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ndations of Science: The Philosophy of Theory and Experiment
Campbell, N. R. (1957). Foundations of Science: The Philosophy of Theory and Experiment, Dover Publications.
요약
내가 생각하는 이론이란 무엇인가 (pp. 122-125)
이론이란 두 집단으로 구분되는 명제들의 집합과 연결된다. (1) "가설" : 이론에 고유한(characteristic) 생각들에 대한 문장들. 스스로 증명 혹은 반증될 수 없으며, 사전과 떨어져서는 자의적인 가정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가설이다. (2) "사전": 이론의 고유한 생각들과 이론과 독립적인 다른 생각(이 생각들을 개념이라 부름. 예: 압력P, 부피V, 온도T. 그리고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맺어주는 명제는 법칙. 예: PV/T=일정)을 연결시켜주는 문장들.
가설적 생각의 조건: 자의적이어야 하며, 따라서 개념concept이 될 수 없다. 중요한 물리학 이론에서 가설적 생각은 개념이라기보다 수학적 상수와 변수이다.
가설로부터 연역된 가설적 생각들에 관한 명제들이 사전을 통해 개념들에 관한 참된 명제, 즉 법칙을 함축할 때, 그 이론은 참이라 얘기된다. 그리고 이 때 이론은 그 법칙을 설명한다고 얘기된다. (이론이 (경험) 법칙을 설명하면 그 이론은 참)
여기서 캠벨은 가상의 이론을 하나 제시. 아래의 이론은 (1) 위에서 제시된 이론의 특징(특히 가설과 사전의 차이)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 (2) 한편으로는 가치있는 실제 과학 이론과의 차이가 어디서 나는지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음.
캠벨이 제시한 가상의 이론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음.
- 가설: (1) u,v,w 등은 독립 변수. (2) a는 이 변수들의 모든 값에 대해 상수. (3) b도 .. 상수. (4) c=d (단, c와 d는 종속 변수)
- 사전: (1) (단, R은 금속 조각의 저항) (2) (단, T는 금속 조각의 절대온도)
가설로부터 다음을 도출.
- 구문 분석 실패 (MathML을 사용하되 미지원 시 SVG나 PNG 사용 (최신 브라우저나 접근성 도구에 권장): "https://en.wikipedia.org/api/rest_v1/" 서버에서 잘못된 응답 ('Math extension cannot connect to Restbase.'):): {\displaystyle (c2+d2)a/(cd/b) = 2ab = 일정}
사전에 의해 위의 명제를 해석하면, 다음의 법칙(실제로 알려진 참된 법칙)에 도달
- 구문 분석 실패 (MathML을 사용하되 미지원 시 SVG나 PNG 사용 (최신 브라우저나 접근성 도구에 권장): "https://en.wikipedia.org/api/rest_v1/" 서버에서 잘못된 응답 ('Math extension cannot connect to Restbase.'):): {\displaystyle R/T = 일정}
따라서 위의 이론은 참이며 위의 법칙을 설명한다.
위의 이론에서 사전은 4개의 변수들로 이루어진 2개의 함수만 (측정가능한) 개념과 연결시켜주고 있고, 변수 사이의 가설이 1개 있음. 이 경우 (변수가 4개이고 방정식이 3개이므로) 변수들은 직접적으로 혹은 명확하게 값을 부여받을 수 없다. 만약 사전이 하나 더 있다면 변수들의 값을 확정지을 수도 있을 것이고, 사전이 거기에 하나 더 있다면 사전 및 가설 사이의 일관성 검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변수의 값이 확정될 수 있건 없건 모두 이론이다. 캠벨의 생각에 따르면, 변수(가설적 생각)가 측정가능한 개념에 의해 직접적으로 확정될 수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가설적 생각을 측정가능한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가설적 생각은 개념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오직 사전을 통해서만 개념과 연관된다.
위의 이론에서, 각각의 독립변수들과 상수들의 값이 확정되진 않더라도, 가설로부터 사전을 통해 R/T=일정하다는 법칙을 도출할 수 있다.
물리 이론의 사례 (pp. 126-129)
실제 사례 : dynamic theory of gases
- 가설 : (1)(2)(3)(4)(5)
- 사전 : (1) 은 기체 용기의 한 모서리 길이 (2) (가스의 질량) (3) (온도) (4)
가설로부터 다음을 도출
사전으로 해석하면 다음의 법칙(보일-샤를, 혹은 보일과 게이-뤼삭의 법칙)에 도달
이 실제 사례는 앞서의 사례와 유사. 가설에 등장하는 변수와 상수 n, m, x, y, z는 실험에 의해서 값을 부여받지 못함. 몇 개의 변수와 상수는 특이하게 부여받기도 함. 예컨대 l은 다른 가설적 생각과 독립적으로 사전에 의해 측정가능한 개념(변의 길이)과 연결되고, v의 경우, 로 측정에 의해 값이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v가 특정한 수치를 가진다는 문장은 실험적으로 증명가능한 다른 어떤 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가설+사전이라는 의미에서, 기체에 대한 동역학적 이론은 캠벨이 제시한 의미에서 이론에 잘 맞아떨어짐. 그렇다면 이 이론과 앞서의 trivial 사례와는 어떤 차이? "It lies, of course, in the fact that the proposition of the hypothesis of the dynamical theory of gases display an analogy which the corresponding propositions of the other theory do not display."(p. 128) 기체의 동역학적 이론의 가설에 있는 명제들은 앞서의 이론과 달리 유비를 제시하고 있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임.
여기서 가설의 명제들은 육면체 상자 안의 완전탄성의 무한히 작은 물체들의 운동을 기술하는 법칙들과 흡사. 우리는 n은 입자의 수로, m을 각 입자의 질량으로, l을 상자의 길이로 두면, 각 입자가 벽에 부딪힐 때 운동량의 변화율을 로 간주할 수 있고, .... 그래서 "All these sympols, m, l, x, y, z, ... would denote the numerical values of actually measurable physical concepts, and it would be a law that they were related in the way described; if they were actually measured and the resulting numerical values inserted in the equations stated those equation would be satisfied."
더구나 사전의 명제들은 가설의 명제들에 의해 제시된 유비에 의해 제안되고 있다. 사전에서 p는 P(압력)으로, nm은 M(기체 총질량) 등등으로 연결시킨 데에는 유비적인 근거가 있는 것임. 단, T를 과 연결하는 근거는 보다 복잡. 캠벨은 둘 사이의 연결의 근거도 유비에 있다고 생각. "Speaking roughly, we may say that the relation is made because, in the law of the elastic particles, mv2 would be a magnitude which would be found to remain constant so long as the box containing the particles was isolated from all exterior interference, while in the case of the gas the temparature is found so to remain constant during complete isolate." (유비가 관련되어 있더라도 이런 조야한 설명만으로는 불충분. 내 생각에 다른 연결은 사전에 유비를 통해 얻은 관계이고, 온도와 평균운동에너지의 관계는 계산 이후에 얻게 되는 유비로, 가설과 나머지 사전으로 얻은 관계식과 보일-샤를 법칙의 동형성을 통해 새롭게 얻은 formal analogy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
유비의 중요성
(가치있는) 물리 이론은 두 가지 특징. (1) 가설+사전 (2) 이론이 가치있기 위해 유비를 제시해야 한다. 즉 가설의 명제들은 어떤 알려진 법칙과 유사해야 한다. "in order that a theory may be valuable it must have a second characteristic; it must display an analogy. The propositions of the hypothesis must be analogous to some known laws."
유비가 이론 발전에서 중요하다는 제안은 새로운 것은 아님. 많은 사람들은 유비를 가설 형성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인정. 그러나 캠벨은 더 나아가, 유비를 이론의 필수 구성요소로서, 그래서 그것이 없으면 이론의 가치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주장하려 하고 있다. "But in the view which is urged here analogies are not "aids" to the establishment of thoeries; they are an utterly essential part of theories, without which theories would be completely valueless and unworthy of the name."
유비는 이론 형성의 사다리이고 이론이 완성되고 나면 치워버려도 된다는 식의 제안이 많다. 만약 물리학이 순수 논리학처럼, 참되고 논리적으로 연결된 명제들의 집합을 확립하는 것이 목표라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학의 목표가) 그렇다면 유비는 애초에 도입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아무라도 아무런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으로 만족스러운 이론을 만들 수 있다. 바로 앞 절에서 제시한 금속의 온도와 저항에 관한 가상의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그 이론은 분명 형식적으로는 물리학의 다른 이론(기체의 동역학적 이론)만큼 만족스럽다. 그것만으로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현상) 법칙에 대해서든 그것을 설명하는 이론을 아무렇게나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이론의 문제는, 그것을 불합리하고(absurd) 가치 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것이 유비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it is just because an analogy has not been used in its development that it is so completely valueless."
(현상) 법칙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을 만드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그것을 논리적으로도 설명하는 동시에 필요한 유비를 제시하는 것이 힘든 것이다. "It is never difficult to find a theory which will explain the laws logically; what is difficult is to find one which will explain them logically and at the same time display the requisite analogy."
유비를 이론 발견의 보조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인 이유는, 캠벨이 보기에 이론의 본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인 듯하다. 그들은 가설과 법칙을 질적으로 구분하기보다, 가설을 단지 "아직 완전히 증명되지 않은" 법칙 정도로 간주하고 있다. (반면, 캠벨은 가설을 단지 아이디어들(자의적인 변수들)의 관계에 대한 명제로, "절대로 증명될 수 없는" 명제로 보고 있다.) 이런 관점이 옳다면 유비는 법칙 발견의 보조물에 불과할 수 있다. 왜냐하면, 법칙이 일단 제안되고 나면 그것의 진위 여부는 유비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고, "가설"이 법칙이라면, 그것의 참/거짓은 다른 법칙과 마찬가지로 시험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은 법칙이 아니다
그러나 이론은 법칙이 아니다. 이론은 법칙처럼 직접적인 실험을 통해 증명될 수 없다. 그리고 이론이 제안되는 방법은 안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론은 추가적인 실험의 수행 없이도 수용되곤 하기 때문이다. "For a theory may often be accepted without the performance of any additional experiments at all." 기체에 대한 동역학적 이론의 경험적 귀결인 보일-샤를 법칙은 이미 이론이 제안되기 전에 알려져 있었고, 그 이론은 추가적인 실험적 예측 없이도 (부분적으로) 수용되었다. 그 이론은 과학적 지식을 추가하지만, 새로운 어떠한 실험적 지식이나 법칙도 도출하거나 제안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이론이 가치있는 무언가를 제공하는 것으로 수용된 이유는 실험적인 데 있지 않다. 그것이 수용된 이유는 바로 그것이 제시한 유비에 기초해 있었다. 만약 유비가 실패했다면, 그것을 수용할 이유도 사라졌을 것이다. "The reasons why it was accepted as providing something valuable which was not contained in Boyle's and Gay-Lussac's Laws were not experimental. The reason for which it was accepted was based directily on the analogy by which it was suggested; with a failure of the analogy, all reason for accepting it would have dissappeared."
이론이 법칙이 아닌 이유는, 가설에 등장하는 변수(가설적 생각)들의 값이 실험을 통해 값이 정해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기체의 동역학적 이론에서 등장하는 v는 실험에 의해 확정된 값을 가질 수 있다. 누군가 "만약 사전이 더 추가되어 다른 변수들의 값들도 실험적인 근거에서 확정된 값을 가질 수 있다면, 이론의 가설들은 법칙으로 간주되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면, 캠벨은 거기에 "No"라고 답.
명제는 그것과 논리적 동치인 다른 명제 또는 그것에 의해 함축되는 다른 명제들과 같지 않다. 그들은 의미가 다를 수 있다. 여기서 캠벨이 말하는 "의미"란, 그것을 말할 때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말한다. 즉 이론은 어떤 경우 실험적 진술들의 집합과 논리적 동치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론은 그 진술들과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 논리적 동치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의 의미이다. 만약 논리적 동치만이 중요한 것이었다면, 앞서 내가 고안한 가상의 이론도 다른 이론만큼 중요할 것이다. 그것이 absurd한 이유는 그것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것에서는 그것이 설명하는 법칙 외엔 아무런 생각도 안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론이 가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그것이 설명하는 법칙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생각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론들은 단지 그것이 떠올려주는 생각이 고유하게(intrinsically) 가치있다는 이유만으로 수용되곤 한다. (물론 사람마다 그 가치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다.) 이론이 법칙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법칙은 그것이 주장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반면 이론은 그것에 의해 도출되는 경험적 주장 이상의 생각들을 담고 있다.)
이론의 발전
평가
캠벨의 용어법 재정리.
- 생각(idea) : 가설적 생각 vs. 개념
- 명제 혹은 문장 : 가설 vs. 법칙
- (가설은 가설적 생각들에 관한 명제. 법칙은 개념들에 관한 명제)
처음에 나는 이 글이 유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 즉 유비가 이론 발견의 보조자 이상의 이론의 필수 구성요소임을 주장하는 글로 생각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근거였다. 그는 가설과 법칙을 구분하고, 가설적 생각과 개념을 구분했는데, 유비가 필요한 이유는 이론이 법칙이 아니라 가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법칙은 관찰가능한 의미를 가지는 데 반해, 가설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바로 유비를 통해서라는 것. 가설은 유비를 통해 의미를 얻는다. 유비 없이는 가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는 가설로부터 사전을 거쳐 관찰가능한 법칙을 도출하면 그것은 논리적 설명은 제공하겠지만, 그건 바보라도 할 수 있는 너무 쉬운 일이다. 따라서 무언가 더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유비라는 것이 캠벨의 논리.
사례1을 다시 재평가해보자. 이론이 갖추어야 할 조건에 관한 얘기로 생각해보자.
1. 사례1의 이론은 관찰 가능한 명제에 대한 논리적 설명(가설로부터 사전을 거쳐 관찰가능한 명제를 도출)을 제공한다.
2. 이것만으로는 대체로 그 이론에 만족하지 않을 것. (근거1 : 사례1의 absurd함. 근거2 : 너무 만들기 쉬움)
3. 사례1이 absurd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렇다면 좋은 이론이 갖추어야 할 부가적인 조건은 무엇일까?
4. 캠벨의 답 : 이론이 유비를 제공하지 않아서. 유비를 제공하지 않는 이론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의미 없는 가설이 어떤 현상을 논리적으로 도출한 들, 그게 무슨 의미겠는가. 의미 없는 혹은 해석되지 않은 이론은 결국 그것이 도출하는 경험적 명제에 의해서만 그것이 주장하는 바가 드러나게 되는데, 그런 이론을 가지고 그 경험적 명제를 도출하는 것을 과연 그것을 설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설명이라 부르더라도 그 설명을 가지고 만족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유비가 있어야만 이론은 의미(이론의 기호나 문장을 볼 때 떠오르는 생각)를 부여받는다. 가치 있는 이론은 자신이 피설명항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 의미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유비이다. 그렇다면, 가치 있는 이론은 왜 자신의 피설명항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1) 캠벨은 여기에 답하지 않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가치 있는) 설명을 위해서, 설명항은 피설명항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캠벨의 기본 아이디어일 듯. p의 의미가 q와 같을 경우, p는 과연 q를 설명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형식적으로 p와 q가 논리적 동치가 되더라도, p는 q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만 q를 가치 있게 설명할 수 있다.
5. 다른 대안적인 답 : 가설이 너무 자의적이다. -> (1) 이것도 유비를 제공하지 않아서라는 캠벨의 답으로부터 나올 수 있음. 캠벨의 조건은 유비를 제공하지 않는 수많은 자의적인 가설들을 배제하는 효과를 가진다. (2) 그러나 "유비를 제공해야 한다"는 조건만으로는 자의적인 가설을 배제하기엔 여전히 약한 조건 아니냐는 재반박이 들어온다면? "어떤" 유비를 제공해야 한다는 제한 조건이 없는 한 여전히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 아닌가? 예컨대 기체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데, 기계론(동역학)적인 유비 외에도 유체(fluid) 유비나 심지어는 유기체적인 유비를 동원하더라도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 아닌가? 내 생각에는 그런 모든 유비가 허용된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이러한 제약이 있는 것이, 아무 기호들의 나열을 통해 가설을 세우는 자의적인 과정보다는 훨씬 덜 자의적이지 않은가. 어떤 이론이 유비를 제공하는 동시에 현재 관심을 가진 현상에 대한 설명까지 제공한다면, 그 이론은 일단 "그럴듯함"의 자격을 갖추는 것 아닐까? "가설은 자의적이지 않아야 한다"라는 조건을, "최소한 가설은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조건으로 생각한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 여기서 의미는 유비를 통해 제공되니까, 유비의 필요성도 얘기된다. 아마 캠벨이 좋아할 해법. (3) 가설을 제한하는 요소로는 가설 외에도 대칭성, 통합성, 단순성, 미적 우아함 등의 조건도 생각할 수 있다. 즉 "자의적인 가설을 배제하기 위해" 유비가 필요한 것이라면, 이러한 것들도 들어와야 하는가? 내가 보기에 대칭성, 통합성 등은 유비로 재해석될 수 있는 듯하고, 단순성, 미적 우아함은 추론을 위한 조건(우리가 풀 수 있는 이론이 좋은 이론이라는 뜻에서)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통합성은 유비와 매우 많은 관련을 맺고 있다. 기체 현상을 역학적인 현상과 통합시키는 것은 바로 당구공 유비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4) 이런 답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설연역적인 방법에 따르면 가설이 자의적인 것은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가설은 원래 아무렇게나 자유롭게 만들도록 허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설을 제안하는 데에는 아무런 제약도 있을 이유가 없다. 그것은 심리학의 문제이다. 가설을 제안하는 어떤 심리적 기제를 그 가설을 평가하는 기준과 헷갈려서는 안 된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면 이들에겐 무엇이 문제? 다음의 경험주의적 답을 보라.
6. 포퍼식 혹은 경험주의적 답 : 가설이 어떠한 새로운 예측도 해주지 않는다. 사례1의 이론은 새로운 경험적 지식을 늘려주지 않기 때문에 좋은 이론이 아닌 것뿐이다. 결국 사례1의 이론은 과학이 아니라 형이상학이다. 만약 사례1의 이론의 가설이나 사전이 변형 혹은 추가되어 무언가 새로운 예측을 해준다면, 그 이론은 해석되지 않은 이론이라 하더라도 좋은 이론이 될 수 있다. (1) 캠벨의 반박 : 기체의 동역학적 이론은 새로운 예측 없이도 좋은 이론으로 수용되었다. 따라서 예측은 이론 평가의 필수적인 기준은 아니다. (2) 재반박 : 그것은 과학자들이 예측 없이도 이론을 수용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해줄 뿐, 그 과학자의 행동이 합리적이라고 말해주진 않느다. 그 과학자는 비합리적인 과학자이다. (3) 캠벨의 두 번째 가능한 반박 : 새로운 예측을 위해 그 이론의 가설이나 사전을 변경 혹은 추가하려고 해도 유비가 필요하다. 유비의 가이드 없이는 이론을 수정 발전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싸움의 핵심은? a. 이론 내 용어와 문장의 의미는 어떻게 부여받는가? b. 유비가 이론 수용의 근거("심리학적 원인"이 아닌)가 될 수 있는가? c. 예측과 유비의 관계는?
a. 이론 내 용어와 문장의 의미는 어떻게 부여받는가? 여러 답변을 다시 검토해보자. (1) 도구주의적 견해 : 이론 내 용어와 문장은 의미를 가질 필요가 없다. 이론은 단지 예측을 위한 블랙박스로 잘 기능하기만 하면 된다. (2) 경험주의적 견해 : 이론 내 용어와 문장은 의미를 가진다. 단 그것이 대응규칙(캠벨의 사전)을 통해 경험가능한 귀결을 도출할 수 있는 한에서, 그로부터 부분적으로 의미를 부여받을 뿐이다. 이론은 대응규칙에 의해 부분적으로 해석된 공리 체계로서, 예컨대 양자역학의 psi는 그것을 통해 경험가능한 예측을 산출하는 한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을 넘어서는 해석을 주려고 할 경우 그것은 형이상학이 되거나 이론에 대한 오해만을 산출하게 된다. (3) 캠벨식 견해 : 이론 내 용어와 문장은, 그것이 유비를 제공하지 않는 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이론의 문장(가설)은 사전(경험주의자들의 대응규칙)을 통해 경험가능한 명제를 논리적으로 함축하거나 그 명제와 논리적 동치가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론의 용어와 문장의 의미가 그 경험가능한 명제에 의해 주어지거나 동일시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론 내 용어와 문장의 의미는 유비를 통해 들어올 뿐이다. (캠벨은 이론(가설)과 법칙을 엄밀하게 구분하자고 하지만, 나는 둘이 그렇게 엄밀하게 구분될 것 같지 않다. 캠벨은 유비는 유비일 뿐 절대로 참된 진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 생각엔 그것이 불가능해보이진 않는다. 경험적 문장과 이론적 문장이 쉽게 구분되지 않으며, 관찰가능한 대상과 관찰불가능한 대상도 쉽게 구분되지 않을 것 같기 때문) (4) 쿤의 견해 : 이론 내 용어와 문장의 의미는 아래로부터(경험->대응규칙을 통해)도 들어오지만, 위로부터(다른 영역의 경험?->유비를 통해)도 들어온다.
(1) 또는 (2)는 양자역학의 psi에 대한 그럴듯한 명시적 해석이 존재하지 않고서도, 즉 psi의 의미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이 좋은 이론이라는 점을 해명해준다. 그러나 나의 견해는 조금 다르다. 양자역학에 대한 negarive analogy가 없는 모형을 만들어내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결함이 있는 여러 모형들을 통해 psi에 대한 의미를 떠올릴 수 있다. 양자역학 내 용어와 문장들은 여러 결함이 있는 모형들과의 positive analogy뿐 아니라 nagative analogy에 의해서 그 의미를 부여받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양자역학에 부합하는 고전역학적인 모형을 만들 수 없지만, 고전역학적인 모형과의 positive analogy 및 negative analogy를 파악하지 않고서 양자역학의 의미를 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양자역학 내 용어와 문장들의 의미는 그것이 산출하는 경험적 귀결 이외에도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적 모형과의 positive and negative analogy에 의해서도 들어온다.
b. 유비가 이론 수용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이건 나중에.
c. 난 경험적 지식을 늘려주지 않는 이론은 암만 그럴듯하다고 해도 무가치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나의 실용주의적 견해이다. 문제는, 어떤 이론이 경험적 지식을 늘려주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쉽게 판가름되기 어렵다는 데 있다. 한 시점에서 그렇지 못한 이론, 즉 형이상학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던 이론도 약간의 수정, 추가를 통해 경험적 지식을 늘려주는 이론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기체의 동역학적 이론이 바로 그러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캠벨이 소개한 그 이론의 상태만으로는 이미 알고 있던 보일-샤를 법칙 이상의 아무런 예측도 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론은 조금만 수정해서 확장하면 참신한 예측을 해줄 수 있다. 문제는 그 사이에 일어난다. 과학자들은 그 사이에 그 이론을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근사적) 참인 것"으로 생각하거나 "등등의 이유로" 그 이론을 받아들인다. 아마도 과학자들의 수용 근거는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1) 경험주의적 수용 : 새로운 예측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수용. (2) 합리주의적 수용 : 그 가설의 의미가 (혹은 그 유비가) 그 자체로 그럴듯하다는 이유로 수용. 갈릴레오나 케플러의 코페르니쿠스주의 수용이 이러했다고 볼 수 있다. (3) 실용주의적 혼합 : 새로운 예측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본 이유를 가만 생각해보면, 그것의 유비가 그럴듯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유비와 예측 산출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을까? 있진 않을 것 같다. 그 유비의 그럴듯함에 이론을 발전시키고자 했으나 결국 경험적 예측의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그때 가서 포기할 수 있음.
아인슈타인의 deterministic hidden variable 해석과 보어의 indeterministic 해석 사이에는 아무런 경험적 차이가 없는 줄 알았다. 따라서 경험주의자가 보기에, 그 둘의 논쟁은 과학이 아니라 형이상학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아마도 그러한 철학적, 형이상학적 논쟁은 과학자들에게 인기있는 연구주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1960년대(?) 벨은 둘의 경험적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였고, 그에 따른 실험은 보어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사례는 유비 또는 모형이 경험적 지식의 증가에 상당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증거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례만으로는 유비와 예측 사이의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긴 역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