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 설계와 과학의 목적: 안드레아스 리바비우스와 티코 브라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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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wen Hannaway, "Laboratory Design and the Aim of Science: Andreas Libavius versus Tycho Brahe", Isis 77 (1986), 585-610.


실험실 설계와 과학의 목적

안드레아스 리바비우스 대 티코 브라헤


오웬 한너웨이 (Owen Hannaway)

김봉국 역



실험실의 역사는 근대 초기 과학의 중요하지만 무시되어온 측면이다. 실험실이 언제 어디서 자연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는 특별한 장소로 등장했는지 물으면, 지금으로서는 명확히 답변하기 힘든 문제들이 제기된다. 실험실 laboratory이라는 단어의 어원조차 모호하다. 각 지역어(vernacular)의 어원인 라틴어 명사 ‘라보라토리움’ laboratorium은 분명 그리스, 로마 시대로부터 유래한 단어가 아니다. 이 단어가 중세에 사용되었던 증거는 있다. 하지만 16세기말까지 이 단어에 지금과 비슷한 의미가 부여되지는 않은 듯하다. 함축적 의미에서, 애초에 실험실은 오직 연금술과 화학하고만 결부되어 있었다. 다만 이 용어가 자연 현상에 대한 조작적인 연구가 행해지는 특별한 장소를 지칭하는 단어로 점차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확실히 근대 초기 과학에서 실험실의 발전을 폭넓게 조망하려는 연구는 화학실험실뿐만 아니라, 해부학 강당(anatomy theater), 경이로운 것들로 가득 찬 진열실(cabinet of curiosities), 식물원(botanical garden), 천문대 등을 포괄하여 다루어야 한다.

초기 실험실과 화학 및 연금술의 관계와 함께, ‘라보라토리움’이라는 단어가 갖는 어원상의 새로움은 본 주제의 더욱 심오한 의미를 알려준다. 실험실의 출현은 새로운 과학 연구방식의 등장을 암시한다. 이런 연구는 특화된 기구, 기법, 장치를 사용하여 자연을 관찰하고 조작하는 행위를 수반하며, 기구, 기법, 장치를 제작․사용하기 위한 개념적 지식과 숙련된 손재주를 요구한다. 고대 혹은 중세의 과학에서 체계적인 관찰이나 기구의 활용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행위 유형에 대한 강조는 16-17세기에 부상한 새로운 과학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였다. 이러한 강조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과학의 의미 자체도 변화했다. 더 이상 과학은 단지 ‘지식의 한 유형’(a kind of knowledge) ― 어떤 이가 지식을 파악하는 것 ― 이 아니라 점차 ‘하나의 활동 양식’(a form of activity) ― 어떤 이가 과학을 행하는 것 ― 이 되어갔다. 그러한 활동을 위해 이 시기에 따로 마련된, 새로운 이름이 부여된 특별한 장소가 출현했다는 점을 통해 위와 같은 변화의 힘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실험실의 부상과 관련된 몇 가지 쟁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나는 실험실에 관한 가장 상세한 계획 두 가지를 비교하려 한다. 하나는 우라니보르그(Uraniborg), 즉 거대한 천문대의 성채(城砦)(castle-observatory)를 세우려는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의 계획이다. 이 덴마크 천문학자는 1598년 출판한 천문관측기구에 관한 책에서 별도의 화학실험실까지 갖춘 이 천문관측소를 상세히 설명했다. 다른 하나는 안드레아스 리바비우스(Andreas Libavious, 1560s-1616)의 화학의 집(Chemical House)이다. 리바비우스는 1606년 발행한 화학교과서 2판 해설서의 1부에서 화학의 집과 실험실을 상세히 서술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두 계획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우선 명확히 해야만 한다. 첫째, 여기서 묘사되는 대상은 단순한 실험실이 아니라, 과학 실행을 위해 별도의 구역이 설계된 ‘완전한 거주 공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험실의 새로운 요소를 더 넓은 사회적 맥락 아래서 평가할 수 있다. 둘째, 우라니보르그는 1576년에서 1597년까지 브라헤가 거주하며 연구했던 실제 건물인데 반해, 화학의 집에 대한 리바비우스의 계획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으며 아마 그렇게 의도되지도 않은 듯하다. 어쩌면 리바비우스가 자신이 묘사한 화학의 집과 상당히 유사한 건물에서 화학 실험을 수행하는 동안, 그의 계획이 이상화되었을 것이다. 셋째, 이런 설명과 묘사를 통한 비교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브라헤가 우라니보르그에 관한 설명을 천문관측기구를 묘사한 글에 포함시켰듯이, 리바비우스도 화학자와 실험실을 수용하기에 적합한 건물에 관한 계획을 그의 화학기구 해설의 부록으로 내놓았다. 나는 더 나아가서 리바비우스가 우라니보르그에 구현된 과학의 의미와 스타일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으로서 자신의 계획을 제안했음을 보이려한다. 이런 모든 사실은 나의 목적에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나는 건축술의 관점에서 두 건물의 기능과 미학을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16세기말 서양 문화에서 갓 출현한 새로운 과학 활동의 지적․이데올로기적 뿌리를 조사하는 길잡이로서 두 계획을 활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건축술의 논쟁을 주동한 안드레아스 리바비우스는 비범한 화학자였다. 작센 지방의 의사이자 교육자였던 그는 16세기말 루터파 스콜라 인문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 젊은 시절 리바비우스는 타우버강(Tauber) 계곡의 로텐부르크(Rothenburg)에서 시 소속 의사이자 장학관으로 활동하며 도시 공공업무에 종사했다. 그 후 리바비우스는 코부르크(Coburg)로 이사하여 1607년부터 1616년 죽을 때까지 아카데믹 김나지움(Academic Gymnasium)의 학장으로 복무했다. 지적 훈련과 사회적 신분에 걸맞게, 리바비우스는 의학, 교육, 종교의 영역에서 모든 종류의 광신에 맞서 지칠 줄 모르게 싸웠다. 또한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출판사들을 통해 많은 저서들을 내놓으며, 각 분야에서 자신이 합리적인 정통으로 인정하는 것들을 변호하고 방어했다.

광신에 반대하는 리바비우스의 여러 강경한 논쟁들은 파라켈수스(Philippus Aureolus Paracelsus, 1493-1541) 추종자들을 향했다. 파라켈수스주의자들은 농민과 장인의 직관적 지혜를 찬양했고, 이에 더하여 자연과 은총의 빛을 통해 특별한 깨달음에 도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교육과 의료의 영역에서 리바비우스의 전문가 사회의 토대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특히 16세기말 파라켈수스주의(Paracelsianism)가 헤르메스주의(hermeticism), 카발리즘(cabalism), 각종 르네상스 마술, 종교 융합주의와 함께 독일의 몇몇 개신교 궁정들과 ― 리바비우스의 입장에서 더욱 불길하게도 ― 루돌프 2세 치하의 프라하 황실에 스며듦에 따라, 리바바우스는 더 큰 위협을 느꼈다. 리바비우스는 이러한 사태의 배후에서 자애로운 평화주의자인 체하는 칼뱅주의자들의 비밀스러운 음모를 읽어내려 했다. 리바비우스가 보기에 칼뱅주의자들은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안정, 정통 루터파 교리의 존속, 그리고 멜란크톤(Melanchthon, 1497-1560)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 대표되는 인문주의 전통에 위협이 되었다. 리바비우스는 궁정, 비밀결사(cabals), 화학철학(chemical philosophy)을 모두 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날이 선 논쟁은 리바비우스의 파라켈수스 비판이 지닌 부정적 영향만을 보여줄 뿐이다. 좀더 건설적인 태도는 그의 화학 교과서 『알키미아』(Alchymia)에서 나타난다. 이 책에서 리바비우스는 화학 기법과 실행을 총망라하여 명확하게 보임으로써 파라켈수스주의자들로부터 주도권을 되찾아오려 애썼다. 그는 화학의 기교(chemical arts)에 관한 문헌을 박식하게 검토하면서 유일무이한 깨달음을 강조하는 파라켈수스주의자들의 주장을 약화시켰다. 또한 리바비우스는 화학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확립된 담론의 역사적 전통 내에 위치지음으로써 숙련자들의 비밀주의로부터 처방전을 탈환냈다. 리바비우스는 화학의 기교에 관한 축적된 문헌들 ― 마치 수사학처럼 사람들을 움직여 행동케 하도록 의도한 문헌들 ― 로부터 사람들을 지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는 화학 기법 및 처방의 변증적(dialectic) 논리를 “창안”해냈다.

『알키미아』 해설서 1부에 실려 있는 화학의 집에 관한 계획은 기교와 과학으로서의 화학에 관한 리바비우스의 설명이자 논쟁이다. 이를테면 리바비우스는 화로와 기구의 상세 취급법의 서문 격으로 이런 장비들을 배치하고 화학적 조작을 실행하기에 적합한 장소, 다시 말해 실험실을 묘사한다. 이런 실험실은 화학자가 연구하면서 동시에 거주하는 집에 위치한다. 하지만 문제가 이처럼 간단치 않음이 리바비우스의 책에서 금방 명확해진다. 리바비우스는 티코 브라헤의 우라니보르그에서 드러나는 호사로움과 장엄함을 직접적으로 지적하고, 두 건물의 구조적 설계를 결정했을 수도 있는 신비적 상징을 비꼬아 언급함으로써, 독자가 곧 자신의 많은 논쟁 중 하나에 말려들게 될 것임을 공고하고 있는 것이다.

리바비우스와 달리, 티코 브라헤는 따로 소개할 필요가 거의 없다. 브라헤는 근대 초기 수리천문학의 위대한 삼인방 중에서 중간에 있었던 인물로, 그의 양옆에는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와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가 서 있다. 브라헤하면 1572년 신성 관측이 떠오르는데, 그는 이 발견을 통해서 천상계가 영원불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의혹을 제기했다. 또한 브라헤는 1577년 혜성을 관측했고, 이를 바탕으로 행성을 나르는 동인으로 간주되던 천구의 존재를 논박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티코 우주체계의 창안자로, 태양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도록 놔둔 채 다른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선회하게 함으로써 지구가 여전히 우주의 중심에 놓일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브라헤의 업적을 이런 순수 개념적인 용어로만 표현하면, 그의 필생의 연구에서 나타나는 진정한 특징이 가려지게 된다. 브라헤는 수리천문학에서 관측의 기초를 체계적으로 쇄신하는 데에 평생을 바쳤다. 브라헤의 첫 관측은 1563년에 시작되었는데, 16세의 학생 신분으로 양각기 하나를 이용해 목성과 토성의 합(合)을 관측해냈다. 또한 브라헤는 세상을 떠나는 1601년까지 더욱 복잡하고 풍부한 방법들을 활용하여 천문도를 계속 작성해나갔으며 관측기구의 설계와 사용법에 변화를 주어 관측천문학의 정확성을 향상시켰다. 브라헤가 죽은 후 10년 내에 등장한 갈릴레오 망원경의 극적 새로움으로 인해, 육안 관측기구를 개량한 브라헤의 성취가 빛바랠 수도 있다. 하지만 수리천문학에서 케플러의 업적은 피사의 망원경에 거의 빚진 것이 없으며, 오히려 덴마크의 육분의(sextant), 사분의(quadrant), 시차자(parallactic ruler), 혼천의(armillary sphere)를 사용한 측정 결과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이런 관측기구들은 우라니보르그의 천문대의 성채와 함께 『천문학 부흥을 위한 기구들』(Astronomiae instauratae mechanica)에 설명되어 있다.

리바비우스가 평범한 화학자가 아니었듯이, 브라헤도 보기 드문 천문학자였다. 브라헤 ― 혹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칭호인 크누스트루프(Knudstrup) 영주 ― 는 덴마크 봉건 귀족의 일원이었다. 1576년 덴마크 왕 프레드릭 2세(FrederickⅡ, 1534-1588)는 티코에게 우라니보르그 천문대를 건설하라는 용도로 벤(Hven) 섬을 하사하여, 그곳에서 천문학 연구를 수행하도록 해주었다. 브라헤는 1597년까지 이곳에 살면서 연구했다. 하지만 젊은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Ⅳ, 1588-1648) 즉위 후 왕과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브라헤는 자신의 기구들과 연구에 어울리는 새로운 장소를 찾아서 벤섬과 덴마크를 떠나게 된다. 『천문학 부흥을 위한 기구들』의 1판(1598)은 이런 이전 계획의 필수적 요소였다. 이 책은 우라니보르그에서 옮겨온 브라헤의 개인 출판사에서 인쇄되었고, 홀스타인(Holstein) 귀족 하인리히 폰 란차우(Heinrich von Rantzau)의 반츠벡(Wandsbek) 성 ― 브라헤가 잠시 머물렀던 함부르크 근교의 성 ― 에서 정식으로 출판되었다. 이 저작에는 벤 섬의 천문대의 성채와 그곳의 관측기구들에 관한 상세한 해설이 실렸으며, 당시까지 브라헤가 성취한 업적들에 관한 설명도 들어있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사본들은 군주들과 저명한 궁정 인사들에게 증정된 판본으로 알려져 있으며, 상당수의 책에 손수 채색한 판화가 실려 있고 몇 권은 비단과 벨벳으로 화려하게 제본되어 있다. 이 책은 브라헤가 최우선 교섭대상으로 염두에 두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RudolfⅡ, 1576-1612)에게 헌정되었다. 이런 시도는 결과적으로 성공했는데, 황제는 브라헤를 프라하로 초청하여 천문대와 실험실을 재건할 부지로 베낙키(Benatky)의 성을 하사했던 것이다. 『천문학 부흥을 위한 기구들』은 분명 평범한 책이 아니며, 실은 인쇄 역사에서도 유례없는 책일지 모른다. 이 책은 출판의 전과정을 관리․감독할 정도의 재력을 갖춘 귀족의 저작이다. 게다가 브라헤는 궁정의 하급직위 정도가 아니라 봉건영지 이상의 대가를 바라면서 이 책을 황제에게 헌정했다.

나는 리바비우스가 브라헤의 책 『천문학 부흥을 위한 기구들』의 양질의 초판본 중 한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브라헤 사후 1년 뒤인 1602년 뉘른베르크(Nuremberg)에서 출판된 약간 하찮은 외관의 2판을 구해 보았는지 알지 못한다. 훗날 출판된 보급판은 더 작고 덜 정성들여 인쇄된 판형으로, 확실히 리바비우스가 평소 취급하던 책들과 훨씬 흡사했다. 화학의 집과 화학 기구들에 관한 리바비우스의 설명이 실려 있는 『알키미아』의 해설서는 충분한 크기의 2절판 책이다. 하지만 비좁은 2단 편집과 얇은 종이장은, 이 책의 출처가 프랑크푸르트의 변변찮은 상업 인쇄소임을 드러내준다. 두 책의 외관상의 차이는 그 내용으로까지 이어지는데, 이내 리바비우스는 자신과 자신의 책을 덴마크 귀족과 그 귀족의 저작으로부터 갈라놓는 사회적 격차를 몸소 통렬히 의식하고 있다고 밝힌다. 리바비우스는 화학의 집과 실험실 계획을 소개하면서 자신과 브라헤가 처한 상황의 차이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는 건축가를 고용하고 석재와 목재로 설계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재력과 후원이 자신에게 모두 부족하다고 시인한다. 그러면서도 리바비우스는 화학자에게 적합한 거주지와 작업장에 관한 계획 혹은 “착상”을 제안한다. 정면도와 평면도에 묘사된 조화롭지 못한 우스꽝스러운 두 건물은 리바비우스의 말에 힘을 실어준다(아래의 [그림2]와 [그림5], [그림6], [그림7]을 한번 비교해보라). 브라헤의 건축가들이 설계하고 세운 벤 섬의 비범한 성과는 반대로, 리바비우스는 훨씬 평범한 양식의 건물을, 즉 그가 적고 있듯이 “왕족의 저택이 아니라 중간계층 민간인을 위한 주택”을 제안한다. 비례와 원근이 안 맞고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조차 보이지 않는 화학의 집 도안은 건축 지식과 기술의 부족을 드러내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 가지 착상을 분명히 전달하고 있다. 이 건물은 16세기 독일의 도시 주택으로, 이웃집과 따로 떨어진 채 사유 부지 위에 세워졌다. 이것은 성채 과학(Burgwissenschaft)에 대한 부르주아적(bürgerlich) 대응물인가?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건축 논쟁의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우선 벤 섬의 우라니보르그를 논해야만 한다.

1576년 프레드릭 2세는 티코 브라헤에게 벤 섬을 하사하여 이 천문학자를 덴마크에 붙잡아 두고자 했다. 이 당시 브라헤는 천문학에 몰두하기 위해서 모국을 영원히 떠나 스위스 바젤(Basel)에 정착하려고 계획했다. 브라헤는 『천문학 부흥을 위한 기구들』에서 당시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 무렵 내 심정은 이랬다. 모국에서 이 연구를 계속하기란 쉽지도 않거니와 현명한 처사도 아닌 듯했다. 특히, 스카니아(Scania) 크누스트루프의 저택이나 덴마크의 한 지역에 머무른다면 귀족들과 친구들의 왕래가 잦아질 것이며, 이들의 방문은 철학 연구에 필요한 평안을 깨뜨려 내 연구를 지연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브라헤가 바라던 은둔생활을 가져다준 벤 섬은 해수면보다 160피트 정도 높은 2000여 에이커의 백악질 고원섬이다. 이 섬은 엘시노르(Elsinore)-헬싱보르그(Helsingborg) 해협에서 남쪽으로 9마일 떨어진 덴마크 해협에 있다. 벤 섬은 왕실 소유지였다. 프레드릭 2세는 소작 지대를 비롯한 이 섬의 소유권을 브라헤에게 평생 동안 하사했다. 게다가 왕은 브라헤에게 자금을 주어 저택과 천문대 건설에 필요한 비용을 원조했다.

브라헤에게 소유권이 넘어왔을 때 이 섬에는 교회와 풍차 하나 그리고 40여 채의 집이 있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의 소작인들은 섬의 상당 지역을 공유 목초지로 사용했고, 바로 이들이 브라헤의 관측기구 개량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해 주었다. 주거 본관과 천문대 외에도 천문관측기구를 제작할 장인들을 위해 작업장이 새로 세워졌다. 이 섬에는 양어지들도 있었는데, 그 중 한 곳에 둑을 쌓아 해안 근처에 지어진 물레방아를 돌렸다. 이 물레방아는 본관 건물의 인쇄소에서 사용할 종이를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 성채과 천문대의 주춧돌은 브라헤의 절친한 친구인 덴마크 주재 프랑스 대사 샤를 댄세이(Charles Dançay, 1510-1589)가 1576년 8월 8일에 놓았다. 훗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주춧돌 위에 놓여진 비문에는, 브라헤가왕의 명을 따라 “철학에 관해 그중에서도 별을 고찰하기 위해서”(philosophiae imprimisque astrorum contemplationi) 이 건물을 지었다고 기록되었다.

[그림 1]은 매우 정밀하게 정돈된 부지에 둘러싸여 있는 우라니보르그의 본관 건물을 보여준다. 성 자체가 나침반의 방위에 맞춰 배치되었으므로, 외곽의 정방형 귀퉁이는 기본 방위 가리키며 대각선으로 놓인 길은 정확히 동-서와 남-북으로 뻗어있다. 저택의 전면은 동쪽을 향해있고 외곽 성벽은 돌로 덮인 흙둑으로 되어있다. 브라헤에 따르면, 동쪽과 서쪽 귀퉁이의 현관은 “전원풍의 투스카나(Tuscan) 스타일”이었다. 현관 꼭대기에는 개집이 있으며, 수상한 사람의 접근을 알리는 영국산 개 한 쌍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 성벽 북쪽 귀퉁이에 있는 건물 ― 본관 저택을 본 딴 듯한 건물 ― 은 하인들의 거처였다. 이에 상응하는 남쪽 귀퉁이 건물은 인쇄소이며 이곳에서 우라니보르그의 출판물들을 발간했다. 저택 주변의 잘 정돈된 화초 정원은 울타리를 통해 식물원과 분리되었다. 브라헤는 이 식물원에 300종의 나무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림 2]는 본관 건물의 평면도와 (동쪽) 정면도를 보여준다. 정확한 대칭성이 이 도면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기본적으로 중앙에 정방형 구역이 있으며 그 북쪽과 남쪽 측면에 원형 격실이 배치된다. 지하실과 두 개 층으로 이루어진 중앙 정방형 구역에는 주로 가사구역이 있다. 도면에서 1층의 남동쪽 방(평면도에서 D)은 겨울철 식당으로 묘사되어 있다. 다른 세 방(E, F, G)은 여분의 침실로 할당되어 있지만, 침대와 함께 학생용 탁자들이 놓여있는 점으로 미루어 천문대의 연구가 이곳에서도 이어져 수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겨울철 식당을 소규모 화학실험실로 전용하려는 개조가 이루어졌다.) 중앙 분수대(B)는 1층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부엌(H) 아래 북쪽 격실 지하실의 펌프식 우물로부터 공급받은 물을 벽면 파이프를 통해 건물 전체로 보낸다. 2층 방 대부분은 기능보다는 색깔로 그 이름이 명시되어 있다. 북동쪽 방은 붉은 방이고 남동쪽 방도 그냥 푸른 방이다. 천장이 꽃과 초목으로 장식된 서쪽의 커다란 녹색 방은 여름철 식당으로 사용되었으며 어감만 무시하면 기능에 따라 특화된 유일한 방이다. 저택 꼭대기의 작은 원형 창문들(정면도에서 X)은 여덟 개의 학생용 다락방 침실에 햇빛을 비춰준다. 반면에 저택의 하인들은 성벽 북쪽 모퉁이에 마련된 별도의 건물에 살았다. 본관 건물 위에는 전망대가 있는 팔각 탑이 솟아있고 종이 달린 시계가 놓여있다. 그 위에서 페가수스 풍향계가 껑충거리고 있다.

북쪽과 남쪽의 원형 격실은 우라니보르그의 주된 연구 구역이었다. 정면도에서 이 구역은 관측기구가 장착되는 전망대의 피라미드형 지붕으로 쉽게 식별된다. 각 격실의 커다란 바닥판은 기둥 위에 얹혀진 두 개의 작은 바닥판에 베란다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이곳의 지붕은 여러 방향의 하늘을 노출시키기 위해 지붕의 삼각형 조각들을 떼어낼 수 있게 만들어졌다. 북쪽 격실 아래쪽 1층에는 부엌이 있으며 그 아래 지하 저장실에는 물 공급용 우물과 펌프가 있다. 남쪽 전망대 아래쪽 1층에는 브라헤의 개인 연구실이 있다. 그 아래 지하실은 우라니보르그의 본관 화학실험실이다. 화학실험실도 위쪽 연구실처럼 원형이며 중앙 기둥 둘레에 작업대가 설치되어 있다. 브라헤는 이곳에 16개의 화로가 “적당한 방식으로 둥글게 배치되어 있다.”고 말한다. (평면도를 보면 둘레의 벽을 따라 이 화로들이 놓인 듯하다.) 다양한 종류의 화로가 첨부된 텍스트에서 언급되지만 각 화로의 정확한 위치가 따로 상술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대부분의 화로들이 열에 잘 견디는 노르웨이 산 베르겐 석으로 제작되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우라니보르그가 완공되고 몇 년이 지난 1584년, 브라헤는 저택 울타리 너머에 다른 건물을 지었다. “별의 성”(Stellaeburg)라 불린 이 건물은 일종의 지하천문대였다([그림3]을 보라). 건물의 반원형 지붕들은 뒤로 젖혀져서 계단모양 원형 테라스들 ― 이런 원형 테라스들은 작업장이자 전체 건물의 중앙난방장치 역할을 한 중앙 정방형 구역과 연결됨 ― 의 밑바닥에 있는 몇몇 거대 관측기구들을 건물 밖으로 노출시킬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 지하천문대가 건설되었다. 우선 이런 구조는 바람이 불어도 거대한 관측기구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주었다. 우리나보르그 전망대에 관측기구들을 장착했을 때 이런 흔들림은 골칫거리였다. 또한 지하천문대 덕분에, 브라헤는 학생 관측팀을 둘로 나누어 동일한 현상을 ― 기록을 서로 비교하지 않은 채 ― 독립적으로 관측하게 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별의 성은 우라니보르그의 화학실험실과 지하 통로를 통해 연결될 계획이었으나, 이 통로가 실제도 완성되지는 않았다.

거대한 벽면 4분의는 가장 주목할만한 관측기구 중 하나로, 이에 대한 묘사는 우라니보르그 연구 공간의 내부 배치에 관한 생생한 인상을 전해준다([그림4]를 보라). 『천문학 부흥을 위한 기구들』에 실려 있는 이 유명한 그림은 벽에 고정된 황동 4분의를 통해 연출되는 광경을 보여준다. 4분의 안쪽 벽면에는 브라헤와 우라니보르그 내부를 묘사하는 벽화가 있다. 이 기구의 위치가 브라헤의 책에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4분의를 정확히 남북 방향인 벽면에 고정 설치했다는 설명은 있다. 이 벽과 수직하게 동서 방향으로 놓인 다른 벽면에는 항성과 행성을 관측할 수 있는 구멍이 4분의의 꼭대기 지점에 뚫려 있다. 티코의 전기 작가 존 드레이어(John. E. L. Dreyer)는 이 4분의가 본관 건물 남동쪽 방([그림2] 평면도에서 E)의 서쪽 벽에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기구는 두 종류의 관측에 사용되었다. 하나는 별의 고도를 측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별의 자오선 통과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다. 첫 번째 경우 [그림4]의 F에 있는 사람과 같은 관측자가 구멍을 통해 별을 바라보면서 4분의의 눈금을 읽는다. 탁자에 앉은 협력자는 이 치수를 기록한다. 자오선 통과 시간이 필요할 경우, 세 번째 협력자가 통과 순간에 시계로부터 시간을 읽어낸다.

4분의 안쪽의 그림에서 티코 브라헤는 마치 빛이 들어오는 구멍을 가리키는 듯 오른 손을 들어올린 채 탁자에 앉아 있다. 이 초상화는 브라헤의 초빙으로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덴마크로 온 화가 토비어스 겜펠린(Tobias Gemperlin)의 작품이다. 브라헤는 자신을 꼭 닮게 그린 이 초상화가 그의 고귀함과 명성을 인상적으로 전달한다고 평했다. 브라헤 발밑에는 충실함과 명민함을 상징하는 듯한 사냥개 한 마리가 쉬고 있다. 브라헤의 머리 뒤편 벽감에는 시계장치로 태양과 달의 운행을 흉내 낸 지구본이 놓여있다. 지구본 양편에는 브라헤의 후원자이자 군주인 프레드릭 2세와 그의 왕비 소피아(Sophia)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지구본 위에는 브라헤의 서재 일부가 보인다.

한편 초상화의 배경은 우라니보르그의 내부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이 배경은 또 다른 예술가이자 우라니보르그의 건축가, 요하네스 스틴윈켈(Johannes Stenwinckel of Emden)의 작품이다. 배경은 아마도 본관 남쪽 격실의 횡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최상층은 수치를 읽는 관측자와 기구들이 있는 전망대를 묘사하고 있다. 그 아래 중간층은 브라헤의 연구실이며 탁자에서 계산하고 있는 조수들이 보인다. 기둥 뒤에는 브라헤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별자리를 기록하여 만든 거대한 천구의(celestial globe)가 있다. 아치 모양 천장의 지하실은 화학실험실이다.

브라헤는 이런 화학실험실에 관한 설명과 관련해, “나는 어릴 적부터 천문학 못지않게 이 주제에 끌렸고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가며 열심히 연구했다”고 적고 있다. 또 다른 곳에서 브라헤는 아우크스부르크에 체류하던 1569년부터 화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1572년 신성출현으로 천문학에 완전히 몰두했던 기간에만 잠시 화학을 보류했다고 이야기했다. 브라헤는 화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의 책에서는 이런 화로 앞 연구에 관한 암시가 종종 등장한다. 브라헤의 화학의 특징과 목표를 정확히 파악하기란 쉽지 않지만, 브라헤가 쓴 책의 여러 문맥들에서 파라켈수스의 견해가 나타나는 것을 볼 때 그가 파라켈수스 저서에 영향을 받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첫 번째는 우주론적 맥락이다. 브라헤는 1572년 신성과 1577년 혜성을 논할 때 ―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지만 ― 파라켈수스의 불 개념이 그럴 듯하다면서 천상계 변화를 설명해주는 하늘의 원소로 인용한다. 다른 곳에서 브라헤는 북극광(aurora borealis)이 바로 전염병의 전조인 유황증기(sulfureous vapor)이며, 화학적으로 조제된 지상계의 황으로 이 전염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이런 효능은 동류가 동류를 치료한다는 파라켈수스의 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브라헤가 실제 화학 치료법을 준비했음은 ― 페스트, 간질, 피부 감염증 등의 특별한 종류의 질병에 관해 ― 그가 상세히 적고 있는 서로 연관된 세 가지 처방과 이것을 총체적으로 취해 만들어진다는 보편 약제를 통해서 입증된다. 브라헤의 화학을 관통하는 중심사상은 우주론적이면서도 의학적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지상 및 지하에서 자라는 것들과 하늘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힘과 효력이 조화를 이룬다는 믿음이다. 이런 관계는 『천문학 부흥을 위한 기구들』의 표제 페이지와 판권 페이지에 있는 한 쌍의 삽화와 격언에 표현되어 있다. 표제 페이지의 삽화에는 컴퍼스를 손에 들고 천구의에 기댄 채 하늘을 응시하는 신을 닮은 인물상과 그 옆의 푸토(putto, 큐피트 같은 어린아이의 나체상)가 보인다. 이 삽화는 “올려다봄으로써 아래를 살펴보게 된다”(suspiciendo despicio)는 격언을 전한다. 한편, 판권 페이지의 삽화에는 몇 가지 약초를 손에 든 채 천으로 덮인 흙 둔덕에 기대고 있는 신을 닮은 인물상과 그의 팔을 돌돌 감싸고 있는 아이스쿨라피우스(Aesculapius, 의약과 의술의 신)의 뱀이 보인다. 여기서의 격언은 “내려다봄으로써 위를 살펴보게 된다”(despiciendo suspicio)이다. 이렇듯 브라헤에게 하늘을 관찰하고 사색하는 것은 지상계의 결실을 화학적으로 면밀히 조사함으로써 보완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브라헤는 화학을 “지상계의 천문학”(terrestrial astronomy)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당시 우라니보르그 지하에 화학실험실을 배치하고 그것을 별의 성 지하천문대와 연결하려했던 계획은, 어쩌면 기능적인 목적 외에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던 것인지도 모른다.

브라헤의 화학의 세부 내용 자체가 다소 불명확하다면, 우리가 그것에 무지한 이유도 그리 불가사의하지는 않다. 브라헤는 『천문학 부흥을 위한 기구들』에서 자신의 성취를 설명한 후, 화학에 관한 자신의 태도를 피력했다.

나는 귀족이나 왕손들 외에 화학에 흥미를 느끼고 이를 조금 알고 있는 저명하고 박식한 사람들과도 이 문제에 관해 터놓고 이야기하기를 꺼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의로우며 화학의 비밀을 지킬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 적당한 시기에 화학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그들과 공유할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실이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되어버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비밀주의와 귀족적 냉담함의 결합은 리바비우스의 이상, 즉 화학은 공유된 정보의 자유로운 이용에 기반한 진정한 학문이라는 이상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리바비우스는 이런 이상을 1595년 화학 서한에서 최초로 명확하게 표명했다. 당시 리바비우스는 브라헤에게 크게 기대하고 있었고, 우라니보르그 성과 폰 란차우 일가가 화학적 실행의 “대망의 은신처”가 될 것이라 말했다. 실제로 폰 란차우와 브라헤의 이름은 『알키미아』의 초판(1597)의 서신교환자 목록에 실려 있으며, 리바비우스는 이들로부터 화학에 관한 정보를 얻곤 했다. 하지만 이 목록은 『알키미아』의 2판(1606)에서 빠지게 된다. 이 때쯤 리바비우스는 앞서 말한 화학에 대한 브라헤의 태도를 간파했으며, 자신이 그토록 경멸한 신비주의적 연금술의 중심지인 루돌프의 프라하와 브라헤의 밀접한 연관성을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리바비우스가 화학의 집에 관한 계획을 세워갈 무렵 두 권의 책이 그의 수중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권은 우라니보르그를 상술한 브라헤의 『천문학 부흥을 위한 기구들』이고, 다른 한권은 리바비우스가 거느리지 못한 설계자와 건축가를 대신해준 비트루비우스(Marcus Vitruvius Pollio)의 『건축십서』(De architectura)이다. 리바비우스는 화학자에게 필요한 거주지와 작업장을 설계할 때 고려할 사항들을 열거하면서 서둘러 요점으로 나아간다. 이 구절은 고스란히 인용할 가치가 있다.

우리는 경건한 활동을 무시하거나 올바른 삶의 의무를 경시하면서, 단지 자신의 캄캄한 화로에 둘러싸인 채 초췌해진 화학자를 원치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바라는 화학자는, 시민사회에서 인성(humanitas)을 기르고 올곧은 가정을 거쳐 자신의 직업을 윤택케 하며, 그 결과 온갖 덕행에 힘써 고장의 조력자이자 조언자로서 동료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화학자가 남들보다 자신의 연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사적 연구실과 은신처로 사용할 키메이온(chymeion) 혹은 실험실을 고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화학자를 위해 준비하려는 바는, 고상한 사회참여와 자유민의 삶에 적합한 거주지와 그런 생활에 필요한 온갖 비품들이다. 그러므로 화학자는 자기 고장 되에도 믿음직한 하인과 가족의 어머니가 돌보는 가정 때문에, 법규를 소중히 하는 경건한 나라에 살 집을 마련하게 된다.

이 구절은 브라헤를 향한 의도적인 비판이다. 브라헤는 『천문학 부흥을 위한 기구들』에서 자신이 벤 섬에 홀로 머물기 전부터 동료들과 거리를 두려했으며 심지어 고국을 떠나려 마음먹었고 밝혔다. 리바비우스는 과학에만 전념하는 은둔생활이 시민의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리바비우스는 화학자를 섬의 성채에 격리시키는 대신에 도시의 주택 아래에 둔다. 그렇다고 리바비우스가 사생활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의 계획에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경계는 확실히 존재하지만 언제나 그 경계를 가로지를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민사회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는 화학의 집에 관한 리바비우스의 설명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되풀이 되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집은 사유지 위에 자유롭게 세워지면서도 따로 고립되지 않는다. 리바비우스는 “이웃집이 화학자의 쾌적한 생활을 방해하여 갑갑하게 하거나 화학의 집으로 들어오는 빛을 차단하지 않는 한” 이웃 건물을 화학의 집 북쪽 면에 가능한 가까이 두어도 무방하다고 보았다. 빛은 리바비우스의 설계에서 두 번째 중요한 주제이며 종종 첫 번째 주제와도 서로 연관된다. 리바비우스는 브라헤의 지하실로부터 화학을 끄집어내어 대낮의 빛 아래 드러내려고 애썼다. 과학에 필요한 것은 은밀한 격리가 아니라 공공연한 드러냄이었다.

화학의 집을 견학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리바비우스는 집과 관련된 자신의 일상경험들을 비트루비우스 책에 대한 독해와 연관짓는 데 어려움을 겪었음이 분명하다. 내가 보기에, 화학의 집의 정면도와 평면도([그림5], [그림6], [그림7])에는 비트루비우스가 설명한 로마 저택의 몇 가지 특징들을 독일의 도시 주택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독일 주택은 높고 뾰족한 박공(牔栱)과 가파르게 흘러내리는 기와지붕이 특징이며, 실제 저택에 걸맞게 이웃 건물과 분리되어 사유부지 위에 세워진다. 남동쪽 정면도([그림5])에서 볼 수 있듯이, 본관 건물에는 우라니보르그의 세 개의 층에 상응하는 세 개의 층이 있다. 하지만 리바비우스의 경우, 첫 번째 층이 지상에 있으며 바로 이곳에 화학실험실이 위치한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북동쪽 배면도에는 집 뒤편에 있는 세 개의 탑이 보인다. 이 탑은 실험실의 일부이며 그 모양과 개수는 아마도 우라니보르그의 원형전망대를 본 땄을 것이다. 심지어 리바비우스는 브라헤의 별의 성에 상응하는 참호 형태의 초석 작업장([그림8])을 저택 주변부지에 두기도 했다. 현관에 들어가면, 우리는 2층으로 통하는 나선형 계단이 있는 원형탑([그림5]의 B, [그림7]의 C) 안에 서 있게 된다. 두 번째 문은 건물 내부로 우리를 안내한다. 일단 여기서 건물의 서까래까지 이르는 중앙홀([그림7]의 F)을 마음속에 떠올려야 한다. 중앙홀의 북쪽과 남쪽 통로에는 개별 방들이 있으며, 전부는 아니지만 여러 방들([그림7]의 R, S, T, N과 Q, P, L)이 중앙홀로 직접 통한다. 1층에 상응하는 2-3층의 방들 앞에는 그것을 한바퀴 둘러싼 회랑이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중앙홀은 집 안 깊숙이까지 이어지다가 한 벽에 이르러 돌연 끝이 난다. 이 벽에는 문이 하나 있고 문 뒤에는 실험실 구역([그림7]의 G)이 있다. 벽과 문이 모두 중요하다. 벽은 친지와 시민과 고객이 출입해도 좋은 공적 공간인 중앙홀로부터 화학자가 학문을 행하는 사적 공간인 라보라토리움을 갈라놓는다. 반면 문은 둘 사이에 절대적인 장벽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공적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까지 학문에 전념하는 것은 형편없는 동료이자 불량한 시민의 징후이므로, 실제로 화학자는 이 문을 자주 넘나들 것이다.

평면도와 정면도의 모든 방들은 목적에 따라 특화되어 있다. 중앙홀에서 떨어져 있는 1층 방들은 저택 관리나 실험실과 관련이 있다. 2-3층 방들은 화학자와 그의 가족용 사실(私室)이다([그림5], [그림6], [그림7]의 기호 해설을 보라). 리바비우스는 가사기능과 관련지어 위층 방들 ― 부부용 침실, 자녀 침실, 거실, 식당, 부엌, 홀, 가족실, 응접실 ― 을 설명하면서, 화학자의 가정생활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대조적으로 브라헤는 방의 색으로 집안을 네 구역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그의 연구조수들을 이야기할 뿐 가족 성원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은연중에 우라니보르그는 형편없는 친구이자 불량한 시민의 은신처가 되었다. 또한 우라니보르그는 무심한 가장(paterfamilias)의 집이었던 것이다.

1층과 실험실로 돌아가자. 중앙홀 통로 북쪽에는 비트루비우스의 오포로테카(oporotheca) 혹은 과일과 채소를 비축하는 첫 번째 식량저장실([그림7]의 R)이 있다. 그 다음에는 욕실이 있고 바로 옆에는 탈의실과 화장실이 있다([그림7]의 S와 T). 남쪽 통로의 첫 번째 구역(Q)은 또 다른 일반 저장실이며, 그 옆은 목재 저장실(P)이다. 북쪽과 남쪽 통로의 방들은 실험실 활동과 관련이 있다. 평면도 북쪽의 N과 K는 각각 실험실에서 사용되는 휴대용 용기와 유리 제품, 그리고 원료와 화학약품을 보관하는 저장실이다. 이 두 방으로 출입하려면 실험실을 통과해야만 한다.

남쪽 통로에는 별도의 작업 구역이 세 곳 있다. 평면도([그림7])의 O는 코아굴라토리움(coagulatorium) 혹은 필트라리움(filtrarium)이라는 방이다. 이곳에서는 여과, 결정화, 침전과 같은 분리 및 정제 작업이 진행되며, 이 작업을 수행하려면 화로 말고 다른 특별한 기구가 필요하다. 이 구역으로 들어가려면 실험실 조수들의 일반 작업구역인 프라이파토리움(praeparatorium)이라는 인접한 방([그림7]의 L)을 통과해야한다. 정면도에 보이듯 이 방([그림5]의 O)에는 벽 밖으로 돌출된 창이 차례로 나있다. 리바비우스는 이 창의 용도가 가능한 많은 빛을 방안으로 비추기 위함이라 설명한다. 이는 실용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기능적으로 햇빛은 결정화와 침전 같은 몇몇 화학작용을 촉진하며, 상징적으로 화학의 모든 절차는 대낮의 빛 아래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 방에 중앙홀로 통하는 출입문이 있고, 그 결과 실험실 조수들조차 이 집의 공적 공간으로부터 고립되지 않음에 주목해야 한다. 맨 끝에 있는 방([그림7]의 M)은 실험실 조수의 침실이며 조수들이 직통으로 실험실에 드나들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또한 조수들은 실험실이 내려다보이는 벽에 난 창문을 통해 그 방에서 진행되는 작업 과정을 빈틈없이 살펴볼 수 있다.

실험실 자체는 앱스(apse, 교회당의 동쪽 끝의 후진(後陣))와 흡사하게 건물 뒤편으로 돌출되어 있다. 실험실 양 편에는 반원형 예배당을 닮은 두 개의 작은 탑이 서 있다([그림6]을 보라). 실제로 리바비우스가 이 부분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어휘들 ― 예컨대, 아이데스(aedes), 아디툼(adytum), 셀라(cella) ― 은 집 못지않게 예배당이나 교회를 상기시킨다. 리바비우스는 건물의 이 부분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면서 이내 자신의 실험실과 브라헤의 실험실을 차별화한다. 티코는 원형실험실을 만들었고 마치 불카누스(Vulcan, 불과 대장장이의 신)를 모신 신전처럼 땅 밑에 놓아 그 운명을 지하세계 신의 수중에 맡겼다. 반면 리바비우스의 실험실은 서쪽 커다란 창문에서 내리쬐는 햇빛에 노출되며 이 빛은 연구의 전 과정을 밝게 비춘다. 브라헤는 자신의 화로 16개를 서로 구분하지 않은 채 원형실험실 둘레에 “채워 넣었다.” 반면 리바비우스는 명칭이 붙은 10개의 화로를 ― 신전 벽의 수많은 조각상들과 흡사하게 ― 특별히 지정된 주변장소에 배치했다. 실험실 맨 앞에는 공용화로(focus communis)가 놓인다. 리바비우스는 이 화로는 화학연구뿐만 아니라 가사용으로도 사용된다고 명기해 놓았다([그림7]의 기호 해설을 보라). 남쪽 탑([그림7]의 I)은 광석에 함유된 금속의 양적 비율을 측정하는 시금(試金) 실험실, 프로바토리움(probatorium)이다. 그 안에는 휴대용 시금화로와 저울이 있다. 상응하는 북쪽 탑([그림7]의 H)은 화학자들의 정신휴양 장소인 아디툼(Adytum)이다. 이 곳에도 화로가 갖추어져 있으며 그곳의 나선형 계단은 위층 연구실로 통한다.

리바비우스는 우라니보르그와 화학의 집의 차이를 다음의 네 문장에서 분명하게 표현하려 했다. “그(브라헤)는 왕실의 후원을 통해 천상의 저택 한복판에서 호화롭게 살 수 있었다. 미약한 인간(homunciones)인 우리는 작은 불꽃(scintilula nostra)에 만족한다. 이 학문, 즉 화학에서는 상이한 것들이 언제나 끌어 오르려는 중이다.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기구들이 요청되고, 이는 결국 더욱 더 많은 것들이 오고가야함을 의미한다.” 내 생각엔, 하나의 이미지와 한권의 책이 ― 사회적․우주론적 차이에 주목하게 하는 반복적 지소사(指小辭, diminitives)의 의미심장한 사용과 더불어 ―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미지는 바로 우라니보르그의 벽면 4분의에 있는 그림이다([그림4]를 보라). 여기서 브라헤는 왕실 후원자들의 초상화 아래의 의자에 기댄 채 영원히 빛나는 하늘의 별을 가리킨다. 반대로 리바비우스는 생성되고 소멸하는 지상세계에 속하는 화로의 순간적인 불꽃을 살려놓기 위해서 여기저기로 분주히 달리고 있는 화학자를 되살려낸다. 이런 차이는 분명 사색하는 삶(vita contemplativa)과 행동하는 삶(vitaa activa)의 차이와 관련이 있다. 하나는 연구실에 앉아 신성한 사물의 진리를 사색하는 천문학자-철학자의 삶이다. 다른 하나는 과학과 시민의 책임 모두에 신경을 쓰는 육체적․사회적으로 활동적인 화학자의 삶이다.

내 생각에, 이 구절의 리바비우스에게 영향을 주었던 책은, 과학이 영원한 하늘의 형상을 연구하는 데에만 제한될 필요가 없으며 덧없이 변화하는 지상의 형상도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에 의해 씌어졌다. 이 사람은 바로 자신의 책 『동물에 관하여』(On the Parts of Animals)에서 생물에 관한 연구를 옹호했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384BC-322BC)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비생성적이고 불멸하며 영원히 지속되는 천상계의 물체는 본성상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것을 연구케 한다. 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으므로, 그것들은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며 결국 우리의 지식과도 동떨어지게 된다. 반면 동식물의 변화무쌍한 형상에 관한 연구는 본질적으로 덜 매력적이고 이따금 혐오스럽기도 하지만, 그것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면서 그에 관한 상세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굉장한 기회를 제공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결론 내린다. “따라서 우리는 하찮은 동물을 연구하는 것에 철없는 반감을 가지며 주춤하여 안 된다. 자연의 온갖 영역은 모두 경이롭다. 방문객들이 부엌에서 불을 쬐는 헤라클리투스(Heraclitus)를 발견하고 들어서기를 망설였을 때, 헤라클리투스는 마치 부엌에도 신성이 있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그들에게 염려 말고 어서 들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혐오감을 버리고 모든 종류의 동물들을 과감히 연구해야만 한다.” 어떤 신성이 리바비우스 실험실의 공용화로(focus communis) 주변의 화로들에서 흘러나온 불꽃의 한복판에 현전할 수 있었을까? 이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우리의 경건한 루터파 선생이 내놓지 않은 대답에 이르게 된다. 그 불꽃은 바로 화로와 가정의 로마 신, 라레스(Lares)와 페나테스(Penates)를 강하게 암시한다.

이제 우리는 우라니보르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화학의 집이 지니는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의사이자 교사로서 대부분의 생애를 도시 공공업무에 바쳤으며 많은 책들을 왕손이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자유도시에 헌정한 리바비우스는, 브라헤의 천문대의 성채에 도전하기 위해 시민 인문주의의 밑천을 전적으로 끌어다 썼다. 한스 바론(Hans Baron)은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를 다룬 고전적인 저작에서 이런 정치-문화 이데올로기의 주요 주제들을 서술했다. 그의 설명은 세 가지 근본적 요소를 지적한다. 첫째, 정치와 사회에 참여하는 삶이 학문과 사색으로 물러나는 삶보다 우월하다는 확신이 당시에 있었다. 리바비우스의 도시 주택은 화학자의 사회 참여를 허용하도록 설계되고 배치되었음이 분명하다. 이는 별에 관해 사색하는 우라니보르그와 대조적인데, 브라헤는 낯선 사람의 접근에 개가 짖어대는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체에서 일체의 교제를 끊은 채 자기충족적인 호화로움에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둘째, 시민 인문주의는 가족을 건전한 사회의 토대로 소중히 했다. 리바비우스의 집에서 연구 공간과 거주 구역은 구분되지만 서로 연결되기도 한다. 집안을 안내하며 들려주는 리바비우스의 설명은 가족과 함께 살면서 그 책임을 다하는 가장으로서의 화학자를 쉽게 떠올리게 한다. 반면 우라니보르그에 관한 브라헤의 설명을 들어도, 결코 우리는 브라헤의 가족을 만나지 못하며 집안의 가사 배치에 관해서도 알아내지 못한다. 맞닥뜨리는 사람은 학생들과 조수들뿐이다. 셋째, 시민 인문주의는 현인의 삶이 완벽한 삶이라는 생각을 거부하면서 그 대신에 시민을 찬양한다. 바론이 인용하기를, 이러한 시민은 “연구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의무를 양어깨에 짊어지고 동료 시민을 위한 공무에 봉사함으로써 인성을 완성해낸 사람들”이다. 이런 바론의 이야기는 화학자에 대한 포부를 밝히는 리바비우스의 말을 완벽히 되풀이하고 있다. “우리는 화학자들이 시민 사회에서 인성을 기르고 올곧은 가정을 거쳐 자신의 직업을 윤택케 하며, 그 결과 온갖 덕행에 힘써 고장의 조력자이자 조언자로서 동료들을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 여기에 드러난 정조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브라헤의 정조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브라헤는 고국에 대한 책임으로 인해 자신의 연구가 방해받기를 꺼려하면서 동료들과 귀족들을 멀리 피했던 것이다.

시민 인문주의에 관한 바론의 설명을 한 천문학자에 대한 화학자의 비판에까지 확대하여 적용하는 것이 다소 과장이라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문주의자 리바비우스는 활동적인 생활과 덕을 추구하는 삶을 위협하는 천문학과 수학을 경고하기에 나무랄 데 없는 원전에 의지할 수 있었다. 이는 다름 아닌 키케로(Cicero)였다. 키케로는 『의무론』(De officiis)에서 가이우스 술피치우스(Gaius Sulpicius)와 섹스투스 폼페이(Sextus Pompey)를 높게 평가했다. 그들은 천문학과 기하학에 열정적이면서도, 과학의 진리를 추구하느라 도덕적 미덕을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인 활동적인 삶을 도외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듯 화학자를 시민 인문주의자로 묘사하는 것은 리바비우스 화학의 지적 원천과 완전히 부합한다. 키케로주의(Ceceronianism)는 루터파 인문주의 멜란크톤 전통의 핵심이었으며, 리바비우스는 그 전통의 강력한 대변인이었다. 철학자로서의 웅변가를 찬미하는 키케로주의는 지식이자 실행으로서의 화학 체계에 변증론적이고 수사학적으로 접근하려는 리바비우스의 시도에 근간이 되었다. 따라서 리바비우스가 집과 실험실의 화학자를 묘사할 때, 마치 로마의 웅변가와 닮은 것으로 설명하는 것에 놀라서는 안 된다.

웅변(술)을 논하게 되면 리바비우스의 실험실 설계에 대한 또 다른 차원의 분석이 가능해지며, 이를 통해 리바비우스 과학의 이데올로기적 외관을 그것의 지적 틀에 좀더 적절하게 맞춰볼 수 있다. 리바비우스는 루돌프 아그리콜라(Rudolph Agricola, 1444-1485)를 필두로 하여 필립 멜란크톤과 요한 슈투름(Johann Sturm, 1507–1589)을 거쳐 페트루스 라무스(Petrus Ramus, 1515-1572)로 이어진 북부 교육 인문주의의 전통에 속해있었다. 또한 리바비우스 자신이 바로, 필리포-라무스주의(Philippo-Ramist)라고 평했던 변증론과 수사학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일화에 관한 논리학사와 변증론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흐름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범주론』(Categories)이나 『분석론』(Analytics)이 아니라, 『토피카』(Topics)에 대한 강조로 특징 지워지며, 이러한 강조는 수사학에 대한 키케로의 토포스적(topical) 접근을 통해 적잖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 [말의] 위치(loci) 혹은 장소(places)라고 자주 불렸던 ― 토포스(topic)는 어떤 주어진 주제에 관한 지식의 보고(寶庫)에서 이용할만한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의지해야하는 공통의 표제 혹은 핵심 개념이었다. 이런 장소에는 연설, 강의 제목, 진상 주장을 위한 화제들이 배치된다. 이러한 전통에서 모든 담화술 ― 좀더 적절하게는 “논거발견”(invention) 활동 ― 은 주장들을 그 장소로부터 빼낸 후, 판단(judgement) 혹은 논거배치(disposition)라는 변증의 두 번째 단계에서 그러한 주장들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장소의 수와 본성은 이런 변증 이론의 일화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한 가지 주제가 전체 발전 과정을 관통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장소의 구별성(discreteness)과 장소의 조직화 기능에 대한 강조이다. 이러한 과정은 외관상으로 계속 분기해 나가는 라무스 분류표(bracketed tables) ― 리바비우스가 화학 분야(art of chemistry)를 체계화하는 데 사용했던 유형의 분류표 ― 의 확장에서 절정에 달했다.

리바비우스의 안내를 받으며 화학의 집 안을 돌아다닐 때, 우리는 집 안 장소들의 중요성과 그것들 간의 구별성에 대한 강조를 몇 번이고 듣게 된다. 마지막 구절에서 리바비우스는 건물의 상징적 설계를 역설적으로 비꼬면서 자신의 평면도에 담긴 중요한 사상을 밝힌다. 단지 이 집에서는 화학의 용기들(기구들)이 눈에 띄게 되며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potissimum prae se ferunt)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생각은 브라헤의 지하 실험실에 대한 리바비우스의 비판에서도 중요한 논점이었다. 리바비우스는 브라헤의 실험기구들이 원형실험실의 화로들 주변에 떼지어 모여 있었다(frequentaverit stipaveritque)고 지적한다. 이는 실험기구들이 분리되어 배치되지 않아 서로 구별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리바비우스는 계속해서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것 중 일부를 군중으로부터 확실하게 격리시켜 놓았는데, 한 장소에서 모든 것들이 수행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리바비우스가 화로를 실험실에 배치하는 방법, 예컨대 명칭이 붙은 화로들을 특정한 방이나 벽(cella)에 할당하는 방식을 이미 살펴보았다. 실로 화학의 집 전체는, 학문의 조직적 실행을 성취하기 위해서, 장소들 내부에 배치되는 일련의 장소들이다. 르네상스 토포스적 논리학의 본원(本源)이라 평가받는 루돌프 아그리콜라는 변증의 장소(dialectical places)가 그렇게 불리는 이유를 “확신을 갖는 데 필요한 기구들이 마치 용기나 보물 상자 안에서처럼 그 장소 안에 배치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화학의 집 안에 있는 장소들에는 주장이 아니라 물질의 정수를 뽑아내는 화학기구들이 비치되는데, 이는 화학기구들을 대낮의 빛 아래 노출시켜 진정한 학문의 결과물로서의 미덕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실험실은 화학의 특정 장소들이 수용되는 공통의 장소이다. 이런 견지에서 우리는 건물에 관한 리비비우스의 설명이 시작되는 구절의 의미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리바비우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제 화로와 용기라는 주제를 논하기에 적당한 때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화로와 용기를 배치하고 보관할 장소(locum)가 아직 창안된(inventum) 적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화로와 용기의 교묘한 배열(constitutio)은 화학에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다.” 이렇듯 변증 이론의 전문 용어들이 지닌 이중적 의미를 활용하는 것은 리바비우스의 특징이며, 그 발상에 있어서는 전형적인 키케로주의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변증적 장소들의 건축술적 배치는 고전 수사학의 필수 요소인 기억술을 상기시킨다. 『웅변교수론』(Institutio oratoria)에서 퀸틸리아누스(Marcus Fabius Quintilianus, c35-c95)는, 웅변가가 연설을 기억하는 데 도움을 얻고 싶으면 친숙하고 넓은 장소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하면 된다고 권고한다. 그런 다음에 웅변가는 집 안 여기저기에 있는 많은 독특한 방들에 자신의 담화의 주제와 관련된 인상적인 이미지들을 배치하면 된다. 그 결과, 웅변가는 연설을 진행할 때 자신이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닌다고 상상하면서 연설의 여러 부분들을 상기하기 위한 이미지들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리바비우스는 기억을 위한 인위적 보조물의 사용을 반대하는 지적 전통에 속했고, 특히 그것들에 구현된 상징적이고 표상적인 사고방식에 적대적이었다. 그렇지만 리바비우스의 화학의 집 건물은 흥미롭게도 이런 기억술과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을 일종의 반전된 기억 체계라고 부를 수 있다. 리바비우스의 과업은 그가 불러내야 하는 낯선(unfamiliar) 건물의 장소들에 질서 잡힌 학문의 기구들을 배치하는 것이다. 리바비우스는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친숙한 기억 장소에서 나오는 고전적 이미지를 대체하려는 노력과, 실험실 과학의 기구들을 둘러싸는 새로운 건물의 설계를 통해서 리바비우스가 서양 문화에서 지니는 상징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험실의 설계를 비교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해 주는가? 첫째, 우리는 고전 전통이 근대 초기 과학에 남긴 지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유산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근대 과학의 발전에서 수학적 방법이 중요했음을 인식하는 것과 함께, 수학과 관련되지 않은 다른 유형의 과학적 실행도 등장했음을 알아야만 한다. 이런 새로운 과학을 모양 지었던 지적 양식을 이해하려고 할 때, 수학적이고 분석적인 전통을 외에도 고대 철학의 변증적이고 수사학적인 전통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전자가 우주의 신성하고 영원불변하는 존재의 확실성을 납득시키고자 힘쓴다면, 후자는 변하기 쉬운 존재들에 대해 지적으로 설득시켜 인간들이 사회적․정치적 영역에서 행동하도록 하기 위해 애쓴다. 이런 두 가지 지적 양식은 지식을 추구하는 데 있어 서로 구별되는 사회적 맥락을 정의했다. 하나가 사색적 연구와 영원한 진리 추구에 전념하면서 움츠러드는 삶을 불러낸다면, 다른 하나는 인류의 진보를 추구하면서 사교적이고 활동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삶을 불러낸다.

우리는 이런 두 가지 삶의 양식을 각각 이 논의의 두 명의 주인공이 드러내는 삶을 통해 살펴보았다. 사색적 양식은 우리가 보통 천문학과 연관짓는 인물, 즉 티코 브라헤를 통해 드러난다. 반면 활동적 양식은 화학자 안드레아스 리바비우스를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삶의] 범주를 이와 관련된 각각의 과학과 동실시하면서, 관측 과학인 천문학은 사색적인 삶과 연관되고 실험실 과학인 화학은 활동적인 삶과 연관된다고 결론짓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단순 구분에 반하는 증거들이 있다. 키케로처럼 리바비우스도 적절한 마음가짐으로 천문학을 추구하면 달력 수정, 천궁도 제작, 불규칙한 우주 현상 예측을 비롯하여 사회․정치적으로 유용한 ― 그것이 없었다면 사회․정치적 안정에 위협이 되었을 ― 실천들로 이어질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반면 사색적인 삶을 받아들였던 브라헤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화학을 연구했다. 이런 명백한 역설에 대한 해답은 과학의 주제가 아니라 과학이 추구하는 목표에 있다. 브라헤는 화학 ― 지상계의 천문학 ― 을 행했고, 그 결과 신성하게 창조된 우주의 조화를 지하 실험실의 어둠 속에서 밝혀냈을지도 모른다. 이런 우주의 조화는 그의 화로에서 만들어진 산물을 하늘의 빛나는 물체들 ― 브라헤가 천문대의 테라스에서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응시했던 물체들 ― 과 연관시켜 주었다. 브라헤는 아래를 내려다봄으로써 위를 살펴보았고, 위를 올려다봄으로써 아래를 살펴보았다. 그의 실행은 사색을 위한 것이었다. 반대로 리바비우스는 ― 대낮의 빛에 완전히 노출된 ― 화로에서 만들어진 산물을 통해 우주론적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인류에게 가져다 줄 이득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의 실험실을 고안했다. 그의 실행은 사회적 유용성을 위한 것이었다. 실험실이 특정 과학 분야와 관련된 것이 아니듯이 활동적인 혹은 사색적인 삶과 배타적으로 동일시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실험실 설계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줄 것이다.

관련 항목

박민아, 김영식 편, 『프리즘: 역사로 과학 읽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2013).

제1부 과학혁명의 또 다른 면모

제2부 실험의 권위

제3부 생물학과 사회의 상호작용

제4부 20세기 과학

제5부 동아시아 사회 속의 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