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 Have All the Theories Gone?
Morrison, M. (2007). "Where Have All the Theories Gone?" Philosophy of Science 74(April): 195-228.
최근 과학철학 논의에서 모형이 강조되고 있다. 이론에 관한 의미론적 관점은 이론을 모형들의 집단(families)으로 정의하였고, "과학적" 모델링에 관한 글들은 모형의 이론으로부터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이론이 과학적 지식을 명료화(articulating)하는 데에서 하는 역할에 대해서는 간과되어 왔다.
이 글은 (1) 이론에 관한 의미론적 관점의 여러 정식화 버전들이 직면하고 있는 한계를 논의하고, (2) 이론이라는 개념이 왜 과학 지식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이론 개념을 얻을 수 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3) 특히 초전도성에 대한 BCS acount(경우에 따라 '이론'이라고도 불리고 '모형'이라고도 불리는) 사례를 통해, 이론/모형 관계의 여러 특징을 밝히는 동시에, 견고한 이론 개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약
수피즈, 반 프라센, 기어리 등의 이론에 대한 semantist들은 자신들의 logico-philosophical acount of theory structure가 scientific practice까지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종종 얘기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semantist들의 model은 타르스키의 model 개념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는 scientific use of model과 완전히 어울리지 못한다. 게다가 이론을 모형의 집합이라고 하는 그들의 주장 또한 타르스키의 관점과 어울리지 못한다. 한편, 카트라이트 등의 작업은 "scientific" acount of models을 옹호하면서 모형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러나 semantists처럼 이론을 모형으로 환원하거나, Cartwright 등처럼 이론을 무시해서는, "과학 지식"의 구조를 온전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한편, semantic view에는 더 큰 문제가 있다. content를 명세하는 문제이다. 모형에는, 통상 이론의 일부로는 포함되지 않을, 근사기법, 수학적 기법, 또는 우리가 거짓으로 잘 알고 있는 특정 현상에 대한 양식화된 기술 등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론을 모형들의 집합이라고 동치시키는 것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이론 개념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이론과 모형을 구분하는 방법을 제안하려고 한다. 이 구분 방법에 따르면 이론과 모형이 각각에 맞는 표상과 설명 양식을 가질 것이다.(많은 semantist들 또는 Cartwright 등에 따르면, 법칙은 세계를 표상을 하지 못하고, 오직 모형만이 표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저자인 Morrison은 핵심 법칙들로 이루어진 이론도 정말 세계를 표상한다고 주장한다.)
모형, 모형 이론, 과학적 모형
이론에 대한 구문론적 관점: 이론은 기본적으로 일차 술어 논리로 구성된 언어적 존재. 모형은 이론의 해석 제공할 수 있지만, 진짜(참된?) 해석은 대응규칙을 통해서만.
이론에 대한 의미론적 관점: 모형은 이론의 해석 제공(모형은 이론을 만족. 이론은 모형 내에서 참 <- 타르스키의 모형-이론 틀 원용). 이론을 일차 술어 논리로 정식화하는 대신, 모형들의 집합 정의하는 것으로 끝. 모형은 기본적으로 비언어적 존재.
이론에 대한 의미론자인 수피즈, 반 프라센, 기어리 모두 타르스키에 의해 정식화된 모형 관념 사용: "이론 T의 모든 문장이 만족되는 가능한 실현은 T의 모형이라 불린다" (Tarski, 1953, 11). 셋 모두 타르스키의 모형 관념을 이용해 과학 이론의 구조를 분석함과 동시에 그 모형 관념이 실제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모형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주장.
의미론적 관점에 대한 비판 1 : 타르스키의 모형 관념은 의미론적 관점과 충돌한다. 타르스키에게 이론이란 문장들의 집합이고, 모형의 역할은 이론이 참이 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또는 알려주는) 것이다. 타르스키의 '참'이나 '만족' 개념은 문장에 적용되는 것이고, 모형의 중요성은 오직 이론의 문장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정의된다. 이런 점에서 타르스키의 모형은 언어적 차원을 가지며, 타르스키의 모형은 사실 이론의 모형이다. 요컨대, 타르스키의 논의는 철저하게 모형(비언어적 상황, possible realization)과 이론(문장들의 집합) 사이의 구분에 의존한다. 그런데 의미론자들은 이러한 구분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의미론자들에게 모형은 이론의 모형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이론이 모형들의 집합이다. (수피즈에게 그러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기어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기어리에게 이론은 진술(법칙, 방정식)들의 집합이 아니다. 오히려 법칙, 방정식이 만족되는[실현되는] 모형들의 느슨한 집합이 이론이다.) 저자인 Morrison은 이론이 모형들의 집합이라고 할 때, 모형이 이론의 실현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의미론자들에게 "모형은 ..의 실현"이 될 그런 이론이란 없다. 이론은 모형들의 집합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이 논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가지고 "과학적" 맥락에서 모형이 사용되는 다양한 방식과 측면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의미론적 관점에 대한 비판 2 : 이론이 단지 모형들의 집합이라고 한다면, 이론의 내용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대부분의 모형에는 이론의 일부라고 하고 싶지 않을 잉여 구조, 각종 가정들, 근사 기법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론/모형의 내용과 이론 적용 기법은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어떤 고도로 이상화된 기술은, 이론의 진짜 경험적 내용과 계산 장치로서 사용된 수학적 추상물 사이의 구분을 헷갈리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래는 이론과 모형 구분을 위한 Morrison의 제안.
첫째, 이론의 핵심적 내용을 구분할 수 있다. 뉴턴 역학의 본질(essence)은 물체의 운동을 그것에 작용된 힘을 가지고 분석한다는 데에 있다. 이 핵심 특징(core features)은 뉴턴적 모형에 공통적이며, 그 모형에서 기술되는 행동을 제약하고 모형 구성의 기초를 제안한다. 이 뉴턴적 모형들은 물리적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공통의 가정을 구현하고 있으며, 그 가정은 라그랑지안과는 다른 종류의 가정이다. 따라서 뉴턴 역학과 라그랑지안은 다른 "이론"이다.
둘째, 이론의 핵심 특징과 특수한 모형에만 적용되는 특수한 (내용적) 가정과 기법은 구별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강체 역학(적 내용)을 모형에 넣어야 할 때가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입자들로 구성된 시스템을 설정하고, 그 시스템의 입자들의 상대적 위치 관계가 언제나 변하지 않도록 하는 특수한 가정을 추가하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중 아무도 이것이 뉴턴 이론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제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자 모형의 행동을 풀기 위해 사용되는 perturbation expansion과 같은 특별한 방법(methods)를 이론의 본질로 생각하지 않듯이 말이다.
문자 그대로만 보면 이론 또는 이론적 법칙이란 아무것도 기술하지 않는다는 Cartwright 등의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론의 근본적 핵심이라 불릴 것을 그 이론의 법칙들을 적용할 때 사용되는 모형 및 기법들과 구분하고 싶을 수 있다! 이론을 핵심 법칙/방정식의 집합(core set of laws/equations)로 규정지으면, 그 문제는 사라진다. 예컨대 고전 전기동역학의 기본 구조에 대해 묻는다면, 우리는 맥스웰 방정식을 얘기할 것이다. 상대론적 양자 역학은? 디랙 방정식.
뉴턴 역학, 고전 전기동역학, 상대론적 양자 역학 등은 이론적 핵심이 비교적 명료하게 존재하는 편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컨대 집단 생물학의 경우는? 이 경우에도 누군가는 유전자 빈도(gene frequency)를 가지고 집단 생물학 이론을 정의하려 시도할 수 있다.
Morrison의 요점은? 이론을 단지 모형들의 집합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이론의 핵심 법칙에 의해 제공되는 이론적 정합성을 보지 못하게 가린다. 이론의 핵심 법칙은 모형의 특징을 전부 결정짓지는 않더라도 모형이 기술하는 행동의 종류를 분명 제약한다. 어떤 모형들이 뉴턴 역학에 속한다는 것을 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론적 핵심을 규정하는 일이지 모형들이 공유한 모든 특징을 나열하는 것은 아니다. 또 이론적 핵심을 규정하기 위해 정식화나 공리화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어쨌든 이러한 구분을 통해서 의미론자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실제 이론/모형 관계 및 모형/이론의 역할 제대로 밝힐 수 있을 것.
부분적 구조: 부분적 해법?
모형과 표상
모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일정한 정도의 표상적 부정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즉, 모형은 정확하게 자연을 표상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모형이다. (때로 우리는 모형이 가진 부정확성의 특정한 종류를 안다. 우리가 특정한 이유로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편 때로 우리는 모형이 가진 부정확성의 종류와 정도를 모른다. 우리는 모형의 대상이 되는 시스템에 대해 (때로? 자주? 항상? ) 접근하지 못하고 그래서 비교의 토대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19세기 물리학은 모형의 제작과 요구로 가득했다. 전자기학 태동기에, 맥스웰은 장 방정식을 정식화하기 위해 에테르에 대한 다양한 그림으로 그려진 기계적 모형(pictorial mechanical models)에 많이 의존했다. 그 모형이 수행한 일은 그것의 운동이 특정한 방정식을 만족시키는 전류를 산출할 수 있는 회전하는 vortex의 기계적 시스템을 표상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아무도 에테르가 vortex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 모형은 기계적 시스템에서 전류가 생성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을 표상(재현)해주었다. 일단 장 방정식이 갖추어지자, 그는 이 모형을 버리고 라그랑지안 역학의 추상적으로 형식화된(abstract formalism of Lagrangian mechanics) 이론으로 정식화하기를 선택했다. 그 정식화 자체는 여러 종류의 물리적 시스템을 위한 일종의 수학적 모형으로 기능했다.
당시 맥스웰의 모형 사용방식은 비판받기도 했지만(켈빈은 정말로 기계 실험적으로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모형이어야 한다고 생각. 즉 켈빈은 맥스웰의 모형이 너무 이상적이어서 현실에서 제작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판한 것이지, 맥스웰의 모형이 실제 에테르와 비슷할리 없다고 비판한 것은 아님), 아무도 에테르가 자신들의 모형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 모형들이 전자기 방정식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적 시스템을 표상하기 때문에 (또는 그 모형이 맥스웰의 수학적 방정식을 개선하도록 도와줄 것이기 때문에) 유용하다고 믿었을 뿐이다. 요점은? 각 모형들은 대상 시스템을 특정한 방식으로 표상한다. 그것을 likeness/similarity로 근사하든, 같은 방정식을 따르는 시스템으로 표상하든. 그러나 각 경우마다 likeness/similarity의 개념이 다르다. (즉, 많은 의미론자들이 모형과 세계 사이의 동형성이니 유사성이니 하는 얘기를 하지만 그 내용이 다르고, 어쩌면 그에 대한 강조는 잘못일 수 있다는 얘기)
과학적 표상을 동형성이나 유사성으로 특징짓는 시도에 대해서 비판이 있다.(Suarez 2003, Frigg 2002). 수아레즈는 유사성, 동형성에 대한 강조가 과학자들의 목적과 의도를 무시하는 환원적 자연주의적 접근의 표식으로 생각한다. 표상에서 유사성이 필요없을 수 있다는 생각은 중요하다. 언제? 우리가 모형을 만들고자 하는 동기가 종종 대상 시스템에 대해 모른다는 점에 있고, 그러한 상황에서 유사성의 조건은 약간 제약적이라는 점을 인식할 때. Morrison은 이러한 유사성, 동형성에 대한 강조가 바로 궁극적으로는 의미론적 접근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의미론적 관점을 버리면 표상을 위한 방벙으로 동형성이나 유사성에 대한 의존도 사라질 것이다.
모형들의 집합으로서 포착되지 않는 이론의 한 가지 역할은? 그것이 현상의 전체 집합(entire class of phenomena)에 대한 일반적 표상(general representation)을 제공한다는 것. 여기서 "표상"이란 현상을 특정한 종류의 행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기술의 일부는 행동이 이론의 법칙에 의해 정해진다는 제약과 관련된다. 예컨대 슈뢰딩거 방정식은 양자 시스템의 시간적 상태 변화를 기술해주며, 이것과 함께 불확정성 원리, 파울리의 배타원리, 플랑크 상수는 양자 역학 "이론"의 핵심을 형성한다. 비상대론적 양자 역학의 모형들은 모두 이 제약조건을 따른다. 다시 말해, 이론은 모형의 집합을 정의하는 제1원리로 기능한다.(theory functions as primary in defining a class of models.) 이런 의미에서 모형뿐 아니라 이론도 물리적 시스템을 이해하고 표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다면 이론에 표현된 일반성은 어떻게 표상적 힘으로 전환되는가?
카트라이트는 이론이나 이론의 근본 원리(예: 작용 반작용 법칙, 운동 방정식), 해석적 추상적 모형(interpretive abstract model, 예: 조화 진동자 모형)은 세계를 표상하지 못하며, 오직 표상적 모형(representative models, 예: 보다 구체적인 모형)만이 표상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왜? 그것의 추상성 때문.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두 가지 문제 있다. (1) 추상성이 현상을 표상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은 표상의 기준으로 엄격한 유사성 기준을 적용할 때에만 해당. (2) 구체적 상세함은 실제 상황의 표상을 보장하지 못함.
조화 진동자 모형이 추상적이란 이유로 실제 물리적 현상을 표상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추상적 개념과 그 해석적 모형은 이론이 특정한 종류의 행동을 분류하는 방식의 일부이다. 이론은 추상적인 조화 진동자 모형을 통해, 실제 현상들을 조화 진동 운동의 한 사례로 표상한다. 어떤 실제 시스템도 조화 진동자 모형과 같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조화진동자 모형이 조화 운동의 기본 특징을 표상하지 못한다거나 중요한 점들을 말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물리적 현상을 더 혹은 덜 추상적으로 표상하는 데 모형을 사용한다. 보다 추상적인 모형도 있고 보다 구체적인 모형도 있다. 이론과 추상적인 모형도 물리적 현상을 표상하며, 대상 시스템의 기본적인 (어쩌면 구체적인) 특징을 지적해줄 수 있다.
초전도에 대한 BCS 이론은 어떻게 이론이 초전도성 생산에 개입되는 인과적 메커니즘을 분리시킴으로써 '표상'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종류의 (물리적 시스템/현상의 근본 특징에 대한) 표상은 이론이 체현하고 있는 일반성에 의해서만 포착될 수 있다. 이러한 표상은 그것이 구체적인 세부사항들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추상적이지라도, 그것은 구체적인 물리적 시스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경우 오히려 카트라이트가 얘기하는 "representational" model을 만드는 것은 오히려 실제적인 특징을 체현하지 않을 수 있다. 목적에 따라, representational model이지만 오히려 고도로 이상화되고 비현실적인 모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마치 맥스웰의 기계적 모형이 그랬듯이 말이다. 이론은 세부사항은 제공하지 않더라도, 이론은 때로 우리에게 카트라이트가 지적한 해석적 또는 표상적 모형보다 더 구체적인 표상을 제공한다. 여기서 "구체적"이란, 이론이 물리적 시스템/현상의 기본 특징, 행동, 원인을 분리 및 부각시킴으로써 그 시스템/현상을 표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론과 모형의 구분은 모형이 표상적이고 이론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혹은 추상성/구체성의 차이로 포착될 수 없다.
실제에서의 이론과 모형
그렇다면 그게 이론인가?
결론
평가
타르스키의 모형 관념과 의미론자들의 모형 관념의 차이 지적
의미론자들의 모형-이론적 관점이 타르스키의 모형-이론적 관점과 다르다는 지적은 흥미롭지만, 전체 논지에서 중요하진 않음.
모형과 이론은 구분해야 하는 이유
일상적으로 과학자들이 구분하기 때문. 그 이상의 이유는?
이론의 "핵심 특징", "본질"에 대해
비트겐슈타인, 쿤 등은 그것의 존재를 부정했음. 기어리의 경우, 고전 역학적 모형에서 허용되는 힘 함수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이론의 본질 부정. 기어리는 단지 이러저러하게 비슷한 모형들이 존재할 뿐, 이론의 핵심이나 본질을 규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 객관적으로 이론의 본질적 내용이 있는가? 모리슨도 그에 대해서는 쉽게 답하지 못할 것. 집단 유전학의 본질은? 누군가가 원한다면 그 나름대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모리슨의 한 가지 답변. 그렇다면 그러한 정식화의 기능은?
쿤이나 기어리는 학습의 맥락과 관련하여, 정식화된 법칙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도 구체적인 성취(쿤의 패어다임)나 예제(기어리의 모형)를 통해 배우는 것이 더 많거나 중요할 것이라고 주장.
미분 방정식이나 변분법 등은 이론의 내용에 포함되는가? 내용은 아니더라도 이론의 필수적인 부분처럼 보이지 않던가? 아마도 쿤과 기어리는 scientific knowledge 자체보다 scientific activitiy (practice)에 관심을 가졌고, 이론적 내용에 포함되지 않을 그러한 것들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 미분방정식을 빼고 뉴턴 역학을 "할 수" 있는가? 변분법을 빼고 라그랑지안을 "할 수" 있는가? 쿤에게는 그러한 도구적인 요소들도 패러다임에 포함, 기어리에겐 아마 모형에 포함.
기어리나 쿤은 유사관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 새로운 문제를 기존의 문제 풀이(패러다임, 모형)와 유사하게 보는 법을 배울 수 있음. 때로 그것은 암묵적으로 이루어지고, 정식화된 정의나 필요충분조건 없이도 이루어지기도 함. 그러한 것은 있더라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음. 혁명 시기에나 그것의 진정한 해석을 놓고 논란이 되곤 함.
이에 대해 모리슨은 뭐라고 답할 것인가? 대체 이론적 (내용의) 정식화의 기능은 무엇인가? 모리슨이 답한다면, 예컨대 BCS 이론은 초전도 현상의 잘 정의된 핵심을 지적. BCS 모형들은 다른 (때로는 모순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론이 해주는 그러한 기능을 하지 못함.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 핵심의 존재는 (1) 각각의 다른 모형이 가진 기본 가정의 안정성과 (2) 파동 방정식 형태의 안정성을 잘 설명해준다.
동형성, 유사성 기준 비판
맥스웰의 예를 들어 유사성 기준 비판. 현상과 모형이 무척이나 닮지 않을 수 있다는 점 인정하더라도, 어느 일부분이라도(예컨대 전류 생성의 일반적인 메커니즘) 현상과 모형 사이의 유사성을 가정하지 않고서 모형을 사용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이론 또는 추상적 모형도 정말 표상을 한다는 주장
일단 지적해야 할 문제: 모리슨은 "concrete"라는 용어를 매우 이상하게 쓰고 있음. 그는 추상적인 모형도 구체적인 표상일 수 있다는 이상한 말을 하는데, 이는 매우 이상. 그가 지적한 것은 concrete detail이 realistic을 담보하지 않으며, abstractness라고 꼭 unrealistic할 이유 없다는 것뿐.
따라서 다음의 표를 그리면 모리슨의 주장이 간단하게 정리. 모리슨의 지적은 모형과 이론이 아래의 네 가지 구도 속에 어디든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한 것뿐. Cartwright는 구체적이면 실제적일 것처럼 얘기하고, 추상적이면 이상적일 것처럼 얘기했지만, 구체적이면서 이상적(즉 비현실적)인 것도 가능하고, 추상적이면서 실제적인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 모리슨 주장의 핵심.
구체(concrete) | 추상(abstract) | |
실제적(real) | ||
이상적(ideal) |
그렇다면 조화 진동자와 같은 추상적인 모형이 현상의 type을 규정함으로써, 실제 현상을 표상할 수 있다는 주장을 인정할 수 있음. 초전도성에 관한 BCS 이론(모형)이 추상적이지만 초전도 현상의 실제적인 일반적인 특징들을 포착함으로써 현상을 표상할 수 있다는 주장도 인정. 그리고 맥스웰의 에테르에 대한 vortex 모형처럼, 구체적인 모형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면서 이상적일 수 있다는 점 인정. 그래서 때로 이상적이면서 구체적인 모형(BCS 초기 모형)이 일단 도입되었다가, 처음의 이상적인 모형의 비현실적인 조건을 완화시키면서 점점 현실적인 모형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점도 인정. 그래서 때로 그러한 현실성을 인정받아 이론으로 인정받는 경우도 있다는 점도 인정. 그리고 추상적인 BCS "이론"은 여러 구체적인 BCS 모형들을 가질 수 있다는 점도 인정.
모리슨의 얘기를 추려보면, 조화진동자 모형은 "조화 운동 일반은 이러저러하게 작동한다"고 표상하고, BCS 이론은 "초전도 현상 일반은 이러저러하게 작동한다"고 표상한다. 어떤 BCS 모형은 "특정 초전도 현상은 이러저러하게 작동한다"고 표상하고, 초기 비현실적인 BCS 모형은 "초전도 현상은 이러저러하게 작동할 수 있다"고 표상한다. 고전역학 "이론"이나 양자역학 "이론"은 "세계 일반이 이러저러하게 작동한다"고 표상한다.
여전히 모리슨의 이론/모형 구분이 질적인 구분인지 양적인 구분인지 잘 모르겠음. 모리슨은 아무래도 이론과 모형의 차이를 그것이 제공하는 설명과 표상의 일반성의 차이로 그리고 있는 것 같은데, 이는 양적인 차이 아닌가? 고전역학 이론이나 양자역학 이론이 세계 일반에 대한 일반적 표상을 제공하고 그것의 모형들은 세계 내 특정 대상을 표상한다고 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BCS 이론은 세계 일반이 아닌 "특정" 현상에 대한 표상이므로 모형인가? 아니면 초전도 현상 "일반"을 다루기 때문에 이론인가?
내가 보기에 BCS "이론"은 고전역학 "이론"보다는 조화진동자 "모형"에 가까워 보인다. 모리슨의 얘기처럼 BCS 이론을 이론이라고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조화진동자 "이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까? 아니라고 한다면 왜 그런 껄끄러움이 발생할까?
모리슨은 BCS 모형을 맥스웰의 vortex 모형에, BCS 이론을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에 대응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BCS 이론은 같은 이유로 조화진동자 모형과도 대응된다. 이는 모리슨이 이론과 추상적 모형 사이의 관계를 얼렁뚱땅 넘어간 데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