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금자/입자론

Zolaist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2월 12일 (월) 17:15 판

갈릴레오 갈릴레이 지음, 정동욱 번역, 『시금자』, "입자론" 원문 : Galileo Galilei, The Assayer (1623), "Corpuscularianism", tr. A. C. Danto (From Sources in Western Civilization), in Modern Philosophy: An Anthology of Primary Sources, Third Edition, ed. Roger Ariew and Eric Watkins, Hackett Publishing Company, Inc.. Kindle Edition. Hackett Publishing Company, Inc.. Kindle Edition.

번역

『시금자』, 입자론

갈릴레오 갈릴레이 지음, 정동욱 옮김


교황님과 제가 맺은 약속에 따라, 저는 "운동이 열의 원인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제 생각을 확실하게 표명할 것이며, 그것이 저에게 왜 참으로 보이는지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나 우선, 우리가 "열"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몇 마디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열은 따뜻하게 느껴지는 물질에 내재하는 참된 일시적 사건(accident), 혹은 작용(affection) 또는 성질(quality)이라고 믿어지지만, 저는 그러한 열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 진실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강하게 의심하고 있습니다.

자, 어떠한 물질적인 혹은 육체적인 실체를 생각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저는 그 실체를 유한한, 이러저러한 모양의, 어떤 다른 물체에 비해 크거나 작은, 이러저러한 시간 동안 이러저러한 위치에 있는, 운동 중이거나 정지해 있는, 다른 어떤 물체와 접촉해 있거나 떨어져 있는, 하나이거나 많거나 적거나 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더라도 저는 이러한 조건들을 갖추지 않은 물체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체들을 빨갛거나 흰, 쓰거나 달콤한, 소리가 있거나 조용한, 즐거운 또는 불쾌한 향기를 가지고 있는 등의 추가적인 조건들과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를 저는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신체적(물리적) 감각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성이나 지성은 그 자체로는 그러한 개념들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맛, 냄새, 색깔 따위의 객관적 존재에 대해 묻는다면, 저는 그것들이 우리의 감각적 신체(corpo sensitivo) 내에서만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한 이름에 불과하기에, 인식하는 생물들이 사라지면 이러한 성질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성질들에 (일차적인 참된 성질에 우리가 부여한 이름들과 구별되는) 별도의 이름들을 부여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성질들이 후자처럼 실제로 참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제 생각에, 다음의 사례는 저의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해줄 것입니다. 제 손으로 먼저 대리석 조각상을 만진 다음 살아있는 사람을 만지는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손 그 자체만을 고려할 경우, 그것은 각각의 대상에 대해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즉, 운동과 접촉이라는 일차적 성질들은 두 대상에 유사하게 작용하며, 각 경우에 우리는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여 이를 기술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실험 대상이 된 살아있는 신체는 내가 만진 신체의 부분에 따라 다양한 방식의 작용을 받은 것으로 느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발바닥이나 무릎, 혹은 겨드랑이 아래를 만지면 단순한 접촉뿐 아니라 우리가 "간지럼"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인 추가적인 작용을 느낄 것입니다. 이 후자의 작용(affection)은 완전히 우리 자신의 것이며, 전혀 손 자체의 속성이 아닙니다. 그리고 손에 운동과 접촉 외에 "간지럼 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또다른 별개의 능력이 내재적으로 존재한다고, 즉 마치 간지럼이 손 자체의 내재적 속성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게 그는 중대한 오류에 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종이 조각이나 깃털도, 우리 신체의 어떤 부분을 부드럽게 문지르든, 그 자체로는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즉, 그것은 운동하고 접촉할 것입니다. 그러나 눈 사이나 코 끝, 혹은 콧구멍 아래가 닿으면, 우리는 거의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반면 다른 곳이 닿으면 별 느낌이 없을 것입니다. 이 가려움은 완전히 우리 것이며 깃털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감각하는 생물들이 사라지면, 가려움은 그것의 텅빈 이름 말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적 물체들의 묘사에 흔히 사용되는 맛, 냄새, 색깔 등의 다른 많은 성질들도 이와 유사한 정도로만 존재할 것입니다.

충실한(solid), 즉 충분히 무거운, 물체는 운동 중 내 몸 어딘가에 닿으면 나에게 "촉감"이라 불리는 감각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 감각은 신체의 모든 부분에서 발견되지만 주로 손바닥에 (손가락 끝에는 훨씬 더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거칠기, 질감, 부드러움 및 단단함의 아주 미세한 차이 — 신체의 다른 부분에서는 구별하기 어려운 — 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촉감 중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즐거운데, 이는 감지가능한 물체의 형태 차이, 다시 말해, 그것들이 매끄러운지 불규칙한지, 날카로운지 뭉툭한지, 유연한지 단단한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리고 촉감은 다른 감각에 비해 물질적이고 밀집된 물질들 그 자체에 의해 산출되므로, 그것은 흙의 원소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물질적인 물체들은 계속해서 작은 입자들로 분해되고 있는데, 그 입자들 가운데 공기보다 무거운 일부는 하강할 것이고, 공기보다 가벼운 일부는 상승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로부터 두 가지의 추가적인 감각이 탄생할 것입니다. 이 입자들은 우리 몸에서 피부 — 피부는 너무 미세하거나(fine) 묽거나(subtle) 유연한(flexible) 물질의 침입을 느끼지 못합니다 — 보다 훨씬 민감한 두 부분으로 침투할 것입니다. 하강하는 입자들은 혀의 상부 표면에 수용 및 침투되어, 혀의 물질과 수분과 혼합됩니다. 이것이 바로 맛의 원인이며, 접촉하는 입자들의 다양한 모양에 따라, 그리고 그 입자들의 많고 적음 및 그 속도의 빠르고 느림에 따라, 좋거나 나쁜 맛이 산출됩니다. 반면 상승하는 입자들은 코로 들어가 냄새의 장치인 다양한 노드를 침투합니다. 또한 이 입자들은 동일한 접촉과 운동을 통해 — 역시 입자들의 모양, 속도, 수에 의존하여 — 좋거나 나쁜 향을 산출합니다. 혀와 콧구멍은 놀랍도록 신중하게 설치되어 있는데, 전자는 하강하는 입자들의 침투를 수용하기 위해 아래쪽에 펼쳐져 있고, 후자는 상상하는 입자를 받을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미각이 자극되는 방식은 아마도 유체가 공기를 통해 떨어지는 방식과 유사할 것이며, 후각이 자극되는 방식은 불꽃이 공기를 통해 올라가는 방식과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공기의 원소인데, 이는 소리의 감각과 대응됩니다. 소리는 우리에게 위아래와 측면에서 섞여 들어옵니다. 이는 우리가 모든 방향의 공기 움직임에 동등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인데, 귀는 공간의 어떤 위치에 대해서도 최대한 적응할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소리는 (화음이나 불협화음의 특별한 성질과 무관하게) 공기의 빠른 진동이 있을 때, 이로부터 생성된 매우 작은 파동이 우리 귀 안에 있는 드럼의 특정한 연골을 움직여 산출됩니다. 공기의 파동 운동이 생성되는 외부적인 방식은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공기를 쳐서 엄청난 속도로 퍼지는 파동을 형성하는 물체의 진동으로 환원될 수 있습니다. 높은 진동수는 높은 음을 낳고, 낮은 진동수는 낮은 음을 낳지만, 외부 물체 안에 그들의 크기나 모양, 혹은 (느리거나 빠른) 운동 이외에 맛, 소리, 냄새를 우리에게 일으킬 수 있는 다른 무언가가 존재한다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저의 솔직한 판단을 얘기하자면, 만약 귀, 혀 및 코가 제거된다면, 물체들의 수, 모양, 운동은 남아 있겠지만, 맛, 소리, 냄새는 남지 않을 것입니다. (몇줄 위에서) 겨드랑이나 코 안쪽의 민감한 피부가 제거됐을 때의 간지럽히기와 간지러움에 대해 주장한 바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피조물 외부에서 후자는 단지 이름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언급한 네 감각과 네 원소의 대응을 고려할 때, 저는 모든 감각 중에서 가장 우수하고 고귀한 시각이 빛과 대응될 거라 믿습니다. 시각은 나머지 다른 감각들에 비해 상당히 우수한데, 그 정도는 유한한 것에 대해 무한한 것이, 점진적인 것에 대해 순간적인 것이, 분할 가능한 것에 대해 분할 불가능한 것이, 어둠에 대해 빛이 가진 우수성과 같습니다. 이 감각 및 그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저는 아주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이 조금이라도 제시하기에는, (더 정확히는) 이를 종이 위에 적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러니 이에 대해서는 조용히 숙고하고 있겠습니다.

이제 저의 원래 주장으로 돌아가서, 흔히 외부 물체의 내재된 속성으로 여겨지는 일부 작용들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만 존재하고 우리 바깥에서는 이름에 불과한 것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 고백컨대, 저의 믿음은 열 또한 이러한 종류이며, 우리에게 열의 감각을 느끼게 하는, 그래서 "불"이라는 일반명사로 불리는, 그 물질들은 이러저러한 모양과 이러저러한 속도를 가진 수많은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라는 쪽으로 아주 많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 몸과 만나면 그들의 극도의 미세함으로 인해 몸을 침투하며, 우리가 "열"이라고 부르는 작용은 바로 그들이 우리 신체를 통과하는 동안 우리에게 느껴지는 그들의 접촉인 것입니다. 따끔하게 침투하는 이 입자들의 수와 (빠르거나 느린) 속도에 따라 그 작용은 쾌적한 따뜻함이 될 수도 있고 불쾌한 뜨거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이들의 침투로 인해 유익한 발한 작용이 촉진된다면 쾌적하겠지만, 그들의 침투로 인해 우리 신체가 너무 많이 분할/분해된다면 불쾌할 것입니다. 요컨대, 불의 작용은 그 자체로는 운동 또는 그 물질의 극도의 미세함으로 인한 물체 침투일 뿐이며, 그 침투 작용은 작은 불꽃 입자들(corpuscles of flame [ignicoli])의 수와 속도 및 물체의 (크거나 작은) 밀도에 따라, 빠르거나 느릴 뿐입니다. 많은 물체들은 이로 인해 분해되어, 그것의 많은 부분은 작은 불꽃 입자들로 변환되고, 이러한 분해 작용은 분해 가능한 물질이 남아 있는 한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나 불 안에 [입자들의] 모양, 수, 운동, 침투, 접촉 외에 "열"이라 불리는 추가적인 성질이 존재한다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건대, 저의 판단에 따르면, 열은 완전히 주관적인 것으로서, 감각하는 생물이 없어지면 우리가 "열"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말뿐인 것이 될 것입니다. 이 작용은 작은 불꽃 입자들이 우리의 신체를 통과하면서 그것과 접촉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산출되는 것이기에, 이 운동이 멈추면 우리에 대한 그들의 작용 역시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석회석 조각의 구멍과 홈 속에 보관된 일정 양의 불꽃[입자들]이—손에 쥐고 있어도—열을 내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불꽃[입자들]은 돌 속에서 가만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돌을 물 속에서 휘저으면, 그 무게로 인해 더 큰 운동 성향을 가지게 되고, 돌의 홈들이 다소 열리게 됨에 따라, 불꽃 입자들은 탈출하여 우리 손에 닿아 거기에 침투함으로써 우리는 열을 느낄 것입니다. 열이 우리에게 느껴지기 위해서는 불꽃 입자가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운동이 추가로 필요하기 때문에, 운동이 열의 원인이라는 저의 주장은 상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나무 조각이 타거나 납 등의 금속이 녹는 데 필요한 이러저러한 운동은 불의 입자가 자신의 속도로 또는 풀무질을 통한 강한 바람의 도움으로 해당 물체를 계속해서 침투하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전자는 또 다른 불꽃 입자나 재로 분해될 것이고, 후자는 액화되어 물과 같은 유체로 변할 것입니다. 상식적인 관점에서, 돌이나 철, 막대를 운동시키는 무언가가 곧 그것을 가열하는 무언가라는 주장은 지나친 허풍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단한 두 물체를 함께 문지를 때 발생하는 마찰[열]은 그 물체를 미세한 비행 입자들로 분해하거나 그 안에 포함되어 있던 불꽃 입자들을 탈출시키는 작용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운동으로 분석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입자들이 우리 몸과 만나 몸을 관통하며 찢어낼 때, 살아있는 피조물은 그 입자들의 운동과 접촉을 느낌으로써, "따뜻함(heat)"이나 "뜨거움(burning)" 또는 "이글거림(scorching)"이라 불리는, 쾌적하거나 불쾌한 기분(affections)을 느끼게 됩니다.

어쩌면 이러한 분쇄와 마찰이 계속되는 동안, 그리고 그 분쇄와 마찰이 입자들 자체에만 한정되어 일어날 경우, 그들의 운동은 일시적이고 그들의 작용은 가열에만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불가분의 원자로의 최종적인 최대의 분해 지점에 도달할 경우, 빛 그 자체가 생성될 수 있는데, 이 빛은 순간 이동 또는 (더 좋은 표현으로는) 순간 확산 및 팽창을 통해—원자들의 미세함, 희박함, 비물질성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아직 명시할 수 없는 조건들 때문인 것인지는 저도 모릅니다—광대한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황님, 저는 항구로 돌아오는 길을 찾을 방법도 갖추지 않은 채 무작정 무한한 바다로 들어가고 싶진 않습니다. 또한 저는 의심 하나를 없애겠다고 새로운 수백 가지 의심을 낳는 우를 범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바닷가에서의 이 작은 모험에서조차 그럴까봐 걱정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배를 다시 띄울 수 있는 더 적절한 때를 기다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