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서의 다원주의: 행동을 촉구함
장하석, 『물은 H2O인가?』 (김영사, 2021), 5장.
요약
이 장에서 장하석은 자신의 다원주의를 정의하고, 앞선 장들에서 내비친 단서들(1장 : 플로지스톤주의의 종말이 화학의 발전을 지체시켰음. 2장 : 전기화학에서의 다원주의의 생산성. 3장 : 원자화학에서의 다원주의의 생산성. 4장 : 물이 H2O라는 불가피성이 없다는 점)을 묶어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체계적인 논증을 제시하고자 한다.
5.1 과학이 다원주의적일 수 있을까?
다원주의를 동기를 밝히고, 일원주의에 대항하는 다원주의를 정의하고, 그에 대한 일반적인 우려에 대해 답한다.
다원주의의 동기
다원주의의 직관적 동기는 경허함이다. 우리는 풍부하고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가 단 하나의 완벽한 과학 시스템을 발견할 성싶지 않다면, 다수의 과학 시스템들을 육성하는 것이 합당하다." 각각의 시스템은 나름의 장점이 있을 것이고, 제각각 다른 시스템이 실재의 다양한 부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 환원주의의 비현실성에 기초한 동기 : 환원주의 전략이 일부 성공적이라도 일반적으로 성공적일 수는 없는 것 같다. (1) 궁극적인 기초에는 끝이 없을 것 같고, (2) 기본 수준으로 가도 물리학이 단순해지지 않는 듯하며, (3) 때로 우리의 관심사에 따라 전체가 부분보다 단순할 수도 있다. 따라서 여러 수준의 이론이 필요하다.
현실적 비관주의에 기초한 동기 : 우리의 시도들 중 일부가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뜻밖의 실패가 과학을 모두 무너뜨리는 일을 방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유사한 직관들 있음(단일경작에 대한 반론, 갤리슨의 이론, 실험, 장비의 독립성과 엇갈린 발전에 의한 물리학의 튼튼함. 사슬보다 밧줄이 좋다는 퍼스의 직관). 쿤의 일원주의적 과학관에 대한 일반적 비판도 이러한 요점을 드러냄. 첫째는 새 패러다임에 의한 교체가 일어나려면 정상과학기에도 다원성이 필요하다는 점. 둘째는 성공적이었던 시스템이 실패했다고 그것을 완전히 버릴 이유는 없다는 점. 오히려 보존해야.
다원주의
일원주의적 통념을 지지하는 직관이 있긴 하다. "단 하나의 세계만 존재하므로 세계에 관한 진리도 단 하나뿐이며, 단 하나의 과학이 그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일원주의를 정식화하자면, 첫째, 과학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의 포괄적인 이론을 확립하는 것이고, 둘째, 좋은 탐구 방법이란 그런 설명을 산출할 수 있는 방법이며, 최소한 각각의 영역에서 가장 좋은 탐구 방법이 하나만 있다는 생각이다.
일원주의에 대한 장하석의 불만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과학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이든 이론의 일원주의적 성격 자체가 우리의 궁극적 목표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오히려 과학의 목표를 이루는 데 일원주의보다 다원주의가 좋을 것이라는 것이다.
장하석은 일원주의에 대항하여 다원주의를 과학의 이상으로 제안한다. 그의 다원주의는 "임의의 주어진 과학 분야에서 다수의 실천 시스템을 육성하는 것을 옹호하는 교설"로 정의된다. 이는 과학이 다원적이어야 한다는 규범적 진술을 넘어 다수의 실천 시스템의 현존을 촉진하겠다는 결심이다.
다원주의에 대한 우려 불식
첫째, 다원주의는 상대주의 아닌가? 다원주의는 상대주의가 아니다. 다원주의는 판단과 결심의 포기를 뜻하지 않는다. 일원주의와 다원주의의 차이는 테이블에 몇 개의 자리를 마련할 것인지에 따른 차이일 뿐, 누구를 어떤 기준으로 어떤 방식으로 앉힐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정답 외에 다른 열등한 답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혼란을 일으키는 것 아닌가? 문제는 궁극적인 정답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으며, 현재 정답이라 여겨지는 것 외의 가능성을 애초에 봉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봉쇄는 원하는 결과도 얻지 못할 뿐더러, 과학을 교조주의로 타락시킬 뿐이다. 불합리해 보이는 입장(가령 창조론)과는 논쟁할 가치도 없다는 것은 오만이며, 그들을 설득하거나 그들로부터 유익한 것을 얻기 위해서라도 앎의 불가피한 정치적 차원을 수용해야 한다.
둘째, 우리가 과연 다원주의적일 수 있는가? 두 가지 방식으로 다원주의적일 수 있다. (1) 개인이 일원적이더라도 집단은 (서로의 또는 중앙 통제에 의한) 관용을 통해 다수의 패러다임을 보유할 수 있다. (2) 개인도 노력하면 여러 시스템을 보유할 수 있다. 여러 시스템을 번갈아 사용하거나(틀 전환), 동시에 여러 시스템을 섞어서 사용할 수도 있으며(틀 섞기),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좋은 증거들이 있다. 생각의 영역에서는 다원주의가 괜찮을 수 있지만, 행위의 순간에는 다원주의가 비효율을 낳기에 억제되어야 한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효율적 행위를 위해 내적인 정합성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믿음들이 한결같아야 한다거나,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동일한 방법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적당히 자족적인 활동 뭉치들을 식별하는 것이다." 각각의 뭉치는 최대한 정합적으로 만들더라도, 때때로는 우리는 다른 뭉치로 옮겨가야 할 것이다. 물론 삐걱거림이 있겠지만, 그것은 삶의 일부이다. 우리가 삶에서 다양한 문제에 대처하여 서로 다른 대처법을 채택하는 데에는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으며, 심지어 하나의 기술을 만들기 위해 여러 시스템을 융합하기도 한다(GPS의 예 : 뉴턴 물리학,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지구중심좌표계, 평면좌표계).
셋째, 한정된 자원을 모든 시스템에 지원할 수는 없지 않을까? (1) 모든 시스템을 감당할 수는 없지만, 복수의 시스템을 감당할 자원은 있다. (2) 일부 시스템을 살려두는 데는 자원이 그렇게 많이 들지 않으며, 유사한 지원 프로그램들이 이미 존재했다. (3) 하나에만 집중하면 성과가 감소하는 시점이 도래할 개연성이 높으며, 모든 과학자를 한 방향에 밀어넣는 것은 자원 낭비이다. (4) 다원주의를 통해 (과학에 대한 관심이 확대됨으로써) 과학에 투입할 자원(과학자와 돈) 자체가 늘어날 수도 있다.
5.2 다원성의 혜택과 그 혜택을 얻는 방법
이 소절에서는 다원주의의 혜택에 기반하여 다윈주의를 옹호한다.
=== 5.3 다원주의의 실천에 관한 추가 언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