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서의 다원주의: 행동을 촉구함"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과학에서의 다원주의 장하석, 『물은 H2O인가?』 (김영사, 2021), 5장. == 요약 == 이 장에서 장하석은 자신의 다원주의를 정의하고, 앞선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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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서의 다원주의
장하석, 『물은 H2O인가?』 (김영사, 2021), 5장.
장하석, 『물은 H2O인가?』 (김영사, 2021),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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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석은 일원주의에 대항하여 다원주의를 과학의 이상으로 제안한다. 그의 다원주의는 "임의의 주어진 과학 분야에서 다수의 실천 시스템을 육성하는 것을 옹호하는 교설"로 정의된다. 이는 과학이 다원적이어야 한다는 규범적 진술을 넘어 다수의 실천 시스템의 현존을 촉진하겠다는 결심이다.  
장하석은 일원주의에 대항하여 다원주의를 과학의 이상으로 제안한다. 그의 다원주의는 "임의의 주어진 과학 분야에서 다수의 실천 시스템을 육성하는 것을 옹호하는 교설"로 정의된다. 이는 과학이 다원적이어야 한다는 규범적 진술을 넘어 다수의 실천 시스템의 현존을 촉진하겠다는 결심이다.  


==== 다원주의에 대한 우려 불식 ===
======다원주의에 대한 우려 불식 ======
첫째, 다원주의는 상대주의 아닌가? 다원주의는 상대주의가 아니다. 다원주의는 판단과 결심의 포기를 뜻하지 않는다. 일원주의와 다원주의의 차이는 테이블에 몇 개의 자리를 마련할 것인지에 따른 차이일 뿐, 누구를 어떤 기준으로 어떤 방식으로 앉힐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정답 외에 다른 열등한 답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혼란을 일으키는 것 아닌가? 문제는 궁극적인 정답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으며, 현재 정답이라 여겨지는 것 외의 가능성을 애초에 봉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봉쇄는 원하는 결과도 얻지 못할 뿐더러, 과학을 교조주의로 타락시킬 뿐이다. 불합리해 보이는 입장(가령 창조론)과는 논쟁할 가치도 없다는 것은 오만이며, 그들을 설득하거나 그들로부터 유익한 것을 얻기 위해서라도 앎의 불가피한 정치적 차원을 수용해야 한다.  
첫째, 다원주의는 상대주의 아닌가? 다원주의는 상대주의가 아니다. 다원주의는 판단과 결심의 포기를 뜻하지 않는다. 일원주의와 다원주의의 차이는 테이블에 몇 개의 자리를 마련할 것인지에 따른 차이일 뿐, 누구를 어떤 기준으로 어떤 방식으로 앉힐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정답 외에 다른 열등한 답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혼란을 일으키는 것 아닌가? 문제는 궁극적인 정답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으며, 현재 정답이라 여겨지는 것 외의 가능성을 애초에 봉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봉쇄는 원하는 결과도 얻지 못할 뿐더러, 과학을 교조주의로 타락시킬 뿐이다. 불합리해 보이는 입장(가령 창조론)과는 논쟁할 가치도 없다는 것은 오만이며, 그들을 설득하거나 그들로부터 유익한 것을 얻기 위해서라도 앎의 불가피한 정치적 차원을 수용해야 한다.  


둘째, 우리가 과연 다원주의적일 수 있는가? 두 가지 방식으로 다원주의적일 수 있다. (1) 개인이 일원적이더라도 집단은 서로를 관용함으로써 다수의 패러다임을 보유할 수 있다. (2) 개인도 노력하면 여러 시스템을 보유할 수 있다. 여러 시스템을 번갈아 사용하거나(틀 전환), 동시에 여러 시스템을 섞어서 사용할 수도 있다(틀 섞기).  
둘째, 우리가 과연 다원주의적일 수 있는가? 두 가지 방식으로 다원주의적일 수 있다. (1) 개인이 일원적이더라도 집단은 (서로의 또는 중앙 통제에 의한) 관용을 통해 다수의 패러다임을 보유할 수 있다. (2) 개인도 노력하면 여러 시스템을 보유할 수 있다. 여러 시스템을 번갈아 사용하거나(틀 전환), 동시에 여러 시스템을 섞어서 사용할 수도 있으며(틀 섞기),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좋은 증거들이 있다. 생각의 영역에서는 다원주의가 괜찮을 수 있지만, 행위의 순간에는 다원주의가 비효율을 낳기에 억제되어야 한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효율적 행위를 위해 내적인 정합성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믿음들이 한결같아야 한다거나,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동일한 방법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적당히 자족적인 활동 뭉치들을 식별하는 것이다." 각각의 뭉치는 최대한 정합적으로 만들더라도, 때때로는 우리는 다른 뭉치로 옮겨가야 할 것이다. 물론 삐걱거림이 있겠지만, 그것은 삶의 일부이다. 우리가 삶에서 다양한 문제에 대처하여 서로 다른 대처법을 채택하는 데에는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으며, 심지어 하나의 기술을 만들기 위해 여러 시스템을 융합하기도 한다(GPS의 예 : 뉴턴 물리학,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지구중심좌표계, 평면좌표계).  


셋째, 한정된 자원을 모든 시스템에 지원할 수는 없지 않을까? (1) 모든 시스템을 감당할 수는 없지만, 복수의 시스템을 감당할 자원은 있다. (2) 일부 시스템을 살려두는 데는 자원이 그렇게 많이 들지 않으며, 유사한 지원 프로그램들이 이미 존재했다. (3) 하나에만 집중하면 성과가 감소하는 시점이 도래할 개연성이 높으며, 모든 과학자를 한 방향에 밀어넣는 것은 자원 낭비이다. (4) 다원주의를 통해 (과학에 대한 관심이 확대됨으로써) 과학에 투입할 자원(과학자와 돈) 자체가 늘어날 수도 있다.  
다원주의의 동기. 주장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논제를 제시


=== 5.2 다원성의 혜택과 그 혜택을 얻는 방법 ===
=== 5.2 다원성의 혜택과 그 혜택을 얻는 방법 ===
이 소절에서는 다원주의의 혜택에 기반하여 다윈주의를 옹호한다.
이 소절에서는 다원주의의 혜택에 기반하여 다윈주의를 옹호한다.


=== 5.3 다원주의의 실천에 관한 추가 언급 ===
<nowiki>=== 5.3 다원주의의 실천에 관한 추가 언급 ===</nowi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