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적, 인지적, 사회적

Zolaist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8월 1일 (일) 11:51 판 (→‎본문)

래리 라우든 지음, 정동욱 옮김, 인식적, 인지적, 사회적. 원문 : Larry Laudan, "The Epistemic, the Cognitive, and the Social", in Science, Values, and Objectivity, eds. Peter Machamer and Gereon Wolters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2004), pp. 14-23.

과학의 중요한 판단 기준들은 참/거짓을 판단하는 인식적 기준들을 넘어섬. 라우든은 이를 “인지적(cognitive)”이라고 칭하고자 하며, 이것이 사회적 가치와는 구별된다고 주장함.

본문

인식적, 인지적, 사회적

래리 라우든(Larry Laudan) 지음, 정동욱 옮김


이 장에서 나는 과학철학자들이 충분한 검토는커녕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던 문제인 과학철학과 인식론 사이의 관계에 주의를 돌리고자 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간주하는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관계에 대한 이해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과학철학자이든, 보다 전통적인 부류의 철학자이든, 과학철학이 일종의 응용 인식론이라고, 즉 과학철학은 분석적 인식론의 범주와 도구를 과학이라 불리는 활동을 이해하는 데 사용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1968년 시드니 모르겐베서(Sidney Morgenbesser)가 “과학철학은 과학적 사례들을 활용한 인식론이다.”라고 조롱했을 때(Morgenbesser 1967, xvi),[1] 내가 믿기에 그는 이러한 상식을 말했을 뿐이었다. (물론 과학철학에는 응용 인식론이라기보다 응용 형이상학으로 보이는 또다른 측면 — 전통적으로 과학 “기초론”이라 불리는 — 도 있는데, 이 주제는 여기서 검토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무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특히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철학의 기원에 대한 이러한 방식은 무해하지 않다. 반대로, 그것을 기본적으로 사례를 이용해 가르치는 인식론으로 생각함으로써 과학이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인식론자의 오만일 뿐 아니라, 과학철학 내의 특정한 한 접근법, 특히 인식적 실재론이 맞다는 것을 전제하는 동시에 적어도 실재론 이상의 탁월한 실적을 기록한 다양한 다른 과학철학의 적절성을 부정하고 있다. 게다가, 과학철학을 응용 인식론으로 보는 관점은 건전한 과학에서 사용되는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평가 전략들의 대다수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나는 과학철학이 (배타적으로든 주된 것으로든) 인식적 활동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과학이 오로지 인식적 활동인 것도 아니고 주로 인식적 활동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상호 연관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다소 우회적인 길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우선 과학철학이 인식론에 환원될 수 있다는 논제의 익숙하고 특수한 사례에 집중해 볼 것이다. 나는 과학철학을 합리적 재구성으로 본 관점, 특히 1930년대와 1940년대의 한스 라이헨바흐(그리고 다소 약한 정도로는 루돌프 카르납)에 의해 개진된 생각을 검토할 것이다. 나는 라이헨바흐식 재구성이 (흔히 생각되는 것과 같은)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에피소드에 대한 폭넓은 사례 연구가 아니라, 오히려 실제 과학에서 어떤 부분을 재구성할 수 있고 어떤 부분은 재구성할 수 없는지에 대한 엄격한 제약조건들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나는 이 제약조건들이 인식론의 도구들이 가진 극심한 제약으로 인한 것임을 보일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로 확립하고자 하는 첫 번째 요점은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한데) 라이헨바흐가 합리적 재구성을 임의의 주어진 과학적 사건에서 인식적으로 중요한 특징들을 규정하는 도구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오직 매우 약화되고 특이한 의미에서만 합리적 재구성이며, 이 점은 내가 이에 대해 지적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점이다. 『경험과 예측』의 첫 장에서 라이헨바흐가 생각했듯이, 합리적 재구성이란 그 사건의 요소들이 어떻게 또는 얼마나 탐구자의 목표를 추동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과학적 사건의 세부사항을 치우려는 시도가 아니다. 라이헨바흐가 합리적 재구성에 관해 얘기할 때 머릿속에 품었던 것은 도구적 합리성과 같은 것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그 문구에서 ‘합리적’이라는 용어가 싣고 있는 것은 순수히 인식적인 것이다. 그는 임의의 실제 사건에서 합리적 재구성에 적절히 포함된 오직 그 특징만이 문제가 되는 사건에서 평가 중인 이론 혹은 가설의 참 또는 거짓과 관련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반복하자면, 라이헨바흐에게 합리적 재구성은 순전히 그리고 단순히 인식적 재구성이었다. 가설의 진위를 결정하는 일과 무관한 활동이나 원리가 관련된 사례의 경우, 그러한 활동과 원리는 그 사례의 소위 합리적 재구성에서는 적절한 자리를 찾지 못한다. 똑같은 요점이 라이헨바흐의 자주 언급되지만 제대로 이해되지는 못한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의 구분에도 적용된다. 이러한 이분법은 그에게 한 연구자의 탐구에서 나타나는 시기적 단계의 구분이 아니라 당신이 역사책에서 볼 수도 있는 사건에 대한 기술적으로는(descriptively) 풍부하지만 철학적으로는 무관한 이야기와 그에게 그 사건의 합리적 재구성을 구성할 순전히 인식적인 이야기 사이의 구분을 말할 뿐이다. 라이헨바흐에게 정당화의 맥락은 문제가 되는 이론에 대한 인식적 평가에 필요한 그러한 모든 요소들과 오직 그러한 요소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즉 비인식적인 모든 것은, 발견의 맥락과 관련되어 있고, 그에 대한 심화된 탐구는 심리학자나 인류학자에게 맡겨진다. 그 사건에서 철학자의 관심은 인식적 검열을 통과한 그러한 요소들에만 엄격히 제한되었다.

자 이제, 만약 과학철학이 응용 인식론이라는 생각을 당신이 지지한다면, 당신은 과학철학의 일이 사건 자체라기보다 사건의 합리적 (이제 인식적인 것으로 이해된) 재구성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라 여기는 라이헨바흐의 생각에서 어떠한 이상한 점도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게다가 당신은 이렇게 덧붙일지도 모른다. 인간 활동에 대한 모든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설명은 감당 가능한 분석 단위를 갖기 위해 실제 세계의 지독한, 와글와글대는 혼란을 단순화하고 이상화해야 한다고 말이다. 단순화가 유용한 목적을 제공하는 한, 나는 단순화를, 심지어 과도한 단순화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수상한 점은 과학 활동을 추동하는 대부분이, 가장 합리적으로 보이는 과학 활동에서조차, 엄격한 의미에서는 아무런 인식적 정당화를 갖지 못한 고려로서 라이헨바흐를 비롯해 과학철학을 응용 인식론으로 생각하는 다른 많은 이들이 보기에 과학의 합리적 재구성에서 배제되어야만 하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이 장의 뒷부분은 이 주장을 공략할 것이다. 나는 과학자들에 의해 사용된 많은, 거의 대부분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론 평가 원리들이, 그들 자신에 의하면 합리적이고 적절할지라도, 인식적 이유(rationale) 또는 토대를 전혀 갖지 못함을 보일 것이다.

나는 내가 선택했을 만한 많은 사례들 중에 일군의 사례에 집중할 것이다. 나의 핵심 논증은 과학자들이 이론을 평가할 때 그것의 범위와 일반성에 대해 묻는 빈도와 지속성에 의존할 것이다. 몇몇 익숙하고 중요한 이론 평가 규칙들(rules of thumb)은 그러한 고려들을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수용가능한 이론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만족할 것으로 기대된다. 영역 내의 알려진 사실들을 설명해야 하고("현상 구제"), 다양한 종류의 사실들을 설명해야 하고(귀납들의 통섭), 왜 경쟁 이론이 성공적이었는지 설명해야 하고(셀라스-퍼트남 규칙), 경쟁 이론을 자신의 극한으로 포섭해야 한다(보이드-퍼트남 규칙). 과학 이론을 평가하는 데 이런 종류의 규칙들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독자는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다. 문제는 그런 규칙들이 인식론 자체에 조금이라도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혹은 가지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지에 있다.

이 목록의 첫 번째 규칙, 즉 영역 내의 알려진 사실들을 설명하라는 규칙을 생각해보자. 정상 상태 우주론은 1960년대에 거부되었지만, 이는 그것이 반박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벨 연구소에서 발견한 우주 배경 복사에 대해 설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허튼(Hutton), 플레이페어(Playfair), 라이엘(Lyell)의 동일과정설은 19세기 대부분의 지질학자에게 거부되었는데, 이는 그 이론이 막대한 반박에 부딪혔기 때문이 아니라, 지구가 원초적인 초기 상태로부터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상태로 어떻게 진화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시종일관 아무 얘기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판구조론은 1960년대 대륙 고정 지질학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전자는 대륙 조각 맞추기의 친숙한 패턴들과 구대륙-신대륙 사이의 동물군과 식물군의 유사성을 설명할 수 있지만 후자는 못했기 때문이다. 갈릴레오는 목성에 왜 달이 있어야 하는지나 태양에 흑점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목성의 달과 태양의 흑점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에 있는 어떠한 주장도 반박하지 않았다. 이 논증의 힘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가 그러한 현상들을 이해하게 해줄 어떠한 메커니즘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 유래했다.

보다 일반적으로, 한 이론이 경쟁 이론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는 세계에 관한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예측할 수 있다면 전자자 후자보다 우수하다는 주장을 과학자들이 자주 한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단언컨대, 이를 허울만 그럴듯한 논증 형식으로 간주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외에 모든 점들이 같을 때, 다른 영역의 사실들을 설명하거나 예측하면, 혹은 경쟁 이론을 자신의 극한적 경우로 보일 수 있다면, 그 이론이 더 낫다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아무런 인식적 토대를 가지지 않은, 그리고 가질 수 없는, 논증 형식이다. 이론의 범위에 관한 우리이 다른 세 가지 규칙도 똑같이 인식론과 단절되어 있다.

이 규칙들 중 어떤 것도 인식적 근거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한 진술이 그 속성들 가운데 무엇을 가지든, 그것은 그 진술의 참에 대한 필요 조건도 충분 조건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 진술이 그와 분명히 양립가능한 어떤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그 진술이 참임을 반대하는 논증이 될 수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참된 진술들은 이러한 덕목을 가지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한 진술이 여럿이 아닌 한 종류의 사실들만 설명한다는 점은 그 진술이 거짓임을 믿을 이유가 될 수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참된 진술들은 다양한 종류의 사실들ㅇ르 설명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진술이 왜 그의 반대 진술들이 왜 그렇게 잘 작동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그것의 참을 반대하는 논증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참된 진술들은 그들의 반대 진술들이 — 만약 성공적이었다면 — 왜 성공적이었는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참된 진술들이 그들의 반대 진술들의 일부가 그들의 극한적인 경우로 보여질 수 있을 거라 일반적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범위와 일반성에 관한 이러한 속성들이 좋은 덕목일지라도, — 그리고 나는 그렇다고 믿는데 — 그것들은 인식적 덕목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론의 폭과 범위에 관한 질문들을 다룰 뿐, 그들의 참이나 확률에 관한 질문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들이 때로 범위에 관한 이러한 덕목들을 인식적 덕목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은 사실이다. 예를 든다면, 통섭-성취적 귀납이 참에 가깝다는 것을 보이려고 했던 윌리엄 휴얼의 공을 들였으나 성공적이진 못했던 시도를 들 수 있다. 또한 보이드와 퍼트넘은 선행 이론을 현행 이론의 극한적 경우로 포착하는 것이 그 이론의 참의 증거임을 보이고자 노력했다.) 내가 다른 곳에서 이미 논증했듯이(Laudun 1981), 이 규칙들 중 어느 하나라도 그것이 거짓인 이론보다 참된 이론을 더 잘 선별한다는 것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이 규칙들 중 어떤 것도 인식적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실제로, 이 속성들이 인식적 지표(indicators)가 될 수 없다는 완벽하게 일반적인 증명을 짜맞출 수도 있다. 나 자신은 그러한 논증들을 그렇게 존중하지 않지만, 존중하는 이들에게는 그 논증은 다음과 같은 형태이다.

이론 T가 범위의 덕목 중 하나인 v를 보이는 이론이라고 해 보자. 그러면 T는 많은 귀결들을 가질 것이고, 그 귀결들 중 무한히 많은 것들은 v를 결여할 것이다. 왜냐하면 넓은 범위의 진술의 논리적 귀결들 중 다수는 그러한 범위를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귀결들 중 하나를 c1이라고 불러 보자. 이제 T가 참이라면, c1 역시 참이어야 한다. 만약 T가 매우 개연적이거나 매우 그럴듯하다면, c1은 더욱더 개연적이거나 더욱 그럴듯해야 한다. 요컨대, 함축의 진리-보존적 성격 덕분에, c1은 필연적으로 T의 모든 인식적 덕목을 가지면서도 v를 가지진 못할 것이다. 결국 v는 인식적 덕목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c1처럼) v를 가지지 못한 진술들이 적어도 v를 보이는 T와 같은 진술만큼은 인식적으로 단단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인식론자들을 빼면 아무도 불편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주관적인 가치들이 과학의 동력을 제공한다거나 "단지 미적인" 잣대가 [과학을]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주지 아니다. 그것이 정말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과학자들이 좋은 과학 이론에 대해 이론의 참에 관한 고려를 훨씬 넘어서는 것들을 기대한다는 점이다. 만약 이러한 사실(score)에 대한 의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과연 어떤 과학자가 자신이 참이라고 믿는 모든 진술을 수용가능한 이론으로 인정할지 자문해보라. 과학자들은 참을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하지도 모른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할 것이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론 평가에서 적어도 참 만큼 중요해 보이는 이론의 다른 덕목들이 있다는 것이다. 정의에 의해 이것들은 인식적 덕목일 수 없다. 왜냐하면 거짓이지만 그러한 덕목들을 보이는 진술도 많고 참이지만 그러한 덕목을 가지지 못한 진술도 많기 때문이다. 정의에 의해, 그것들은 인식적 의제(agenda)에 의해 추동되는 소위 과학의 합리적 재구성에서 설 자리가 없다.

바스 반 프라센(Bas van Fraassen)은 좋은 이론이 되기 위해 참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이 격언을 다음과 같이 뒤틀 수도 있다. 나쁜 이론이 되기 위해 거짓일 필요가 없다. 어떤 이론은 유관한 비인식적 덕목들을 가지지 못해 나쁜 이론이 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우리는 대다수의 단지 참이기만 한 진술들이 해주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일을 우리의 이론이 우리에게 해주길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추가적인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낼 수도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을 알아낼 때, 우리는 인식적 영역 너머 내가 인지적-비인식적 가치들이라고 부르는 영역으로 진입할 것이다.

그러한 가치들은 그것들 없이 과학이 기능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과학의 구성요소이다. 고전적인 지식 이론의 용어로는 포착될 수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추후 완성 예정)

  1. 1960년대 말, 라카토슈는 런던 정경 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진행한 세미나에서 비슷한 관찰을 많이 했다.

참고문헌

  • Kitcher, P. 1933. Advancement of Scienc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 Laudan, L. 1981. A Confutation of Convergent Realism. Philosophy of Science. 48:19-49.
  • Morgenbesser, S., ed. 1967. Philosophy of Science Today. New York: Basic Books.
  • Reichenbach, H. 1938. Experience and Prediction: An Analysis of the Foundations and the Structure of Knowledge.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