제임스 스토다트(James Stodart)와 함께 강철(steel)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연구. 그들은 합금을 만들었다. 1823년 스토다트의 죽음으로 프로젝트 중단. 그들의 작업은 야금 분야의 발전에 별 영향 못 줌. 질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 당시 상업적으로 제조 불가능했기 때문.

패러데이가 다양한 법정 사건에 개입했다는 점은 중요. 영국 산업화에 따라, 정부부서뿐 아니라 산업가들도 기술적 변화의 함의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했다. 소송 증가(특허 또는 보험 관련)에 따라 전문 과학자의 증언 필요. 패러데이는 몇몇 재판에서 전문가 증인으로 출석했지만, 대부분 패소하는 쪽에 선 듯 -_-;;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전문가 증언의 이용 절차 불명확. 과학인들(men of science)은 종종 원고쪽이나 피고쪽 모두에 등장했고, 이는 판사와 배심원들에게 혼란을 줌과 동시에 과학에 bad publicity를 주었다.

1818년 패러데이는 다니엘 휠러(Daniel Wheeler)의 1816년 특허(맥아로 맥주를 만드는 새로운 공정)의 독창성 결정 자문 요청 받음. 휠러는 피고 말링(Maling)을 특허권 인정 후 휠러의 방법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특허 침해로 고소. 그러나 휠러는 특허 신청일 6개월 이내에 공정에 대한 스펙을 채우지 않았음. 휠러에 반해 그의 특허권 사용을 금지하는 단기 권고 발효. 휠러는 그 권고 무효화를 요청. 이때 말링은 그 공정이 특허일 이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것임을 보이기 위한 전문가 증인으로 두 명의 화학자 고용. 휠러는 패러데이 고용. 패러데이는 말링의 증인에 의해 만들어진 증거를 깎아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

전문가 증인이 대동된 가장 큰 사건으로는 세번(Severn)과 킹(King)의 슈가베이킹 공장과 다양한 보험 회사 사이의 사건이다. 제국 보험사(Imperial Insurance Company)는 패러데이를 고용. 그들은 1819년 11월 화재에 따른 70000 파운드에 달하는 세번과 킹의 요구를 거절. 핵심 문제는 보험사의 지식 없이 세번과 킹에 의해 도입된 새 oil-gas 이용 공정이 화재의 위험을 증가시켰는지 줄였는지였다. 패러데이는 화재 위험이 증가했다는 것을 보이는 여러번의 실험을 수행했다. 그러나 보험사는 졌다. 패러데이는 피닉스 보험사를 위해서도 실험을 수행했지만, 재판은 같은 결과였다.

oil-gas를 가지고 연구하던 중, 그는 그 분해 과정에서 형성되는 물질에 관심 가지게 됨. 그중 하나는 그가 수소와 탄소의 화합물로 밝혀냈고, 그는 이를 수소의 이가탄화물(becarburet of hydrogen)이라 명명했다(1825). 이는 독일 화학자 아일하드 미쉘리히에 의해 1834년에 벤젠이라 재명명되었다. 전기화학에 관한 연구와 촉매 작용에 관한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제외하면, 이는 패러데이의 마지막 순수 화학 연구였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책(논문이나 강연 모음이 아닌)은 1827년 출판된 Chemical Manipulation이라는 화학 교과서이다. 이 교과서는 사전 지식이 없는 학생들을 위해 쓰여진 화학적 절차의 교과서. 화학 원소 및 화합물의 성질을 묘사하는 대신, 이 책은 그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실험을 수행하는지를 보였주었다. 그것은 패러데이가 왕립연구소에서 훈련받는 동안 습득한 화학적 절차, 기술, 방법의 개론서로도 읽혀질 수 있다.

화학으로부터, 패러데이는 전기의 존재도 배웠다. 전기는 당시 물리보다 화학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패러데이는 당대의 누구보다도 전기를 화학으로부터 취해서 물리학의 영역에서 그것을 연구했다. 화학 도제로부터, 그는 실험의 중요성뿐 아니라 조작 방법과 암묵적 지식들을 습득했으며, 이는 전자기를 성공적으로 탐구하도록 해준 발판이었다. 화학자로서의 15년간의 경험은 훌륭한 훈련을 증명했다.

Electricity, Matter and Motion

1821년 9월, 외르스테드의 발견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패러데이는 전류가 하르는 도선이 자선 주위를 계속 돌도록 만들었다. 이는 화학적 에너지로부터 산출된 최초의 지속적 운동이었다. 첫 회전 장치 스케치가 그려져 있는 1821년 9월 3일 패러데이의 실험 노트를 보면, 그는 다른 사람들이 놓쳤을 것으로 의심되는 단서를 찾는 것에서 시작해 작동하지 않았던 실험(특히 도선이 자기 자신의 축에서 돌 것이라던 울러스턴의 아이디어를 시험하는 실험을 포함해서)을 검토하는 데 이르렀다. 2장에서도 얘기했지만, 당시 패러데이는 독립된 연구자로 서기 위해 자기 자신의 발견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 전자기 회전은 떠오르는 새로운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를 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는 전자기 연구에 관한 그의 첫 공헌이자, 이후 30년간 발전될 자연에 대한 새로운 그림의 첫 붓질이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발견에 발견을 거듭하며 패러데이가 어떻게 힘과 물질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와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을 구성했는지를 볼 것이다.

화학의 확장하는 프런티어에 있는 전기 현상에 대한 패러데이의 접근은 수학적으로 훈련받은 자연철학자들의 뉴턴주의적, 역학적인 접근보다는 데이비와 브랜드와 함께 했던 화학적 도제살이에 뿌리를 두고 있음. 뉴턴주의 역학은 물질과 힘을 기본적인 것으로 두고 있는데 반해, 패러데이는 전자기 회전을 그러한 힘의 일종으로 해석하지 않음. 그는 전자기 회전을 보다 일반적인 힘의 원천이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전환되는 일의 일종으로 보았다. 그는 데이비나 다른 사람들처럼, 전지에 있는 물질의 화학적 힘이 본성상 전기적이라고 믿었고, 자석과 상호작용하는 전류 또는 '동적' 형태가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가정했다. 그러한 현상은 여러 형태 중 하나의 형태로 있는 힘의 소비를 보여주며, 그 현상은 기술적으로, 질적으로 접근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액면 그대로(at face value) 취급되어야 했다(다시 말해 그 이면의 뉴턴주의적 힘을 가정할 필요 없음). 앙페르와 비오는 이 현상들을 수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그 현상을 뉴턴주의적 힘에 의해 산출된 작용으로 해석한 반면, 패러데이는 현상을 미리 정해진 이론에 맞도록 각색하는 재해석을 거부했다. 그의 접근은 화학적 도제살이만큼이나 수학에 대한 그의 불신에 의해서도 형성되었다. 그렇다고 그의 수학에 대한 불신이 과학적 훈련 부족의 징후로 간주되어선 안 된다. 그런 훈련은 당시 영국의 두 대학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상상 속에서 체계적으로 물리적 상황의 한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의 추론을 할 수 있는 엄격한 사고를 자랑했다. 이 능력은 수학적 분석을 위해서도 필요한 질적 추론에 필수적이었고, 이는 효과적인 사고실험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패러데이는 현상을 수학적 방법에 맞추는 사람과 싸우는 데 익숙했고, 그래서 그의 유명한 시리즈 논문의 이름도 "전기에 대한 실험 연구"였다. 그 시리즈의 첫 논문에서 그는 전자기 유도 발견을 공표했다.

Electromagnetic Induction

1821년 외르스테드의 발견 이후, 반대의 효과도 찾아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 노력, but 실패.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패러데이는 미련을 놓지 않았다. 1831년 8월 29일, 철심링을 감싼 한 코일 A는 갈바노미터에, 다른 한 코일 B는 전지에 연결. 그러자 검류계 바늘이 움직였다가 제자리로 돌아옴. 즉 코일 A에 잠깐동안 전류가 흘렀다는 것임. 어떻게 이 포착하기 어려운 효과를 보이게 만드는 데 성공했을까? (1) 코일과 철심 -> 효과의 크기 확대 (2) 실험 절차를 조금 바꿨기 때문: 전지를 연결하기 전에 검류계를 먼저 연결!!! 코일 B에 전지 연결되자 자기 유도, 이 자기는 다시 코일 A에 전류 유도. 패러데이는 이 효과를 조금 변경하여, 움직이는 자석이 전류를 유도하는, 다시 말해 간단한 발전기를 만드는 데 성공(1831년 10월 17일). 이로써, 1821년의 회전기가 전자기가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였다면, 1831년의 발견은 움직이는 자기가 전류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였다. 이 두 가지는 전기기술의 기초!

11월에 이 결과를 왕립학회 모임에서 발표한 후, 1832년에 학회지인 Philosophical Transaction에 연구 논문 발표. 이것이 이후 25년 간 이어진 30편이 넘는 논문 시리즈 "전기에 대한 실험 연구"의 첫 작품. 하나만 빼고 모두 Philosophical Transaction에 발표. 여기서 그는 자기를 통한 전기 유도의 필수 조건으로 유도 회로가 자기력을 묘사하는 선 또는 '곡선' 시스템을 cut through 해야 한다는 것을 보임.패러데이는 이전의 논문에서는 자기력선을 사용한 적이 없었음. 그러나 그 이미지는 매우 익숙. 다른 자연철학자들도 (위도, 경도선이나 지구의 온도 분포를 표상하는 등온선에 유비하여) 이 convention을 가지고 자기현상을 묘사하는 데 사용했었다.

처음엔 보조 기억 장치로 도입되어, 기술적(descriptive) 개념으로 사용되던 패러데이의 선은 톰슨과 맥스웰의 강력한 이론적 도구가 됨. 패러데이는 이 선을 여러 방식으로 사용. 새로운 현상을 분석하고 알려진 효과를 설명하고, 새로운 실험 가능성을 밝혀주는 묘사 및 해석 도구로 말이다.

새로운 실험 가능성을 밝혀준 예 : 그의 단극 유도(unipolar induction) 발견(1832)은 선을 가지고 하는 사고 실험이 어떻게 새로운 실험 상황을 이끄는지 예증해준다. (사실 잘 이해 안됨. 자석을 축에서 회전시킬 때 어떻게 회로가 자기력선을 자른다는 것인지?)

알려진 효과의 설명 예 : 아라고의 원판(자극 사이의 구리 원판이 '전류가 공급되거나 자석을 회전시킬 때' 회전하는 현상, 1825)에 대해 쉽게 설명. 패러데이 이전까지, 아무도 자석이 구리에 작용하는 이 현상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었다.

이로 인해, 패러데이 자신감 얻음. "실험은 수학 앞에서 기죽을 필요 없다. 오히려 실험은 정말 수학과 대적할 만하다."

이러한 발견과 성공은 다양한 사색 촉진. 그중 두 가지 사색은 매우 중요. (1) 1832년 3월 12일, 그는 왕립학회 서기에게 밀봉된 노트 맡김. 그 안에는 전류를 유도하는 자기가 자석으로부터 점차 전파되어 전파되는 데 시간이 걸리며, 정전기 유도도 같은 방식으로 전파될 것이라는 내용 담겨 있음. 전파 방식에 대해서는 'vibrations upon the surface of disdurbed water, or those of air in the phenomena of sound'와 비슷할 것이라 추측. 그러면서 파동 이론이 소리와 그리고 아마도 빛에 잘 적용되듯이 이 현상들에도 적용될 수 있을 거라 추측. (2) 1832년 3월 26일, 그의 일기에는, 전기, 자기, 운동의 일반적인 상호작용을 기하학적으로 표상하는 법에 대한 고민이 그려져 있다. 그에 따르면, 전기, 자기, 운동은의 상호 관계는 3차원 상에서 직교하는 세 직선으로 표상될 수 있다. 여기서 아무 두 가지의 작용은 나머지 하나를 그림에서 묘사된 선의 방향으로 산출할 것이라고 말이다.

The Identity of Electricities

그의 성공에 힘입어, 그는 전기들의 동일성을 실험적으로 증명해 보이고 싶어했다. 당시 전기들은 그 소스에 따라 이름이 붙여졌었다. 마찰에 의해 만들어진 정전기는 '마찰' 또는 '일반(common)' 전기, 화학 전지에 의해 만들어진 전류는 '볼타 전기', 갈바니의 개구리 다리 연구에서 비롯된 '갈바니즘' 또는 '동물' 전기. 금속 가열을 통해 만들어지는 '열-전기', 그리고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에 의해 만들어진 전류는 '자기-전기'.

패러데이는 이들이 모두 같은 것이라 믿었지만, 자명하진 않았음. 그의 증명 방법은 화학적. 각기 전기들에 전통적으로 부여되었던 현상들의 속성에 대해 체계적인 분석을 하기 시작. 이 속성들은 다음과 같음: 열, 자기, 화학 분해, 생리 효과(따끔) 등. 1833년경 표 만들고, 1838년까지 보완. 발표할 때에는 전기들의 동일성이 self-contained scientific issue로 제시.

이것이 같음을 보이는 게 무슨 역할? 그러한 발견들은 신의 창조의 다양한 측면의 통일성과 연결성에 관한 연구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패러데이는 과학자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신의 계획에 내재된 통일성을 밝히는 것으로 믿음. 그러나 조화시켜야 할 새로운 발견들이 항상 있었고, 패러데이는 스스로 설명을 요구하는 새로운 현상을 산출하기도.

예컨대, 마찰 전기의 방전도 볼타 전기처럼 자기 효과를 가진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패러데이는 회로에 젖은 끈을 놓아 방전 속도를 줄였다. 검류계에 영향을 줄 시간을 가지도록 말이다. 그런데 물은 다시 큰 차이를 만들어 냈다. 물은 힘을 흡수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전극을 쥘 때 팔과 가슴에 전달되는 쇼크를 줄였다. 그렇다면 물질이 전기를 흡수하고 잠시동안 저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정전기가 화학적 변화를 초래할 수 있음도 보였다. 아직 그는 이같은 사실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로 하여금 물질이 두 개의 딱 구별되는 종류, 도체와 '전기체electrics(절연체)'로 나누어질 수 없으며, 전기가 물체(material substance)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Electricity and Matter

전기에 대한 확립된 이론은 물체 안 혹은 위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하나 또는 둘의 준-물질적 유체를 가정. 물이 종이에는 흡수되지만, 철에는 흡수되지 않고 표면에 얇은 막을 형성하거나 구슬처럼 존재하듯이 말이다. 이 유체는 물체 사이를 이동할 때 스파크의 형태로 visible해진다. 패러데이도 강연에서 이 유체 가설을 언급했지만, 단지 가정일뿐이라고 강조.

1790년에서 1831년 사이에 발견된 전기에 대한 새로운 속성들은 그 본성에 관한 문제를 긴급한 문제로 만듬. 화학자들은 1800년부터 볼타 전류가 물을 분해한다는 것 알게 되었고, 전류(전지판의 수와 크기에 의해 대충 측정되는)는 곧바로 화학자들의 중요한 탐구 도구가 됨. 데이비를 포함해 많은 학자들은 입자들을 묶어주는 화학적 친화성이 실제로 전기적이라고 결론내렸다. 정전기가 스파크로 방전될 수 있듯이, 볼타 전류가 화학적 친화성의 전환된 유동적 형태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유비는 불완전: (1) 전류는 화학분해를 통해 생성되지만, 반응물질은 새로운 물질로 결합. 이 물질은 전기로 전환 안 됨. (2) 주어진 반응물에 의해 산출될 수 있는 전류보다 강한 전류는 이 반응을 되돌릴 수 있지만, 더 많은 반응물로 전환되지는 않음.

패러데이는 어떻게 전기와 물질이 연관되어 있는지 알고 싶어함. 이를 위해 전기화학 현상에 대한 체계적 연구 수행. 특히 전류와 반응물의 다양한 속성을 가지고 실험.

1833년부터 패러데이는 전기화학 분해에 집중. 한 초기 발견은 그를 놀라게 함. 전지의 용액이 얼면, 전도도 분해도 중단. 패러데이는 이를, 물질이 상태가 변하면 (전도성과 같은) 특정한 힘을 잃거나 얻는다는 일반규칙의 사례로 봄. 그는 전도성이 물리적 상태에 의존하는 현상에 대해 우선 입자간 힘을 가지고 설명하려 시도했지만, 금새 포기. 분해에 관한 그의 실험은 (1) 그의 두 가지 전기화학 법칙과 (2) 두 가지 다른 전기화학 이론과 (2) 전기화학을 위한 새로운 용어를 산출했는데, 이는 전기와 물질의 관계에 더 큰 문제 야기. 이는 그의 생각 발전에 매우 중요.

물질과 전기의 명료한 관계를 찾는 과정에서, 패러데이는 전기와 화학 변화 사이의 정량적 관계 탐구. 1833년, (1) 전류에 의한 화학 작용의 양이 통과한 전류의 양과 바로 연결된다는 것과 (2) 생성되거나, 침전되거나, 용해된 산물의 질량이 그 화학 당량에 비례한다는 것 보임. 이 과정에서 여러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그중 백금의 촉매작용도 발견했으나 설명 잘 안 됨. 고심 끝에 완전히 새로운 이론 고안. ....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성취는? 새로운 전기화학 용어! 그의 용어 중 대부분 - ion, anion, cation (for the reagents), electrode, cathode, anode and electrolyte - 은 현재까지도 사용.

이 용어들 어떻게 발명? 한 사례로 'pole'만 들어보자. 화학 산물들은 전지의 금속 극(metal poles)에서 침전되거나 기체로 생성된다. 이들이 극으로 불리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반응물의 입자들을 잡아당기거나 밀어낸다고 믿었기 때문. (물 전기분해시, 수소 극, 산소 극 이름도 붙여짐) 그러나 극이 입자에 작용한다는 생각 의심. 그렇다고 단지 화학 산물이 나타나는 장소도 아님. 그는 그곳을 통로(gateway)로 생각. 즉 회로를 완성하도록 전류가 용액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장소로 말이다. 그에 따르면, 전류는 입자간 긴장을 풀어줌으로써 화학 변화를 일으켰다. 전류는 긴장과 방전이 그것을 따라 움직이는 힘의 '축'이었다. 화학 산물은 물질적이므로, 이 축은 물질을 위한 통로(pathway)여야 했다. 그러나 물질은 힘과 단순히 동일시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실험 철학이 다룰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질문을 제기. 전류는 전체 용액에 걸쳐 화학 변화를 일으키는 동시에 그에 의해 만들어지며, 그것엔 특정한 방향이 있다.

캠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의 윌리엄 휴얼의 도움 받음. 패러데이가 새로운 말이 묘사해야 할 존재자와 상황을 얘기하면, 휴얼이 그리스 어원을 가지고 말 제안. 패러데이는 휴얼에게 동-서 전류에 기초한 예를 제공했었다. 'pole' 대신, 휴얼은 'eisode'와 'exode' ('a way in'과 'a way out' 의미) 또는 'anode'와 'cathode' ('동쪽', '서쪽' 의미).

패러데이는 왜 새로운 말이 필요했나? 이름붙일 새로운 현상이 있었던 것은 아님. 원자, 힘, positive & negative 유체, 극(pole)이란 말이 있었고, 이는 새로운 말보다 독자들에게 이해하기 쉬었을 것. 패러데이는 '이름과 과학은 별개'라는 것도 알고 있었음. 그러나 그는 언어의 양면성에 직면에 있었음. 말과 이미지는 경험 이면의 가능성을 묘사하는 힘을 주지만, 익숙한, 확립된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제약한다. 패러데이는 익숙한 현상에 대해 새로운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 즉, 전통적인 전기화학 언어에 의해 함축되는 이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음. 이를 위해, 현상에 대한 습관적인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현상을 재기술한 것. 1834년 4월 휴얼에게 말했듯이, 그가 느끼기에, 전기에 대한 만연한 생각은 '매우 서툴'렀고, 전류에 대한 현재 관점은 곧 바뀔 것이라고 확신. 레먼(C. Lemen)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비슷한 생각. "양과 음, 그리고 전류라는 말에 붙은 통상적인 관념이 모조리 틀렸다고 '생각하지만', 나에겐 그 자리에 무엇이 대체되어야 할지에 대한 분명한 관점이 없다.' 그래서 그는 '전기의 본성에 관한 어떤 이론에도 구애받지 않고 [대상을] 지칭할 수 있는 이름'을 원했다. (사실 자기 이론에 더 가까운 이름을 원한 것일지도) 패러데이는 아직 새로운 이론이 무엇이 될지 말할 수 없었지만, 그것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어떻게 전기와 물질이 상호작용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관점'은 잘 잡히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액체가 얼 때, 왜 전도가 중단될 뿐 아니라 대전(charged)까지 되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이 현상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그는 '금속에서부터 셀락과 기체까지, 모든 물체가 같은 방식으로 전기를 전도한다. 단 매우 다른 정도로'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여기서 이 화학자는 정전기의 가장 핵심에 있는 확립된 가정중 하나에 대립하게 된다. 그 가정이란 '모든 물체는 물리적으로 다른 두 개의 종류로 나뉜다'는 것. 전도체와 절연체로. 확실한 선을 긋는 대신, 패러데이는 전기가 모든 물체에서 동일하게 작용한다고 가정. 그의 주장이 정당화되려면, 상태변화시에 개입되는 비-화학적 힘이 결국 재도입되어야 한다. 여기서 그는 두 가지 사실을 화해시켜야 하는 곤란함에 직면하게 됨. 즉 전기가 두 가지 상태(정전기와 동전기)를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과 물질이 연속체가 아닌 개별화되어 있다는 가정을 화해시켜야 했다. 그는 이를 화해시키지 못함. 그의 논문에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할 필요성을 조금 비췄지만, 그는 1834년 봄 무렵 particulate or atomistic 이론을 완전히 버렸다.

From Electricity to Natural Philosophy

Self-induction

1834년 그는 새로운 전자기 현상에 대해 배움. 다음의 두 경우 모두에서 strong aftershock이 느껴짐 (1) 연철심이 안에 있는 코일이 포함된 회로를 끊는 경우 (2) 매우 긴 도선으로 이루어진 회로를 끊는 경우

(1)은 전류가 끊어질 때 연철심의 자화가 변화됨으로써 만들어진 현상으로 해석 (2)는 매우 긴 회로를 통과하면서 커진 강도 때문? (전류를 유체로 생각하면, 파이프에 있는 물처럼, 도선이 길수록 더 많은 운동량 얻기 때문) -> 이러한 해석은 회로가 끊어질 때 "스파크가 점프"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설명 -> 그러나 이는 패러데이가 원치 않는 역학적 설명.

패러데이가 선호하는 해석에 따라 : 전류가 화학적 친화도(결합) 사이의 긴장을 풀어준다면, 전류가 통과하기 전에 긴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다행히(?) 그는 회로를 끊을 때와 마찬가지로 회로를 이을 때에도 스파크가 생길 수 있음을 발견.

회로를 이을 때에도 스파크가 튈 수 있다는 발견은, 회로가 끊어질 때 생기는 스파크가 틈을 건너려는 전기유체의 운동량 때문이라는 생각에 의문을 던짐. 이러한 운동량-설명은 전기의 물질성을 당연시하는데, 이는 한 회로에서 다른 회로로의 자기 효과 전달이라는 사실과 모순된다. 전기 스파크는 그래도 보이지만, 어떻게 물질이 한 도선에서 다른 도선으로 인지불가능하게 옮겨갈 수 있단 말인가?

패러데이는 두 경우를 재기술하기 위해 자기작용선을 사용. 그러자 (1), (2) 효과 모두, 전류가 끊어질 때 도선에 2차 전류를 유도하는 자기 작용을 공통 원인으로 가지는 것이 되었다. 패러데이는 추가적인 실험을 통해 유체 이론이 이를 설명할 수 없으며, 그 효과는 유도 작용에 의한 것임을 보였다. 예컨대 (1) 하나의 회로에서 전류를 끊으면 그 gap에서 스파크 발생. (2) 추가 회로를 옆에 두고서, 원래 회로의 전류를 끊으면, 원래 자리 대신 추가 회로의 gap에서 스파크 발생. => 추가 회로를 통해 스파크 발생 위치를 옮길 수 있다는 것은, 원래 스파크를 일으켰던 extra current를 원래 회로에서 추가 회로로 옮길 수 있다는 것. 추가 회로가 있는 경우 2차 전류가 추가 회로에 생긴 반면, 추가 회로가 없는 경우엔 2차 전류가 원래의 회로에 발생한 것뿐임. 원래 1차 회로에 영향을 주었을 모든 유도작용이 2차 회로에 전달되었음을 주장하기 위해 패러데이는 자기력선 사용. 2차 회로가 받은 유도 작용의 양을 표현하기 위해 유도선(lines of induction)의 수를 사용.

그는 1차 전류가 회로안에서 모멘텀 또는 관성을 가지고 돈다는 생각 거부.

1834년 12월 경, 그는 이 모든 효과가 ERE 시리즈 1편에서 묘사된 유도 전류 때문이라고 결론. 여기서 그는 유도작용의 전달과 보존을 표현하기 위해 자기선 사용. 이는 톰슨과 맥스웰이 전자기장의 에너지라 부른 것 예고.

Electrostatic Induction

전기와 물질 에 관한 수용된 이론으로부터 꽤 멀리 왔지만, 아직은 대안적 견해의 초기 단계. 그의 새로운 접근은 19세기 새로이 발견된 현상(볼타 파일, 전기화학 현상, 전자기 현상)을 취급. 1835년 그는 그의 새로운 접근의 물리적 함축을 탐색하고, 전통적인 정전기 및 자기 이론과 비교해야겠다고 결정. 그로부터 몇 년 후, 1837, 1838년에는 고전 정전기 이론에 대한 엄격한 실험적 도전을 출판. 어떻게?

그의 도전은 전도체와 절연체 사이의 구분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 (그는 전해질이 얼었을 때 전도성을 잃는 새로운 사실에 puzzled했었음) 이 새로운 문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확신 줌. 물질-힘 상호작용에 대한 일반 이론은 전기와 물질 입자 사이의 관계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기다려야 한다고.

1834년 8월초, 일기에 주요 문제들을 나열. '정전기와 볼타 전기 사이의 관계에 대해 최근 많은 생각: 전자로부터 유도, 후자로부터 분해'. 1835년 11월 일기에는, '일반 전기 현상의 진짜 본성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유도와 전도의 여러 형태들 사이에 '밀접한 연관이 있음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든다고 씀. 이러한 가능성을 그는 다음의 질문으로 표현: 절연체는 전하의 존재에 필수적인가? (이 질문은 전기 유체 이론에서는 무의미한 질문)

패러데이가 고민한 문제 : 전해질 안의 긴장이 (전극 사이의 공간에 걸친) 화학 전지 바깥의 유도선에 의해 유지되고 지속된다면, 대전된 상태라는 것은, 화학 전지의 것이든, 정전기 발생기의 유리구(bulb)의 것이든, 컨덴서(라이덴병)의 윤기나는 금속 구의 것이든, 준-물질적 존재의 축적으로 볼 수 없다.

1834년 5월, 일기에 회로 없는 전류의 가능성, 즉 일련의 장치 양 끝에 흡수 효과가 있다면, 원을 그리지 않고도 두 용기 사이에는 전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음. 1837년 그의 이론은 (1) 대전된 전도체 표면 사이의 '전기체(절연체)' 물질의 분극된 상태와 (2) 전해질이 얼었을 때, 혹은 전극이 끊어져서 열린 회로가 되었을 때의 그 전해질의 화학적 활성상태 사이의 유비에 기초함.

전해질과 절연체 사이의 유비는 패러데이의 1834년 전기화학 작용에 관한 이론과 그의 1837년 정전기 유도에 관한 이론을 두 가지 방식으로 연결 : (1) 실험의 가능한 의미에 대한 가이드 (2) 실험 디자인을 위한 practical 가이드. 1836년 1월이 되면, 정전기의 많은 근본적인 실험들에 대해 검토할 준비가 됨.(정전기 유도를 전기화학적 관점에서 봄)

기존에 극과 극 사이의 인력/척력 작용으로 보던 전기화학 작용과 정전기 작용을, 그 지역의 모든 물질의 입자들이 개입된 보다 보다 큰 상호작용 시스템을 통해 보게 됨.

볼타전류 형성과 마찰전기 형성 모두에 분극된 상태 필수적이므로, 효과가 나타나는 지점 사이(의 공간)에 정전기적 긴장 존재. 전도체 물질은 분극 능력이 거의 없으므로, 전하(긴장이나 움직이려는 경향으로 나타나는)는 주변의 비전도체 물질의 분극된 상태에 자신의 원천을 가질 것임! (만약 정전기적 힘이 상태(또는 장소) 변화의 경향을 보인다면, 그것은 분명 반대 경향(저항이나 반작용)에 대해 만들어져야 한다?) 이는 전도와 절연이 단지 겉보기에만 다름을 의미. 둘 모두는 입자들 사이에 polar tension이 반복적으로 established되는 과정에 의한 효과로, 전류로 방전된다?

polar conception of force. 균형. 작용-반작용. 평형.... 뭔 말인지 -_-;;

보통 정전기는 (준물질적인) 전하 사이의 인력/척력으로 다루어졌음. 패러데이는 전하의 물질적 존재 의심. 효과가 나타나는 장소 대신 그 사이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에 주목. 그 사이를 차지하는 물질 입자들의 poar tension에 주목. (이를 가능케 해준 것은 정전기 현상을 정 전기화학적 현상처럼 본 유비 덕분. 어떻게? 아직도 이해 잘 안 됨.) 전하란 물체 사이의 polarity 또는 긴장을 manifest하는 것일뿐이라면, 동일한 두 전하는 서로 직접 작용할 수 없음. 그들의 존재는 그 반대의 전기적 상태가 어딘가 존재함을 요청. 두 전하 사이의 반발은 primary phenomena가 아님. 그들의 상호 반발은 그들 사이의 공간에서의 보다 크고 보다 근본적인 상호작용 시스템을 통한 설명을 필요로 함. 모든 전하는 항상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음. (이는 electrometer와 같은 기본적인 측정장치의 토대를 무너뜨림)

ERE 11회에서, 패러데이는 유도(induction) - 반대 상태를 일으키는 힘 - 를 전기 과학, 어쩌면 모든 과학의 제1원리로 주장. 이에 따르면, 전하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됨. 이는 (사이의) 물질에 의해 유지되는 긴장 상태의 겉보기 효과를 지칭. 1836년 12월 휴얼에게 조언을 구한 결과, 이 물질에 유전체(dielectric)라는 새로운 이름 붙임. 유전체를 통한 작용은 인접한(contiguous) 입자를 통해 국소적으로 전달. 전하는 좋은 도체와 나쁜 도체 사이의 경계면에 나타나(는 겉보기 현상). (즉 전하는 축적되는 것이 아님) 유전체는 전하의 존재에 필수적임. 왜? 반대되는 힘이 각각을 중성화시키는 것을 막아주는 무언가가 필요한데, 그것이 유전체? (그렇다면 진공은? 원자 사이의 공간은?)

패러데이는 전기의 거시 세계를 역학보다는 화학을 통해 접근. 그는 다음과 같이 가정 : 전기체 또는 전도체 표면의 전기의 양은 자연적으로 입자들에 속한 것과 입자들에 화학적 결합의 힘을 주는 것의 거의 무한히 작은 양이어야 한다. 무슨 말???

패러데이는 이제 polar conception of force로부터 전기가 국소적으로 인접한 입자들을 통해 작용한다고 추론. 이는 중간의(intervening) 입자들에 영향을 주지 않는 직접 작용을 배제! 이로써 작용은 입자에서 입자로 순차적으로 작용. 정전기 유도의 전달을 위해서는 물체 사이의 물질을 필요로 한다는 뜻. 그러나 물질 입자들 사이의 작용 전달은 어떻게 되는지 답 없음.

Specific Inductive Capacity

인접한 입자들에 의한 유도 작용이라는 개념은 새로운 실험 떠올리게 함. "물질이 긴장을 유지하는 능력 = 유도 용량 = 전하를 유지하는 용량"이 물질마다 다를 것. 이 용량은 끓는점, 녹는점처럼 물질을 특징짓는 성질이 될 것. 1835년 11월 3일 실험. 여러 절연체 안에 금속구를 넣고 electrometer로 전하(? 전위?) 측정해봤더니 값들이 다름. 이는 전기가 전도체가 아닌 전기체(절연체)와 연관됨을 증명. 이 초기 실험은 1837년 11월 출판된 유명한 실험으로 이어짐. 안쪽 금속구와 바깥쪽 금속구 사이의 전하 차이(또는 전위 차이)가 그 사이의 물질의 종류에 영향받음을 보임. 이로써 절연체가 전하에 영향을 준다는 것 보임.

문제가 있다면, (1) 진공도 두 금속 사이의 전하 차이(전위 차이)를 만들어냈다는 점. 어떻게 거의 물질이 없는 공간이 전하를 유지시킬 수 있는가? -> 이 유도용량 측정은 정전기 작용이 진공을 지날 수 없음을 보이는 데에 실패 (2) 공기의 대전 가능성으로부터도 질문이 나옴: 만약 전하가 (공기와 같은) 절연체의 긴장으로서 지속되는 것이지 도체 표면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물질에 한 종류의 전기를 '절대적으로' 대전시키는 것은 불가능.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들의 미시적인 영역에서 아주 큰 물체의 영역으로 관심 이전)

(번개와 같은) 대기 현상은, 땅(지구)은 공기라는 전기체(절연체)로 둘러싸여 있으며, 공기 중에 전기가 있음을 말해줌. 그렇다면 땅(지구)이 화학 당량으로 표현될 수 있는 특정한 전기양을 가지고 있을까? 이것이 실험적으로 결정될 수 있나? "지구+공기" 자체가 특정한 잉여 +,- 전기로 실제로 대전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음. 왜냐하면 그 표면과 비교할 다른 지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

(전하) 강도의 절대 기준이 가능한가? 또는 그것이 있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가의 문제로부터, 패러데이는 그런 기준은 없다고 결론. 이러한 고민으로부터 패러데이의 케이지 실험이 나옴. 케이지 밖에서 볼 때 케이지는 엄청나게 대전되어 있지만, 케이지 안에서는 어떠한 전기도 느낄 수 없음.(이 케이지는 차폐 현상을 가리키며, 오늘날 전파로부터 자유로운 실험실을 지을 때 사용) 다시 말하지만, 이 괴상한 실험장치는 전하의 절대 기준에 관한 추상적인 질문에서 기인!

Lines of Electric Induction

유도용량 측정 실험이 원거리 작용 반증하기 위한 것? 그렇게 보기보다는, 전기의 존재 방식에 관한 다음의 아이디어에서 기인. (1) 전기가 전도체 표면 위의 유체로 존재하지 않고 주변의 절연체에 의해 유지되는 긴장에 비롯한다는 점, (2) 전기력이 유도적(inductive), 즉 항상 반대의 상태 또는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것. 그리고 이 유도용량 측정 실험으로부터 패러데이는 대전체와 주변 매질의 배열이 전기 분포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보이게 되었음.

이를 보여주는 데 방전선(스파크선)의 이미지 활용(휘트스톤이 발명한 스트로보스코프 사용). 패러데이는 각 스파크가 방전 이전에 존재한 정적 긴장의 선의 경로를 따랐을 것으로 믿음. 실험 결과 이 선의 모양은 도체의 위치 변화, 새로운 절연체의 도입에 따라 변화. (마치 자석 주변의 철가루가 자석의 움직임이나 다른 비자기적 금속의 도입에 따라 변경되듯이) 유도와 방전은 매우 높은 주파수로 서로를 번갈아가며 따름. 전자기파가 떠오르는 구절. 그러나 패러데이의 진전은 여기서 중단.

그가 보기에 전기와 자기가 같은 힘의 다른 형태라고 믿었다면, 자기도 전기처럼 모든 물질에 영향을 주어야 할 것이다. 1836년 초 여러 금속에 대해 자성을 띠는지 알아보는 실험. (저온에서 자성 띰 발견) 1838년에는 대전된 상태에서 자기적 성분 검출하기 위해서 노력. 또 물질마다의 전기 유도 용량과 비슷한 자기의 효과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 모두 실패. 3가지 금속 외에는 자석에 영향 안 받음. 이 문제는 전기와 자기의 일반 이론을 만드는 데 방해물.

Matter, Magnetism and Light

전기와 자기의 일반 이론을 가로막았던 방해물은 1845년 말, 자기가 모든 종류의 물질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제거됨. (38년과 45년 사이엔 아팠음) 1846년이 되면 완연한 자연철학자로서 패러데이는 뉴턴주의 전통의 근본 개념에 공개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수 있게 됨.

그 시작은 광자기 회전 효과의 발견. 당대 많은 사람들처럼 패러데이는 힘의 여러 유형이 다른 유형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믿음. 그 시작은 하나가 다른 하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이는 일. (전기 -> 자기, 자기 -> 전기 등..) 당대 많은 사람들 빛과 전기, 자기 사이의 영향 찾아내려고 노력했었음.(1823년 존 허셜은 전자기를 가지고 빛에 영향주려 시도. 패러데이도 정전기를 가지고 빛 영향 주려 시도) 1845년 BAAS 모임에서 만난 윌리엄 톰슨(당시 21세)도 그러한 시도에 희망 갖고서 패러데이 격려-_-; 처음 실험들 실패. 9월에 자기력을 가지고 시도하기 시작. 패러데이는 마음 속에 (1) 자기가 직접 빛에 영향을 주거나 (2) 빛이 물질을 통해 효과를 나타낼 것이라고 생각. 그 가능한 효과를 확대하기 위해 고굴절율의 유리 사용(이 유리는 1829-30년에 만들었던 것). 강력한 전자석에 의해 자기장에 놓인 유리를 통과하는 빛의 편광면 회전 관찰에 성공(이 효과를 패러데이 효과 또는 광자기 효과라 부름) 이때 처음으로 장(field)이라는 매우 평범한 용어 도입.

한편 패러데이는 이 편광 빛이 자기력선의 코스를 밝혀준다고 생각. 빛을 자기력선 탐색 도구로 사용가능하다고 생각.

Diamagnetism

광자기 효과의 발견은 두 가지 의미: (1) 빛이 (자기력선에 대한) 탐사 도구가 될 수 있음 (2) 자기가 (빛이 통과하는) 물질에 자석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을 보임. 이 사실 매우 중요. 그래서 1845년 11월, 수많은 실패 끝에, 무거운 유리막대가 매우 강력한 전자석 양극 사이에서 가로로 서는 현상 관찰. (아마 다른 과학자들에게도 보인 현상이었겠지만 인력/척력이 아닌 이상 무심코 지나간 반면, 자석이 철 이외의 다른 물질에 영향을 주는 것을 찾고 싶었던 패러데이에게만 의미있는 현상으로 보였을 것) 일단 이에 성공하자, 모든 물질들에 대해 실험. 이 물질들이 역선을 가로지르는 방향으로 섬을 확인. "인간이 자기장(Magnetic field)에 놓인다면, 인간도 가로로" 추측. 이 물질들은 자기적이진 않음 ->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자기? 극성의 방향도 다르고, 이렇게 영향받는다고 자기자신의 자성을 가지는 것도 아님. 이들의 현상은 외부의 강한 자석에 의존. 패러데이는 물질들은 자기의 민감도에 따라 순서를 매길 수 있음 깨달음. 근데 기체가 아무런 반응 없음. 또 진공은? 공기 뺀 튜브 반응 없음. 패러데이의 답은? 진공을 평범한 자기 물질과 새로운 효과를 보이는 다수 물질 사이의 중간점으로 간주. 전기력과 마찬가지로 자기력도 진공을 통과해 힘 전달.

새로운 성질을 처음엔 dimagnetic이라 했다가, 휴얼의 조언을 받아 diamagnetic으로 명명. 자기정체성의 기준은 역선을 따라 정렬하느냐, 가로로 정렬하냐. 반자성체 정밀 조사한 결과, (1) 반자성 효과는 장이 켜져 있을 때에만 작동. 평범한 자석과 달리, 자기장이 사라지면 반자석의 효과도 사라짐. (2) 평범한 자석은 극에 끌리는 반면, 반자석은 거기서 멀어지려고 함.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장)이 약한 곳으로 이동.

이런 현상 어떻게 설명? 일반적으로, 물체는 힘의 전달을 방해하는 양을 줄이는 쪽으로 이동! 자석은 가장 밀집된 작용의 지역으로 이동하는데, 그래야 힘이 그 자석을 통해 더 쉽게 통과할 수 있기 때문. 반대로 반자성은 가장 밀집하지 않은 작용 지역으로 이동하는데, 그래야 보다 많은 힘들이 그것이 없는 공간을 통해 더 쉽게 통과할 수 있기 때문. 즉 자연스러운 운동은 힘의 가장 경제적인 분배와 소비를 실현시키는 운동! 이는 매우 목적론적 설명(더 좋은 미래의 상태를 마치 알고서 그리로 가는 것처럼. 라이프니츠 등의 최소작용의 원리가 떠오르는 구절) 이 간단한 아이디어는 운동에 대한 비 뉴턴주의적 관점 함축. 자기장 내의 물체의 행동은 내적 성질에 의한 것이 아님. 그 운동은 주변 물질보다 (자기력선의) 더 좋은 conductor인지 더 나쁜 conductor인지에 달려 있음. 이런 아이디어의 기원은? (1) 신이 부여한 자연의 경제성. 신은 자연에 waste of physical action을 허용하지 않음. (2) 부력적인 아이디어?

황산구리 용액의 농도에 따라 conduction 정도 다름 발견. 황산구리 용액이 담긴 유리 튜브는 더 진한 용액 내에서는 자석처럼, 더 묽은 용액 내에서는 반자석처럼 행동. 즉 자기 conductivity는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님(전기 inductive capacity가 그런 것처럼).

이로써, 증명까지는 아니지만 장 내의 물체의 운동을 인력/척력이 아닌 장을 채우고 있는 것에 의거해 설명할 수 있게 됨. Matter moves so as to offer least resistance to the passage of tension or strain, while lines of force arrange themselves so as to follow paths of least resistance to the passage of inductive action.

Aether and Matter

자기 conductivity의 순서를 나열하는 과정에서, 진공도 conduct lines of foce하도록 허용. 진공(혹은 공간)은 정전기 작용뿐 아니라 자기 작용도 전달.

44년에서 46년 사이 왕립연구소에서 물질과 힘에 관한 추측성 생각들 강연. 물질은 그 겉보기 성질에 의해서만 인지 가능. 따라서 물질은 전기나 다른 대상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개념화되어야.

1846년 4월에는 '광선-파동에 관한 생각'이란 강연. 전기와 자기는 역선의 진동으로 공간에 전파. 다른 힘들도 마찬가지일 것.

imponderable electric fluid 버렸다면, 지금은 aether도? 에테르가 매우 희박한 형태의 물질이라면 빛이 전달되기 위한 특별한 물질 가정할 필요 없다고 생각. 에테르를 버리고서, 오직 역선만 남긴 후, 원자도 버림. 원자는 단지 상상의 점일 뿐. (물질적 원자에 부여되는) 관성이란 각 점을 연결하는 역선의 '불활상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각 원자의 관성은 움직이길 저항하는 그물의 매듭의 경향처럼 볼 수 있지 않을까? 즉 관성이란 원자 자신의 성질이라기보다는 장의 다른 부분에 줄을 통해 연결된 물리적 연결의 속성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상상은 아직 문제 많음. 안 맞는 현상 있음. 기체는 자기에 무반응. 그러나 에테르는 희박화된 물질이라는 그의 가설에 따르면, 물질의 기체 형태는 진공보다 자기적 영향에 훨씬 예민해야. 그러나 그런 관찰 이루어지지 않음.

1847년 10월, 한 이탈리아 과학자가 자기가 불꽃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보고 자극. 패러데이는 그 실험 반복 후, 기체 스트림을 가지고 자기적 영향 확인. 여러 다른 종류의 기체의 비누 방울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관찰. 몇몇 기체, 특히 산소는 일반 자석처럼 행동. 즉 이 기체들은 그 주변 기체에 비해 더 나은 conductors of magnetic action. 물론 산소가 철처럼 자화되진 않음.

이 무렵 패러데이는 물질을 세가지로 구분해야겠다고 생각. 영구 자화되진 않지만 자기장 속에서 자석처럼 행동하는 물질을 paramagnet, 자기장이 희박한 곳으로 이동하는 물질을 diamagnet, 자화된 후 극성을 간직하는 철 같은 애들은 ferro-magnet.

패러데이는 점점 자기 현상을 conductivity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 생김.

crystalline diamgnet을 가지고 한 정교한 실험을 통해, 빛, 자기, 물질의 관계 더 이해. 특히 1848년 실험은 수정의 광축(광선이 둘로 굴절되는 선)이 자기선이 conducted되는 축임을 보임. 즉 빛도 자기처럼 신의 근본 경제 원리 따름. 물체는 힘의 가장 효율적인 전달과 소비를 허용하는 쪽으로 움직임. 그리고 힘은 최소 저항의 길을 찾음.

Faraday's Field Theory

1850년부터 자기에 관한 포괄적인 이론 출판하기 시작.

모든 물질은 자기를 통과시킴. 어떤 물질은 conduct만 하고, 철과 같은 어떤 물질은 자기력을 획득한 후 유지하기도. 반자성체는 진공보다 나쁜 자기전도체, 자성체는 진공보다 좋지만 강자성체보다는 나쁜 자기전도체. 진공은 반자성체와 자성체의 중간점.

이러한 해석은 전자석의 성능을 높이는 데 사용되어 오던 연철의 능력 설명해줌. 철은 역선을 집중시켜, 다른 곳보다 자석에 의해 점유괸 공간에 더 많은 작용선을 모은다. 철가루의 패턴은 철이 주변의 선을 모으는 것 보여줌. 또 반자성체가 주변의 선을 발산시키는 것을 보여줌.

패러데이에게 공간은 작용에 관여. 공간은 반자성체보다 좋은 conductor로 작동. (패러데이는 진공을 빈 공간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매우 희박한 상태의 물질로 간주.) 패러데이는 공간을 장, 즉 thing과 관찰자를 상호작용하게 해주는 장소로 간주. 소위 에테르는 공간과 동일. 패러데이는 물질을 그들의 능력에 따라 구분했는데, 공간은 비스무스와 같은 반자성체와 철과 같은 강자성체 사이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자기 또는 중력과 같은 물질적 힘은 선을 통해 빈 공간으로 보이는 곳을 통과. 빛도 그러한 선의 진동으로 통과.

1849년, 그는 이러한 생각의 연장으로 중력과 전기 사이의 관계를 탐지하려 시도. but 실패.

1850년에서 55년 사이, 지금까지의 증거들 정리하는 데 주력. (물론 중력과 전기 사이의 상호작용 관찰 시도 지속. 1856년 가루 금속 용액 연구 하기도) 최대의 간심은, 역선 이론이 단지 유용한 표상에 불과한지, 아니면 세계에 대한 참된 기술인지 결정하는 것.

1831년 전기, 자기, 운동 상호작용 발전시켜, 1852년 맞물린 반지 비유를 통한 전기-자기 상호작용 설명.

전류 주변의 자기유도선은 서로 반발, 반대 방향의 전류에 의한 자기유도선과는 끌어당김. 이러한 전기와 자기의 극성의 상보적인 양상을 모아 다음과 같이 정리. 전기성분이 증가하면 그에 직교하는 자기성분은 감소, 자기 성분이 증가하면, 그에 직요하는 전기성분 감소(전체는 보존). 이로써 하나의 힘의 상호전환가능한 형태로서의 두 힘을 그릴 수 있게 됨. (이는 전자기파의 모형이기도)

그의 이론 매우 그럴듯해지고 정교해졌지만, 역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증명 여전히 불가능. 대안 이론(전기의 유체이론 및 원거리력 이론) 완전히 반증시키는 것도 불가능. 패러데이는 순간적이고 매개되지 않는 작용이란 생각 싫어했는데 이는 또 다른 믿음에 기초해 있기도. 그에는 (1) 모든 힘(중력 제외)의 polar or dual 본성. (2) (자기) conduction 가설 (3) 힘의 파괴불가능성 또는 보존, (4) 단지 거리 혹은 '공간'의 관계에 근거해 정의되거나 측정되는 양에 대한 불신. (단순 거리나 공간적 변화가 전류를 만들어내거나 하는 일을 하다니!)

polarity와 conductivity 결합하여, 자화된 강철 링이 외부의 장을 거의 행사하지 않는지 설명. (1) 대부분의 힘이 철 안에 거주하는 것은 철이 주변 공기에 비해 매우 잘 자기를 conduct하기 때문. (2) 철을 끊으면 힘이 안에서 나와 갭을 채우고 있는 나쁜 conductor를 통해 통과. (전류가 끊어질 때 스파크가 갭을 통과하듯이) 철을 나간 힘은 발산하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들어감. 즉 선이 나오는 쪽(N)이 있으면 선이 들어가는 쪽(S)도 있어야. N극이 있으면 어딘가 S극도 있어야. 이는 힘의 이원성의 한 사례, 즉 모든 극성 힘은 반대방향의 반대 효과 발현. 이는 단 한 가지의 힘만 가지는 것이 불가능함 보임. 다시 말해, 같은 크기의 반대의 반작용 없이 공간으로 발산하는 작용은 불가능하다는 말. (정전기 유도선이 나오는 +극만 있을 수는 없음. 이는 어딘가에서 그 선을 받아주는 -극이 있다는 뜻?)

이는 1837년, 정전기 유도를 가지고 '절대' 전하는 있을 없다, 즉 한 종류의 자유 전기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 지금 그는 한 종류의 고립된 혹은 자유 자기극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

극은 언제나 쌍을 이루며, 그 쌍 극은 철링을 잘라 반작용 매체가 도입될 때에만 생긴다. 그냥 막대자석과 말굽자석의 경우, 양 극은 바깥의 매질 덕분에 생기는 것. 즉 외부 매질이 자석에 필수적(essential)! (마치 전하가 있기 위해서는 유전체가 필수적이듯이!)

이러한 힘에 대한 polar, conserved quantity of action 관념은, 공간을 물리적 참가자로 끌어들이도록 만듬. 즉 사이에 반작용 매질이 없을 때, 공간 자체가 그러한 반작용 혹은 저항 역할을 해줘야 하는 것. 그렇지 못할 경우, 힘은 'polar relation'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됨.

ERE 28편. 형이상학적으로 중요한 실험. 움직이는 도선에 의한 전류 유도의 양적 관계 탐색. 패러데이는 전류가 자석 주변의 공간에 존재하는 자기력에서 전환되는 것임을 보이고 싶었음. 그는 원거리 작용 관점에 반대하여, 유도 전류가 도선이 자석 근처에 가져가질 때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 그는 힘의 양이 이런 식으로 생긴다는 (혹은 없어진다는) 생각을 수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오직 신만이 힘과 같은 보존양을 만들거나 없앨 수 있기 때문. 그리고 전류는 도선이 선을 가로지르거나 자극에 상대적으로 움직일 때 유도된다. 그러나 위치의 변화는 물리적 원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빈 공간은 자석과 도선 사이의 물리적 관계를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 또한 패러데이는 유도 전류가 회로를 움직이게 한 역학적 힘의 전환된 형태라는 견해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는 서로 잡아당기는 물체를 떨어뜨릴 때 줄어드는 인력의 세기에 대한 보상으로 위치 에너지가 증가한다는 생각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가 확신하기를, 도선을 돌리는 데 쓰인 역학적 힘은 전기로 전환되지 않는다고 생각. -> 전자기 유도는 자석 주변 공간에 conducted된 힘의 선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생각.

Faraday's Influ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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