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에 대한 최근 논의
전통적 서술
- R. Hooykaas, "The Rise of Modern Science: When and Why?", BJHS (1987), pp. 453-473.
16-17세기에 자연에 관한 지식과 자연을 탐구하는 방법에 혁신적 진보가 있었음.
근대과학의 기원이나 부상에 대한 모든 논의는 과학의 정의에 의존함을 인정하더라도, 근대과학이 탄생한 시기는 근대 초기 유럽이라 주장.
두 가지 발전이 근대과학의 기원에서 가장 중요
- 신대륙 발견에 따른 일련의 새로운 발견 과정: 고대 자료에 언급되지 않은 땅, 식물, 동물, 사람의 존재는 고전의 권위를 잠식. 경험이 우선권을 쥐기 시작.
- 유기적 세계관에서 기계적 세계관으로의 전환: 자연은 기계처럼 작동. 그러므로 기계를 연구하는 방식처럼, 즉 수학적으로 자연을 연구할 수 있음.
과학을 사회나 여타의 문화적 활동과 분리된 인지적 활동으로 보는 시각에 반대.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역사가의 임무란 잘못된 이론의 오류를 지적하고 비판하며 진실에 이르기까지의 서사를 구성하는 것. 호이카스는 이를 목적론적이고 진보주의적인 접근법이라 명명.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16, 17세기에 혁신적인 단절이 있었으나 이는 과학의 내재적인 발전이었지 광범위한 역사적 사건의 귀결은 아닌 것이 됨.
호기카스는 이에 반하여 과학의 등장을 이해하려면 신학적 관심에서부터 장인계층의 부상에 이르기까지 과학에 호의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요소들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
비판
16, 17세기 호이카스가 지적한 것보다 더 많은 얘기가 있음.
- 호이카스 역시 사실의 중요성을 언급하지만, 실제로 사실이 무엇인지, 사실이 사실로서 확립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에 관해서 논의하지 않음. 섀핀이 보여주었듯이 과학적 사실은 생산, 구성되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과정임.
- 경험과 실험을 구분할 필요가 있고, 웨스트폴이 지적했듯이 기계적 세계관과 수학적 방법론이 자연스럽게 부합하는 것은 아님.
- 자연사, 의학, 연금술 등 다른 분과를 다루지 않은 문제도 있음.
분과의 투쟁: 과학과 종교
- Robert S. Westman, "The Copernicans and the Churches," in God and Nature, pp. 76-113.
널리 퍼져 있는 모형에 따르면, 종교와 과학은 필연적으로 대립한다. 그러나 이 모형은 왜 코페르니쿠스의 저작이 나오고 70여년이 지나도록 가톨릭 측에서든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든 그에 대한 유죄선고가 없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음.
웨스트만에 따르면, 갈릴레오 사건은 여러 분과의 투쟁의 결과로 이해해야 함. 주요한 과학상의 변화기마다 분과들 사이의 경계가 재구성됨.
코페르니쿠스의 저작이 급진적이었던 것은 태양중심설 때문이 아님. 문제는 전통적인 분과의 위계를 거슬렀던 것. 전통적으로 수학의 한 분과인 천문학은 그저 천체의 운동을 묘사하고 예측하는 분과로서 천체가 실제로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음. 이는 더 높은 분과였던 자연철학의 임무였음.
코페르니쿠스는 수학자를 위한 수학에 관해 저술하고 있다고 주장. 그의 책은 아주 전문적이어서 극소수의 사람만이 읽고 이해할 수 있었음. 이들이 보기에 코페르니쿠스의 성취는 equant를 제거할 방법을 제공한 것일 뿐. 하늘의 구조에 관한 주장은 자연철학의 영역을 침범한 것으로 기각됨.
또 다른 충돌 분과는 신학. 16세기 중엽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는 교회와 교회의 신학자들만이 성서를 해석할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공표. 그리고 교회의 신학자들은 성서에 따르면 지구는 정지해 있다고 해석한 것.
코페르니쿠스가 수학에 기대 세계에 대한 물리적 주장을 내세움으로써 분과의 경계를 위배했다면, 갈릴레오는 자연철학자이자 수학자로서 성서를 해석할 권위를 참칭한 것으로 보였던 것.
둘에게서 충돌한 분과가 달랐음을 이해해야 70여년의 세월차를 설명할 수 있음.
실험철학
- Steven Shapin, "Pump and Circumstances: Robert Boyle's Literary Technology," Social Studies of Science 14 (1984), 481-520.
사실이란 무엇이고 그것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이 문제는 17세기에 날카롭게 제기된 문제였음. 왜? 새로운 기구가 발명되어 자연철학을 수행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한 것.
기구: 17세기 이전의 기구는 수학적 기구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현상을 그저 측정하는 기구였음. 17세기의 새로운 점은 그 기구가 없다면 접근할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내는 기구가 등장한 것. 예컨대 천문학에서 사용된 갈릴레오의 망원경. 실험철학에서는 진공을 만들어 내는 보일의 공기펌프.
난점: 관찰자가 보았다고 말한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이를 어떻게 확신시킬 것인가? 더욱이 특정한 기구가 있어야만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라면? 혹은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기구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그러한 현상을 볼 수 없다면? 결국 어떤 주장은 어떻게 사실이 되는가?
망원경이 빠르게 확산된 것에 비해 공기펌프는 보일이 실험할 당시 세계에서 유일한 장치였음. 보일은 반복실험의 문제를 인식할 수밖에 없었음. 누구도 보일이 묘사한 실험을 반복할 수 없었던 것.
결국 사실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지식의 생산과 교환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사실로 수용되고 지식으로 간주되는 것은 주장이 교환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 본질적으로 사실이란 그것을 믿는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 없음. 신뢰와 신임은 사회적 관계 내에서만 발생하는 것. 또한 사실과 신뢰의 존재는 특정한 사회적 제도에 의해 진작될 수 있음. 17세기 후반에 최초의 과학단체가 설립된 것은 우연이 아님.
보일은 왕립학회에서 그의 실험을 공개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음. 직접 목격을 통해 사실을 확립. 또는 물리적으로 참가할 수 없는 이들을 설득하고 목격 경험을 늘리기 위해 보일은 물질적, 문필적, 사회적 기술(섀핀의 용어)을 만들어 냄. 예컨대 가상 목격.
기계적 철학
- Peter Dear, "A Mechanical Microcosm: Bodily Passions, Good Manners, and Cartesian Mechanism," in Science Incarnate, pp 51-82.
과학이론은 어떻게 수용되는가? 왜 어떤 이론은 믿는 반면 어떤 이론은 배척되는가? 전통적으로 과학사학자들은 순수하게 인지적인 관점에서 설명. 가령 한 이론은 관측에 부합하고 정확한 예측을 제공하며, 폭넓은 설명력과 설명의 경제성을 제공하기 때문에 좋은 이론으로서 수용된다. 그러나 최근 점차 사회적, 문화적 영향을 깨닫기 시작. 이에 따라 이론이 수용되는 데 있어 순전히 합리적이거나 인지적이지 않은 요소들이 고려되지 시작. 가령 쿤은 코페르니쿠스가 그의 이론을 정당화할 때 일종의 미학에 호소했음을 주목한 적이 있음.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자신의 신플라톤주의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그 진실성을 확신했음. 사람들은 어떤 이론이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세계상과 잘 조화될 때 그 이론을 수용함. 때로 특정 행위를 정당화해주기 때문에 수용하기도 함.
- 쿤은 관념적, 심리적 요소에 주목 vs. 디어는 사회적 요소로까지 확장
디어는 데카르트류의 기계적 철학이 17세기 철학자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프랑스와 네덜란드 사회 전반에 걸쳐 널리 퍼졌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철학이 근대 초기 사회의 수요에 어떻게 부응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 이 과정에서 실험실 복장을 갖춘 근대 과학자의 모습과 상당히 다른 자연철학자의 모습 제공.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에 따르면, (엄격히 조직화되고 규율화되어 가던) 절대주의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념을 조절할 수 있어야 했음. 이런 이들에게 데카르트의 심리학, 생리학 이론은 매우 유용했음.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 혹은 영혼은 신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음. 신체는 운동 중인 물질에 불과. 동물은 영혼이 없는 로봇 혹은 기계적 오토마타. 인간은 비물질적 영혼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신체는 송과선을 통해 영혼에 작용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정념을 생성할 수 있었음. 반대로 영혼은 신체를 규율할 수 있었고 정념을 억누르고 조정할 수 있었음. 바로 이러한 측면이 당대에 가치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문명화된 행위 규범을 내면화하려던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했음. 국외 추방된 보헤미아의 엘리자베스 공주 역시 힘든 운명의 우울증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에 호소력을 느꼈던 것.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 Margaret C. Jacob, "The Cultural Origins of the First Industrial Revolution," in Scientific Culture and the Making of the Industrial West, pp. 99-115.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간의 시간적 순서는 순전히 우연적이었는가? 아니면 특히 영국의 경우에는 과학혁명이 산업혁명을 야기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기존의 논의들: 영국의 발전된 상업 및 회계 제도(기관)들, 상인과 귀족 계층 모두의 기업가적 대담성, 노동력 풀과 잉여자본 풀을 만들어낸 인클로져 운동, 거대 자본 저장고의 역할을 했던 해양제국, 공장 체계의 발전 등의 요소로 산업혁명 설명. 이에 못지않게 스피닝 제니 또는 증기기관과 같은 기술적 혁신의 역할도 컸음.
기술=응용과학?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사이의 관계는 실험실에서 수행하는 생의학적 연구와 신약 생산 사이의 관계만큼 그리 분명한 것은 아님. 그럼에도 최근의 역사적 연구는 뉴턴이나 후크와 같은 인물들(갈릴레오처럼 대륙에서 활동했던 인물뿐만 아니라)이 실용적 문제를 푸는 것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었음. 가령, 항해시 경도 결정 방법은 17,8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수학자들과 천문학자들이 찾아 헤매던 것. 그러나 여전히 산업혁명의 주요한 발명들을 지적하여 그것들이 과학혁명의 직접적 산물이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은 무리.
마가렛 제이콥이 보기에,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사이에는 아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발명들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음. 그 연관은 좀더 넓고 문화적인 것이었음. 어떤? 뉴턴 역학의 응용 가능성을 전파했던 대중적 교과서, 순회 강연자, 그리고 지역의 교육, 문학, 철학 협회 등으로 인해 새로운 과학적 학문은 유럽 어느 국가보다 18세기 영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음.
엔지니어들, 기계공들, 종교적으로는 비국교도였던 이들, 엘리트 및 중간 계층의 여성들까지 뉴턴주의에 정통. 이들의 뉴턴주의는 원리를 실제에 연결함으로써 과학을 기계와 연관지었음. 그리하여 이러한 지식을 운하, 터널 그리고 탄광을 파거나 기계를 제작하는 데에서 발생한 실제적 문제를 푸는 데 적용하려 했던 엔지니어들은, 그러한 기획에 자금을 댔던 기업가들과 공통된 뉴턴주의의 언어를 공유했음.
과학혁명의 시기를 옮겨라!
- Andrew Cunningham and Perry Williams, "De-centering the "Big Picture": The Origins of Modern Science and the Modern Origins of Sci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