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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석은 일원주의에 대항하여 다원주의를 과학의 이상으로 제안한다. 그의 다원주의는 "임의의 주어진 과학 분야에서 다수의 실천 시스템을 육성하는 것을 옹호하는 교설"로 정의된다. 이는 과학이 다원적이어야 한다는 규범적 진술을 넘어 다수의 실천 시스템의 현존을 촉진하겠다는 결심이다.  
장하석은 일원주의에 대항하여 다원주의를 과학의 이상으로 제안한다. 그의 다원주의는 "임의의 주어진 과학 분야에서 다수의 실천 시스템을 육성하는 것을 옹호하는 교설"로 정의된다. 이는 과학이 다원적이어야 한다는 규범적 진술을 넘어 다수의 실천 시스템의 현존을 촉진하겠다는 결심이다.  


=====다원주의에 대한 우려 불식 =====
====다원주의에 대한 우려 불식 ====
첫째, 다원주의는 상대주의 아닌가? 다원주의는 상대주의가 아니다. 다원주의는 판단과 결심의 포기를 뜻하지 않는다. 일원주의와 다원주의의 차이는 테이블에 몇 개의 자리를 마련할 것인지에 따른 차이일 뿐, 누구를 어떤 기준으로 어떤 방식으로 앉힐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정답 외에 다른 열등한 답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혼란을 일으키는 것 아닌가? 문제는 궁극적인 정답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으며, 현재 정답이라 여겨지는 것 외의 가능성을 애초에 봉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봉쇄는 원하는 결과도 얻지 못할 뿐더러, 과학을 교조주의로 타락시킬 뿐이다. 불합리해 보이는 입장(가령 창조론)과는 논쟁할 가치도 없다는 것은 오만이며, 그들을 설득하거나 그들로부터 유익한 것을 얻기 위해서라도 앎의 불가피한 정치적 차원을 수용해야 한다.  
첫째, 다원주의는 상대주의 아닌가? 다원주의는 상대주의가 아니다. 다원주의는 판단과 결심의 포기를 뜻하지 않는다. 일원주의와 다원주의의 차이는 테이블에 몇 개의 자리를 마련할 것인지에 따른 차이일 뿐, 누구를 어떤 기준으로 어떤 방식으로 앉힐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정답 외에 다른 열등한 답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혼란을 일으키는 것 아닌가? 문제는 궁극적인 정답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으며, 현재 정답이라 여겨지는 것 외의 가능성을 애초에 봉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봉쇄는 원하는 결과도 얻지 못할 뿐더러, 과학을 교조주의로 타락시킬 뿐이다. 불합리해 보이는 입장(가령 창조론)과는 논쟁할 가치도 없다는 것은 오만이며, 그들을 설득하거나 그들로부터 유익한 것을 얻기 위해서라도 앎의 불가피한 정치적 차원을 수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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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장기적) 경쟁. 여러 시스템이 공존하면 경쟁이 촉진된다. 여러 시스템이 공존할 경우, 각 시스템은 자신들의 접근법을 정당화하고, 자금 제공자, 학생들, 잠재적 협력자들에게 판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 서게 됨으로써, 시스템들의 발전적인 경쟁이 촉진된다. (경쟁상대가 없는 시스템은 게을러질 것이며, 과학 전체는 사회로부터 매력을 잃을 수 있다.) 한편 여기서 강조되는 경쟁은 단거리 경주보다는 장거리 경주에 가까우며, 상대를 제거하는 경쟁이 아니라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승자 독식의 경쟁은 경쟁의 목적을 없애기 때문이다. 경쟁자를 성급히 제거하지 말아야 하는데, 경쟁자가 잘하던 것이나 추구하던 목표나 질문 자체를 상실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누락 효과).
셋째, (장기적) 경쟁. 여러 시스템이 공존하면 경쟁이 촉진된다. 여러 시스템이 공존할 경우, 각 시스템은 자신들의 접근법을 정당화하고, 자금 제공자, 학생들, 잠재적 협력자들에게 판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 서게 됨으로써, 시스템들의 발전적인 경쟁이 촉진된다. (경쟁상대가 없는 시스템은 게을러질 것이며, 과학 전체는 사회로부터 매력을 잃을 수 있다.) 한편 여기서 강조되는 경쟁은 단거리 경주보다는 장거리 경주에 가까우며, 상대를 제거하는 경쟁이 아니라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승자 독식의 경쟁은 경쟁의 목적을 없애기 때문이다. 경쟁자를 성급히 제거하지 말아야 하는데, 경쟁자가 잘하던 것이나 추구하던 목표나 질문 자체를 상실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누락 효과).


====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임무 ====
====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임무와 상보적 증식 ====
능동적 다원주의, 즉 지식의 육성을 위해, 과학사와 과학철학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직업적 과학자들의 다원주의는 그 직업적 제약에 한정되기 쉽다. 따라서 (보다 폭넓은) 능동적 다원주의는 직접적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 특히 과학사학자와 과학철학자의 활동을 요구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가? 과학사학자들은 과거의 과학에 실제로 존재했던 다원성을 드러냄으로써, 과학철학자들은 통상적인 과학관의 바탕에 깔린 우리의 일원주의적 집착을 들춰냄으로써 기여할 수 있다.  
능동적 다원주의, 즉 지식의 육성을 위해, 과학사와 과학철학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직업적 과학자들의 다원주의는 그 직업적 제약에 한정되기 쉽다. 따라서 (보다 폭넓은) 능동적 다원주의는 직접적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 특히 과학사학자와 과학철학자의 활동을 요구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가? 과학사학자들은 과거의 과학에 실제로 존재했던 다원성을 드러냄으로써, 과학철학자들은 통상적인 과학관의 바탕에 깔린 우리의 일원주의적 집착을 들춰냄으로써 기여할 수 있다.  


과학사학자들은 다원주의적 역사 서술을 통해 기여할 수 있다. 다원주의적 역사 서술은 다음의 명령의 수행이다. (1) 패배자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불운하게 배제된 합리적 대안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최선을 다해 살펴보라. (2) 종결 및 종결에 대한 설명에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나라. (3) 다원성을 과학의 정상적인 특징으로 부각하라. 딱히 승리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좋은 과학이 많이 실행된 사례들을 이야기하는 경험을 하고 나면, 과학에서 관건은 오로지 승리도 아니고 심지어 합의도 아님을 깨닫기가 쉬어질 것이다.
과학사학자들은 다원주의적 역사 서술을 통해 기여할 수 있다. 다원주의적 역사 서술은 다음의 명령의 수행이다. (1) 패배자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불운하게 배제된 합리적 대안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최선을 다해 살펴보라. (2) 종결 및 종결에 대한 설명에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나라. (3) 다원성을 과학의 정상적인 특징으로 부각하라. 딱히 승리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좋은 과학이 많이 실행된 사례들을 이야기하는 경험을 하고 나면, 과학에서 관건은 오로지 승리도 아니고 심지어 합의도 아님을 깨닫기가 쉬어질 것이다.


과학철학자들은 우리의 일원주의적 집착이 스며든 전제들을 식별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기여할 수 있다. 우선 이론 선택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다분히 일원주의적 편견에 빠져 있는데, 다원주의 철학자들라면 다원적 선택 자체도 합리적인 것임을 깨닫게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어떤 결과의 불가피성을 함부로 승인하지 말아야 한다.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에도 일원주의적 가정이 깔려 있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을 품고,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만들어야 한다.  
과학철학자들은 우리의 일원주의적 집착이 스며든 전제들을 식별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기여할 수 있다. 우선 이론 선택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다분히 일원주의적 편견에 빠져 있는데, 다원주의 철학자들라면 다원적 선택 자체도 합리적인 것임을 깨닫게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어떤 결과의 불가피성을 함부로 승인하지 말아야 한다.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에도 일원주의적 가정이 깔려 있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을 품고,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만들어야 한다.
 
능동적 다원주의는 과학사와 과학철학에게 역사 서술과 철학적 논평의 작업을 넘어 과학 그 자체, 즉 상보적 과학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즉 다원주의적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능동적 임무는 과학적 실천 시스템을 증식하여 현재의 정통 시스템을 보완하는 것이다. 과학사학자와 과학철학자는 소멸의 위기에 처한 시스템을 보호하고, 멸종했던 시스템을 되살리는 과학적 작업에 종사함으로써, 전무화된 과학이 외면하는 과학적 질문들을 다룰 수 있다.


=== 5.3 다원주의의 실천에 관한 추가 언급 ===
=== 5.3 다원주의의 실천에 관한 추가 언급 ===
첫째, 능동적 다원주의 대 다원주의적 태도. 켈러트, 론지노, 워터스(2006)은 "다원주의적 태도"를 옹호한다. 그들의 다원주의는 "과학 탐구의 내용과 실천을 해석하기 위한 접근법"으로서, 그러한 다원주의적 해석이 "진보로 이어지지 않는 무의미한 논란을 피할 수단을 제공"하고 "과학 지식의 편파성을 부각하은 데 기여"한다고 말한다. 장하석은 이러한 다원주의적 태도에 동의하지만 너무 수동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특정한 주제 영역마다 다원주의와 일원주의 가운데 어느 쪽이 생산적인지는 열린 문제로 둔다. 그런데 이를 알아보려면 시험을 해봐야 한다.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누가 다원주의적 태도의 실험을 해보겠는가? 장하석은 일원주의자는 실험을 수행하기 어려울테니, 다원주의자가 하는 수밖에 없다고, 즉 다원주의자라면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 인식적 다원주의 대 형이상학적 다원주의. 장하석은 자신의 인식적 다원주의가 존재론적 다원주의와 양립가능함을 인정하지만, 특정한 형이상학적 전제나 결론에 연루되길 원치 않는다. 장하석의 다원주의는 실재의 본성을 서술하려는 목표를 가지기보다는, 인간 지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장하석의 다원주의는 복잡한 특정 분야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셋째, 다원주의 대 메타-다원주의. 동기적 측면에서 일원주의는 광신주의처럼 위대한 성취를 밀어붙이는 데 도움이 되어 왔다. 그러나 현재도 그런 광신주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한 일원주의는 놀라운 성취 이면에 값비싼 비용을 치러야 했다. 그렇다면 다원주의자는 일원주의자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다원주의자는 일원주의자도 관용하는 메타-다원주의를 채택해야 할까? 장하석은 메타 다원주의를 채택하진 않으며, 이 문제를 "관용적 사회에서 절대주의자를 어떻게 처우할 것인가"와 같은 정치적 질문과 유사하게 취급한다. 다원주의는 다원주의를 존중하는 일원주의자만을 허용할 수 있다. 불관용적 일원주의는 허용할 수 없다. 또한 서로 다른 일원주의자들만으로는 관용의 혜택만 얻을 수 있다.
넷째, 상보적 과학 프로젝트에 대한 이 책의 기여. 회복, 비판적 의식, 새로운 발전 모두 기여했다. (1) 회복 : 프리스틀리의 전기화학 실험들, 초기 전기화학의 신기한 실험들. 중요한 회복의 성과는 발견보다는 복권이었다. 특히 플로지스톤주의 화학이나 전기분해에 대한 리터의 해석을 복권하는 데 힘을 보탰다. (2) 비판적 의식 : 물이 H2O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어떻게 합의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그에 대한 역사적 검토를 통해 이긴 진경이 완전하게 명백하게 우월했던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를 통해 "물은 H2O"라는 상식에 도전했고, 그러한 믿음에 도달하는 미묘하고 정교한 이유들을 검토하는 비판적 의식을 통해 과학 지식의 질을 높였다. (3) 새로운 발전 : 기초 전기화학에 관한 새로운 상보적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원조 전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해 실험을 하고, 볼타의 접촉 포텐셜 개념을 현대적인 전기화학의 틀 안에 수용하기 위한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그 실험적 연구 과정에서 전문 화학자들에게도 낯선 현상들을 산출해냈다. 이 연구는 현재 진행중이며, 앞으로 더 많은 성과가 나올 것이다.
== 관련 항목 ==
* [[Inventing Temperature]]
* [[Scientific Pluralism and the Chemical Revolution]]
[[분류:과학철학]]
[[분류:과학적 실재론]]
[[분류:과학적 방법]]
[[분류:장하석]]
[[분류:다원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