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와 탑 논증
폴 파이어아벤트, 『방법에의 도전: 새로운 과학관과 인식론적 아나키즘』 (한겨레, 1987), 82-84쪽(6장의 일부)을 그대로 옮김. WikiNote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부 표현을 수정했음.
낙하하는 돌로부터의 논증[지구가 돈다면 탑에서 떨어뜨린 돌이 뒤쳐져야 하지만, 실제로는 수직으로 떨어지므로 지구가 돌지 않는다는 논증]은 코페르니쿠스적 견해를 반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내재한 약점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개선되어야 할 자연적 해석[감각 그 자체는 아니지만 감각과 밀착되어 분리되기 힘든 해석]이 존재하는 탓인지도 모른다. 이 경우 첫 번째 과제는 전진을 방해하는 검토되지 않은 이러한 장애물들을 발견하고 고립시키는 것이다. 베이컨의 신념에 따르면, 자연적 해석은 모든 관찰의 감각적 핵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까지 한 장 한 장 껍질을 벗겨가는 분석의 방법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방법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첫째, 베이컨이 생각하는 자연적 해석은 그것에 앞서 존재하는 감각 작용의 영역에 단순히 부가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베이컨 자신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 영역을 구성하는 데 사용된다. 모든 자연적 해석을 배제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사고하고 지각하는 능력마저 잃게 된다. 둘째, 자연적 해석의 이 근본적 기능을 무시한다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분명해질 것이다. 즉 사용할 수 있는 자연적 해석을 단 하나도 갖지 않은 채로 지각적 영역과 대면하는 사람은 방향을 완전히 잘못잡은 것이고 그는 과학이라는 작업을 시작할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베이컨적 분석을 한 후에도, 우리들이 정말 시작한다는 사실은 분석을 너무 일찍 끝내버렸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분석은 우리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그것 없이는 진행시킬 수 없는 자연적 해석에서 정확히 멈추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자연적 해석을 제거해 버리고 제로 상태로부터 출발하자는 생각은 자기 파괴적인 것이다.
더우기 일군의 자연적 해석을 부분적으로 해명하는 일마저 불가능하다. 얼핏 보면 그 일은 아주 간단하게 보일 것이다. 우리는 관찰언명들을 하나하나 순서대로 늘어놓고, 그 내용을 분석한다. 그러나 관찰언명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개념들은 언어의 보다 추상적인 부분에서도 정체를 잘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만일 정체를 드러낸다고 해도 그것을 고정시키기란 여전히 어려운 것이다. 개념은 지각대상과 거의 마찬가지로 애매하며 배경에 의존한다. 더군다나 개념의 내용은 그것이 지각에 관계되는 방식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그렇지만 이 방식이 어떻게 순환없이 발견될 수 있는가? 지각이 무엇인지가 알려져야 하는데, 그 알려지는 메커니즘은 조사되어야 할 개념의 용법을 지배하는 아주 똑같은 몇 가지 요소를 포함할 것이다. 우리들은 아무리 해도 이 개념을 완전히 꿰뚤어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 구성요소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늘 그것의 일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환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는데, 그것은 개념과 지각대상을 관계지우는 새로운 방법을 포함한 비교의 외적인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담론의 영역으로부터도, 그 생활양식을 형성하는 모든 원리나 습관이나 태도들로부터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외적 기준은 실제로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 기준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론이 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이상하다고 하는 인상은 자연적 해석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고, 자연적 해석의 발견을 향한 첫걸음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탑의 사례의 도움을 빌어 설명해 보자.
이 예는 코페르니쿠스적 견해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사용된다. 이러한 ‘사실’의 관점으로부터 본다면, 지구의 운동이라는 관념은 이상하고 비합리적이며 명백한 오류이다. 이것들은 당시 종종 사용되었던 표현의 단지 몇 가지만을 언급한 것인데, 이것들은 또한 오늘날의 고지식한 전문가들이 새로운 반사실적인 이론에 직면했을 때마다 하는 말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견해가 방금 앞에서 기술된 것과 똑같은 종류의 외적인 잣대가 된다고 의심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 논증[낙하하는 돌로부터의 논증]의 방향을 돌려 지구의 운동을 거부하는 자연적 해석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는 탐지 장치로 그것[코페르니쿠스적 견해]을 사용할 수 있다.. 논증의 방향을 돌려, 우리는 먼저 지구의 운동을 주장하고, 그 다음에 어떠한 변화가 모순을 제거하게 될 것인지를 탐구한다. 이러한 탐구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으며, 그 탐구는 오늘날까지도 끝나지 않을 수 있다. 그 모순은 수십년 내지 수세기 동안 우리들과 더불어 남아있을 수도 있다. 게다가 그 모순은 우리의 검토가 끝날 때까지 유지되어야만 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검토--우리 지식 속의 케케묵은 성분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는 시작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이미 얘기했듯이, 이는 사실과 일관되지 않은 이론들을 유지하는 일이--어쩌면 심지어 발명하는 일까지도--필요한 이유 중 하나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 지식의--특히 우리 관찰의--이데올로기적 성분은 그것에 의해 반박되는 이론의 도움을 받아 발견된다. 즉 그것은 반귀납적으로 발견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