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서의 다원주의: 행동을 촉구함"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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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다원성의 혜택과 그 혜택을 얻는 방법 ===
=== 5.2 다원성의 혜택과 그 혜택을 얻는 방법 ===
이 소절에서는 다원주의의 혜택에 기반하여 다윈주의를 옹호한다.
이 소절에서는 장하석이 옹호하고자 하는 다원주의의 특징을 열거하고, 다원주의의 혜택에 기반하여 다윈주의를 옹호한다.


<nowiki>=== 5.3 다원주의의 실천에 관한 추가 언급 ===</nowiki>
장하석이 옹호하는 다원주의는 (3) 능동적 (2) 규범적 (1) 인식적 다원주의이다. (1) 인식적 : 형이상학적 다원주의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2) 규범적 : 지금까지의 과학이 다원주의적이었는 서술적 주장이 아니라, 과학이 다원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과학의 목표들과 과학 안에서 작동하는 근본적 가치들에 관한 어떤 합당한 입장을 전제하더라도 다원주의가 일원주의보다 더 많은 혜택을 과학에게 준다"고 주장한다. (3) 능동적 : 단지 구경꾼의 가치 판단에 그치지 않고 다수의 시스템을 '육성'하는 일에 뛰어들겠다는 다짐을 강조한다.
 
위와 같은 다원주의의 핵심적인 옹호 논증은 다원주의의 두 가지 혜택에 기초한다. 하나는 관용의 혜택이고, 다른 하나는 상호작용의 혜택이다.
 
==== 관용의 혜택 ====
 
첫째, 다원주의는 실패의 위험에 대비하는 분산 투자이다. 과학의 목표를 진리로 두더라도, 혹은 과학의 목표를 경험적 적합성에 두더라도, 과학적 발전의 예측 불가능성을 고려할 때,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향을 열어두는 것이 하나의 방향만 열어두는 것보다 좋다. 근본적인 예측 불가능성 하에서, 특정 순간의 추측에 기반해 성공 가능성이 높은 하나만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리석으며, 한번 제거되거나 망각된 탐구의 길을 재발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둘째, 다원주의는 영역 분담을 통해 과학의 목표를 더 잘 성취하게 해준다. 현재 바로 지금의 입장에서, 진리는 작업가능한 목표가 아니다. 현재적 시점에는 그 성취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몇 가지 목표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경험적 적합성을 목표로 설정할 경우, 영역에 따라 그 목표를 성취하는 데 적절한 시스템이 있다. 최선의 과학 이론도 모든 현상을 다루지 못하며, 여전히 고전역학의 영역에서는 고전역학이 필요하다(이는 단지 실용적인 것이 아닌데, 우리는 거시적 강체에 적절한 슈뢰딩거 방정식을 세우지 못한다). 실용적인 목표를 따질 경우, 고전역학도 문제마다 뉴턴의 운동방정식을 사용하는 것이 편리할 때가 있고 라그랑지안이나 해밀토니안을 사용하는 것이 편리할 때가 있다. 직관적 이해를 추구할 경우에도, 다양한 이상화된 모형이 현상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이해를 제공해줄 수 있다. 측정에서도 측정 영역에 따라 다양한 측정법이 필요하다.
 
셋째, 다원주의는 과학의 다양한 목표를 성취하게 해준다. 과학의 목표를 하나로 볼 이유가 없다. 그러면 쿤의 정확성, 단순성, 일관성, 생산성, 넓은 범위, 반 프라센의 우아함, 완전성, 통합력, 설명력 등도 과학의 인식적 가치로 볼 수 있다. 반 프라센은 이러한 가치들이 경험적 적합성에 비해 부차적이라고 볼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실제 과학자들은 그러한 가치들을 목표 삼아 과학에 헌신하곤 한다. 그렇다면 다양한 목표(e.g., 경험적 적합성 대 이해) 및 목표의 다양한 해석들(e.g., 이해에 대한 다양한 해석, 단순성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다원주의가 필요하다. 이 책의 대표적인 사례는 경험적 포괄성을 추구한 프리스틀리 대 이론적 우아함을 추구한 라부아지에. 화학결합에 대한 설명을 추구한 전기화학자들 대 화학결합의 구조만을 추구한 유기화학자들.
 
넷째, 다원주의는 앎을 풍부하게 해준다. 한 시스템이 우리의 목표들에 꽤 적합하게 종사할 수 있을 때에도, 다른 시스템 역시 똑같은 목표들에 새로운 방식들로 종사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동일한 문제에 대한 뉴턴적 정식화, 라그랑지안 정식화, 해밀토니안 정식화 가능. 동일한 현상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과 기계론적 설명 가능. 세계를 음미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 많으면, 자연을 향한 창들이 더 많아지고, 자연에 대한 이해가 더 풍부해지는 것이다. 증거에 의한 이론 미결정성은 단지 나쁜 것이 아니다!
 
====상호작용의 혜택 ====
첫째, 융합(짜깁기). 여러 시스템을 임시방편적으로 융합하여 더 나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는 GPS. 3장의 원자화학의 역사도 융합의 좋은 예인데, 당시의 실제 화학자들은 다양한 시스템을 적당히 짜깁기하여 사용했으며, 가장 대표적인 융합의 거장은 베르셀리우스.
 
둘째, 수입. 한 시스템은 다른 시스템의 성과를 빌려올 수 있다.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와 캐븐디시의 성과(산소 발견 실험, 물 합성 실험)을 빌려온 셈인데, 라부아지에의 방식에서는 그러한 실험들이 나올 여지가 별로 없었고, 플로지스톤주의자에게는 자신들의 실험을 새롭게 해석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볼타 전지도 볼타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사용되어 새로운 성과를 냈다. 그러나 볼타의 접촉 전기 이론은 볼타 전지의 발명으로 이끈 중요한 동기였다. 물론 남의 것을 빌려 쓰는 과정은 약간의 재조정과 재발명을 요구한다.
 
셋째, (장기적) 경쟁. 여러 시스템이 공존하면 경쟁이 촉진된다. 여러 시스템이 공존할 경우, 각 시스템은 자신들의 접근법을 정당화하고, 자금 제공자, 학생들, 잠재적 협력자들에게 판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 서게 됨으로써, 시스템들의 발전적인 경쟁이 촉진된다. (경쟁상대가 없는 시스템은 게을러질 것이며, 과학 전체는 사회로부터 매력을 잃을 수 있다.) 한편 여기서 강조되는 경쟁은 단거리 경주보다는 장거리 경주에 가까우며, 상대를 제거하는 경쟁이 아니라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승자 독식의 경쟁은 경쟁의 목적을 없애기 때문이다. 경쟁자를 성급히 제거하지 말아야 하는데, 경쟁자가 잘하던 것이나 추구하던 목표나 질문 자체를 상실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누락 효과).
 
====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임무 ====
능동적 다원주의, 즉 지식의 육성을 위해, 과학사와 과학철학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직업적 과학자들의 다원주의는 그 직업적 제약에 한정되기 쉽다. 따라서 (보다 폭넓은) 능동적 다원주의는 직접적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 특히 과학사학자와 과학철학자의 활동을 요구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가? 과학사학자들은 과거의 과학에 실제로 존재했던 다원성을 드러냄으로써, 과학철학자들은 통상적인 과학관의 바탕에 깔린 우리의 일원주의적 집착을 들춰냄으로써 기여할 수 있다.
 
과학사학자들은 다원주의적 역사 서술을 통해 기여할 수 있다. 다원주의적 역사 서술은 다음의 명령의 수행이다. (1) 패배자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불운하게 배제된 합리적 대안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최선을 다해 살펴보라. (2) 종결 및 종결에 대한 설명에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나라. (3) 다원성을 과학의 정상적인 특징으로 부각하라. 딱히 승리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좋은 과학이 많이 실행된 사례들을 이야기하는 경험을 하고 나면, 과학에서 관건은 오로지 승리도 아니고 심지어 합의도 아님을 깨닫기가 쉬어질 것이다.
 
과학철학자들은 우리의 일원주의적 집착이 스며든 전제들을 식별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기여할 수 있다. 우선 이론 선택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다분히 일원주의적 편견에 빠져 있는데, 다원주의 철학자들라면 다원적 선택 자체도 합리적인 것임을 깨닫게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어떤 결과의 불가피성을 함부로 승인하지 말아야 한다.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에도 일원주의적 가정이 깔려 있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을 품고,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만들어야 한다.
 
=== 5.3 다원주의의 실천에 관한 추가 언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