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론 비교: 하이에크와 기든스

<사회과학의 철학 서평 과제> ■The Constitution of Liberty, Friedrich A. Hayek ■The Constitution of Society, Anthony Giddens

방법론 비교 : 하이에크와 기든스

담당교수 : 이상욱 | 제출자 :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2004-20309 정동욱 | 제출일 : 2004.5.12


1. 내용 요약

1) The Constitution of Liberty

이 책의 목적은 어떤 정책이 자유체제에 적합한가를 판단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다. 1부에서는 전체논의의 전제가 되는 자유의 가치에 대해 논한다. 자유가 왜 필요하고 또 자유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보여줄 것이다. 2부에서는 자유의 원리를 보존하기 위한 원칙들을 검토할 것이다. 3부에서는 그로부터 오늘날의 복지국가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 속에서 자유의 원리를 훼손하는 정책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살피고, 자유체제에 적합한 정책의 기준을 제시한다.

1부. 자유의 가치 ‘(타인의) 강제가 없는 상태로서’의 ‘개인적 자유’는 ‘내적 자유’, ‘정치적 자유’, ‘힘, 권력으로서의 자유’ 등과 구분된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전자의 ‘개인적 자유’와 후자의 ‘자유들’은 양립가능하긴 하지만, 후자의 자유들을 우선시할 경우 개인적 자유가 훼손될 위험이 있다. 즉, 무엇을 할 수 있는 허가로서의 자유 또는 권력으로서의 자유는 오히려 타인에 대한 강제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인간의 문명은 계획적으로 건설된 것이 아니며, 우리는 문명을 충분히 알 수 없으며, 계획적으로 건설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것이며 이는 자주 자유의 적이 된다고 말한다. 오히려 문명의 성장 또는 진보는 우연의 산물에 가깝다. 설계 없이도 진보가 지속되는 명백한 이유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성공한 것들이 존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화론적 자동적인 메커니즘은 ‘개인적 자유’ 때문에 가능하다. ‘개인적 자유’의 보장을 통해서만 새로운 발전의 기회와 가능성이 마련되고 그에 대한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것이 보장되지 않을 경우 끊임없는 사회진화의 과정을 멈추게 된다는 논리이다. (부자유로운) 다수는 특정 개인의 무한한 자유로부터 혜택을 받는다. 대부분의 다수는 ‘특정 개인들이 자유를 (모험적으로) 이용한 결과’에 의해 시도되고 확인된 사항들을 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른 사람에게는 아직 그 혜택이 미치지 못한 새로운 성취로부터 이미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 즉 불평등의 존재이다. 진보의 길은 과거에 누군가가 이미 지나갔기에 한결 수월하다. 지금은 소수만이 향유하는 지나치게 낭비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결국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용가능해질 삶의 스타일을 실험하는 대가에 대한 지불인 것이다. 자유를 위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법 앞의 평등이다. 이 말은 인간이 ‘본성’의 결과이든 ‘양육’의 결과이든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대우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해악을 해결하기 위해서일지라도 자의적 강제의 사용은 정당화되지 못한다. 대부분의 평등주의자들은 ‘본성’의 결과인 차이와 ‘양육’의 결과인 차이를 다르게 보며 상속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어떤 개인의 자질이 가족배경의 산물일 때 유전자의 산물일 때보다 사회에 덜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은 근거가 없다. 가족이 도덕, 취향 및 지식의 전수를 위한 도구로써 개인간의 차이를 만들어내더라도 바람직하다고 믿는다면 재산의 이전 또한 막을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규범과 전통을 물려주는 가족의 기능은 물질적 재화의 전수 가능성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2부. 자유와 법 강제란 해를 끼칠 위협과 그것을 통해 특정한 행위를 유발할 의도를 모두 포함한다. 이러한 강제는 한 개인이 자신의 정신적 능력을 완전하게 이용하고 공동체를 위해 최대한 기여하는 것을 막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권력(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능력)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강제하는 권력, 즉 위협을 통해 타인을 자신의 의지에 강제로 복속시키는 권력이 나쁜 것이다. 강제는 특정한 서비스나 이익을 제공하려고 하는 조건이나 상황과는 조심스럽게 구별되어야 한다. 상인이 자신이 원하는 가격이 아니면 원하는 물건을 제공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강제’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필수적인 상품에 대한) 독점자는, 예를 들어 오아시스에 있는 샘의 소유자라면, 진정한 의미의 강제를 행사할 수 있다. ‘강제’를 제한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일반규칙’의 실행이다. 일반규칙의 적용이 자의적이지 않고 유사한 상황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도록 만들어진 것인 한 그러한 규칙은 자연법칙과 동일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 대표적 예인 국가의 법률은 적어도 예측가능한 강제이기 때문에, 임의적인 권력이 행사하는 자의적인 강제보다 개인을 훨씬 덜 제한한다. 일반원칙으로서의 법률은 개인의 자유를 위한 본질적인 조건이며, 그것을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법률의 주된 기능이다. ‘인간이 아닌 법의 통치’의 원리는 정부의 자의성에 맞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핵심 원리이다. 그러나 법의 통치라는 형식적 절차만 지켜진다고 법치가 유지되진 않는다.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서도 법치의 원리는 훼손될 수 있다. 이 때 법치의 훼손되어서는 안 될 원리란 다음과 같다. 첫째, 법치란 정부가 알려진 법의 수행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에게 강제를 행사하지 말아야 한다. 법이 없다면 죄도 없고, 위법도 없다. 둘째, 법은 최대한 확실해야 한다. 셋째, 법은 일반적이고 평등해야 한다. 추가적으로 권력분립 원칙 또한 법치의 일부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자유가 빠져나갈 수 있는 틈새’로 유력한 것이 행정부의 재량권이다. 효율성을 위해 재량권은 불가피할 수 있지만, 행정부의 재량적 행위가 개인의 사적 영역(사적 개인과 그 소유권)을 침범하는 모든 경우에 대해서 법원은 그 특정한 행위가 합법적인가, 초법적인가, 또는 법이 요구하는 것인가에 대해 판단할 권한을 가져야 한다. 즉 그 경우에 한해서 행정부의 재량권은 금지된다. 이러한 원칙은 경제정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가능하지만, 자유체계가 기반하고 있는 원칙에 반하는 개입은 배제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의적인 정책수단이 계속 등장하는 이유는 법치의 한계 안에서는 달성될 수 없는 정책목표 ― 특히 분배정의 ― 들 때문이다. 분배적 정의는 일반준칙이 아닌 계획당국의 특정한 목표와 지식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결국 당국이 개인들이 해야할 일을 결정하게 된다. 이는 개인적 자유를 원리적으로 훼손하게 된다.

3부. 복지국가에서의 자유 하이에크는 현대 복지국가에서 쟁점이 되는 것들, 특히 각종 사회정의를 위한 정책들이 지켜야할 원칙에 대해서, 노동조합, 사회보장, 조세와 재분배, 화폐체계, 주택 및 도시계획, 농업 및 천연자원, 교육과 연구 등 각 세부사항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그가 적은 것들을 일일이 요약하기란 힘들며, 1부와 2부에서 언급했던 기본원칙을 각 부문에 적용한 것으로 보면 된다. 그 대부분의 결론은 자유와 법치의 원칙에 어긋나는 정부의 재량적 개입은 선의의 의도에 의한 것일지라도 종국에는 해악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점이다.

2) The Constitution of Society

이 책은 ‘구조화(structuration) 이론’이라는 자신의 독창적인 사회이론에 대한 소개서이다. 기든스가 ‘구조화’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이유는 대립하는 두 사회이론 ― 객관적 결정론과 해석적 사회학 ― 모두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첫째, 특히 기능주의와 구조주의로 대표되는 구조결정론에 강한 불만을 나타내는데, 이러한 사회이론은 구조를 행위의 외부에 설정함으로써 행위와 구조의 역동적인 관계를 설명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이다. 둘째, 해석적 사회학의 경우에는 행위와 의미에 대한 미시적 설명을 제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에 가해지는 제약과 제재를 적절히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갖는다. 객관적 결정론과 해석적 사회학을 동시에 거부하려 한 기든스는 결정론과 해석적 사회학에 내재된 이원론(dualism)을 비판하면서 ‘구조의 이중성(duality)’이라는 대안적 개념을 내놓는다. 여기서 구조의 이중성이란 사회구조가 반복적으로 조직하는 실천의 ‘매개’이자 ‘결과’라는 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사회체계의 구조적 속성은 행위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생산과 재생산에 지속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구조화란 바로 사회적 행동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 관계가 구조지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런 구조의 이중적 성격을 부각하기 위해 기든스는 구조와 체계를 새롭게 정의한다. ‘구조’가 사회체계의 속성으로 구성된 규칙과 자원을 말한다면, ‘체계’는 규칙적인 사회적 관행으로 조직된, 행위자들 및 집합체들 사이의 재생산된 관계를 지칭한다. 여기서 규칙은 의미의 구성과 사회적 행동양식의 제재에 관련되어 있으며, 자원은 사회적 행위의 조정에 연관된 ‘권위적 자원’과 물질적 세계의 통제에 연관된 ‘할당적 자원’으로 나뉘어진다. 요컨대 구조는 사회적 행위의 생산 및 재생산에 사용되는 동시에 체제재생산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제약인 동시에 가능성이다. 이러한 구조의 이중성 논의는 무엇보다도 행위의 자율성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구조의 이중성에 따르면, 행위자는 구조의 규칙과 자원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존재임과 동시에 규칙과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기든스는 행위자의 이런 능력을 성찰적 감시(reflexive monitoring)로 개념화하는데, 이러한 행위의 성찰적 감시가 행위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내고, 이 결과가 피드백을 통해 행위의 인식하지 못하는 조건을 이루게 된다고 본다. 행위자는 ‘행위하는 동안 자신이 행하는 것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으며, 이러한 ‘성찰적(reflexive) 능력’은 부분적으로는 '담화적 의식‘에 그리고 대부분은 ‘관행적 의식(practical consciousness)’ 수준에 기반해 있다. 기든스에게 있어 재생산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는 ‘관행적 의식’은 ‘담화적 의식’과 ‘무의식’과 구별되는 행위자가 사회생활에서 활용하는 암묵적 지식을 말하며, 매일매일의 사회생활을 반복하는 ‘관례화’를 지탱하는 핵심요소이다. 기든스에 의하면, 행위자는 보통 주어진 조건하에서 관행적 의식에 기반한 관례화를 통한 사회생활을 지속해나가는 동시에, 그 생활에 내재된 행위자의 성찰적 감시가 새로운 구조적 조건을 낳게 된다고 본다.

위와 같은 성찰적 행위자에 대한 개념화를 기반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으로서의 공-현전 상황의 상호작용을 분석한 기든스는 그러한 분석을 사회체계의 더욱 광범위한 측면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이기 위해 시-공간 안에서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방법에 대해 이론화하기 시작한다. 시-공간에 대한 논의는 헤거슈트란트의 시간-지리학(time-geography)에서 출발한다. 헤거슈트란트는 시-공간 범위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사회유형들의 성격은 능력제약과 연결제약에 의해 제한된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기든스는 이러한 시-공간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상호작용의 무대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면의 영역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밝힌다. 성찰적 행위자는 의사소통적 행위에서 의미 유지를 위해 ‘무대’를 끊임없이 이용하기 때문이며, 무대 역시 대면의 연쇄적 특성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영역화된다. 기든스는 위의 공-현전 상황의 대면들을 ‘거시구조적인’ 사회적 속성이 만들어지는 토대로 여기거나, 그 반대로 공-현전 상황의 상호작용이 규모가 크고 오랫동안 확립되어온 제도의 견고성에 비해 덧없는 것일 뿐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기든스에 의하면, 미시/거시의 대립은 이원론의 쓸모없는 대립에 불과하며, 미시/거시의 대립은 공-현전 맥락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광범위한 시-공간 원거리화(time-space distanciation) 체계에 구조적으로 연루되는가, 다시 말해 그들 체계가 더욱 큰 시-공간 부문에 어떻게 퍼져나가는가에 대한 관심으로 적절히 재개념화된다고 한다. 이는 사회통합과 체계통합과의 연계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에 따르면, ‘사회통합’은 공-현전의 맥락에서 행위자 사이의 교호성, 즉 대면적 상호작용 수준에서의 체계성을 의미하고, ‘체계통합’은 확장된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행위자 혹은 집합체 사이의 교호성, 즉 시간 혹은 공간에서 물리적으로 부재한 사람들 사이의 연관을 가리킨다. 체계통합 메커니즘은 사회통합 메커니즘을 분명히 전제하지만, 그것은 핵심이 되는 또다른 측면에서 공-현전의 관계에 관련되는 것들과는 구분된다. 이때, ‘사회체계’ 및 ‘사회’의 개념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 기능주의와 자연주의는 ‘사회들’을 분명히 한정지워진 실체로, ‘사회체계’를 내적으로 고도로 통합된 단일체로 수용하도록 고무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들’은 사회체계인 동시에 복합적인 사회체계들의 상호교차로 구성되는 것으로서 쉽게 구분되는 경계선이 거의 없으며, 사회체계의 체계성의 정도 또한 대단히 가변적이다. 한편, ‘구조’에 대해서는 구조적 사회학과 방법론적 개인주의의 입장을 거부하며 새로운 개념들을 도입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구조적 원리’라는 개념이며 그것은 사회 전반 또는 사회적 총체의 구조적 모습을 뜻한다. 또한 모순 개념에 대해서 구조적 원리의 개념을 통해서만 사회분석과 관련해 유용하게 분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입장으로 사회변동 연구에 접근한 기든스는 ‘사회변동이론’을 찾으려는 시도에 대해 회의적이다. 특히, 진화론적 발상 ― 구체적으로는 사적유물론 ― 이 선호해온 도식은 거부되고 해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론’에 회의적이라는 말이 ‘일반화’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든스는 위에서 언급한 ‘구조적 원리’, ‘사회사회체계’, ‘시-공간 경계’와 더불어 ‘에피소드’와 ‘세계시간’을 덧붙여 사회변동을 논한다. 기든스에 따르면 모든 사회생활은 ‘에피소드’의 시리즈로 제시될 수 있다. 일정한 유형의 대규모 변동과정에서,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나름대로 유용하게 비교가능하지만 맥락으로부터 완전히 추상화된 채 비교될 수는 없다. 이에 덧붙여서 기든스가 중요하게 언급하는 것이 ‘세계시간’의 영향이다. ‘세계시간’의 영향은 에피스드 유형에 관한 일반화를 제한하는 요소들과 관련되어 있다.

기든스는 자신의 ‘구조화이론’을 종합하면서, 자신의 이론과 조응하는 몇몇 조사연구를 제시한다. 그리고나서 자신의 이론이 함축하고 있는 ‘사회과학’의 의미를 정리한다. 이때 ‘이중해석학(double hermeneutics)’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사회과학과 그 연구대상이 되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해석적 상호작용을 말한다.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 달리 보편적 법칙이 있을 수 없는데, 이는 사회과정에 대한 성찰이 모집단에 지속적으로 개임-이탈-재개입함으로써 조사대상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과학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이중해석학의 중요성을 고려했을 때, ‘기술(description)'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과학의 실천적 공헌은 제한적이지만, 세상이 그들이 분석하는 세계로 걸러진다는 관점에서 보면 사회과학의 실천적 결과는 정말로 심대하다.


2. 방법론 비교

크게 보았을 때, 하이에크의 ‘(The) Constitution of Liberty'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대립을 주된 축으로 경험주의적 통찰의 우수성을 전제로 ‘자유’의 가치를 논하는 글인 반면, 기든스의 ‘(The) Constitution of Society’는 구조주의와 행위이론의 대립을 주된 축으로 둘의 절충을 모색하는 자신의 사회과학 방법론인 ‘구조화이론’을 소개하는 글이다.

1) 하이에크 : 진화론적 설명과 자유로운 행위자

하이에크에 있어, 사회는 인간행위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인간설계의 결과는 아니다. 문명의 성장 또는 진보에 일반법칙은 없으며, 그것은 오히려 우연의 산물에 가깝다. ‘어떠한 문명이 왜 성공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 문명의 어떠한 특징 때문이었는지를 모르더라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질문에 대해서는 ‘성공한 것들이 존속했기 때문’이라고 진화론적으로 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편, 이러한 답변을 넘어서는 오만한 합리주의적 설계이론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어리석은 시도라고 비웃으며, 17세기 헤일의 홉스비판을 인용한다. “오랜 경험은 가장 현명한 위원회가 얼른 예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법률의 편리함, 또는 불편함에 관한 발견들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제도의 존재이유를 우리에게 명확히 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확실성을 주는 제도화된 법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개별제도들의 존재이유는 모를지라도 그것들을 관찰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이에크는 위의 진화론적 설명에 대한 자동적인 메커니즘을 부여하는데, 그것이 바로 ‘개인적 자유’의 존재이다. ‘개인적 자유’의 보장을 통해서만 새로운 발전의 기회와 가능성이 마련되고 그에 대한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보장되지 않을 경우 끊임없는 사회진화의 과정을 멈추게 된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위의 ‘어떠한 문명이 왜 성공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성공한 것들이 존속했기 때문’이라는 답변 외에 ‘그 문명의 어떠한 특징 때문에’라는 답변은 왜 안되는가? 두가지 답변은 서로 배치되는가? 논리적으로 두가지 답변은 배치되지 않으며, 상호보완적일 수 있다. 후자의 답변이 하이에크에게 거부되는 이유는 첫째, 사회현상이 개인행동의 분석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으며 각 개인들은 하나의 원리로 설명될 수 없다는 생각과 둘째, 인간행위의 산물은 개인이 파악하기엔 너무 복잡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기든스의 글에서 인용된 하이에크는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데 타자를 향한 개인의 행위와 기대되어진 개인의 행위에 대한 이해 이외의 방법은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하이에크의 이 글 전체에서 함축하는 바에 따르면, 각 자유로운 행위자들은 매우 다양한 기질,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보통 특출한 기질과 신념을 가진 엘리트 행위자들에 의해 사회변화가 주도되며, 사회가 변해감에 따라 다수 행위자의 신념체계 또한 변해간다는 것이다. 한편, 복잡계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그의 생각은 ‘우리는 문명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로 요약되며, 그에 대한 어떠한 설명과 설계도 거부하는 결과를 낫는다. 이에 대한 예외가 있다면, 가상의 모델로서의 경제학과 사회전체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이다. 이러한 전제를 가진 하이에크에게, 특정한 제도, 특정한 사회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은 거부될 수밖에 없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가능한 설명은 ‘개인적 자유’의 존재가 사회진화를 지속시켜왔고, 특정한 제도, 특정한 사회는 그러한 사회진화의 산물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설명밖에 없다.

2) 기든스 : 성찰적 행위자와 이중해석학

하이에크는 몇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사회현상에 대한 설명을 거부했지만, 기든스는 완벽하진 못하더라도 사회현상에 대한 설명에 의의를 두었다. 구조주의의 결정론과 행위이론의 주관성 모두를 거부하고자 한 기든스는 성찰적 행위자를 도입함으로써, 행위자의 자율성을 보장하면서도 사회에 대한 ― 완전히 추상적이거나 시-공간을 초월하는 법칙은 불가능하지만 ― 일반적인 설명을 시도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구조의 영향을 언급하는 사회과학은 거의 대부분 기능주의적 설명을 필요로 했으며 행위자의 의도는 무시되곤 했다. 예컨대, 산업자본주의에서 교육활동을 거친 이후 계급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할 때, 기존의 설명에서는 산업자본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일정수준의 계급분포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언급 외에는 별다른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지 노동계급에 진입하는 노동계급의 아이들은 산업자본주의라는 사회구조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끌려간 것처럼 묘사되고, 행위자의 행동의 의도성은 무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방식으로는 실질적인 재생산 조건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이러한 기능주의적 설명의 난점을 폴 윌리스는 노동계급이 되는 반항아들을 성찰적 행위자로 간주함으로써 해결한다. 노동계급이 되는 반항아들은 사회구조에 수동적이 아닌 오히려 능동적인 방식으로 개입한다. 그들은 학교라는 사회체계와 사회속에서의 자신의 지위의 본질에 대해 상당부분 ― 더 넓은 측면에 대해서는 부정확하게 ― 간파하고 있었고, 그러한 간파는 그들의 반항적 태도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적인 반항적 태도는 ‘노동계급의 재생산’이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러한 윌리스의 연구는 ‘반항아들’의 상황지워진 행위 맥락에서, 위에서 산업자본주의의 구조적 관계가 어떻게 행위 속에서 유지되며 또 행위에 의해 재생산되는지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기든스는 이러한 예를 통해, 구조로부터 행위를 혹은 행위에서 구조를 ‘읽어내지’ 않는 것,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이원론을 거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편, 기든스는 사회과학의 중요성을 이중해석학에서 찾는다. 성찰적 행위자를 도입함으로써, 각 행위자는 나름의 사회이론가로서 간주된다. 위의 예에서 반항아들은 학교체계에 대한 전문적인 이론가이다. 이러한 성찰적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가 (자신 또는 사회과학자의) 이론에 영향을 받는 특징을 가진다. 기든스는 이러한 사회과학과 그 연구대상이 되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해석적 상호작용을 이중해석학이라고 말한다. 만약 윌리스의 계급재생산 연구에 대해 노동계급의 아이들이 안다면 아이들의 행위패턴은 달라질 것이고 계급의 재생산조건은 윌리스의 일반화된 설명과 들어맞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폴 윌리스의 연구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인가? 오히려 기든스는 그 점이 바로 사회과학의 진정한 의미라 대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