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nstruction of Modern Science

웨스트폴의 The Construction of Modern Science는 16-17세기에 진행된 과학의 성과들을 포괄적으로 개괄하고 있는 교과서적 저술이지만, 책 전체를 통해 그는 과학혁명을 바라보는 그의 득특한 주장을 일관되게 펼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과학혁명, 즉 근대과학의 형성은 서로 양립하기 힘들었던 두 가지 '지적 조류'의 긴장과 갈등이 해소됨으로써 가능했다. 16-17세기 동안 갈릴레오와 케플러로 대표되는 플라톤-피타고라스주의 전통과 데카르트, 가상디, 보일로 대표되는 기계적 철학은 각각 과학활동의 기본 틀을 규정지으며 그 영향력을 행사했다. (통상적인 직관과 달리) 그 둘은 추구하는 이상과 목적이 달랐기에 쉽게 조화되지 못하고 서로 충돌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들 사이의 긴장관계는 '수학적 전통'과 '기계적 철학'을 종합한 뉴턴에 이르러서야 해결되었고 자연의 완전한 '수학화'가 이루어졌다. (pp. 11-12, p. 69, p. 179, p. 205)

요약

플라톤-피타고라스 전통

플라톤-피타고라스 전통의 추종자들은 우주의 궁극적 구조가 수학적(기하학적) 원리를 따른다고 확신했고, 자연의 정확한 '수학적 기술' 형태를 찾고자 노력했다. 천문학 혁명은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543)가 출판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단지 태양과 지구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그래서 약간의 기하학적 단순화가 이루어졌을 뿐) 아리스토텔레스 체계 하에서 이루어진 제한적인 개혁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개혁이 거대한 혁명으로 전환된 것은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업적이 있고 나서이다.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했던 케플러는 우주의 기하학적 단순성을 추구했고, 티코 브라헤의 관측 데이터에 부합할 수 있는 행성 운동의 수학적 체계를 탐구했다. 케플러는 수정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위에서, 그렇다면 어떻게 우주의 기하학적 구조가 유지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상계의 새로운 기하학적 구조와 함께 새로운 물리학을 동시에 추구했다. 그 결과 케플러는 타원 궤도, 행성운동의 법칙 등을 제시했고, (자기력에 기초한) '천상계 동역학'을 확립했다.(p. 25, p. 27)

케플러의 태양 중심 우주설은 기하학적 단순성과 관측상의 정확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지구 중심설에 비해 선호할 이유가 없었다. 가령 지구가 움질일 때 나타나야 할 많은 문제들이 실제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일상적인 경험은 태양중심설 수용의 큰 걸림돌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관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해결한 사람이 바로 갈릴레오였다. 역시 신플라톤주의자였던 갈릴레오는 추상적인 수학적 관계들로 이루어진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이상세계를 가정했으며, 암호화된 자연을 수학이란 언어로 해독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갈릴레오는 사고실험을 통해 운동의 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변화 개념에서 상태 개념으로 바꾸었고, 이를 통해 원인이 필요로 하지 않는 운동 개념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즉 갈릴레오에게 운동은 원인이 필요하지 않으며, 운동의 변화에만 원인이 필요하다. 갈릴레오의 역학은 케플러의 성과를 무시한 채 원운동만을 고집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적할 수 있지만, '자연의 기하학화'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갈릴레오는 완전하고 영원한 천체의 운동만이 아니라 지상계의 운동 또한 기하학의 분석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그의 등속 운동, 등가속도 운동, 자유낙하 운동 법칙들은 '물체 운동의 문제'를 해결했고, 이후 확립된 '지상계 역학'의 기초를 마련했다.(p. 40, pp. 42-43)

기계적 철학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기계적 철학자들은 자연을 '이해 가능한'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보고 현상 뒤에 숨겨진 메커니즘을 밝혀내고자 애를 썼다. 개별 현상의 인과관계에 관심을 가졌던 그들은 자연철학에서 모든 불명확한 설명방식들(e.g., 르네상스 자연주의로 대표되는 이해 불가능한 자연의 신비스러운 힘들을 이용한 설명)을 제거하고자 했으며, 자연현상을 일상생활에서 친숙한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p. 53-54) 따라서 기계적 철학자들은 물질세계로부터 모든 영적 특성들을 배제하면서, 모든 자연현상을 '불활성인 물질들'과 '그것들 간의 충돌'만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이러한 단순한 원리로 도출된 충돌 법칙, 소용돌이 이론 등은 거의 모든 자연현상의 원인을 일관되게 설명해줄 수 있어씩 때문에, 점차 붕괴되어 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광범위한 철학 체계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으로 여겨졌다.(pp. 61-62, pp. 64-68) 따라서 기계적 철학은 천문학, 역학에서뿐만 아니라, 실험과학, 화학, 생물학 등과 같은 거의 모든 과학 분야의 기본틀을 규정지으며 그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런 분야들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나 르네상스 자연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기계적 철학은 기계적 과학, 기계적 화학, 기계적 생물학을 탄생시키며 점차 그 분야를 넓혀갔다. 메커니즘 설명에 집중한 기계적 과학은 파스칼, 보일 등이 행한 수은주 실험에서 좋은 성과를 보였다. 입자의 충돌과 광학 분야도 기계적 과학이 주목한 대상 중 하나였다. 기계적 철학은 운동에 직선관성을 도입하였고, 빛의 경로를 파동설을 통해 설명하는 등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을 극복하는 많은 성과를 보였다. 한편 화학 분야에서도 기계적 철학은, 당시 파라셀수스와 반 헬몬트로 대표되던 르네상스 물활론에 기반을 둔 화학을 대체함으로써 화학을 마술의 영역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전환시켰다. 생물학에서도 데카르트는 신체에 대한 기계적 설명을 시도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렇듯 기계적 철학의 설명방식은 그 당시 모든 분야의 현상들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설명, 르네상스 자연주의적 설명, 마술적 설명, 목적론적 설명 등을 대체하였다.

그러나 기계적 철학은 여전히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보다는 "그것이 왜 일어났느냐?"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었고, 알려진 현상에 대한 그럴듯한 '기계적 설명'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곤 했다. 그 결과 데카르트의 생리학은 사실 "기계적 철학의 옷으로 갈아입은 갈레노스 이론"에 머물러 있었다. 한편 기계적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르네상스 자연주의적, 목적론적 설명을 대체하며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긴 했지만, 그 새로운 세계관의 공약에 맞지 않는 것들을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하기도 했다. 예컨대 뉴턴의 '인력(힘)'과 같은 원거리력은 기계적 철학의 추종자로부터 많은 비판을 들어야 했다.

과학단체와 실험

17세기 과학혁명은 단지 관념의 재구조화에만 있지 않았다. 조직된 과학 활동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때도 이때이다. 이전 시기의 과학은 철학과 구별하기 힘들었다. 17세기의 과학 활동 또한 철학과 완전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과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들은 고립된 개인으로 활동하기보다는 단체를 조직했다. 웨스트폴은 당시의 상황을 단적으로 "과학혁명은 대학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대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났다"고 표현했다.(pp. 161-162) 17세기까지 전통적인 교과과정을 고수한 대학은 철학자들의 근거지였다. 과학혁명에 기여한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대학 교육을 받긴 했지만, 그들이 받은 대학 교육은 실제 과학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새로운 과학 활동은 당시 새로 생겨나기 시작한 다양한 과학단체를 통해 이루어졌따.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의 문학 집단을 본딴 로마의 "린체이 아카데미"가 설립되었고, 메디치의 후원 아래 설립된 "치멘토 아카데미"에서는 새로운 실험과학이 행해졌다. 네덜란드의 메르센느 공을 중심으로 서신교환을 통한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와 영국의 왕립학회가 설립되면서부터는 보다 조직적인 활동과 교류가 이루어졌다.

한편 다양한 실험 기구의 발명은 17세기 과학 활동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준다. 망원경, 현미경, 정밀시계, 온도계 등 17세기 발명된 다양한 측정기구들은 이전의 사람들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 주었따. 이러한 기구들을 기반으로 실험적 방법은 전통적 논리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탐구활동을 제시했다. 자연은 더 이상 단순히 보여주는 대로 관찰하는 대상이 아니라, 실험자들에 의해 결정된 조건하에서 적극적으로 탐구 관찰하는 대상으로 전환되었다.(pp. 171-173)

웨스트폴은 이러한 변화를 통해 17세기 이후 서양과학이 기독교 중심으로 조직된 문화에서 과학을 중심으로 한 현실문화로 변형되었다고 지적한다.(p. 178)

결론: 뉴턴의 종합

기계적 철학의 신봉자들에게는 '모든' 자연현상의 원인을 기계적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었기 때문에, 전체 설명체계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들은 부차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취급했으며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설명을 제시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정량적인 설명방식을 경시했던 기계적 철학은 17세기 과학의 다른 근본적 조류(플라톤-피타고라스주의적 전통)에 때론 방해가 되었다. '기계적 철학'과 '수학적 전통' 사이의 갈등은 뉴턴에 이르러서야 해결되었는데, 그는 물질과 운동이라는 기계적 철학의 기본 원리에 '힘'이라는 제3의 범주를 도입함으로써 이 둘을 통합할 수 있었다. 그는 르네상스 자연주의의 공감과 반감과 같은 모호한 정성적 작용에 반대하면서, 힘에 운동의 변화량으로 측정되는 정량적인 특성을 부여함으로써 기계적 철학의 다른 원리들과 조화시켰다. 결국 그 실체는 명확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힘이라는 개념은 갈릴레오로 대표되는 '수학적 기술의 전통'과 대카르트로 대표되는 '기계적 철학의 전통'을 타협시키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p.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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