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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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양,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프리즘: 역사로 과학 읽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自主性), 다시 보기


문중양


Ⅰ. 문제 제기; 유교적 보편성과 조선적 자주성의 함의

그동안 세종대는 과학사 분야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아왔다. 그것은 한국의 역사를 통해서 세종대 과학기술의 성과가 다른 시대에 비해 두드러진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한국과학사상의 그 유례가 드문 황금시대를 이루었다”고 평하는 데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선학들은 우리의 역사에서 과학기술의 성과가 가장 두드러진 시대로 세종대를 꼽는데 인식을 같이했다. 세종대 과학기술에 대한 이와 같은 긍정적인 평가는 “15세기 전반기의 (세계) 과학기술사에서 세종 때와 같은 유형의 발전은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로 특히 주목할 만하”며, “그것은 서방세계는 물론, 아랍세계와 중국의 과학기술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라는 역사적 평가로 이어졌다. 그야말로 세종대의 과학기술이 15세기 전반기 전 세계를 통해 가장 우수한 수준 높은 과학기술의 성과를 이룩해 냈다는 찬사였다.

사실 천문학을 비롯한 정밀한 기계시계의 제작과 같은 특정한 분야의 과학기술이 세종대에 최고의 성과를 이룩해 냈다는 것에는 현재에도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과학기술사에서 세종대가 전성기였다는 이해는 역사의 긍정적 해석 못지 않게 부정적인 해석을 낳기도 했다. 예컨대 황금기를 누렸던 세종대의 과학기술이 그 이후에 잘 계승되지 못하고 쇠퇴했다고 이해되고, 그러한 이해는 결국 세종대 과학기술의 찬란했던 성과가 오히려 우리 역사에서의 예외적인 현상이었다는 인식을 낳기도 했던 것이다.

근래 들어 이와 같이 눈부신 성과를 이룩해낸 세종대 과학기술이 이후 쇠퇴하고 말았다는 종래 학계의 역사적 해석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세종대의 과학기술이 왜 쇠퇴했는지 묻는 질문 자체에 대해서도 반성적 고찰을 제기하는 문제 제기도 있었고, 세종대의 과학기술이 절정기를 누렸고, 그 이후 쇠퇴하여 잘 계승되지 못했음은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난다는 지적도 있었다. 세종대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와 같은 근래의 비판적 고찰은 세종대 과학기술의 역사적 성격과 위치에 대한 반성적 고찰로 이어질 것이다.

그동안 과학사학자들은 세종대 과학기술의 역사적 성격과 관련해서 일반적으로 세종대 과학의 정치적, 이념적 본성에 주목해 왔다. 즉 세종대의 눈부신 과학기술의 성과는 ‘새로운’ 왕조가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왕도정치를 구현’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는 이해이다. 전통 천문역산학은 유교적 정치 이념에 의하면 제왕학의 요체로서 전통적으로 ‘관상수시(觀象授時)’는 제왕이 가장 앞서 실천해야할 사업이었다. 따라서 유교적 사회질서와 이념을 표방하는 새로운 왕조가 그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가 체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앞서서 확립해야 했던 것이 천문역산학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래 선학들은 유교적 이상국가의 실현이라는 정치적․이념적 배경을 거론하면서 동시에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일찍이 전상운이 세종대 천문역법의 눈부신 성과를 ‘자주적 역법’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한 이후, 이와는 약간 다르게 박성래는 선진적인 중국의 과학기술을 수용하여 ‘과학기술의 민족화’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았다. 박성래는 이후 세종대의 천문학을 ‘민족 천문학’, 의학을 ‘민족 의학’으로까지 개념화시킬 정도였다. 최근에는 구만옥이 세종대 과학기술 정책의 핵심 논리로 ‘풍토부동론(風土不同論)’에 입각한 ‘자주성’의 표방을 전면적으로 부각시켰다. 그것은 『농사직설』의 농업기술, 향의약학의 확립, 그리고 훈민정음의 창제에서 드러나듯이 ‘중국과 다른 우리의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주장이 ‘풍토부동’의 논리로 표출되어 세종대 여러 분야의 과학기술 진흥 정책이 추진되었으며, 그 산물이 세종대의 ‘자주적 천문역법’이었다 것이다.

선학들이 언급하는 ‘자주적’이라는 용어는 어떤 의미일까? ‘자주적’의 사전적인 의미는 ‘자기의 힘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종대 과학이 ‘자주적’이었다고 말할 때의 의미는 그 이상인 듯하다. 즉 선진적인 중국의 과학기술을 완벽하게 소화한 이후 그것을 극복하면서 ‘그것과 다른 우리에게 알맞은, 적합한 과학기술을 구성해냈다’는 의미인 듯하다. 대표적인 예로 천문역산학 분야의 성과에 대한 이해를 들 수 있는데, 실제로 세종대에 중국의 수준을 넘어서서 중국의 것과는 다른 우리의 독자적인 천문역산학을 이룩해냈다는 것이 선학들의 이해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과학은 이제 중국으로부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세종대 이후 조선 과학기술의 추이를 보면 아직도 중국에서 배울 것이 많았고,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중국의 과학기술을 수용하면서 조선의 과학기술은 세종대의 과학기술을 계승 발전해 나갔다.

구만옥은 이와 약간 다르게 세종대의 과학기술에서 조선의 특수성 또는 개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세종대 과학기술 정책 입안자들이 유교적 보편주의를 존숭하는 가운데 조선의 토착적인 개별성을 살리기 위해서 ‘풍토부동’의 논리를 부각시켰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조선의 특수성과 개별성에 대한 강조는 유교적 이상사회와 국가를 구현하려는 ‘보편성’의 추구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주적 역법’을 국가 정책적으로 추구했던 세종의 의도가 유교적 보편주의를 추구하기보다는 조선이 중국과는 다르다는, 즉 조선 고유의 개별성을 강조하는 정책이었다는 데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논문은 세종대 과학기술의 성과가 새로운 왕조의 건설과정에서 유교적 이상국가를 실현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는 주장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자주적’이었다고 규정하는 종래의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즉 세종대 과학은 그동안의 중국 의존적인 수준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수준으로 발전했지만, 선학들이 말하듯이 세종대 과학이 ‘중국과 다른, 그것을 능가하는, 우리에게 적합한 과학기술이었다’는 평가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먼저 기왕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거론되었던 것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볼 것이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서 세종대 과학기술의 성과는 ‘중국과 다른 우리의 것’이 절실하게 필요해서 얻어진 것이 아님을, 또한 조선의 토착적인 개별성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살펴볼 것이다. 오히려 유교적 보편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의 과정에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조선의 개별성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했고, 그러한 인식이 ‘풍토부동(風土不同)’, ‘신토불이(身土不二)’, ‘풍기이수(風氣已殊)’의 표현으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러한 중요한 인식의 전환을 하게되는 과정을 고제(古制) 연구와 아악의 정비라는 유교적 이상국가를 실현하려는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통해서 살펴보겠다. 천문역산학의 눈부신 성과도 그러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추진되어 얻어졌던 것임을 살펴볼 것이다.

조선 사회가 기본적으로 성리학적 사회 이념과 질서를 기본 축으로 성장해 가는 사회라고 본다면, 조선 초기의 시기에는 아직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만족스럽지 못한 때였다고 볼 수 있다. 성리학은 보편적인 ‘천지지성(天地之性)’과 함께 특수성을 강조하는 ‘기질지성(氣質之性)’도 중요하게 담아내는 사상체계이다. ‘이일분수’가 바로 그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초기의 시기에 세종과 조선 사대부들이 중국의 선진적인 제도, 즉 유교적인 차원에서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고제를 조선에서 재현하면서 부닥치게될 특수성의 문제, 결국은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했는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Ⅱ. ‘풍토부동’의 레토릭

그 동안 자주적 또는 민족적인 세종대 과학기술로 자주 거론되던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아닌가 싶다. 즉 『농사직설』(1429년, 세종 11년)의 편찬과 삼남 지방의 선진적 농업기술의 전국적인 보급 노력, 『향약집성방』(1433년, 세종 15년)의 편찬과 조선 향의약학의 정리, 그리고 훈민정음의 창제(1443년, 세종 25년) 등이 그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사업들이 성공적으로 완료된 이후 사업의 주도자들이 술회하면서 적어 놓은 서술들을 보면 유난히 중국과 다른 조선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중국과 조선은 다르다’는 언설들이 진정 중국의 보편적인 과학기술을 지양하고 조선의 특수성과 개별성을 지향하는 것이었는지는 면밀히 따져볼 일이다.

1. 『농사직설』과 강남농업기술의 추구

“삼가 생각하건대 태종공정대왕께서 일찍이 유신(儒臣)에게 명하시어 옛 농서(農書)에서 간절히 필요한 내용을 뽑아서 향언(鄕言)으로 주를 붙여 판각․반포하게 하여 백성을 가르쳐서 농사를 힘쓰게 하셨다. …오방(五方)의 풍토가 같지 아니하여 (지역에 따라) 곡식을 심고 가꾸는 법이 각기 적합한 바가 있어, 옛 농서와 다 같을 수 없다하여, 여러 도의 감사(監司)에게 명하여 주현(州縣)의 노농(老農)들이 이미 체험한 바를 갖추어 아뢰게 하시었다. 또 신(臣) 정초에게 이를 정리하라 명하고, 종부소윤 변효문과 더불어 피열(披閱) 참고하여 그 중복된 것을 버리고 그 절요(切要)한 것만 뽑아서 찬집하여 한 편을 만들고 제목을 ‘농사직설’이라 하였다.”(『농사직설』 정초의 서문)

이 문구는 1429년 세종 11년 『농사직설』을 책임 편찬한 정초(鄭招)가 쓴 서문의 내용이다. 그것을 보면 일찍이 태종대부터 중국의 농서를 활용해 써 왔으나, 각 지역마다 풍토가 다르고, 그에 따른 적합한 농업기술이 다를 수밖에 없어 중국 농서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각 지역에서 체험을 통해서 검증된 농업기술을 채록해 농서를 펴내고 그것을 널리 보급해 농업기술을 정착시키려 한다는 점을 이 서문은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만 보면 조선은 중국과 풍토가 달라 그에 따른 적합한 농업기술도 다를 수밖에 없어 중국의 농서를 그대로 활용하는데 한계가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독자적인 삼남지방의 관행 농업기술을 채록해 정리하고, 그것을 널리 보급하려 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농사직설』의 서문은 중국과는 다른 우리의 ‘자주적’인 농업기술의 발전을 추진했던 세종대 농업정책의 방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이해될 소지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전기 농업기술의 역사적 추이 속에서 『농사직설』이 지니는 위치, 그리고 편찬의 궁극적인 목적을 고려하면 사정은 많이 달라진다. 먼저 『농사직설』의 편찬이 지향했던 바를 지적해 보자. 그것은 일차적으로 하삼도 지역에서 먼저 확립된 연작의 집약 농업기술과 같은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그 이외의 농업기술 후진지역에 보급하고자 하는 것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농사직설』이 강조해서 채록하고 전국적으로 보급 정착시키고자 추구했던 하삼도 지역의 연작 집약농업기술이 중국의 선진적인 강남농업 기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태진에 의하면 『농사직설』이 추구하는 농법과 농업기술의 발전 단계상의 위치는 중국 강남농업의 전통과 기술이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조선 전기 농업기술의 역사적 추이는 고려말 이후 연작(連作) 상경(常耕)의 농업 생산력 발전을 주도하면서 새로운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한 신흥사대부 세력이 그들이 이상사회로 추구하던 성리학의 발원지 강남의 선진적인 수도작 중심의 농업기술을 조선에서 구현하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체계로 무장한 신흥 사대부들에게 강남의 선진적인 수도작(水稻作) 기술은 성리학과 떼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강남 농업기술의 정착 자체가 성리학의 정착과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신흥 사대부들의 농업기술 지향이 『농사직설』에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이태진은 보는 것이다. 실제로 비록 이앙법과 같은 강남농업 기술의 요체가 『농사직설』에서 적극적으로 반영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수리(水利) 시설이 절대적으로 불충분한 여건 때문이었으며, 적어도 시비법과 같은 연작 상경을 실현하는데 매우 중요한 농업기술의 측면에서 보면 『농사직설』의 시비법 기술 수준은 강남농업 기술을 담은 대표적인 농서 『왕정농서』의 기술 수준이었다고 한다. 결국 이앙법도 비록 『농사직설』에서는 수리 시설이 부족한 현실에서 조심해야 할 수도작법으로 제시되면서 직파법에 비해 부수적인 도작법으로 제시되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수리시설의 보강을 통해서 실현해야할 강남농법의 핵심 기술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말 조선초 새로운 사회의 주도 세력인 성리학적 사회이념과 학문으로 무장한 신흥 사대부 세력이 주도하는 농업 정책의 방향이 강남농업 기술의 구현을 통한 연작 상경화라고 한다면 『농사직설』 서문에 나오는 ‘풍토부동’의 문구가 조선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의미였는지 재고해볼 문제이다. 위 인용구에서 오히려 주목할 만한 문구는 “옛 농서와 다 같을 수 없다(不可盡同古書)”이다. 『태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태종 17년 『농상집요』의 중요한 내용을 발췌해 ‘본국리어(本國俚語)’로 주를 달아 간행해 널리 배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태종대 뿐 아니라 세종대에 들어와서도 세종 5년에 『농상집요』와 『사시찬요』 등의 농서를 잘 활용해 농사를 지을 것을 각 도에 권면하고 있다. 그런데 그동안 농사에 활용하려던 농서들인 『농상집요』와 『사시찬요』는 강남의 수도작 농법기술 단계에 비해서 훨씬 뒤지는 화북의 전작(田作) 농법을 중심 내용으로 담고 있는 농서들이었다. 그렇다면 “옛 농서와 다 같을 수 없다”는 표현은 화북농업의 기술을 담고 있는 『농상집요』와 같은 종래의 중국 농서들이 조선의 삼남 지방에서 일부 행해지던 농업기술, 그리고 신흥 사대부들이 구현하려던 강남 농업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본격적으로 강남농업 기술을 담아낸 중국의 대표적인 농서 『왕정농서(王禎農書)』(1313년)를 조선 사대부들이 처음으로 접하는 시기가 중종대인 1543년 경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옛 농서와 다 같을 수 없다”는 표현은 당시 주로 의존하던 중국 농서들에 만족하지 않았던 조선 사대부들의 불만의 목소리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농사직설』의 서문은 조선의 풍토가 중국과 다르기 때문에 중국의 농업기술과 다른 조선의 풍토에 적합한 농업기술을 개발해야 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종래 의존하던 중국의 농서들이 시대에 뒤진, 또는 신흥 사대부들이 지향하는 농업기술과는 거리가 먼 내용을 담고 있어 차라리 비교적 조선 내에서 선진적인 농업기술이 이루어지던 삼남 일부의 관행 농업기술을 채록해 활용하자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농사직설』에서 채록했던 농업기술은 중국과 다른 자주적 농업기술을 지향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중국의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따라가기 위한 자구책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향약집성방』과 금․원 의약학의 구현

조선초기 세종대에 이루어진 과학기술의 성과들 중에 조선 고유의 자주적 성격이 가장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분야는 향의약학 분야일 것이다. 실제로 고려말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고종 20년, 1233년)에서부터 시작해 조선 세종대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세종 15년, 1433년)에서 완성된 향의약학에 대해서 일찍이 미끼 사까에는 ‘고유의학’과 ‘의료의 자주화’라고 평가했다. 미끼 사까에에 이어 김두종은 “향약의 사용을 권장케 한 것은 향약에 관한 자주적 정책을 수립코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라며 고려 말 이후 향약 의서의 편찬 전통을 ‘자주적 향의약학’의 성립으로 이해했다. 이에서 더 나아가 박성래는 “『향약집성방』의 발간은 고려 중엽부터 시작된 자주적인 의학 개혁운동의 절정을 뜻한다”면서, “이 책은 중국 본초학의 테두리를 탈피하여 어디까지나 한국 중심의 것으로 다듬은 것으로서, 우리 나라 고유의학의 확립이라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세종대에 편찬된 『향약집성방』을 조선 고유의 자주적인 의약학의 확립으로 보는 일차적인 근거는 비싼 중국산 약재(즉 ‘당약(唐藥)’)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상황에서 벗어나 값싸고 구하기 쉬운 국산 약재(즉 ‘향약(鄕藥)’)을 활용하는, 즉 약재의 국산화를 이루어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약재의 국산화를 이룩한 성과만으로 ‘자주적 의약학’으로 보기에는 부족하다. 그것은 중국과 조선은 풍토도 다르며 사람의 몸도 다르기 때문에 약리(藥理)상으로도 조선 사람 몸에는 조선에서 나는 약재가 중국산 약재보다 적합하다는, 즉 ‘신토불이(身土不二)’의 논리에 입각한 향약론의 이론을 확립했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중국 본초학의 테두리를 벗어난 우리 나라 고유의학의 성립의 의미였다. 그런데 과연 고려말 『향약구급방』에서 조선초 『향약집성방』에 이르는 향약서들의 편찬이 중국의 의약학 테두리에서 벗어나 자주적 의약학을 수립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고려말 이후 조선의 의약학이 처해있었던 당면과제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당면과제의 해결에 향약서들이 어떠한 역할을 해주었는지 고려하면 고려말 조선초 향의약학 성립의 역사적 성격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고려말 조선초의 시기에 의약학의 과제는 한 마디로 말해서 중국의 선진적인 의약학을 수용해 성리학적 ‘인정론(仁政論)’에 입각해 백성들을 질병의 질곡으로부터 구제해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제를 풀려는 노력은 고려후기 이래 줄곧 있어온 일이었다. 예종 7년(1112년) 중국 송대의 의료개념에서 영향받았을 혜민국을 설치해 대민 의료에 적극 나서는 등 고려 정부와 사대부들은 중국 송․원의 의학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선진적인 의술을 전수 받아 아무리 잘 배운다해도 결정적으로 한계에 부닥친 것이 있다. 값이 매우 비싸고 구하기도 쉽지 않은 중국산 약재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여건 때문이었다. 1233년 『향약구급방』의 편찬으로 시작된 향약서들의 이후 계속된 등장은 이러한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련의 노력이었다. 세종대 1433년에 편찬된 『향약집성방』은 고려 후기 이래의 향약서들을 집대성하고, 민간에서 축적되었던 여러 경험적 처방들을 정리해 편찬한 향약서였다.

한편 15세기 전반 조선의 의약학이 처해있는 의학사적 과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중국 의학사에서 한의학의 이론적 전통과 경험적 전통이 종합적으로 결합되는 획기적인 성과로 이해되는 금․원 의학의 수용이었다. 1444년 세종 26년에 편찬된 방대한 내용의 『의방유취』는 그러한 선진적인 금․원 의약학 지식을 담은 의서들을 집대성하여 종합한 의서였다. 이에 비해 『향약집성방』은 그동안 고려와 조선에서 축적해온 경험적인 향약재의 처방을 종합적으로 수집 정리한 의서였다. 결국 『의방유취』와 『향약집성방』은 이론적 차원과 경험적 차원에서 각각 금․원 의학의 소화․정착을 이룩해낸 의서였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종래 연구자들이 『향약집성방』의 편찬을 통해서 조선의 자주적 의약학의 확립을 강조하면서 그 논리적 근거로 제시하는 ‘신토불이’는 중국과는 다른 독자의 의약학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중국의 선진적인 금․원의학을 완벽하게 수용해서 정착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조선의 향약서 편찬자들은 중국과는 다른 조선의 ‘특수성’과 ‘개별성’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훈민정음 창제와 성운학

“나라의 말소리(語音)가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펼 수 없는 자가 많도다. 내 이를 딱하게 여겨 28개의 글자를 새로 만드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히고 나날이 쓰기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 문구는 소위 『훈민정음해례본』의 맨 앞 「어제」 부분의 처음 말이다. 세종이 1443년(세종 25년)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창제의 목적을 직접 밝힌 중요한 내용이다. 말 그대로 우리 말을 표현하는 글자가 없어 우매한 백성들이 자기 생각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니 그들이 글을 쉽게 배우고 쓰게 하고자 우리 글자를 창제했다는 것이다. 종래 연구자들은 이러한 문구를 부각시켜 세종대 민본의식과 함께 ‘자주 의식’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으로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적 의의를 지적했다.

그런데 ‘중국과 다른 우리의 독자적인 글자’가 필요하다는 창제의 변이 궁극적으로 ‘자주 의식’의 발로였는가는 의문이다. 우리의 글자가 없어 불편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자. 과연 한자를 모르는 우매한 백성들이 불편했을까? 어차피 중세 사회에서 문자는 지배자들의 권력의 영역에 속하던 것이 아니던가. 우매한 백성들은 하등 불편할 것도 없고, 그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길 것도 딱히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배자의 입장에서 불편한 점을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유교적 사회이념과 지식체계를 이용해 새로운 왕조의 국가체제를 안정되게 확립하려는 세종대 학예 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이 국정교학으로 삼기 시작한 송대 성리학의 이념에 의하면 제왕된 자의 참된 치국(治國)의 방법은 성인의 도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인의 도를 표현하는 수단은 궁극적으로 언어인데, 참되고 바른 언어가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성인의 도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언어를 확립하기 위한 성운학(즉 언어음운학)과 문자학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간과할 수 없는 매우 긴요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한자라는 동일한 문자 체계를 쓰면서도 중국과 우리의 말이 다르다는데 있었다. 특히 앞서 『훈민정음해례본』의 「세종어제」의 첫 문구가 강조하는 ‘중국과 다른’ 것의 내용은 문법이나 용어가 아닌 ‘읽는 소리’가 다르다는 것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같은 한자를 읽더라도 중국과 다르게 읽었고, 그렇기 때문에 한자를 읽는 방식도 표준이 없이 혼돈된 상태였다. 또한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식, 즉 차자표기 방식도 표준화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는 책과 언어를 통해서 성인의 도를 표현하고 이해함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한자의 음을 정확히 표기할 수 있고, 우리말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문자 체계가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결국 훈민정음의 창제는 당시의 선진적인 성운학과 문자학을 수용해 발전시키려는 국가적인 차원의 거대한 학문적 프로젝트였다고 할 수 있다. 정인지와 신숙주, 성상문과 최항 등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던 집현전 학자들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성운학과 문자학에 대한 연구, 그리고 15세기 중세국어에 대한 연구였다.

세종 25년 12월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중요한 후속 사업으로 벌인 것이 음운학의 정비였던 것도 그러한 사정을 짐작케 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당시 심각한 혼란상태에 빠진 한자음을 통일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는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국정운』을 편찬했던 것이다. 이렇게 『동국정운』의 편찬은 훈민정음을 창제한지 3년 9개월 만인 세종 29년 9월에 완성되었는데, 신숙주가 서문에 쓰고 있는 다음과 같은 언급은 성운학이 왜 필요했는지 단적으로 잘 말해주고 있다.

“문자(書契)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성인의 도가 천지에 의탁했으나 문자가 만들어진 다음에는 성인의 도가 여러 서적(方策)에 실리게 되었다. 그래서 성인의 도를 밝히려 한다면 마땅히 문의(文義)부터 공부해야하고 문의의 요점을 알려면 마땅히 성운(聲韻)부터 공부해야하니, 성운이란 곧 학문과 도를 연구하는 시초(權與)이다.”

중국과 ‘말소리’(語音)가 다르기 때문에 서적에 한자로 적힌 성인의 도를 밝힐 수 없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즉 훈민정음)를 창제했음을 암시하는 『동국정운』의 서문은 과학기술의 성과를 포함해서 세종대에 이루어진 제 성과들이 어떠한 의도 하에 추구되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결국 이상적인 유교국가의 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제왕된 자로서의 절실한 과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이 이러한 시대적 과업을 자신의 치세 동안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고 보았을 때 주목을 받는 것이 있다. 바로 고제(古制) 연구와 아악의 정비가 그것이다. 거시적으로 봐서 세종대 천문역산학의 성과도 이러한 고제 연구와 아악의 정비 과정과 불가분의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듯 싶다.


Ⅲ. 고제(古制) 연구와 아악의 정비

고제란 원래 유학자들이 이상적인 사회로 여기던 중국 고대의 제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후 조선 초기의 유학자들이 흔히 쓰는 고제의 의미는 반드시 중국 고대 하․은․주 삼대의 제도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소위 ‘시왕지제(時王之制)’로 불리는 명(明) 당시의 현실적인 제도 이전의 옛 적의 제도를 의미했다. 한․당의 제도는 물론이고 심지어 송․원의 제도도 고제에 포함될 정도였다. 유교적 이상국가의 구현을 건국의 당면과제로 하는 조선초기에는 이미 국초부터 고제 연구가 이루어졌었다. 즉 태조대부터 정도전 등을 중심으로 고제 연구가 시작되어, 태종대에는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와 예조의 주도 하에 제도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고제 연구는 세종대에 이르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활발하게 추진되는데, 특히 세종 10년 경에 이르면 집현전의 참여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고제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때는 집현전 주도의 고제연구가 시작되던 세종 10년 9월 경 부터 의례상정소가 폐지되던 세종 17년 경까지 였다고 한다. 의례상정소가 폐지되었던 것은 당시 예조판서 허조가 말하듯이 원래 그것이 고제 연구를 위해서 설립한 임시기구였고, 세종 17년 경에 이르면 더 이상 필요 없을 정도로 고제 연구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와 같이 고제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세종 10년에서 17년 사이에 이 논문이 주목하는 아악(雅樂)과 천문역산 분야의 국가적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유교적 이상국가를 실현하려는 의도 하에 고제 연구가 추진되었기 때문에 그것의 중심 내용은 예악(禮樂)이었다. 유교에서 예와 악이 무엇인가. 예와 악을 통해서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가. 유교에서의 예와 악은 소위 질서(秩序)와 조화(調和)로 흔히 구분되어 이해되기도 하는데, 쉽게 말해서 제례(祭禮)를 예로 들면 예는 인간과 신이 교접함에 있어서 합당한 위계질서의 형식을 말하며, 악은 인간과 신이 화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음악을 말한다. 합당한 형식적 질서가 보장되지 않고 신이 흠향할 수 없는 음악이 연주되면 인간과 신은 교접할 수 없으며, 그러한 의식은 그야말로 형식에 불과한 것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의미 있는, 즉 인간과 신이 제대로 교접할 수 있는 의식이란 이상적인 고제에 따른 예와 악으로써 치룰 때 보장할 수 있을 것이었다. 세종대에 고제 연구를 통해서 예와 악을 적극적으로 정비하려는 배경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와 같이 유교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는데 중요한 악이었지만 당시 조선의 악은, 특히 정악인 아악은 매우 미비된 상태였다. 북송시대의 정악인 아악이 이 땅에 처음 수입된 것은 고려 예종 11년(1116년)이었다. 이후 역대 왕들은 아악을 제대로 연주하기 위한 노력을 꾀했지만 그 뜻을 계속해서 이루지 못했다. 특히 편종과 편경을 중심으로 하는 아악기를 전적으로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던 상황이 사정을 더욱 어렵게 한 하나의 요인이기도 했다. 사정은 조선 건국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태종 5년(1405년) 아악기를 완비하기 위해서 명에 아악기의 구매를 요청했지만, 명은 ‘아악기는 사사로이 돈으로 구입할 수 없는 것’이라며 몇 개의 아악기만을 선심 쓰듯 보내주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악의 온전한 연주를 지속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아악의 온전한 연주가 힘든 여건에서 각종 의례에서 향악(鄕樂)을 섞어서 연주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향악이란 정악과 대비되는 우리 나라의 속악(俗樂)을 말한다. 정악이 바로 고제에 따른 신이 흠향할 수 있는 바른 음악이라면, 속악은 감성에 호소하는 소위 세속적인 음악을 말한다. 예악에서 말하는 악은 당연히 제대로 된 악인 정악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한 악은 “성인(聖人)이 (악을 통해서) 성정(性情)을 기르며, 신과 인(人)의 화합을 도모하고, 천지에 순응하며, 음양의 도를 조화롭게 한다”고 일컬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상적인 유교적 의례에서는 당연히 정악이 연주되어야 하며, 감성에 호소하는 속악의 연주는 예악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 초까지만 해도 아악만을 온전히 연주할 수 없는 여건에서 불가피하게 향악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제에 따른 이상적인 중국의 정악인 아악의 정비가 시작되는 것은 세종 8년 1426년 봉상시(奉常寺) 판관 박연(朴堧)의 상소에서 비롯되는 듯 하다. 그 해 4월 25일의 상소에서 박연은 한대(漢代)까지만 해도 음성(陰聲)과 양성(陽聲)의 조화를 이루어 신인(神人)이 화합할 수 있는 악이 있었지만 당대(唐代)에 이르면 양성에만 치우쳐 성인의 법도에서 벗어났다고 하면서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에서 쓰는 제향약도 성인의 악에서 벗어났으니 악을 바로 잡자고 제안했다. 이러한 박연의 주장은 바로 수용되어 세종은 그로 하여금 악학을 연구하여 악부(樂部)를 바로 잡도록 하였다.

아악의 정비 사업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박연을 중심으로 하는 봉상시 주도의 표준적인 음의 제정인 율관 제작과 악보의 편찬이었고, 다른 하나는 집현전을 중심으로 하는 율려의 이론서인 『율려신서(律呂新書)』에 대한 연구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율려신서』는 송대의 성리학자 채원정(蔡元定)의 저서로 『성리대전』에 수록되어 성리학자들의 대표적인 성리서로 널리 보급되었던 문헌이다. 이 문헌은 중국에서 1415년에 처음 간행된 이후 조선에는 세종 원년 1419년에 처음 들어와, 아악의 정비가 시작되던 때인 세종 9년 1427년에는 복간되기도 했다. 이러한 『율려신서』에는 권1에 율관의 부피와 길이를 정하는 방법, 황종음에서 비롯되는 11음의 산출 방법 등을 담고 있는 것을 비롯해 율관의 제작 및 제작 원리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율려신서』에 대한 연구는 고제 연구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율관 제작과 아악 정비를 위한 이론적 문헌연구로 집현전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세종의 아악 정비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컸던 듯하다. 그것은 세종 12년 1430년 가을에 『율려신서』를 경연에서까지 강의하도록 한 데에서 잘 드러난다. 사실 율관의 제작과 아악의 정비가 세종 7,8년부터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으로 급 물살을 탄 것은 세종 12년 1430년에 이르러서였다. 그것은 세종이 직접 『율려신서』를 탐독하고 율관의 원리를 깨우치면서 일어난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세종이 『율려신서』를 탐독하고, 고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율관 제작의 실무를 맡았던 박연과의 의견차이가 드러나게 되어, 매우 흥미롭다.

세종과 박연의 의견 차이는 결국 고제에 따라 이상적으로 율관을 제작하고 그에 따라 성인의 제도와 완벽하게 동일한 아악을 완성하고자 하는 군주 세종과 그러한 시도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인지하고 있는 박연의 차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세종 12년 2월 경에 이르면 율관 제작과 아악 정비 사업은 마무리되었던 듯하다. 그러한 사정은 그 해 2월 19일 자로 『실록』에 수록되어 있는 예조 의례상정소에서 올린 장문의 박연의 상서(上書)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세종 7,8년 이후 계속해왔던 작업의 결과와 문제점들을 정리해 올린 것이었다. 그것을 보면 율관 제작과 관련한 핵심적인 쟁점은 어떻게 하면 고제에 따라 황종율관을 만들면서도 태종대 5년에 명(明)에서 내려준 편경(編磬)의 황종음과 일치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을 박연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중국에서) 역대로 음률을 제정할 때에 기장(黍)으로 하였으나 일정하지 않았고, 성음(聲音)의 높낮이도 시대에 따라 달랐을 것인데, 오늘날의 중국의 음률이 진짜가 아니고 우리 나라의 기장이 그 진실됨을 얻은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음률과 도(度)․량(量)․형(衡)을 표준화하는 것은 곧 천자의 일이고 제후의 나라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만약 지금 검은 기장(秬黍)이 마침내 중국의 황종과 합하지 않는다면 일단은 권도(權道)를 좇아 다른 종류의 기장을 임시로 사용해 중국의 황종에 맞추어 율관을 만드소서. 그런 연후에 삼분손익법에 의거해 성율(聲律)을 바로 잡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고제에 따르면 황종음은 자연산 검은 기장 1200개를 딱 맞게 넣을 수 있는 율관의 소리였다. 그런데 당시의 표준 황종음은 ‘시왕지제’로서 명에서 내린 편경의 황종음이었기 때문에 고제에 따라 황종율관을 만들어 그것의 음이 시왕지제의 황종음과 합치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박연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기장이 시대에 따라 또는 산출되는 지역에 따라서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달라서 기장 1200개를 담는 율관이 일정하지 않다는 데 있었다. 그에 따라 내는 소리도 달라질 것이었다. 박연이 당시에 황해도 해주에서 나는 검은 기장을 이용해 시제품을 만들었으나 음이 명에서 내린 편경의 황종음보다 높게 나왔던 것이다. 어떻게 해도 자연에서 산출되는 기장으로 황종음을 낼 수 없었던 박연은 결국 시왕지제를 인정하고 고제를 포기하는 결론을 내게 되었다. 표준으로서의 음률과 도량형은 중국의 천자만이 정할 수 있는 것이므로 당시의 표준음인 중국 편경의 황종음을 따르고 그에 맞추어 임시 방편으로 기장을 작위적으로 만들어 율관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당시 중국의 황종음이 진실한 음인지, 아니면 조선의 해주에서 나는 자연산 기장으로 만든 황종음이 진실된 음인지 누가 장담하겠는가라는 자조 섞인 탄식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사실 이와 같은 박연의 주장은 세종의 입장에서 매우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고제를 따라서 충실하게 이상적인 황종음을 내는 율관을 제정하고자 하는 세종이었기에, 시왕지제를 따라서 고제를 변통해 억지로 꿰어 맞춘다는 것은 진정한 고제의 실현이 못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박연이 집중적으로 상소를 올리던 2월 무렵에는 세종의 즉각적인 반응은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 해 8월부터 『율려신서』를 경연에서 강의하면서 직접 탐독하기 시작한 세종은 율관 제정과 아악 정비에 대한 이론적인 분석과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본격적으로 검토하면서 박연의 주장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비판의 초점은 박연의 율관 제작이 고제에 충실하지 못한 점이었는데, 중국과 조선의 풍기(風氣)가 다르고 산출되는 자연물도 다를 수밖에 없는데 조선에서 나는 기장과 대나무로 율관을 만들어서는 고제를 구현하는 율관을 만들었다고 할 수 없다는 불만이었다. 결국 세종은 박연을 믿을 수 없으니 관습도감의 관원들도 연구해 보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중국에서도 고제의 실현은 만족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즉 아악도 일정하지 않고 황종음도 높고 낮은 것이 제각각이어서 시왕지제로서의 당시 중국의 법도도 고제와 부합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박연의 작업과 주장에 약간 실망했을 세종은 이어 집현전 부제학 정인지로 하여금 『율려신서』 등의 문헌을 참조하여 주척(周尺)을 바로 잡아 보라고 지시를 내린다. 그러나 세종은 지시를 내린 지 20여일 만에 주척 제작을 그만 두라고 한다. 본래 원칙적으로 주척은 황종척에서 비롯되고, 황종척은 결국 황종율관이 만들어져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정인지에게 주척 제작을 명한 것은 황종율관에 의거하지 않고 단지 문헌 조사만을 통해서 표준적인 주척을 제작해보라고 한 듯 하다. 그렇게 제작된 주척은 문헌 고증을 통한 임시방편의 주척일 뿐 고제에 입각한 이상적인 주척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세종이었기에 “주척의 제도는 역대의 제도가 제각기 다른데, 황종율관도 (그에 따라서) 역시 다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옛 사람들이 소리에 따라서 악을 제정했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의 성음(聲音)이 중국과 다르니 비록 고제(古制)를 연구해서 율관을 만들어도 그 올바름을 얻지는 못할까 두렵다”고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피력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세종은 올바른 율관에 의거하지 않은 주척의 제작은 “뒷날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니 차라리 만들지 말라”며 주척 제작 사업을 중단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세종 12년 9월 무렵의 세종의 언급만을 보면 이 당시에는 시왕지제를 좇아 고제를 변통하자는 박연의 주장에 세종은 따르지 않고 고제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세종은 적어도 고제를 이상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 나라의 풍기(風氣)와 성음(聲音)이 중국과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러나 2월에 나온 박연의 주장을 9월까지도 세종이 수긍하지 않고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면 그만두라고 했었는데, 그로부터 3개월 후 윤 12월 1일자로 『아악보』가 완성되었음을 『실록』은 전하고 있다. 다음 해 세종 13년 새해 아침 근정전에서 하정례(賀正禮)를 행할 때 새로 제정한 아악이 처음으로 연주되었다. 사가(史家)는 “새로 제정한 아악을 처음으로 연주했는데, 그 의장(儀章)과 성악(聲樂)이 찬연(粲然)하여 가히 볼만했다”고 아악의 정비와 연주를 매우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석달 만의 변화는 세종이 결국엔 박연의 주장을 인정하고, 권도를 좇아 황종율관의 제작과 아악의 정비가 추진되었음을 말해준다 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세종과 박연의 논쟁 과정, 그리고 황종율관과 아악의 정비가 말해주는 바는 무엇일까? 인조 밀랍 기장을 만들어 사용한 것을 고제의 포기로 볼 수 있을까? 고제를 포기하고 임시변통으로만 시왕지제를 좇은 것으로 만 볼 수 있을까? 꼭 그렇다고만 볼 수는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단지 인조 기장을 사용했을 뿐 다른 모든 것들은 고제를 따르지 않았던가. 게다가 시왕지제도 따랐다. 그렇다면 인조 기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만을 인정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결국 우리의 풍기와 성음이 중국과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 아울러 중국에서 나는 기장도 제각각 달라 중국에서의 황종음도 일정치 않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세종은 하게 되었다. 사업 초기에 우리의 풍기와 성음이 중국과 달라 이상적인 고제의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인조 기장의 사용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서 고제를 구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많은 관료들은 저항했던 듯하다. 그것은 박연이 중국의 황종율관과 달리 인조 기장으로 만든 것에 대한 부정이었다. 『실록』은 이러한 사정에 대해서 박연이 인조 기장으로 율관을 만든 것을 여러 대언들이 비판하며 중국의 음을 버리고 스스로 율관을 만든 것으로 모두 거짓에 불과하다고 부정했다고 알리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세종은 인식의 전환을 한 다음 “임금이 하고자 하는 바를 신하가 혹 저지하고, 신하가 하고자 하는 바를 임금이 혹 듣지 아니하며, 비록 위와 아래에서 모두 하고자 하여도 시운(時運)이 불리할 때가 있는데, 지금은 나의 뜻이 정하여졌고, 국가가 무사하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이룩하라”고 박연에게 힘을 실어주며 아악을 정비하도록 했다. 이렇게 세종은 과거 매우 불만족스럽게 보았던 박연을 나중에는 칭찬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아악 정비를 맡겼던 것이다.

이상 세종 7,8년경부터 시작된 고제의 구현으로서의 율관 제정과 아악의 정비는 박연에 의해서 주도되었지만 세종 12년경 세종이 고제 연구로서의 『율려신서』의 탐독으로 율관과 악의 원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면서 완성될 수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한 아악의 정비는 세종 15년경에는 완벽하게 마무리가 된 듯한데, 이러한 세종 12년에서 15년 사이의 시기는 고제 연구를 통해 유교적 이상국가를 실현하려는 세종에게는 귀중한 인식을 가져다 준 시기였다. 즉 그것은 조선의 풍기와 성음은 중국과 다르다는 사실의 인식, 그리고 그러한 차이가 고제를 구현하는데, 즉 유교적 이상국가를 실현하는데 큰 저해가 되지는 못한다는 인식이었다.


Ⅳ. 천문역법 사업과 유교적 이상국가의 실현

이 절에서는 세종대 천문역산의 프로젝트가 앞 절에서 살펴본 고제의 연구와 그것의 구현을 통한 유교적 이상국가의 실현이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추진되었음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서 현대의 과학과는 그 본질적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던 전통 과학으로서의 세종대 과학의 성과가 당시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세종대 천문역산 사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나중에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編)』의 편찬으로 귀결되는 역법 연구가 하나이고, 천문관측 의기의 창제와 자격루와 같은 표준 물시계의 제작과 같은 시제(時制)의 정비가 또 하나이다. 그 중에 역법의 연구는 세종 24년 1442년 이순지(李純之) 주도의 『칠정산내외편』의 편찬으로 뒤늦게 완성되었지만 상당히 일찍부터 관심을 두고 추진되었던 사업인 듯 하다. 즉 이미 세종 2년 1420년에 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이 역법의 교정을 건의하면서부터 세종대 천문역산의 연구는 시작된 듯하다. 세종 5년 1423년에는 문신들로 하여금 당(唐)의 선명력(宣明曆)과 원(元)의 수시력(授時曆)을 비교 검토하도록 지시를 내리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역법의 비교 분석을 서운관(書雲觀) 관원들에게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신들에게 지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역법의 비교 연구가 급하게 필요했던 상황은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문신들로 하여금 고제 연구와 같은 차원에서 고제로서의 선명력과 수시력을 연구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이 때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세종은 문신들로 하여금 산술과 역법의 연구를 무시하지말고 관심을 가지고 익히라고 지시하곤 했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직접 󰡔산학계몽(算學啓蒙)󰡕을 공부하면서 정인지에게 말하길 “산수를 배우는 것이 임금에게는 필요가 없을 듯하나, 이것도 성인이 제정한 것이므로 나는 이것을 배우고자 한다”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렇게 세종 2년과 5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던 천문역법의 연구는 세종 12년경 이전까지는 두드러진 진전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다가 세종 12년경 무렵부터 천문역법의 연구가 급 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이때쯤이면 세종 1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활발해진 고제 연구가 박연의 율관 제작과 아악의 정비로 그 성과가 열매를 맺게되는 시기이다. 세종이 경연에서 『율려신서』를 배우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법 분야의 연구는 여전히 어려웠다. 세종 12년 12월 노력한 만큼 실효를 전혀 거두지 못했었는지 역산 전문가 유순도(庾順道)에게서 상황을 알아본 세종은 천문역법 연구의 책임자였던 정초에게 천문역법의 정비 사업을 그만 두는 것이 어떻겠냐고 의향을 물어볼 정도였다. 그러나 정초는 『황명력』, 『당일행력』, 『선명력』 등의 문헌을 계속 연구하면 바르게 잡을 수 있다며 계속해서 노력할 뜻을 비치고 있다. 이에 세종은 다음 해 3월에 천문역법의 정비는 결국 산법(算法)을 정통해야 가능하다는 판단 하에 중국어에 능통한 자들을 뽑아 중국에 유학 보낼 것을 강구하고, 사역원 주부 김한(金汗), 김자안(金自安) 등에게 산법을 익힐 것을 명하였다. 이어서 세종은 집현전 교리 김빈(金鑌), 한성 참군 우효강(禹孝剛)에게도 산법을 익힐 것을 명했다.

이렇게 세종 12년부터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결과 세종 14년 10월 무렵에는 일월식과 절기의 추보가 중국의 역서와 조금의 차이도 없을 정도로 성과를 보았다. 그러나 세종은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만일 이 정도 선에서 역법 교정의 사업을 그만 둔다면 20년 강구한 공이 중도에서 폐지되는 것에 다름 아니므로 다시 정력을 다해 책으로 완성해 후세에 모범이 되자며 재차 역법의 교정 사업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긴 시간을 두고 벌인 역법의 정비 사업은 세종 24년 『칠정산내편』의 편찬으로 완성되었다.

한편 역법의 교정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던 시점인 세종 14년 무렵부터는 천문 관측을 위한 관측의기의 제작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러한 사실을 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덕 7년 임자년(세종 14년) 가을 7월 성상께서 경연에 나아가 역상의 이치를 논하다가 예문관 제학 정인지에게 이르기를, ‘우리 동방이 멀리 바다밖에 있어서 무릇 시행하는 바가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준수했는데, 유독 관천(觀天)의 기구만은 빠뜨렸다. 경이 이미 역산의 제조를 맡아하고 있으니 대제학 정초와 더불어 고전을 강구하고 의표(儀表)를 창제해 측험에 대비하도록 하라. 그러나 그 요지는 북극고도를 정하는데 있으니 먼저 간의(簡儀)를 만들어 바치라’ 하였다. 이에 신 정초와 정인지가 고제(古制)를 상고하는 일을 맡고, 중추원사 이천(李蕆)이 공역의 감독을 맡아 …”

이렇게 시작된 천문관측 의기의 제작은 문신 정초와 정인지의 고제 연구, 그리고 무인 이천과 천재적인 기계기술자 장영실의 협동 작업에 의해서 빠른 시일 내에 수많은 관측의기들이 제작되었다. 간의(簡儀)를 시작으로 소간의, 일성정시의, 규표 등의 천문관측 기구와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현주일구 등이 늦어도 세종 19년까지는 모두 만들어졌다. 의기는 아니지만 세종 15년에는 천문도(즉 천상열차분야지도)도 수시력법에 의거해 제작되었다.

이상과 같은 관측기구들을 제작한 의도와 배경은 다음과 같은 “일성정시의명”에 잘 나타나 있다.

“요(堯) 임금께서 역상(曆象)을 공경히 하고 순(舜) 임금께서 기형(璣衡 즉 璿璣玉衡)을 관찰하셨으니 역대로 이를 전하여 제작함이 더욱 정교해졌다. 때로는 의(儀)라고 하기도 하고 상(象)이라 하기도 하여 그것의 이름이 같지 않았으나 굽어보아 땅의 이치(地理)를 살피고 우러러보아 천문(天文)을 관측하여 백성에게 때를 정확하게 알려 주었다. 이제 고대로부터 오래되었으니 제도가 가리워지고 무너졌으니 책이 비록 남아 있다 하나 누가 그 책의 본래 의도를 알 수 있겠는가? 성스러운 우리 임금께서 때 맞춰 요와 순 임금을 본받아 규표(圭表)․구루(晷漏)․혼의(渾儀)․혼상(渾象)의 고제(古制)를 회복하였다.”

이를 보면 천문역법과 천문의기가 유교 사회에서 갖는 상징적인 이미지가 잘 묘사되고 있다. 즉 유가에서 고대의 이상적인 성군으로 추앙하는 요와 순이 각각 역법과 의기의 제도를 창안해서 천문을 관측하고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각을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성황(聖皇)이라 추앙 받는 요와 순이 그랬듯이 역상(曆象)과 수시(授時)는 단지 천문학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제왕된 자가 ‘하늘을 받드는 정치’를 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먼저 앞서서 행해야할 중요한 사안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의미를 갖는 역법과 의기에 대한 제도가 요순 시대 이후로 세월이 오래지나 세종 당시에는 그 제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야 말로 이상적인 유교적 천문역법의 고제가 사라진 것이다. 결국 당시에 세종의 명으로 요순의 뜻을 본 받아 제 관측의기의 제작이 이루어졌으니, 그야말로 요순 시대의 고제(古制)의 회복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세종 14년 7월에 시작된 천문의기의 제작 사업은 비교적 단기간에 성과를 본 듯하다. 대부분의 의기들은 세종 15년경에는 제작이 된 듯하며, 간의를 비롯 제작된 의기들을 경회루 북쪽 궁궐 담 근처에 높이 31척, 길이 47척이나 되는 커다란 관측대인 간의대를 쌓고 간의, 정방안, 동표, 혼의, 혼상 등을 설치하고 관측활동을 벌이니 그야말로 궁궐내의 왕실 종합관측소인 셈이었다. 하지만 관측활동만 벌인 것은 아니었다. 간의와 동표 등을 이용해 실제로 관측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지만, 간의대 기구들은 간의를 비롯 혼의와 혼상의 고찰을 통해서 천체의 운행과 원리를 체득하면서 요순의 ‘하늘을 받드는 정치’의 깊은 뜻을 새기는 교육용 기구이기도 했다. “세자가 간의대에 이르러 정초, 정인지, 이천, 김빈 등과 더불어 간의와 혼천의 제도를 강문(講問)했다”는 『실록』의 기록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아마도 가장 늦게 만들어진 것은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였던 듯하다. 대부분의 다른 의기들이 세종 15년 또는 16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에 비해서 세종 19년 4월 15일의 실록 기사는 일성정시의가 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이 때의 기사는 일성정시의 제작을 보고하는 것을 기회로 세종 14년 이래로 추진되어왔던 천문의기 제작의 마무리를 알리는 종합 보고서의 성격을 띄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앞 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율관 제작과 아악의 정비 과정에서 불거진 이상적인 고제의 구현과 그것과 맞지 않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한 문제들이 천문의기의 제작과 관련해서는 전혀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미 율관 제작과 아악의 정비 과정에서 ‘시왕지제’를 통해서 ‘고제’를 구현해야 하고, 나아가 조선의 ‘지역성’(locality)을 인정하면서 중국과의 차이점을 반영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에서의 고제의 구현임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면 지나칠까?

한편 천문의기의 제작 사업이 궁극적으로 마무리 된 것은 세종 20년 1월 옥루(玉漏)가 제작되고 그것을 흠경각을 새로 지어 설치하면서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옥루란 자동 시보장치를 지닌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제작의 경험과 기술을 토대로 장영실이 제작한 매우 정교한 자동 물시계였다. 유교적 정치이념에 의하면 역상(曆象), 즉 천문역법과 함께 수시(授時)는 제왕된 자의 하늘을 공경하는 정치를 할 때 가장 앞서서 수행해야할 업무였다. 이와 같이 정밀한 시각을 측정하고 알려주는 시계의 제작과 운영은 역법의 정비 및 관측 활동에 못지 않게 중요했던 것이다.

자격루는 기계기술자 장영실의 주도로 사업이 시작된 지 14개월 정도 지난 세종 15년(1433) 9월경에 일차로 만들어졌다. 빠른 시간 안에 자격루의 제작 성과를 본 세종은 크게 기뻐하며, 노비 출신의 장영실에게 특별 승진이라는 큰상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일차 제작된 자격루는 더 보완되어 다음해 세종 16년(1434) 7월 1일을 기해 최종 완성을 발표하고 그 날부터 공식적으로 조선의 표준시계로 자리를 잡았다. 『실록』에는 그러한 사실이 상세한 자격루의 구조에 대한 설명문과 함께 그대로 적혀있다. 자격루 제작이 세종의 격려와 칭찬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제작된 이후에 장영실은 또 하나의 물시계를 제작했으니 그것이 옥루였다. 옥루는 물시 계의 기계장치에 천문의 이치를 재현한 형상을 시뮬레이션으로 작동시키는 장치를 덧붙인 일종의 천문시계였다. 그야말로 정교한 물시계의 기계장치와 전통적으로 상징적인 천문의기로 여겨지던 혼천의를 결합한 의기였다. 이러한 천문시계의 완성은 세종에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김돈이 쓴 「흠경각기」를 보면 옥루가 지니는 각별한 의미가 잘 드러나 있다. 그것은 세종 14년부터 19년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동안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천문의기와 해시계, 물시계들의 제작의 결실을 옥루에서 결말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종은 당시의 사업이 중국의 어느 천문의기와 시계들보다도 훌륭한 것이었다고 자부하면서, 옥루와 같은 기구의 제작을 통해서 과거 요(堯)․순(舜)․탕왕․무왕에 버금가는 치세를 펴겠다는 의지를 비로소 만천하에 드러내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그러한 의미를 지니는 기구였기에 『서경』 요전(堯典)편의 “공경함을 하늘과 같이 하여, 백성에게 때를 알려준다(欽若昊天 敬授人時)”는 문구에서 따와 옥루를 설치한 각을 “흠경각(欽敬閣)”이라 이름지었다. 그랬기에 세종은 이 흠경각을 왕의 침소인 천추전 바로 옆 서쪽에 세워 가까이 두었던 것이다.

세종대 천문의기 제작의 종결을 의미하는 옥루의 형상을 살펴보면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옥루는 정교한 기계장치로 작동되는 자동 물시계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기계정치가 드러나지 않는다. 옥루의 중앙에는 7척 높이의 산을 풀먹인 종이로 만들었고, 그 둘레 사방에는 매 시각마다 목탁과 종, 그리고 북을 쳐서 시각을 알려주는 인형들을 세워놓았다. 산의 허리에는 금으로 탄환(彈丸) 크기만 한 해를 만들어 구름과 함께 하루에 한번씩 돌아 해의 운행을 재현하도록 했다. 또한 산의 동서남북에는 『시경(詩經)』 「빈풍도(豳風圖)」에서 묘사되어 있는 사계절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즉 유교적 지상낙원의 풍경을 만들어 놓았다. 그야 말로 옥루는 시계라기 보다 성군이 다스리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사회, 그리고 자연의 이치가 순리대로 구현되는 자연의 세계를 재현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한 사회와 자연은 바로 유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이었고, 세종이 자신의 치세 동안에 이룩하려던 목표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옥루의 제작과 흠경각의 설치가 세종 14년 이후 추진된 천문의기 제작 사업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면, “흠경각기”에서 말하고 있듯이 세종대 천문의기의 프로젝트가 지니는 의미는 결국 천문역법의 정비를 통해서 유교적 정치이념에 따라 요순의 ‘하늘을 받드는 정치’를 본받아 국가를 경영하겠다는 실천적 의미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조선의 자주성과 지역성, 또는 개별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Ⅴ. 맺는 말

이 논문은 세종대 과학기술의 성격에 대한 종래 과학사 연구자들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부터 출발했다. 즉 찬란했던 세종대 과학기술이 ‘자주적’이었다는 평가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그 함의를 검토하고, 재 규정해보고자 하려했다.

본래 ‘자주성’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의 힘으로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세종대 과학기술은 이러한 사전적 의미의 ‘자주적’이었음은 분명하다. 즉 종래 중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수준에서 비로소 벗어나 중국에 버금가는 수준의 과학기술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양의 위도를 기준으로 비로소 처음으로 역법 계산을 하게된 『칠정산내외편』의 편찬은 그러한 대표적인 예이었다. 그러나 종래 세종대 과학기술이 ‘자주적’이었다는 이해는 이러한 사전적 의미와는 상당히 달랐음도 사실이다.

종래 과학사 연구자들이 말하는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은 선진적인 중국의 과학기술을 완벽하게 소화한 이후 그것을 극복하면서 ‘그것과 다른 우리의 고유한 과학기술을 구성해냈다’는 의미인 듯하다. 자주성의 의미가 이렇다면 세종대 과학기술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규정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적어도 유교적 통치이념의 이상적 구현을 위한 과학기술과 중국에의 의존에서 벗어나 그것과 다른 고유의 과학기술을 수립한다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역사상이 아닐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이 건국과 함께 성리학적 통치이념과 사회질서를 기본 축으로 운영되던 나라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더 그러했다. 조선 초기 무렵에는 조선 지배층들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아직은 심화되지 못했던 때이고, 이후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조선 초기의 시기에는 선진적인 중국적인 것의 수용과 정착을 통해 유교적 통치이념의 구현을 추구하는 것이 당면 과제였고, 중국적인 것과는 다른 우리의 고유한 것을 추구하는 일은 훨씬 나중의 사안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이 논문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종래 세종대 자주적인 과학기술이었다고 이해되던 것들을 검토해 보았다. 잠정적 결론은 그것이 조선의 고유한 개별성이나 특수성을 추구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편적이고 선진적인 중국의 것을 배워 익히려는 제 노력의 과정에서 나온 성과들이었다는 것이다. 강남농법 수준의 농업기술을 궁극적으로 목표로 했던 『농사직설』, 금․원의학의 궁극적인 소화와 정착을 목표로 했던 『향약집성방』, 그리고 ‘성인의 도’를 구현하는 데 저해가 되었던 조선의 혼란스러운 성운학과 문자학을 정리하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훈민정음의 창제 등이 그것이었다. 그 문헌들에서 거론되던 ‘풍토부동’, ‘신토불이’, ‘풍기이수’ 등은 조선 고유의 개별성을 추구하기 위한 논리라기보다는 조선의 과학기술을 선진국 중국의 과학기술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과정에서 조선이 중국과 다르다는 사실, 즉 조선의 특수성과 개별성을 비로소 인식하면서 나타난 표현들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세종대 고제 연구와 아악의 정비를 중심적으로 살펴보았다. 세종은 유교적 이상국가와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이상적인 유교적 제도로서의 고제(古制)를 추구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을 어렵게 했다. 그것은 중국의 보편성과 조선의 지역성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국의 보편성은 고대의 이상적인 ‘고제’(古制)일수도 있지만 현실 속의 동시대 천자가 부여한 ‘시왕지제’(時王之制)일 수도 있었다. 조선의 지역성은 고제와도 달랐고 시왕지제와도 달랐던 것이다. 율관의 제정과 아악의 정비 과정을 통해 이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세종은 고제의 변통을 통해서 시왕지제와 부합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러한 선택은 조선의 지역성이 보편성 못지 않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율관의 제정과 아악의 정비를 통해 유교적 이상국가를 구현하려던 노력 속에서 세종이 깨닫게 된 인식의 전환이었다.

세종대의 천문역산학 사업은 이와 같은 고제 연구 및 아악의 정비를 통한 유교적 이상 국가와 사회의 구현이라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안정적인 농업생산을 위한 실용적인 차원에서 추진되었던 것도 아니었고, 중국과 다른 자주적인 역법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천문의기 제작사업을 종결 지운 ‘옥루’에서 우리는 그러한 세종대 천문역산학의 의미를 잘 살펴볼 수 있었다. 즉 천문역법의 정비를 통해서 유교적 정치이념에 따라 요순의 ‘하늘을 받드는 정치’를 본받아 국가를 경영하겠다는 실천적 의미였던 것이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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