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omic Bomb Scientist: Memoirs, 1939-1945

Joseph J. Ermenc ad.. Atomic Bomb Scientist: Memoirs, 1939-1945, Interviews with Werner Karl Heisenberg, Paul Hartech, Lew Kowarski, Leslie R. Groves, Aristid von Grosse, C.E. Larson, (Westport: Meckler, 1989), pp. 1-75 (Heisenberg)

하이젠베르크 : 핵분열 시 중성자 나오면서, 연쇄반응 가능하다. 이를 통해 폭발 얻을 수 있다. 원리적으로는 가능하나, 구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 아무도 몰랐다. 실제로는 모두들(페르미 등과의 토론에서) 회의적이었다. 분열 당 튀어나오는 중성자의 평균이 1보다 크다면 연쇄 반응 만들 수 있다.

39년 플루게의 논문에 다수 흥미가졌고, 독일 국방부에서 그에 관심을 가지고 핵분열 연구 결정했음. 나는 39년 라이프찌히에 돌아왔고 군당국으로부터 우라늄 연구팀에 합류할 것을 지시받았다. 우리의 임무는 우라늄이 폭발에 이용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기술자와 물리학자 사이의 갈등? 추상적 물리학(유대 과학)에 대한 적대감 또는 무시 있었음. 그러나 기술자는 전체를 볼 수 없고, 핵분열에 대해 아무것도 모름. 내가 우라늄 프로젝트의 책임자라는 것은 과장. 이론가로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난 프로젝트의 책임자도 아니며, 아무런 공식적 책임도 없었다. 난 이론물리학자일 뿐. 가능성에 대한 이론적 제안만 할 수 있을 뿐.

나는 페이퍼에서, 다른 이들의 연구논문이 옳다면 연쇄반응을 얻을 수 있고, 원자로를 지을 수 있으며, 순수한 우라늄-235을 얻거나 원자로를 작동시켜 그와 비슷한 물질(반년 지난후 알게된 바로는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다면 폭발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원자로 배치에 대한 것을 제안했다.

처음에 팀은 실험물리학자가 주도했다. 여러 그룹들이 가벼운 경쟁을 하긴 했지만 심한 불화, 불일치는 없었다.


돈문제 : 전쟁 전엔 열악했지만, 전쟁 중에는 풍족해졌음.

라이프찌히 그룹의 되플(Dopel) 부부와 연쇄반응 실험 성공(L-4 : 중수 속에서 우라늄 화염.. 뜨거워지다 폭발). 흥분.

당시 물리학자들의 심리적 상황 : 처음으로 재정지원을 받으며 연구 수행. 그 상황을 계속 이용하고 싶었다. 정부는 우리를 전쟁에 이용한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물리학을 위해 전쟁 이용한다고 생각했다. 원자폭탄을 만드는 것은 원리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만드려면 오래 걸릴 것(5년 또는 그 이상)이라 예상했고, 그 전에 전쟁은 끝날 거라 예상했다. 그러한 상황 인식에서 우리는 그 방향(폭탄개발)으로 진지한 연구를 수행하지 않았다. 39년 12월 실용화 계획안을 작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 너무 오래 걸린다고 하면 지원이 소홀해질 것이라 예상. 조심스럽지만 만들 수 있다고 함. 우리는 전력발전용 우라늄 원자로를 개발하려 했고, 이는 전후 중요한 에너지원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미국도 우리와 마찬가지 인식일 것이라 예상했다. “나는 전쟁이 금방 끝날 것이며, 독일이 질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전후에 관심이 있었다.” 반면, 당신들(미국)은 빨리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당신들도 45년에야 만든 거 아닌가..) 우리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방향은 피했다. 우리는 단지 연구용 돈이 필요했을 뿐. 누군가 “이제 원자폭탄을 만듭시다”라고 할까봐 두려웠다. 단, 연구의 책임권한을 다른 그룹(특히 Deibner)에게 뺏기지 않도록 조심하긴 했다. 그들을 의심하고 조심하면서 그들과 협동했다. 미국 프로젝트와의 차이는 원자폭탄의 개발가능성 및 기간을 다르게 보았다는 것 외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다. 군 당국은 핵보다는 로켓에 더 지원.

Irving의 저술 : 사실은 맞지만, 정신은 틀렸다. 그는 우리의 심리상태를 잘못 파악. 전쟁 중, 그는 우리가 전쟁승리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라 추론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원자로 개발에 흥분했지만 그 이상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것을 전쟁 또는 원자폭탄과 관련짓지 않았다. 독일에는 진정 원자폭탄에 관한 것이라고 부를만한 프로젝트가 없었다. 바이스재커의 아버지 : 레지스탕스. 보어의 안전 도모해 줌. 보어가 미국으로 간 이후, 조사받았음.

과학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 복잡하다. 기술, 과학 함께 발전했다. 나는 기술(무기)발전에 의해 정치적 단위 커질 것이라 예상.


결국, 하이젠베르크는 전쟁중의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았다. 상황논리일 수 있으나, 그는 원자로 연구에 매진했으며, 절대 원자폭탄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또는 그에 관심이 없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가 개발 가능성을 높게 보았다면? 그땐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