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 재판
흔히 갈릴레오 재판은 자유롭고 진보적인 과학자와 보수적이고 구시대적인 종교가 대립한 대표적 사례로 여겨지지만, 역사적 연구들은 그 사건이 그리 단순치 않음을 보여준다.
갈릴레오는 1610년 망원경을 직접 만들어 하늘을 관측하고 전통적 우주론과 배치되는 사실들을 알아내면서 코페르니쿠스 우주론을 옹호했으며, 지식인과 대중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게 된다. 지동설에 대한 지지에 위협을 느낀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들은 성경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도미니쿠스 수도회 신부들과 연합하여 그를 비난했으며 급기야 비밀리에 그는 불경죄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에 놀란 그는 교회가 과학적 사실의 진위에 대해서 관대한 입장을 견지해 줄 것을 탄원했고 많은 종교 지도자들도 그의 입장을 지지했지만, 교리 책임자였던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태도는 완강했다. 추기경의 주된 관심은 신교와 싸우기 위한 가톨릭 진영의 단결에 있었고 그로부터의 이탈을 최대한 막고자 했다. 교황청에서 1616년 3월 5일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오류임이 공포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책은 금서목록에 오르게 되었고, 그 전에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갈릴레오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면서 앞으로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지지하거나 변론해서도 안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이 금지령을 어기지 않고도 자신의 주장을 계속할 수 있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의 기초를 공격하거나 코페르니쿠스 우주론에 대한 공격에 반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1623년 새 교황으로 즉위한, 갈릴레오의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새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Ⅷ, Maffeo Barberini)는 두 우주체계를 공정하게 다룬다는 조건으로 책의 출판을 허가해주었다. 교황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우주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판단할 수 없다는 식의 결론을 원했고 어떠한 다른 논의를 해서도 안된다고 못박았다. 이에 대한 다짐은 교회 검열관에 의해 서면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 우주론의 우수성을 밝히는 계기로 그 책을 활용했다. 1630년에 완성된 『두 가지 주된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는 두 우주구조가 모두 가설적인 것이라고 말해 1632년 교황청의 모든 검열을 통과했지만, 책의 내용은 프톨레마이오스 우주구조를 지지하는 바보스러운 심플리치오가 결국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를 지지하는 살비아티와 중재자 역할의 사그레도의 협공에 설득당하는 것으로 그림으로써 새로운 우주구조의 우수성을 선전하고 있었다. 이 책은 1632년 출판되어 문학과 철학 분야의 걸작으로 전유럽에 널리 퍼졌다.
그러나 교황은 이 책이 제목과는 달리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명백히 옹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예수회에서는 이 책이 루터와 칼뱅의 설교를 합친 것보다 더 나쁘다고까지 주장했다. 책의 출판을 허가해 준 교회당국은 우롱당했다고 느꼈고, 심플리치오가 교황을 모델로 삼았다는 풍문이 떠돌면서 교황을 화나게 만들었다. 화가 난 교황은 기소를 명령했으며, 이와 동시에 그가 1616년에 서약했던 문서가 발견되었다. 결국 법정에 선 갈릴레오는 1616년 교회와 맺은 서약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자택연금을 당했다.
과학 vs. 종교 이외의 요소들
여기서 우리는 단순한 과학과 종교의 대립이 아닌 여러 측면을 찾아볼 수 있다.
- 당시 가톨릭 교회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공격에 대처하는 상황에서 가톨릭은 자신의 영향력 약화를 그냥 방치할 수 없었다. 특히 가톨릭 교회의 쇄신을 위해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년)를 계기로 신학은 (신교, 미신, 마술 등에 대항하여) 더욱 방어적이고 보수적인 면이 강화되었다.
- 과학의 조예가 깊다는 평판을 받아왔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교황이 우롱당한 것을 깨달았을 때의 분노도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 갈릴레오의 생각은 낙관적이고 순진했다. 자신의 합리적 주장으로 교황청을 설득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 교회당국도 마찬가지로 착각을 했다. 과학적 주장을 억누르면 그것의 발전과 전파를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갈릴레오의 재판은 이와 같이 개개인의 개성과 교회의 정치적 상황 등이 뒤얽힌 복잡한 사건이었다.
1980년대 이후의 해석들
- 예. 후원동역학을 틀을 이용한 설명: Biagioli, Galileo, Courtier
방법론의 충돌
- Owen Gingerich, "The Galileo Affair," Scientific American 247, no. 2 (1982), 118-127.
깅거리치에 따르면, 갈릴레오가 재판을 받게 된 것은 단지 과학적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인 중 일부는 갈릴레오의 출세욕과 자기중심적이고 공격적인 성격 탓이었고, 핵심적인 쟁점은 진리에 이르는 방법에 대한 불일치에 있었다. 저자는 갈릴레오가 사용했던 추론을 분석하면서 그것이 교회의 교리와 모순될 뿐 아니라 (당시 받아들여지던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비추어볼 때) 논리적으로도 결점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즉 갈릴레오의 논증은 전건긍정의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갈릴레오는 금성의 위상 변화를 근거로 태양중심설이 진리라고 주장했는데, 금성의 위상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대안적 설명(e.g., 티코의 우주구조, 또는 태양을 금성의 주전원의 중심으로 놓는 버전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이 있었기 때문에, 태양중심설이 가설 이상의 실재라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달 관측 등의 추가적 시험을 통해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입증하려 했는데, 저자는 갈릴레오가 정교한 귀납 혹은 초기 형태의 가설연역법을 사용함으로써 공인된 규칙을 깨뜨리고 새로운 규칙을 창조해냈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논쟁의 핵심은 진리에 이르는 방법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갈릴레오의 신앙, 교회의 과학
- David B. Wilson, "Galileo's Religion versus Church's Science? Rethinking the History of Science and Religion," 'Physics in Perspective 1 (1999), 65-84.
윌슨은 갈릴레오가 재판에 이르는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고 그것을 설명하기보다는, 갈릴레오와 교회 사이에 있었던 개념적 차이들을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드러내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갈릴레오 재판은 종교와 과학 사이의 직접적인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갈릴레오와 교회 사이의 여러 층위의 개념적 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갈릴레오와 교회 사이의 불일치는 여러 층위를 갖는데, 첫째 그들은 성서 해석에서(문자적 해석 vs. 관용 이론), 방법론에서(경험론 vs. 수학적 합리론), 그리고 신과 인간에 대한 견해에서(신/인간 엄격히 구별 vs. 이성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 불일치했다. 교회는 인간 경험에 의한 명백한 사실들이 지구의 정지를 선언한 신의 계시와 완벽히 일치한다고 결론내린 반면, 갈릴레오는 (신과 같이) 수학적 미를 자연의 진리와 연결시켰다. 갈릴레오는 신의 선물인 이성을 통해 신의 피조물인 자연을 탐구하는 과정이 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했지만, 교회는 인간이 신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는 갈릴레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갈등은 과학과 종교 사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과학들 사이에, 그리고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에 있었다.
갈릴레오 재판의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차원
- David C. Lindberg, "Galileo, the Church, and the Cosmos," in When Science and Christianity Meet, eds. D. Lindberg and R. Number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3), 33-60.
깅거리치와 윌슨이 당시 갈릴레오와 교회 사이에 존재했던 근본적인 갈등의 본질을 찾아내려고 한 반면, 린드버그는 왜 갈릴레오가 재판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찾아내어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특히 그는 갈릴레오 재판을 구체적 시공간 속에 위치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술함으로써, 인간적 차원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는 갈릴레오 사건을, 주목받는 과학자와 권위 있는 신학자들 사이의 갈등으로 보고, 인간적 정치적 차원을 통해 이해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래서 갈릴레오의 친분관계나 그의 성급하고 공격적인 성격을 고려하는 한편, 종교 개혁 이후 가톨릭 교회의 보수화 경향과 문자적 성서해석주의, 그리고 재판 당시 교회가 처한 어려움들(30년 전쟁, 스페인의 위협, 교황에 대한 비판, 교황의 죽음을 예언한 점성술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전선이 단순치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과학과 교회의 갈등만큼이나 성서 해석에 대한 교회 내의 갈등, 우주론에 대한 과학 내의 갈등이기도 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자연의 진리를 말할 권위가 이성과 경험에 있는지, 아니면 계시에 있는지에 관한 인식론적 방법론적 문제도 핵심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갈릴레오 사건을 기술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가치들에 주의해야 함을 지적하면서, 그 사건은 독단론이나 불관용의 결과가 아니라, 당시에 표준적이던 관료적 절차, 정치적 판단, 그리고 인간적 실수 등의 복합체였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