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light of the Perfect Model Mo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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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eller, P. (2001). "Twilight of the Perfect Model Model." Erkenntnis 55: 393-415.

정확한 자연 법칙을 찾는 활동으로서의 과학에 대한 의심: 첫째, 자연 자체가 유한한 수의 말해질 수 있는 법칙에 의해 부호화 가능한(encodable) 잘 짜여진 구조로 구성되어 있지 않을 수 있다. 둘째, 그렇더라도 우리에게 그러한 법칙으로 구성된 이론이 쓸모없을 수 있다. 왜냐하면 엄청난 수의 초기조건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 셋째, 우리의 지적 능력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단순성과 같은 가치를 이론의 중요한 가치로 두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 물리학도 제1원리로부터의 연역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더라(예: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대부분의 작업은 법칙과 사실 양자 모두를 (충분히 서로 잘 맞고, 충분히 간단하게) 교묘하게 재단하는 작업(ingenious tailoring)이더라.

반 프라센(1974)의 의미론적 관점 : 이론은 모형들의 집합(하나의 이론, but 복수의 형식화 문제 해결). 모형으로 구현된 이론과 세계는 동형성 관계 맺음. 그러나 위의 근사나 이상화 문제 전혀 해결 안 함.

기어리(1979)의 관점 : “한 과학 이론은 자연 시스템의 종류에 대한 정의이다.” 정의로서의 이론은 그 자체로는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며, 이론의 경험적 내용이란 ‘이러저러한 실제 시스템은 그 이론에 의해 정의된 종류의 시스템이다’와 같은 형태의 ‘이론적 가설’에 의해 제공된다.

카트라이트(1983)의 관점 : 근사와 이상화 문제에 집중. ‘준비된 기술’, ‘극장으로서의 물리학’, ‘캐리커쳐’로서의 모형, ‘가상의 작업’, ‘시뮬라크라’, 허구 등등의 개념 도입. 물리학이 제1원리로부터의 연역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조심스럽게 준비된 기술이나 모형에 의해 이루어짐을 밝힘. 각각의 준비된 기술이나 모형은 제한된 종류의 일반성을 얻기 위해 일정 부분 정확성을 희생시켰다는 점 폭로(?).

기어리(1988)의 관점 : 텔러가 이름붙인 ‘모형 관점’의 원형. (1) 일차적으로 과학은 (구체적이거나 추상적인) 모형을 생산. (ii) 모형은 세계와 이론적 가설에 의해 “제한된 측면과 제한된 정도의 유사”한 것으로서 연결. (iii) 법칙은 모형을 정의하는 역할을 함. 그러나 모형을 정의하는 유일한 요소는 아님. 법칙은 모형 안에서 참. (iv) 법칙은 세계와 간접적으로만 연결. 즉 모형을 만든 후 모형과 세계를 연결하는 이론적 가설 필요. (v) 이론은 모형들의 느슨한 집단. (vi) [이것은 기어리 생각이 아닐 수도 있는데] 누군가는 이론을 ‘모형 구축 키트(tool kits)’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텔러의 모형 관점(model view) (not semantic view)

  • 동형성이 아닌 유사성(언제나 제한된 측면과 정도에서의) 관계로 [세계룰] 표상하는 것으로서의 모형
  • 모형 또는 모형 구축 지침의 부정확하게 특성화된 집단으로서의 모형

이러한 관점에 대한 가능한 반론

  1. 무엇을 모형으로 간주해야 할지 말하기 어려움
  2. 무엇을 ‘유사성’으로 간주해야 할지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3. 모형 관점은 과학의 성공의 설명하는 데 실패

앞으로의 내용은 위의 반론에 대한 텔러의 대답임

모형이란 무엇인가?

물리적, 특히 스케일 모형의 경우, 모형이 무엇인지, 유사성이 무엇인지 답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이론적인 과학에서 다루는 대다수 모형은 물리적 모형이 아니다. 카트라이트는 모형에 대한 통일적인 얘기를 한 적이 없고, 기어리는 모형을 비언어적 추상적 존재라고 하면서 단순 조화 진동자의 사례를 들은 바 있음. 텔러가 보기에 별로 좋은 대답이 아님.

텔러의 주장 : 원리상, 무엇이든 모형이 될 수 있다. 무언가를 모형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모형 사용자에 의해 무언가의 표상으로 간주되거나 사용된다는 사실이다(p. 397).

이는 모형에 대한 질문을 표상에 대한 질문으로 바꾸어 버림. 이것의 장점은? 무언가가 모형이라고 할 때, 그것을 모형이게 만드는 내적인 특징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어떤 것이 모형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다른 무언가의 표상에 사용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형과 문장의 차이는 무엇인가? 둘 사이의 선명한 구분 힘들다는 것이 텔러의 관점. 텔러가 보기에는 문장도 모형이 될 수 있다. 물론 기어리(와 카트라이트의 암묵적 입장)를 따라, 많은 경우 모형이 추상적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 형태적 표상이 우선이고, 언어적 표상이 그러한 형태적 표상에 자의적인 기호를 붙인 것이란 인지 심리학의 연구 결과는 이를 지지? 최근 과학철학의 수많은 사례들은 과학의 표상이 언어적 기술과 표상 대상 사이의 필수적 매개체로 기능하는 형태적 표상을 필수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줌.[1]

텔러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첫째, 과학은 수많은 것들을 모형으로 사용한다. 과학은 기술적인(descriptive) 문장, 단언, 명제뿐 아니라 형태의 일치를 통해 표상하는 광범위한 추상물(abstracta)을 제공하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그 표상은, 기술적 표상이든, 행태적 표상이든,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사성에 관한 질문들

비판 1 : 구체적인 물리적 시스템과 추상적 대상으로 이해된 모형 사이의 유사성을 어떻게 논할 수 있는가?

텔러의 답변 : 구체적인 대상이 예화하고 있는 속성과 모형 사이의 관계로 볼 수 있겠다. 다시 말해, the concrete object HAVE properties and that properties are PARTS of models.

비판 2 : (유사성) 비교는 언어를 필요로 한다. 삼각형 모양의 종이조각과 추상적인 삼각형 비교한다고 할 때 결국 우리가 하는 것은, 종이조각에 대한 기술(description)과 삼각형의 정의(둘 모두 언어적 존재)를 비교하는 것이다.

텔러의 답변 : 첫째, 비교에 언어 사용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비교 대상이 모형이라는 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즉, 종이 조각과 비교되는 것은 삼각형의 정의가 아니라 여전히 삼각형이다. 둘째, 실제 대상과 모형 사이의 비교에서 그림(그래프 등)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 언어는 비교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비판 3 : 유사성이란 대체 무엇이냐? 유사성이란 특정 측면과 특정 정도에 한해서만 적용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측면과 정도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어느 무엇이든 유사한 것이 되지 않는가? 어떤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유사성을 허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반적인 해명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해명이 불가능할 것 같다.)

텔러의 답변 : 유사성에 대한 일반적인 해명은 없으며 필요하지 않다. 필요한 측면과 정도는 언제나 그때그때의 구체적인 관심, 측면, 정도에 의해 (우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일반적인 답이 있는 것이 아님. 그리고 그런 답이 없다는 것이 문제도 아님.

텔러의 사례 : (1) 물의 흐름과 파동 전파 설명 목적, (2) 확산 설명 목적. (1)의 경우 물을 연속적인 압축불가능한 매질로 모형화, (2)의 경우 물을 열운동을 하는 입자들로 모형화. 목적에 따라 전혀 다른 모형 사용 가능. 만약 누군가 물의 파장을 미터(m) 정도의 정확성으로 알고 싶다면 표면 장력과 같은 부분은 모형에서 없어도 된다.

근사적 참에 대해

근사적 참의 필요조건이나 충분조건을 찾는 것은 불가능. 예컨대, 특정한 오차범위를 줌으로써 근사적 참의 조건을 제공하려는 시도는 파인, 반 프라센 등이 제기한 결합 문제(conjunction problem)에 의해 지탱되기 어려움.

거짓(false)인 문장 중에서 어느 것이 ‘근사적 참’이란 딱지를 붙일 만큼 참된 문장에 의해 표현될(되는) 상황에 ‘충분히 근접’한 것인가? 이는 사실 문장에 의해 기술된 비-실제적인 상황 중에서 무엇을 실제 상황에 유관하게 유사한 것으로 간주할 것인지 묻는 것과 같다. (문장은 모형과 실제 시스템 모두를 기술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장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들에 의해 기술된 것들 사이의 유사성을 찾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근사적 참이란 (굳이 그것을 규정하고자 한다면) 맥락의존적인 것이 되며, 따라서 관심의 측면에 따라 “..보다 참에 근접하다”는 말은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 관심의 측면은 상황을 기술하는 언어에 반영될 수도 있다. (텔러의 사례: 뉴욕에선 이론1이 이론2보다 참에 근접, 캘리포니아에서는 이론2가 이론1보다 참에 근접)

정말 그런가? 주관적이지 않는 객관적인 근사적 참 개념은 불가능한가?

프톨레마이오스 문제와 통합 문제

문제 : 매우 정확한 버전의 프톨레마이오스 모형과 부정확한 버전의 뉴턴 모형 중에 어느 모형이 더 참에 근접한 모형일까? 우리는 여전히 부정확한 변수가 설정된 뉴턴 모형이 프톨레마이오스 모형보다 더 참에 근접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나?

어떤 모형주의자들은 관찰가능한 현상 이면의 실재적인 측면과 그냥 픽션 사이의 구분을 거부하고 관찰가능한 현상에서의 정확성만을 기준으로 모형을 평가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텔러가 보기에, 관찰가능한 현상과 이론적 현상 사이에는 어떠한 (맥락 독립적인) 구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형의 어떠한 측면도 평가의 기준으로 사용될 수 있다. 특히 모형의 ‘숨은 메커니즘’도 평가의 기준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따라서 모형주의자들은 현상 이면의 메커니즘에 대한 반실재론자뿐 아니라 실재론자도 될 수 있다. 즉 항해를 목적으로 한다면 정확한 프톨레마이오스 모형을 취하겠지만, 통합적인 설명을 추구한다면 부정확한 뉴턴 모형을 취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그렇다면 세계에 대한 완벽한 기술을 찾는 활동으로서의 과학활동 모형(Perfect Model Model)과 텔러가 추구하는 과학 활동 사이의 차이는?

물의 연속 매체 모형은 물의 흐름과 파동 설명, 파장 예측. 물의 입자 모형은 물의 확산 현상 설명. 그러나 두 모형은 양극단의 이상화. 모든 현상의 실제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양자 역학 필요. 즉, 양자 역학은 두 가지 표면적인 모형이 왜 잘 작동하는지 설명해 줌. 그렇지만, 양자 역학이 물의 흐름이나 확산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아님! 양자역학으로부터 그러한 현상이 연역되는 것도 아님(엄청난 수의 변수 개입. 방정식 풀 수 없음). 양자역학이 해주는 것은 두 부정확하고 대립적인 모형이 각각의 제한된 현상을 설명하는데 어째서 사용 가능한지를 이해시켜주는 것일 뿐.[2]

인간은 표면적이면서도 이상적인 모형을 필요로 함과 동시에, 기본적이고 통합적인 모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정합적인 그림으로 결합되지 못한다. 물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동시에 양자역학적이면서 유체역학적인 대상이 될 수 없다. 즉 통합적인 모형의 추구를 허용하는 것과 완벽한 모형(세계에 대한 완벽한 기술)을 추구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각주

  1. 이 문단에서 텔러는 전체적으로 모호하다. 문장도 모형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림 형식의 형태적 표상이 더 우선적이라고 주장하고, 그러한 형태적 표상이 언어적 기술과 표상 대상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형태적 표상에 의해 매개되는 언어적 기술은 모형인가? 또 추상적 대상이란 무엇인가? 비언어적인 것이 추상적인 것인가? 기어리나 다른 의미론자들이 모형을 추상적 대상, 구조, 가상적 대상이라고 얘기했을 때, 그것은 언어에 의해 정의되나 실제 세계에는 없는 그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즉 기어리에게 모형은 그림이 아니다. 모형은 법칙 등에 의해 정의되는 가상적 대상이다. 뉴턴의 법칙은 그러한 가상적 모형 안에서 참인 것이지 그림 안에서 참인 것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교과서에 그려진 그림은 그 가상적 모형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도록 제시된 일러스트이지 그것 자체가 기어리가 말한 모형은 아니다. 모형의 전형이 그림이나 조각과 같은 형태적 표상임은 분명해 보인다. 말(소리), 언어(글씨), 그림, 조각은 매체에 얹혀진 표상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다. 문장은 말해지거나 쓰일 수 있지만, 문장의 뜻은 말해지거나 쓰여진 그것 자체가 아니다. 그림은 그려질 수 있지만, 그림의 뜻은 그려진 그것 자체가 아니다. 논리학이나 수학에서 문장, 혹은 명제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모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때 사용되는 모형이란 그 명제를 참으로 만드는 (가능한) 상황 또는 해석을 뜻한다. 가끔 우리는 그 상황이나 해석을 다른 매체, 특히 그림이나 조각, 영화로 다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그림이 그 명제의 ‘논리적 의미에서의’ 모형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가끔 우리는 그 그림이 왠지 모형인 것처럼 느껴진다. 왜? 내 생각 다시 정리: 세계를 표상(재현)하기 위해 우리는 문장도, 그림도, 조각도 사용할 수 있다. 더욱더 나아가 문장이나 그림 등을 이용해 구상해낸 픽션도 표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를 표상하기 위해 우리는 문장도, 그림도, 조각도, 픽션도 사용할 수 있다? 뭔가 어색하다. 동등한 범주들이 나열된 것 같지 않다. 픽션은 앞의 것과 다른 범주이다. 문장과 그림과 조각은 어떤 매체의 형태를 담지하고 있지만, 픽션은 그것과 상관이 없는 범주이다.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아서 일단 여기서 중단.
  2. 설명을 위해 모형이 필요하고, 모형을 설명하기 위해 더 기본적인 모형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설명이 이행적인(transitive) 속성을 가지는 것은 아님. 한편 설명의 전제를 설명하는 것은 원래 설명의 일부가 아님.

평가

아래의 지적에 대해서는 십분 공감

원리상, 무엇이든 모형이 될 수 있다. 무언가를 모형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모형 사용자에 의해 무언가의 표상으로 간주되거나 사용된다는 사실이다.(p. 397) 이는 모형에 대한 질문을 표상에 대한 질문으로 바꾸어 버림. 이것의 장점은? 무언가가 모형이라고 할 때, 그것을 모형이게 만드는 내적인 특징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어떤 것이 모형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다른 무언가의 표상에 사용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장도, 추상적 대상도 모형이 될 수 있다는 주장과 근거에서는 많은 혼란이 있음. 무엇이든 모형이 될 수 있지만 추상적 대상이 모형의 전형이라는 점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기술적(descriptive) 표상은 문장에, 형태적 표상은 추상적 대상에 귀속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뒤의 유사성에 관한 질문들에서는, 문장이 실제 시스템(real system)과 가상적 대상 모두를 기술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으며, 텔러는 추상적인 삼각형과 삼각형을 정의하는 문장을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텔러는 전자를 모형으로, 후자는 모형의 정의처럼 묘사한다. 이러한 텔러의 주장들은 문장, 그림, 가상적 대상의 관계를 혼동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 첫째, 일단 세계에 대한 기술적 표상이 문장에 귀속된다면, 형태적 표상은 그림이나 조각에 귀속되어야 할 것이다.
  • 둘째, 문장과 그림은 모두 실제 시스템을 표상하는 데(기술하거나 그리는 데) 사용될 수 있다.
  • 셋째, 문장과 그림은 모두 가상적 대상을 표상하는 데(기술하거나 그리는 데) 사용될 수 있다.
  • 넷째, 가상적 대상은 다시 세계의 실제 시스템을 표상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 질문: 가상적 대상이 문장과 그림에 의해 묘사된다면, 실세 시스템이 그 문장과 그림에 의해 표상된다고 하지 않고 왜 가상적 대상에 의해 표상된다고 말해야 하는가? 이 때 실제 시스템의 모형은 문장이나 그림이 아니라 왜 가상적 대상이라고 해야 하는가? 실제 시스템의 모형이 문장인 경우와 그림인 경우와 가상적 대상인 경우를 구분할 수 있는가?
    • 비슷한 질문 다시 : 문장이나 그림이 실제 대상을 표상하는 경우와 문장이나 그림에 의해 묘사된 가상적 대상이 실제 대상을 표상하는 경우는 어떻게 다른가? 두 경우는 과연 구분 가능한가?

두 대상 사이의 유사성을 판별하는 데 언어가 사용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비교 대상이 모형에서 언어로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텔러의 주장에 공감. 그리고 언어적이지 않은 형태적인 방식의 비교가 가능할 때 언어가 별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지적에도 공감. 유사성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 필요없다는 지적에도 공감. 나의 의문은

  • 첫째, 이러한 텔러의 해명이 실제적인 문제에 도움이 될까? 실제 과학 현장에서 특정 모형을 수용하거나 용인하거나 거부하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과학자들에게 어떠한 유익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 둘째, 더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는데, 유사성의 측면과 정도를 언어로 명세가능할(specifiable) 때와 가능하지 못할 때의 차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예컨대 19세기 과학자들은 뉴턴 역학 시스템이 실제 시스템에 어느 측면에서 어느 정도로 유사한지 명확하게 말할 수 없었던 반면, 오히려 현재의 과학자들은 그 점을 더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다. 내 생각에, 현재 작업중인 모형이 실제와 닮은 측면과 정도는 어느 정도 열려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을 다 알면 과학을 왜 하겠는가?

근본적인 원리, 근본적인 모형으로부터 현상을 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에 동감. 여러 수준의 때로는 양립불가능한 모형들이 공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동감. 그러나 피상적인 모형이 현상 설명하고, 근본적인 모형이 피상적인 모형이 정당한 이유를 설명하지만, 근본적인 모형이 원래의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에 대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경우 있음. 화성의 운동 <- 케플러의 법칙 <- 뉴턴 모형 <-?- 아인슈타인 모형?. 뉴턴 모형을 아인슈타인 모형이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뉴턴 모형과 아인슈타인 모형은 모두 근본 모형 아닌가? 그렇다면 뉴턴 모형과 아인슈타인 모형 사이의 관계는? 아인슈타인 모형이 뉴턴 모형이 그동안 잘 작동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맞음. (앗.. 나도 헷갈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