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hn vs. Popper
흔히 토머스 쿤(Thomas S. Kuhn)과 칼 포퍼(Karl Popper) 사이의 논쟁은 과학의 방법론과 합리성에 관한 논쟁으로 거론되는데, 쿤과 포퍼 사이의 직접적인 논쟁은 1965년 7월 런던대학에서 단 한번 벌어졌다. 이 논쟁에는 포퍼의 제자였던 임레 라카토스(Imre Lakatos)와 폴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도 참여했다. 이 논쟁은 5년 후 라카토스의 제자인 알란 무스그레이브(Alan Musgrave)에 의해 보완되어 Criticism and Growth of Knowledge라는 책으로 출판되었고, 한국에도 《현대 과학 철학 논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 Lakatos, I. & Alan Musgrave, Criticism and Growth of Knowledge (1970); 조승옥 김동식 옮김, 《현대과학철학 논쟁》
한편 최근 스티브 풀러(Steve Fuller)는 둘의 논쟁을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맥락에서 재조명한 책을 발간했다. 아래의 글은 이 책에 대한 해설이다.
- Steve Fuller, Kuhn vs. Popper (2003); 나현영 옮김, 《쿤/포퍼 논쟁》 (생각의 나무, 2007)
《쿤/포퍼 논쟁》 해설
- 작성자: zolaist
스티브 풀러(Steve Fuller)의 《쿤/포퍼 논쟁(Kuhn vs. Popper)》는 1960년대 과학철학자인 토머스 쿤(Thomas S. Kuhn)과 칼 포퍼(Karl Popper)를 갈라놓았던 쟁점들을 완전한 형태로 재현시킬 의도로 씌여졌다. 흔히 둘 사이의 논쟁은 과학의 방법론과 합리성에 관한 논쟁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풀러는 그 논쟁을 보다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논쟁으로 재현함으로써, '권위주의자로서의 쿤'과 '민주주의자로서의 포퍼'를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쿤이 냉전시기 자신들의 맹목적인 자율권을 지켜내려 애쓴 과학자들 중 대표적인 장본인이었다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포퍼는 '열린 사회'로서의 과학의 이상을 일관되게 실천했던 지식인이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둘이 실제 모습과 너무 다르게 기억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포퍼는 과학이 추측과 논박을 통해 발전하며 '반증 가능성의 원리'를 통해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철저히 구분할 수 있다고 믿은 인물로 기억된다. 반면 쿤은 과학이 검증이나 반증과 같은 과학적 방법을 통해 누적적으로 발전한다는 교과서적 관념을 무너뜨린 인물로 기억된다.
쿤의 1962년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 따르면, 과학은 하나의 '패러다임(paradigm)'을 채택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패러다임이란 탐구의 성공적인 모범사례(examplar)와 그것이 미래의 탐구에 제공하는 청사진 모두를 의미한다. 확립된 패러다임 하에서 연구자들은 근본적인 의심을 삼가고 틀에 박힌 문제 풀이 활동에 매진하게 되는데, 쿤은 이러한 활동을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사소해 보였던 문제가 계속 풀리지 않는다거나 미해결의 문제가 점점 증가하게 되면 패러다임은 '위기'에 처하고, 오직 그 때에만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분야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규범을 정하기 위해 광범위한 토론에 참여하게 된다. '혁명'은 실행 가능한 대안적 패러다임이 발견되었을 때에만 일어나는데, 새로운 패러다임과 기존의 패러다임은 공약불가능(incommensurable)하다. 따라서 혁명의 종식은 합리적 논증에서의 승리보다는, 정치적 설득과 종교적 개종 그리고 세대교체에 의해 달성되고, 새로운 정상과학이 시작된다.
"과학 혁명이 초래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종교적 개종과 흡사하다"는 쿤의 주장은 과학의 합리성을 세속화함으로써 과학의 인식론적 지위를 끌어내리려는 시도로 읽혔다. 이러한 독해에 따르면 과학적 합리성이란 고작해야 특정 시기 과학자들이 합의한 패러다임에 의존할 뿐이었다. 1970년대 후반 이래로, 쿤의 개념들은 객관적 지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장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되기 시작했고, 1980-90년대에는 인간의 지식(과학)을 객관적 실재에 대한 '반영'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 하에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구성'으로 보는 포스트모더니즘적·사회구성주의적 인식론의 기초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쿤은 자신이 포스트모더니즘과 사회구성주의의 정신적 지주로 간주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상대주의자 또는 비합리주의자로 공격하는 다른 과학철학자들에게도 끊임없이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변호해왔다. 사뭇 모순적으로 보이는 쿤의 행보를 이해하는 데, 1965년 쿤과 포퍼 사이에 실제로 오간 논쟁은 상당히 유용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이 책의 전체 논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쿤과 포퍼 사이의 직접적인 논쟁은 1965년 7월 런던대학에서 단 한번 벌어졌는데, 이 논쟁에는 포퍼의 제자였던 임레 라카토스(Imre Lakatos)와 폴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도 참여했다. 이 논쟁은 5년 후 라카토스의 제자인 알란 무스그레이브(Alan Musgrave)에 의해 보완되어 Criticism and Growth of Knowledge라는 책으로 출판되었고, 한국에도 《현대 과학 철학 논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논쟁은 쿤의 비판적 논문으로 시작되는데, 오늘날 이는 포퍼의 과학 방법론에 대한 결정적 비판으로 평가받는다. 쿤에 따르면, “칼 포퍼 경이 강조하는 테스트들은 과학의 발전에서 대단히 드물게 나타난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때는 언제나 관련된 분야에서 위기가 선행되었거나 현존하고 있는 연구의 규범과 경행하는 이론이 출현했을 경우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들은 내가 다른 곳에서 '비통상적 연구'라 이름 붙인 경우에 해당된다. ‥‥ 과학적 과업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과학을 다른 활동과 가장 잘 구분시켜주는 것은 비통상적 과학이라기보다는 칼 포퍼 경이 말하는 종류의 테스트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 정상과학이라는 점이다. ‥‥ [한편] 모든 이론들은 기존의 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도 다양한 임시방편적인(ad hoc) 조정을 통해 수정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쿤은 이론과 맞지 않는 변칙사례가 등장할 때마다 이론 전체를 폐기한다면, 연구활동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반면, 포퍼는 이러한 과학활동이 비판정신을 말살시키는 교조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건대 '정상과학자는 잘못된 가르침을 받았다. ‥‥ 그는 교조적 정신을 배웠다. 말하자면 그는 세뇌당했다. 그는 왜라는 이유를 묻지 않고도 응용될 수 있는 기술을 배웠다. ‥‥ 나는 이런 유의 태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런 태도는 엔지니어들뿐만 아니라 과학자로 훈련된 사람들에게도 있다. 나는 다만 그런 태도 속에, 그리고 그것이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될 가능성 속에, 내가 전문화의 경향 속에서 느끼는 것과 유사한, 커다란 위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즉 그것은 실로 과학에 대한, 우리 문명에 대한 위협이다."
위에서 인용된 포퍼는 풀러가 20세기 후반 과학의 현실에 대해서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해주고 있다. 풀러가 보기에, 20세기 후반의 과학은 민주적 견제장치가 결여된 과학자들의 자율적인 권력으로 성장해버렸는데, 쿤의 영향력 하에서 진행된 과학에 대한 (철학적, 역사적, 사회학적) 연구들은 이를 조장하거나 적어도 방조했다는 것이다. "쿤의 과학적 변동의 이론에서 철학적 감시는 찾아볼 수 없다. ‥‥ 쿤의 정상과학은 마피아와 왕조, 종교적 질서의 특징들만을 결합한 정치적으로 원시적인 사회 구조였다. 그것은 정치가들이 그저 자기 한 몸보다 더 많은 사람을 책임지도록 정식으로 강제하는, 오늘날의 우리가 현대 민주주의에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조직상의 안전장치들을 빠뜨리고 있었다." 우리의 지식이 특정 시기에 형성된 패러다임에 의존한다는 점을 부인하긴 어렵지만, "그것을 안정의 원천으로 다루느냐(쿤), 아니면 극복해야 할 문제로 다루어야 하느냐(포퍼)는 다른 문제이다." 물론, "비판은 오직 특정 조건에서만 생산적이며, 예를 들어 어떤 연구 프로그램의 초기 단계에서는 생산적이지 않다. 쿤은 이점을 분명 포퍼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 '위기'의 상태에 접어든 패러다임에 대해서만 비판을 허용하는 쿤의 보수적인 자기만족은 또다른 극단이었으며, 라카토스 또한 이를 참을 수 없었다." 당연히 풀러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쿤과 포퍼(풀러)의 대립은 과학과 진리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반영한다. 쿤에게 진리는 항상 탐구자 사회에 '내재하는' 것이었던 반면, 포퍼에게는 언제나 그 사회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쿤이 과학의 합리성을 전문적인 과학자 집단에 위임해버렸다면, 포퍼는 이를 과학자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고 끝까지 저항했던 것이다. 그리고 풀러는 과학자들에게 수여된 그 위임장을 다시 뺏어오고자 노력하고 있다.
문제는 현재의 지식인 사회가 그 위임장을 뺏어오기에 무기력할 뿐만 아니라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현재의 지식인 사회는 자신의 전문화된 분과가 가진 자율성에 만족할 뿐 다른 분과(특히 과학)를 침범하려 하지 않는다. 쿤 이후의 과학철학은 과학 내 특정 영역의 증거와 추론 사이의 관계를 치밀하게 분석하는 전문적인 분야로 전락해버렸다. 또한 과학사 분야는 완전히 전문화된 분과로 정립되어, 과거에 대한 평가를 배제한 채 역사를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그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적 과정을 어쩔 수 없었던 일 또는 예측치 못했던 우연한 일로 그림으로써, 당시 행위자들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고 도리어 그들의 행위들을 합리화해주고 만다.
여기서 풀러는 포퍼의 감수성을 불러낸다. 포퍼는 인간이라면 "자신의 관념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기 잘못의 책임을 주변 사물과 상황에 떠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평가는 변명에 불과하며, 그것만으로는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없다. 포퍼가 보기에, 인간이 동물과 다를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한 의식적인 평가를 통해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과거의 선택(특히 잘못된 선택)을 상황상의 이유로 설명할 경우, 그것은 자신의 선택을 상황에 모두 양도하는 것이며고, 결국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 된다.
포퍼와 라카토스, 그리고 저자인 풀러에 따르면, 역사에는 실현되지 않는 가능성들이 숨어 있다. 즉, 현재는 최선의 결과가 아니다. 현재는 과거 행위자들의 특정한 선택 결과이며, 그들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현재는 보다 나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과거에 대해 평가를 할 수 있고 과거의 행위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이때의 평가란 우리가 놓쳐버린 반사실적 가능성들을 분별해내는 우리의 능력과 관련된다. 우리가 과거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능력 때문일 것이다. 풀러가 보기에, 쿤과 그를 이어받은 지식인들의 태도는 자기 반성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풀러는, 현재의 지식인 사회에는 비겁한 쿤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고 보았다. 그는 포퍼의 입을 빌어 이들을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일부 독자들은 쿤과 포퍼에 대한 풀러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책에는 분명 현재의 무기력한 서구 지식인 사회에 대한 진지한 통찰과 반성이 녹아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지식인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지식인들에게 바로 그러한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 사족: 너무나 거친 논증과 오만한 말투에 심기가 불편해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