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을 거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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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Feyerabend, Against Method: Outline of an Anarchist Theory of Knowledge, third edition (New Left Books, 1993). 아래의 번역은 정병훈의 번역본 『방법에의 도전 : 새로운 과학관과 인식론적 아나키즘』 (한겨레, 1987)을 참고하여 현대적인 문체로 다듬은 것이다.

본문

방법을 거부하며: 무정부주의적 인식론의 개요

폴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

정병훈 옮김, 정동욱 수정


1장. 무엇이든 좋다

역사적 사례들에 대한 검토와 관념과 행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추상적 분석으로부터 다음이 밝혀진다. 진보를 방해하지 않는 유일한 원리는 무엇이든 좋다(anything goes)이다.

과학이라는 활동을 관장하는 견고하고, 불변하며, 절대적 구속력을 가진 원리들을 담고 있는 방법이라는 관념은 역사적 연구 결과들에 직면하여 상당한 곤경에 빠진다. 이제 우리는, 인식론에 단단히 근거한 아무리 그럴듯한 규칙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위반되지 않는 규칙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위반들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들이 아니며, 불충분한 지식이나 피할 수 있었던 부주의의 결과도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반대로, 우리들은 그러한 위반이 진보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최근 논의에서 나타난 가장 현저한 특징 중 한 가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즉 고대 원자론의 발명이나, 코페르니쿠스 혁명, 현대 원자론(기체 운동론, 기체 확산 이론, 입체 화학, 양자 이론)의 출현, 빛의 파동 이론의 점진적 출현과 같은 사건들과 발전 사례들은, 일부의 사상가들이 어떤 “분명한” 방법론적 규칙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결심했거나 아니면 그 규칙들을 무의식 중에 깨뜨렸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러한 자유로운(liberal, 무제약적인) 실천 양식은 단지 과학의 역사에서 나타난 사실만이 아니다. 그것은 지식의 성장을 위한 적절하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어떤 규칙이 주어지든, 그 규칙이 아무리 ‘근본적’이거나 ‘합리적’이라 하더라도, 그 규칙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규칙을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한 상황이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임시방편적 가설, 또는 잘 확립되어 널리 수용된 실험적 결과들과 모순되는 가설, 또는 경험적으로 적합한 기존의 대안보다 협소한 내용을 가진 가설, 또는 자기-모순적인 가설 등을 도입하고 발전시키고 옹호하는 것이 바람직한 상황들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논증이 자신의 미래지향적인 성격을 잃고 진보의 장애물이 되는 상황도 존재하며, 이러한 상황은 꽤 자주 나타난다.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논증이 사용되기도 하고, 통상 생각되는 것보다 많이 사용되어야 할 수도 있지만) 오직 논증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의 산물로 보이는 것들 — 언어의 숙달, 풍부하게 명료화된 지각 세계의 존재, 논리적 능력 — 이 부분적으로는 주입(indoctrination) 덕분이고 부분적으로는 자연 법칙에 의한 성장 과정 덕분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논증이 정말로 효력을 가진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것은 논증의 의미 내용(semantic content)보다 그것의 물리적 반복 덕분인 경우가 더 많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어른뿐만 아니라 과학, 종교, 성매매 등의 제도(의 이론적 부분)의 성장에 있어서도 비논증적인 성장의 가능성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확실히, 어린 아이에게 가능한 일 — 사소한 자극을 통해 새로운 행동 양식을 획득하는 일, 의식적인 노력 없이 그것에 익숙해지는 일 — 이 어른에겐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당연하게 간주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물리적 환경의 파괴적 변화, 전쟁, 전반적 도덕 체계의 붕괴, 정치 혁명이 어른의 중요한 논증 양식들을 비롯한 반응 양식들을 마찬가지로 변형시킬 것이라고 예상해야 한다. 그러한 변형 역시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 있으며, 합리적 논증의 유일한 기능은 그것이 행동에 앞서 행동을 야기하는 종류의 정신적 긴장을 증대시킨다는 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

이해관계나 강요, 혹은 선전(propaganda)이나 세뇌 기술이 우리 지식의 성장이나 과학의 성장에 있어서 통상 믿어지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은 관념과 행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분석으로부터도 보여질 수 있다. 새로운 관념에 대한 명석판명한 이해가 그것의 정식화 및 제도적 표현에 선행되며, 또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종종 당연시 되고 있다(연구는 문제와 함께 시작된다고 포퍼는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먼저 관념이나 문제를 가지고, 그 다음에 행위, 즉, 말하고, 만들고,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린 아이들의 발달 방식과 확연히 다르다. 어린 아이들은 그들의 이해 능력 너머에 있었던 의미를 파악할 때까지 단어들을 사용하고, 결합하며, 그 단어들을 가지고 논다. 그리고 이러한 초기의 놀이 활동은 이해라는 최종 행위를 위한 본질적인 필요조건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이 성인에게는 작동을 멈추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자유라는 관념이 자유를 창조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바로 그 행위들을 통해서만 명료해질 수 있다고 기대해야 한다. 어떤 것을 창조하는 것과 그것의 정확한 관념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동일한 분리불가능한 과정을 구성하는 부분들로, 그 과정을 중단시키지 않고는 분리될 수 없다. ...

갈릴레오로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코페르니쿠스적 관점의 발전은 내가 기술하고자 하는 상황의 완벽한 사례를 제공한다. 우리들은 동시대의 이성과 동시대의 경험을 거스르는 강력한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믿음은 {{--} 더 비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 똑같이 비합리적인 다른 믿음들(관성의 법칙, 망원경)에서 지지를 넓히고 근거를 찾는다. 연구는 이제 새로운 방향으로 굴절되고, 새로운 종류의 도구들이 만들어지며, ‘증거’는 이론과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되어, 결국에는 풍부하면서도 유연한 이데올로기가, 즉 그것의 어떤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도 독립적인 논증들을 제공할 정도로 풍부하며, 필요해 보일 때면 언제나 그러한 논증들을 찾아낼 수 있을 만큼 유연한,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갈릴레오가 올바른 노선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한때는 어리석은 우주론으로만 보였던 [새로운] 우주론에 대한 그의 고집스러운 추구가, 특정한 방식으로 말해질 때에만 그 견해를 수용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관찰 보고’라 불리는 마법적 문구를 포함하고 있을 때에만 그 견해를 신뢰하려고 하는 사람들 모두의 공격에 대비하여, 그 우주론을 변호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지금까지 창조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외가 아니며, 이것은 정상적인[평범한] 경우이다. 즉 이론은 그것의 비정합적인 부분들이 오랫동안 계속 사용된 에야 비로소 명료해지고 ‘합리적’이 된다. 따라서 그러한 비합리적이고, 터무니 없으며, 무질서한(unmethodical) 초기의 놀이 활동(foreplay, 전희)이 명료함과 경험적 성공의 불가피한 전제조건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제, 우리들이 이러한 종류의 발전을 일반적인 방식으로 기술하고 이해하고자 할 때, 당연히 우리는 그러한 [미래의] 발전을 고려에 넣지 않은 기존의 언어 형식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따라서 이 언어 형식은 예상치 못했던 상황들과 어울리기 위해 왜곡되고, 오용되며, 새로운 패턴에 끼워 맞춰질 수밖에 없다(언어의 지속적인 오용 없이는 어떠한 발견도 진보도 있을 수 없다). “더우기, 전통적인 범주들은 (통상적인 과학적 사고를 포함해) 일상적인 사고와 일상적인 실천의 금과옥조(gospel)이기 때문에, [그러한 범주들을 이용한 이해 시도는] 결국 — (과학적) 상식의 관점에서 — 거짓된 사고와 행위의 규칙과 형식을 제시하게 된다.”[1] 바로 이와 같이, 변증법적 사고는 형식 논리를 비롯한 “상세히 완결된 이해를 무산시키는”[2] 사고 형식으로 등장한다.

(부차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즉 내가 ‘진보’, ‘진전’, ‘개선’ 등의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은 내가 과학에 있어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 지식을 독자에게 강요하려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은 이 용어들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읽을 수 있고, 따라서 각자가 속한 전통에 맞추어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어떤 경험주의자에게는, ‘진보’란 그것의 기본적 가정들 대부분에 대해 직접적인 경험적 시험을 제공하는 이론으로의 전이를 의미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양자 이론이 이러한 종류의 이론이라고 믿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진보’란 경험적 적합성에 있어서는 희생을 치를지라도 통일과 조화를 의미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일반상대성 이론을 보고 있다. 그리고 나의 논지는, 사람들이 어떤 의미의 진보를 채택하든, 무정부주의가 그 진보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법과 질서에 의한 과학마저도, 때로는 무정부주의적 조치가 허용되는 경우에만 성공을 거둘 것이다.)

그렇다면 고정된 방법 혹은 고정된 합리성의 이론이라는 관념은 인간과 그 사회적 환경에 대한 너무도 소박한 견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역사가 제공하는 풍부한 자료를 살펴보고 있는 사람들과, 저급한 본능 — 명료성, 정확성, ‘객관성’, ‘진리’라는 형식 안에서 자신들의 지적 안정성을 갈구하는 본능 — 을 만족시키느라 역사를 빈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상황에서 또 인류 발전의 단계에서 옹호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원리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든 좋다(anything goes)라는 원리이다.

이 추상적인 원리는 이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면까지 검토되고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2장. 반귀납

예를 들어, 우리는 잘 확립된 이론이나 잘 확립된 실험 결과와 모순되는 가설을 사용해도 된다. 우리는 반(反)귀납적으로 과학을 발전시킬 수도 있다.

그 원리[‘무엇이든 좋다’는 원리]를 상세하게 검토하기 위해서는 과학이란 활동의 익숙한 규칙들과 반대되는 ‘반(反)규칙들’의 귀결들을 추적해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 이론의 성공을 측정하는 것은 ‘경험’이나 ‘사실’ 혹은 ‘실험 결과’라는 규칙, 즉 이론과 ‘자료’ 사이의 일치는 그 이론을 지지(또는 그 상황을 용인)하지만 불일치는 이론을 위태롭게 만들어, 심지어 그 이론을 제거할 수도 있다는 규칙에 대해 살펴보자. 이 규칙은 모든 입증 또는 승인에 대한 이론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 그것은 경험주의의 정수이다. 이에 대한 ‘반규칙’은 우리에게 잘 확립된 이론이나 잘 확립된 사실과 모순되는 가설을 도입하고 발전시킬 것을 권장한다. 그 규칙은 우리에게 반(反)귀납적으로 연구할 것을 권장한다.

반귀납적 절차는 다음의 질문들을 야기한다. 반귀납은 귀납보다 합리적인가? 반귀납의 사용을 선호할만한 상황은 존재하는가? 그것을 옹호하는 논변은 무엇인가? 그것을 반박하는 논변은 무엇인가? 아마도 귀납이 항상 반귀납보다 바람직하지 않을까? 등등

이 질문들은 두 단계에 걸쳐 답변될 수 있다. 나는 우선 수용된 고도로 입증된 이론들과 모순되는 가설을 발전시킬 것을 권하는 반규칙을 검토할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잘 확립된 사실들과 모순되는 가설을 발전시킬 것을 권하는 반규칙을 검토할 것이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이론을 반박할 수 있는 증거는 그와 양립불가능한 대안의 도움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정통 이론이 이미 반박되어 신뢰를 잃었을 때에만 대안을 사용하라는 조언은 (뉴턴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현재도 여전히 매우 대중적인 조언이지만) 일의 순서를 정반대로 만든다. 또한, 한 이론의 가장 중요한 형식적 특성들 중 일부는 분석이 아닌 대조를 통해 발견된다. 따라서 한 과학자가 자신이 가진 견해의 경험적 내용을 최대화하고 그것을 가능한 분명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다른 견해를 도입해야 한다. 즉 그는 다원주의적 방법론을 채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관념들을 ‘경험’보다는 다른 관념과 비교해야 하며, 그는 경쟁에서 진 견해를 폐기하기보다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그는 창세기나 포이만드레스(Pimander)에서 발견되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이론들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진화론이나 다른 ‘현대적’ 견해들의 성공을 측정하는 데 그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는 개선된 버전의 창세기를 통해 진화론이 일반적인 생각만큼 좋지는 않아 그에 대한 보완이나 완전한 교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된 지식은 이상적인 견해를 향해 수렴하는 자기-일관적인 이론들의 연속물이 아니며, 진리로의 점진적인 접근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끊임없이 확장되는 상호 양립불가능한 대안들의 바다로, 각각의 이론, 각각의 동화, 각각의 신화는 서로를 보다 명료하게 만들어주는 집단의 일원으로, 그 모두는 경쟁의 과정을 통해 우리 정신의 발전에 기여한다. 어떤 것도 끝내 확립되지 않으며, 어떤 견해도 완전한 이해에서 생략될 수 없다. 디랙(Dirac)이나 폰 노이만(von Neumann)이 아니라 플루타르크(Plutarch)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us)가 이런 종류의 지식을 보여주는 모델로, 여기서 과학의 역사는 과학 자체의 분리 불가능한 부분이 된다. 그것[과학의 역사]은 과학의 계속된 발전을 위해서도 매순간 과학의 이론들에 내용을 부여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전문가와 비전문가, 프로와 아마추어, 진리광과 거짓말쟁이, 그들 모두는 시합의 선수로 초대되며 우리의 문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 각자의 기여를 한다. 그러나 과학자의 임무는 더 이상 ‘진리 추구’나 ‘신의 찬양’이나 ‘관찰의 체계화’나 ‘예측의 개선’이 아니다. 이것들은 그의 주된 목표가 되는 활동의 부산물로, 그 활동이란 소피스트들이 말한 ‘보다 약한 주장을 강한 주장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을 통해 전체의 운동을 지속시키는 것이다.

관찰, 사실, 실험 결과와 모순되는 가설을 편드는 두 번째 ‘반규칙’은 어떠한 특별한 변호도 필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자신의 적용 범위 내에 있는 알려진 모든 사실에 부합하는 흥미로운 이론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과학에서 반귀납적 이론을 허용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이론과 사실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를 증가시켜야 하는지, 감소시켜야 하는지, 아니면 그 불일에 대해 다른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관찰 보고, 실험 결과, ‘사실적’ 진술에 이론적 가정이 포함되어 있거나 아니면 그들[관찰 보고, 실험 결과, 사실적 진술]이 사용되는 방식에 의해 당연시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이점에 대해서는 6장의 자연적 해석에 대한 논의를 참고하라). 즉, 우리는 평범한 상황에서 양호한 지각을 가지고 탁자를 볼 때는 ‘탁자가 갈색이다’라고 말하지만, 조명 조건이 나쁘거나 자신의 관찰 능력에 확신할 수 없을 때에는 ‘탁자가 갈색인 것 같다’라고 말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지각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익숙한 상황이 존재하고 우리의 지각에 착각을 일으키는 다른 익숙한 상황도 존재한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의 감각 자극 중 일부는 진실인 반면 다른 일부는 그렇지 않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또한 우리는 대상과 우리 사이의 매질이 어떠한 왜곡 효과도 발휘하지 않는다는 것과 빛처럼 둘 사이를 맺어주는 물리적 존재자가 참된 모습을 운반한다는 것도 당연시한다. 이 모든 믿음들은 직접적인 비판에는 노출되지 않은 채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영향을 미치는 추상적이면서도 의심스러운 가정들이다. 대개 우리는 그러한 믿음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며 그들의 영향은 우리가 완전히 다른 우주론에 직면했을 때에야 인식된다. 즉 편견은 분석이 아니라 대조를 통해 발견된다. 그의 가장 탁월한 이론과 그의 가장 정교한 기술을 비롯해, 과학자가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도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구조화된다. 그 도구들에 포함되는 원리 또한 인식되지 않거나 인식되더라도 시험하기 극도로 어려울 수 있다. (그 결과, 한 이론과 증거의 충돌은 이론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증거의 오염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다.)

이제 — 어떻게 우리는 우리가 늘상 사용하고 있는 무언가를 검사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는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인 관찰들을 표현하는 데 우리가 늘상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을 분석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우리가 늘상 하던 대로 작업할 때 전제하는 그러한 세계를 발견할 수 있을까?

답은 분명하다. 우리는 그것을 그 내부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우리는 외부적인 비판 기준이 필요하고, 우리는 대안적인 가정들 혹은 (이 가정들이 상당히 일반적인 상황으로서) 흡사 대안적인 세계 전체를 만들 필요가 있으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거주하는 (사실은 또다른 상상의 세계일 수도 있는) 현실 세계의 특징들을 알아내기 위해 상상의 세계가 필요하다. 따라서 익숙한 개념과 절차에 대한 비판의 첫 번째 단계, '사실'에 대한 비판의 첫 번째 단계는 순환의 고리를 끊는 시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가장 신중하게 확립된 관찰 결과들을 무시하거나 그들과 충돌하고 가장 그럴듯한 이론적 원리들을 뒤엎는 새로운 개념 체계를 발명해야 하며, 기존의 지각 세계(perceptual world)의 일부가 될 수 없는 직관들(perceptions)을 도입해야 한다. 이 단계 역시 반귀납적이다. 따라서 반귀납은 항상 합리적이며, 그것은 항상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 누군가는 내가 귀납을 반귀납으로 교체하고 통상적인 이론/관찰 구분 대신 이론, 형이상학적 견해, 동화의 증식을 사용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추천한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인상은 분명한 오해이다. 나의 의도는 한 세트의 일반적 규칙들을 그러한 다른 세트로 교체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의도는 독자들에게 모든 방법론이, 심지어 가장 명백해보이는 것들조차도, 한계를 가진다는 것을 납득시키는 것이다. 이를 보이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이 기초적이라고 간주할 것 같은 어떤 규칙들의 한계와 심지어는 그 비합리성을 논증하는 것이다. 귀납의 경우(반증에 의한 귀납도 포함하여), 이는 반귀납적 절차가 얼마나 잘 뒷받침될 수 있는지 논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사용된 논증과 수사가 나의 ‘깊은 확신’을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라. 이들은 사람들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휘둘리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무정부주의자는 이성(진리, 정직, 정의 등)의 권위를 깎아내리기 위해 이성의 게임에 참가한 비밀 요원과 같다.

6장. 자연적 해석

그러한 사례의 사례로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지구의 운동을 반박하기 위해 사용한 탑 논변을 검토할 것이다. 그 논증은 자연적 해석들 — 관찰과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관념들로서 그것의 존재를 깨닫고 그것의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서 특별한 노력이 필요한 — 을 포함하고 있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와 모순되는 자연적 해석들을 식별해내고 그것을 다른 것으로 교체한다. 

... 낙하하는 돌로부터의 논변[지구가 돈다면 탑에서 떨어뜨린 돌이 뒤쳐져야 하지만, 실제로는 수직으로 떨어지므로 지구가 돌지 않는다는 논변. 줄여서 탑 논변]은 코페르니쿠스적 견해를 반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내재한 약점 때문일 수도 있으나, 개선이 필요한 자연적 해석[감각 그 자체는 아니지만 감각과 밀착되어 분리되기 힘든 해석]의 존재 때문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첫 번째 과제는 이러한 미검토된 진보의 장애물들을 발견하고 고립시키는 것이다.

베이컨의 믿음에 따르면, 자연적 해석은 모든 관찰의 감각적 핵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까지 한 장 한 장 껍질을 벗겨가는 분석의 방법을 통해 발견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방법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첫째, 베이컨이 생각하는 종류의 자연적 해석은 앞서 존재하는 감각의 영역에 단순히 첨가되는 것이 아니다. 베이컨 자신이 말했듯이, 그것은 그 영역을 구성하는 데 사용된다. 모든 자연적 해석을 배제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사고하고 지각하는 능력마저 잃게 된다. 둘째, 자연적 해석의 이러한 근본적 기능을 무시한다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분명해질 것이다. 즉 동원할 수 있는 자연적 해석을 단 하나도 갖지 않은 채 지각적 영역을 대면하는 사람은 전혀 방향을 잡지 못할 것이고 그는 과학이라는 활동을 시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베이컨적 분석 이후에도, 우리들이 정말로 시작한다는 사실은 그 분석이 미진한 상태에서 중단됐음을 나타낸다. 그 분석은 딱 — 우리들이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그것 없이는 나아가지 못하는 — 자연적 해석을 앞두고 중단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모든 자연적 해석을 완전히 제거하고서 무의 상태에서 시작하려고 하는 것은 자기 파괴적이다.

더우기 일군의 자연적 해석을 부분적으로만 해명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얼핏 보면 그 일은 아주 간단한 일로 보일 것이다. 누군가 관찰 진술들을 하나씩 받아 그 내용을 분석한다고 해보자. 그러나 관찰 진술들 속에 숨어 있는 개념들은 보다 추상적인 용어를 통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것 같지 않다. 만일 정체를 드러낸다고 해도 그것을 고정시키기는 여전히 어려울 것이다. 개념은, 지각 대상과 마찬가지로, 애매하며 배경에 의존한다. 더군다나, 한 개념의 내용은 그것이 지각과 연결되는 방식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그러나 이 방식은 어떻게 순환 없이 발견될 수 있을까? 지각이 [개념과 구별되어] 식별되어야 하지만, 그 식별 메커니즘은 조사되어야 하는 개념의 사용을 관장하는 아주 똑같은 요소들 중 일부를 포함할 것이다. 우리들은 절대로 이 개념을 완전히 꿰뚫어 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개념]의 구성 요소를 알아내려고 시도할 때마다 항상 그것의 일부를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환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은 유일한데, 그것은 외부적인 비교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다. 개념과 지각 대상 사이의 새로운 연결 방법도 이에 포함된다. 자연스러운 담론의 영역으로부터도, 그 형식(form)을 구성하는 모든 원리, 습관, 태도들로부터도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외부적인 기준은 정말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그 기준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론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처럼 이상하다는 인상은 자연적 해석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며, 자연적 해석을 발견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다. 이러한 상황을 탑 논변의 사례를 이용해 설명해 보자.

탑 논변은 코페르니쿠스적 견해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려는 의도에서 사용된다. 이러한 ‘사실’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구의 운동이라는 관념은 이상하고, 불합리하며, 명백한 오류이다. 이는 당시 빈번히 사용되었던 표현들 중 단지 몇 가지만 언급한 것으로, 이들은 현재도 고지식한 전문가들이 새로운 반사실적인 이론과 맞닥뜨릴 때마다 하는 말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은 코페르니쿠스적 견해가 위에서 얘기한 바로 그 외부적인 잣대가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논변의 방향을 거꾸로 뒤집어, 그것[코페르니쿠스적 견해]을 지구의 운동을 배제하고 있는 자연적 해석의 존재를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는 탐지 장치로 사용할 수 있다. 논변의 방향을 뒤집어, 우리는 지구의 운동을 먼저 가정하고, 어떠한 변화를 주어야 그 모순이 제거될 지 그 다음에 탐구한다. 이러한 탐구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으며, 그 탐구는 오늘날까지도 끝나지 않을 수 있다. 그 모순은 수십 년 내지 수 세기 동안 우리 곁에 남아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모순은 우리의 검토가 끝날 때까지 유지되어야만 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검토, 즉 우리 지식 속의 케케묵은 성분들을 발견하기 위한 시도는 시작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는 사실과 모순되는 이론들을 유지하는 일이, 어쩌면 그것을 발명하는 일도, 왜 필요한지에 대한 한 가지 이유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 지식의, 특히 우리 관찰의, 이데올로기적 성분들은 그것에 의해 반박되는 이론의 도움을 받아 발견된다. 즉 그것은 반귀납적으로 발견된다. ...

  1. Herbert Marcuse, Reason and Revolution, London, 1941, p. 130.
  2. Hegel, Wissenschaft der Logik, Vol. 1, Hamburg, 1965, p.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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