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과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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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 = 관념상의 혁명 not 경험상의 혁명 ?

과학혁명에 대한 가장 초보적인 관념은 도그마에 빠져 있던 중세에서 탈피하여 경험과 관찰, 실험을 끌어들임으로써 합리적인 과학이 탄생했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 실험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낙하 이론을 반박하고 새로운 낙하 법칙을 얻어냈다는 식의 생각 말이다.

그러나 과학혁명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한 코이레나 버터필드 등은 우리가 흔히 과학혁명이라고 부를 때 떠올리는 혁명들, 예컨대 천문학 혁명, 역학 혁명이 본질적으로 관념상의 혁명이었으며 관찰이나 실험과는 무관했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 바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새로운 관측결과보다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체계에 대한 미적 불만족에 기인했다거나, 갈릴레오의 혁신은 실제 실험이 아닌 사고 실험에 기인했다거나 하는 주장들이 그에 해당한다. 갈릴레오가 들었던 실험들은 많은 경우에 실제로 행해지지 않고 논리의 전개를 위해 머리 속에서 행해졌던 사고실험들이었거나, 실제로 행하는 것이 불가능했거나 혹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당시의 형편으로는 행해지기 힘든 실험들이었다. 때로 그는 실험에 대해 마치 그것을 실제 행한 것처럼 자세히 언급하고서도 끝에 가서는 자신의 수학적 또는 이론적 논리 전개가 워낙 확실하고 당연하기 때문에 실험을 해보나마나 결과는 뻔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갈릴레오를 뒤이어 역학의 혁명을 전개시킨 데카르트나 호이겐스 등의 업적이 모두 이론적, 수학적 추론에 의해 얻어졌다는 사실도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사실 관성, 운동의 상대성 원리, 운동의 합성 및 분해와 같은 새로운 개념이 어떠한 직접적인 경험에 기인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개념을 얻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정밀한 관측이 아니었다. 갈릴레오는 오히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화된 조건(e.g., 공기의 저항이나 마찰이 없는 상태)을 가정했는데, 그러한 이상화된 추상적 사고가 새로운 개념의 출발점이었다.[1] 코이레는 이러한 갈릴레오의 태도를 플라톤주의적 경향과 연결시켰는데, 플라톤주의적 경향은 케플러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수용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도 자주 사용되었다. 즉 고정된 시각으로 바라보던 기존의 현상을 새로운 사상적 영향이나 새로운 형이상학적 관념 덕분에 새롭게 볼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과학혁명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코이레나 버터필드 등이 보기에, 과학혁명의 주체들은 새로운 것을 봤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믿은 것이 아니라, 먼저 새로운 것을 믿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볼 수 있었다. 천문학, 역학을 포함한 중세까지의 지식체계는 고도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정교하면서도 일상 경험에도 부합하며 설명력이 매우 높은 체계였기에 단순히 사실 몇 가지만으로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세계를 보는 방식을 바꾸기 전까지 사실 자체는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경험의 역할

과학혁명에서 경험/관찰/실험의 역할이 거의 없다고 주장하는 위의 입장에 대해서는 위의 입장에 대한 가능한 반론으로는, 첫째, 위의 같은 입장은 천문학과 역학에만 해당되는 얘기라는 점, 둘째, 천문학과 역학에도 경험이 상당히 중요했다는 점, 셋째,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새로운 경험의 중요성을 역설했다는 점 등이 있는데, 정돈된 논의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글을 작성하고자 한다. 첫째, 당시 경험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 변화를 서술하고 그것이 과학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 후, 둘째, 각 분과마다 경험/관찰/실험의 역할을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 경험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 변화

1600년경의 과학혁명의 당사자들은 전통에 대해 자주 의심과 회의를 표명했으며,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나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 등은 새로운 지식을 위해서는 전통과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당대인들의 이 같은 태도는 당시 그들이 펴낸 책 제목들에 자주 등장하는 “New”라는 단어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2] 또한 과학혁명의 당사자들은 자연 자체에 대한 연구를 강조했다. 코페르니쿠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파라켈수스(Paracelsus, 1493-1541)는 “의학적 진리를 찾고자 한다면 먼저 고대 문헌부터 치워 버리고, 식물이나 광물, 별에 대한 연구에 몰두해야” 한다며, 자신은 “무엇이든 증명하고자 할 때 관련 문헌을 인용하지 않고, 실험과 추론에 의해 결과를 얻어냈다”고 자부했으며, 길버트(William Gilbert, 1544-1603)는 자신의 책을 “지식을 책 속에서만이 아니라 관련된 사물 자체에서 찾는 진정한 철학자들에게 헌정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신이 쓴 두 권의 책으로 ‘성서’와 ‘자연이라는 책(Book of Nature)’이 있다는 주장이 유행하면서, 갈릴레오, 하비, 보일 등은 제도화된 권위에 기초한 전통적 해석에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 ‘자연이라는 책’을 읽을 것을 주장했다. 예컨대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는 “철학은 우리의 눈앞에 끊임없이 열려져 있는 우주라는 거대한 책에 씌어져 있다”고 했으며,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는 “사물 그 자체에 대한 관찰 없이 다른 이들의 해설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려고만 하는 것은 열등한 것이며, (특히) 자연이라는 책은 열려 있으므로 참고하기가 쉽다”고 했다. 그들 각각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똑같지 않았지만, 자연을 강조하고 그로부터의 직접적인 경험을 강조했다는 것은 의심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러한 태도 변화를 일으킨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3] 그 중에서도 1400년대 중반 이후 유럽의 팽창과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사건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당시 서유럽에는 새로운 발견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그 중에는 기존의 지식체계와 부합되지 않는 것들도 상당수 있었다.[4] 물론 그러한 발견들이 곧바로 기존 지식 체계의 붕괴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사실은 그냥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어야 했는데, 앤서니 그래프턴이 지적했듯이 새로운 사실들에 대해 기존의 지적 전통은 상당히 유연하고 포용력 있는 해석틀의 더미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들은 경우에 따라 다분히 억지스럽거나 다른 것들과 모순을 초래하기도 했으며, 이 경우 새로이 발굴되었거나 그동안 무시되어 오던 다른 고대 문헌들이 대안적인 해석틀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사실들이 기존 지식 체계에 조화롭게 붙을 수 없다는 인식이 증가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지리학 또는 자연사의 경우이다.

지도 제작자와 자연사학자들은 1400년대 중반 이후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이나 플리니우스의 <자연사>에 기초한 지리적 자연사적 지식에서 출발하여 (느리지만) 지속적인 축적과 교정을 하고 있었다. 1600년 무렵이 되면, 지리서나 지도 제작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대의 지리적 지식이 엉터리였다는 것에 동의하여 자신들의 지식이 고대의 것보다 훨씬 낫다는 인식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메르카토르는 자신의 지도가 “이미 유통되고 있는 기존의 지도들보다도 최신이고 더 정확하다”(1538)고 자신감을 표현하는가 하면, 1570년경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은 오늘날 단지 역사적인 흥밋거리일 뿐,” 지리적 지식의 정당한 참고자료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지도 제작술은 ‘경험에 기초한’ 지식의 축적적 발전의 모범으로 여겨질 만 했다. (아마도 이는 지도 제작이라는 분야가 다른 분야에 비해 경험적인 축적과 교정이 상대적으로 쉬운 분야였기 때문일 수 있다.) 한편, 당시 상류계급에서는 ‘진기한 것들의 방(Cabinet of Curiosities)’이 유행하여 신대륙과 아프리카의 새로운 동식물들이 진열되었는데, 이는 새로운 사실의 추구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음을 반영한다. 이러한 인식은 지리학과 자연사 분야에만 국한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베이컨은 위와 같은 인식을 일반화하여, 당시 철학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 수집된 경험적 사실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는데, 이는 새롭게 얻어진 자각이었다. 그 이전까지 철학은 경험적 사실의 부족을 문제삼지 않았었다. 자연의 중요한 사실들(e.g.,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은 널리 공유되어 있었고 더 사실을 찾아낼 이유는 그다지 존재하지 않았다. 철학의 임무는 그렇게 보편적으로 공유된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었다.[5] 피터 디어는 이러한 인식 변화에 대해, 자연에 대한 지식이 중세식으로 “자연세계의 어떤 측면이 통상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에 대한 일반적인 진술”이 아니라 “자연세계가 하나의 특정한 경우에 보여준 구체적인 모습”의 기술을 통해서 얻어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과학혁명기에는 경험의 의미가 변한 것이며, 구체적인 개별 사실이 그 자체로 중요성을 획득한 것이다.[6]

한편, 과학혁명기 새로이 시작된 실험적 방법 또한 빛, 열, 전기, 자기, 기체학과 같은 새로운 분야들에서 새로운 경험적 사실들을 빠른 속도로 축적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축적한 사실들 또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실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새로운 개별적인 사실은 사적이고 일회적인 경험에 기초해 있기에 오히려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당대인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분명 새로운 사실의 보고는 그 중요성을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참된 보고와 거짓된 보고는 구별될 수 있어야 했다. 당대인들은 신뢰할 만한 경험을 골라내고, 사적인 경험을 공적이고 객관적인 경험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했는데, 그 중에 가장 널리 이용된 방법은 신뢰할 만한 목격자를 대동하는 방법과, 상세한 보고서를 통해 가상의 목격자를 산출하는 방법,[7] 그리고 재현(replication) 가능하도록 실험을 수행하고 소개하는 방법이었다.[8] 물론 이러한 각각의 방법들은 당시에 완전한 합의를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경험의 진위를 두고 자주 논쟁이 벌어졌었다. 망원경을 통한 갈릴레오의 목성 위성 관찰도, 보일의 공기 펌프 실험도, 뉴턴의 프리즘 실험도 그러한 논쟁에 휘말렸었다.

요컨대 새로운 사실들의 범람은 고대 지식의 권위를 끌어내리고 그로부터의 속박을 풀었다는 점에서 지적 활동 일반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으며, 지리학이나 자연사와 같은 몇몇 분야에는 직접적인 지식 발전의 모범이 되었으며, 실험과 같이 새로운 현상을 발견/창조하는 활동을 자극했다.

실험사/실험철학의 탄생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철학에서는, 방해받지 않은 자연의 일상적 움직임을 설명하는 데 관심이 있었고, 자연에 개입해 들어가는 실험은 자연을 ‘비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여겨졌다. 자연과 인공물은 엄격히 구분되었고, 사회적 위계상으로 자연을 취급하는 철학자와 인공물을 취급하는 기술자/장인은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사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첫째, 당시 유행하던 르네상스 마술전통, 혹은 헤르메스주의에 따르면, 마술을 행하는 마술사는 원죄 이후 자연을 단지 수동적으로 관찰만 하게 되었던 인간의 무능력으로부터 벗어나서 다시 자연에 무엇을 가하고 변형시켜서 무엇을 일어나게 하고 자연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는, 천사들이나 지니고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대학에서의 과학이 자연에 대해서 수동적인 태도를 지닌 채 책을 위주로 철저하게 이론적, 수학적, 사변적 형태로 남아 있는 동안 마술과 연금술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자연데 대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실험적 태도)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e.g., 길버트의 자기) 이러한 마술적 자연관은 르네상스기의 유럽에 아주 널리 퍼져 있었고, 과학혁명의 시기에는 그간의 아리스토텔레스 위주 학푸으이 지적, 과학적 무용성 및 혼란에 대한 대안의 한 가지 형태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 꽤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한편, 연금술은 화학의 직접적인 선조로도 여겨질 수 있다.

둘째, 실제적, 기술적 지식의 지적인 지위가 상승했다. 15,16세기 경제활동과 부의 증대, 그리고 그에 따른 도시의 발달과 중앙집권적 왕정의 확립 등의 영향으로 실제로 무슨 일을 해낼 줄 알던 사람들 ― 기계술사(mechanics), 항해사, 건축가, 외과의사, 장인들 ― 의 필요성이 증가하면서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 자신들의 지위 상승을 자각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비천하고 하잘 것 없는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서 훌륭한 자격을 갖추었음을 내세웠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분야가 이론적 바탕과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음도 보이려고 했다.(e.g., 헤론, 아르키메데스) 그리고 그들의 지식을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학문적 기술자(academic engineer)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기계가 자연에 역행하거나 자연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움직임을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측면에서 더 잘 보여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자연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변형을 가해서 그 움직임을 볼 때, 자연의 진실을 더 볼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그 방법은 과학에도 채택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자연/인공의 구분이 모호해졌는데, 인공물도 자연의 원리를 따르며, 자연물도 인공물처럼 이해될 수 있다는 인식도 생겨났다.[9] 따라서 인공물의 연구, 자연의 제어/변형은 정당한 자연탐구의 한 방법으로 채택될 수 있었다. 대학과 상류사회의 학자들에게도 이러한 인식은 일부 받아들여졌고, 경우에 따라 대학의 학자와 실제적 기술자들 사이의 융합이 일어나곤 했는데, 갈릴레오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쿤에 따르면, 실험이 적극적으로 행해진 분야는 기존의 수학적 분야(천문학, 역학)보다는 새로운 분야, 기체, 화학, 빛, 열, 전기, 자기 등의 분야였는데, 실험을 통한 새로운 경험적 지식의 축적과 교정이 이루어지면서 그러한 분야가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과학혁명 중 실험적 방법의 선구자로 간주되는 길버트(자기), 보일(기체학/화학), 후크 등의 과학적 업적들이 거의 대부분 이들 분야들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나 당시 과학단체들의 초기 실험적 업적들도 대부분이 이들 분야들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렇게 축적된 새로운 분야의 경험적 지식들은 점차 체계화되고 수학화되어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역학과 함께 현대물리학으로 종합되게 된다.

분야별 경험/관찰/실험의 역할

앞에서 정리했듯이, 과학혁명기에 경험은 전반적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인정되는 정도나 의미는 분야마다 차이가 있었다. 천문학과 역학처럼 매우 규칙적인 패턴을 연구하면서도 그 자료가 상당히 잘 축적되어 있었던 분야의 경우, 새로운 사실에 대한 추구는 그렇게 크지 않았으며 그 역할도 작았다. 또한 그 경험의 의미도 전통적인 의미의 경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반면 자연사나 새로이 연구되기 시작한 빛, 열과 같은 분야에서는 관찰과 실험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경험의 의미도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천문학

천문학 분야에서 관측은 원래 중요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당시까지의 가장 정확한 관측 자료에 부합하도록 자신의 천문학 체계를 만들었고, 이러한 과학혁명기의 천문학자들, 예컨대 코페르니쿠스나 티코 브라헤, 케플러도 그러한 (현상 구제의) 전통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다만 중요한 사실은 코페르니쿠스 이전까지, 아니 코페르니쿠스까지도 새로운 관측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았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정밀한 자료의 필요성은 그 이후의, 특히 티코 브라헤서부터 생긴 새로운 인식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은 새로운 관측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과거 관측 자료의 종합에 기인했다. 코페르니쿠스는 당대까지 전해진 자료들은 닥치는 대로 수집하여 정리했는데, 이러한 자료는 그 정확성을 신뢰하긴 어렵더라도 매우 긴 시간 지평의 천문 관측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이는 그 이전의 천문학자들, 예컨대 프톨레마이오스는 접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엉터리 자료들을 정합적으로 꿰어 맞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코페르니쿠스는 수많은 자료들의 교정 작업 과정에서 새로운 정밀한 자료의 필요성을 인식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만들어낸 자료는 그때까지 어떤 천문학자도 갖추지 못했던 정밀한 자료였으며, 그 긴 시간 지평의 자료는 코페르니쿠스에게 더 정밀한 모형을 만들도록 추동한 것으로 보인다.[10]

실제로 라베츠(Ravets)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 모형이 그가 실제로 다루었던 구체적인 천문학적 문제, 즉 달력 계산상의 큰 문제점이었던 세차운동의 불규칙성 및 관측된 별자리와 북극간의 거리의 변화까지 설명하기 위해서 지구의 자전이 불가피했었다고 주장한 바 있으며, 쉐들로우(Swerdlow)는 코페르니쿠스가 실제 행했을 계산을 다시 해봄으로써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동기가 행성, 특히 화성의 움직임을 천구의 회전으로 그리는 문제에 있었다고 주장했다.[11]

한편 “브라헤의 관측 없이 케플러의 세 법칙이 가능했겠는가?”라는 질문은 매우 유효한 질문으로 보인다. 물론 브라헤의 관측에도 불구하고 케플러가 신플라톤주의에 빠져있지 않았거나 당시 새로이 알려진 아폴로니우스의 원추곡선에 대한 지식이 없었더라면 타원궤도는 산출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여전히 관념이 중요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브라헤의 관측 없이도 케플러의 혁신이 가능했을까? 이 또한 아닐 것이다. 물론 브라헤의 관측이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브라헤의 관측이 과거의 방식에서 다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그렇게 꾸준히 관측을 하게 된 동기를 묻는다면 사태는 조금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브라헤는 어려서부터 과거의 자료를 섭렵한 후, 과거의 자료에 만족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는 더 정밀하고 체계적인 자료가 필요하다는 생각했는데, 이는 과학혁명기에 나타난 분명 새로운 태도였다.

티코 브라헤는 부가적으로 혜성과 초신성을 관측했는데, 이러한 새로운 발견은 천상계의 영원불멸을 주장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를 부정하는 효과를 낳았다. 그의 관측은 하늘에서 새로운 현상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이 새로운 사태는 망원경의 발명으로 더욱 촉진되었다.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통한 달, 금성, 목성의 위성 관측은 획기적으로 새로운 관찰 방식이었다. 그의 관측은 일반인들에게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당시 전문적인 천문학 이론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망원경을 통한 관측은 하늘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활동을 자극했고, 1645년 무렵이 되면 표준적 관측 방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의 수용과 관련해서도 관측의 정밀성은 어떠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흔히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을 실재(reality)로서 진지하게 수용한 이들은 대부분 신플라톤주의에 경도된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이 코페르니쿠스를 배운 것은 대학의 표준 교과과정을 통해서였는데, 대학에서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가설적인 모형으로서만 가르치긴 했지만 그 과정을 통해 많은 당대의 전문적인 천문학자들은 그 수학적 기법과 그 체계에 기초한 천문학 표를 배울 수 있었다. 태양중심 가설은 고대부터 아리스타르쿠스 등에 의해 이미 제기된 바 있었지만, 이때처럼 상세하게 그것을 학습하게 된 것은 코페르니쿠스 이후이며, 그 이유에는 그 체계가 당대 최고의 정밀한 자료에 기초해 있었고 당대 최고의 수학적 정밀성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 분명 포함될 것이다. 만약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 체계가 그러한 기초 위에 있지 않았다면, 대학에서 그것을 이용해 전문적인 천문학자들을 양성할 이유는 전혀 없었을 것이며, 그것을 실재로서 진지하게 수용한 이들도 나타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요컨대, 천문학 혁명에서 관측은 고대로부터의 관측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달라진 태도가 있다면 고대로부터의 자료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인식과 더 정밀하고 체계적인 자료가 필요하다는 생각일 것이다. 관측 자료의 형태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정밀성의 증가는 (다른 사상적, 관념적 영향들과 함께) 그 자료를 수학적으로 조직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었다. 한편 당대까지의 천문학에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지만 망원경을 통한 새로운 관측방식이 갈릴레오서부터 의미를 획득하기 시작했고 1645년경이 되면 표준적인 관측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새로운 방식은 하늘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자극하고 정당화하는 효과를 지녔다.

역학

역학은 과학의 모든 분야 중에서 가장 관찰과 실험의 역할이 없었던 분야이다. 역학 혁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인정되는 갈릴레오의 세 가지 원리와 뉴턴의 세 가지 법칙 및 만유인력의 법칙이 관찰이나 실험에 기초해 있다는 주장은 하기 어려워 보인다. 갈릴레오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뉴턴의 대표적인 성과도 투사체의 운동과 행성(또는 달)의 운동을 같은 현상으로 취급할 수 있다는 사고실험에서 비롯되었으며,[12] 그것을 정밀한 수학적 법칙으로 정식화하고 현상들을 설명해낸 것은 고도의 수학적 성취이지 관찰이나 실험의 성취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러나 역학 분야도 당시 새로운 발견의 범람이 만들어낸 일반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갈릴레오는 고대 문헌에 얽매이지 말고 ‘자연이라는 책’을 직접 볼 것을 강조했는데, 이는 당시 널리 퍼진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갈릴레오가 ‘자연이라는 책’을 보는 방식은 조금 특이했는데, 그는 이성적인 방법을 통해 경험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무슨 뜻일까? 갈릴레오는 직접적인 경험을 강조했지만, 특이하거나 신기한 경험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으며, 여전히 그는 당시까지 철학이 다루어 오던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경험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고대 문헌에 기초한 편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판단했는데, 따라서 올바른 경험을 위해서는 이성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갈릴레오에게 중요한 것은 경험을 통한 새로운 사실의 발견 따위라기보다는 이성에 기초한 올바른 경험이 될 것이다. 결국 강조점은 경험보다는 다시 관념으로 돌아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어야 할 의문이 남아있다. 갈릴레오가 했다고 주장한 그 많은 실험들이 갈릴레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 드레이크(Drake)는 갈릴레오의 운동학 법칙과 실험과의 관계에 대해 조사하던 중, 그의 저작을 관리했던 파바로(Favaro)가 그것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일부 노트들에 다른 부수적인 이론이나 설명이 없고 단지 도표와 수치들만이 적혀 있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누락시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드레이크는 이후 이 노트들 속에 적혀 있는 수치들과 도표들이 자유낙하 운동과 포물선 운동과 연관되어 있는 경사면 실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노트의 실험 결과치가 갈릴레오의 계산치가 거의 일치하며, 자신이 직접 그 실험을 재현한 결과치와도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드레이크는 그와 같은 정확한 수치를 얻기 위해서는 매우 정교한 장치와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갈릴레오를 중세 이래의 사고 실험의 전통 내에서는 설명될 수 없는 새로운 실험 전통의 선구적인 인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드레이크의 주장 이후 많은 과학사학자들은 갈릴레오의 실험 수행을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그 외에도 세틀(Settle)은 무게가 다른 두 물체를 낙하하는 실험에 대한 갈릴레오의 기록,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늦게 출발하지만 떨어지는 동안에 이를 따라잡는다”를 두고, 실제로 실험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었던 보고로 평가하기도 했으며,[13] 맥라클란은 갈릴레오가 물과 포도주 혼합 실험을 재현해봄으로써 갈릴레오가 그 실험을 실제로 수행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험의 수행 사실 자체가 코이레의 주장을 곧바로 반박하는 효과를 가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코이레의 주된 요지는 실험들의 수행 여부나 수행가능성 여부보다는 그것들이 갈릴레오의 이론적 추론에 부수적이었으며 따라서 갈릴레오의 이론의 발전에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틀(Settle)은 갈릴레오가 경사면 실험을 실제로 행했을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도 갈릴레오가 실험을 행한 이유가 자신이 철저히 확신하고 있던 등속도 이론을 예증하기 위해서였고 결과가 가속운동을 보여주자 한참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하려 했음을 시사함으로써 갈릴레오의 실험의 부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갈릴레오에게 실험이 어떤 의미였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해준다.

우선 갈릴레오에게 실험은 이미 다른 방법으로 얻어진 이론이나 법칙을 입증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갈릴레오는 그가 실제 할 수 없는 실험이나 실제로 해볼 필요가 없는 실험의 경우 간단한 언급만으로 논의를 진행시켰는데, 그가 예외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실험의 경우, 대개는 그 실험을 통해 검증 또는 입증하고 하는 이론이 기존의 견해와 대치되는 자신만의 독특한 창조물일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그것이 실재와 부합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는 뭔가가 더 필요했고, 그 때 그가 사용한 방법이 바로 입증 실험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실험은 때로 자신의 이론과 맞아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고, 그 때 자신의 실험을 신뢰할지 이론을 신뢰할지는 열린 문제이다. 여기서 그가 이론을 선택했다고 그가 실험을 무시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오도할 수 있다.)

때로 갈릴레오의 실험은 기존의 이론을 반증하거나 새로운 이론을 유도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드레이크에 따르면 갈릴레오는 노트 117r에서 ‘수평 등속 운동’에 관해 연구하던 중 만약 저항만 없다면 일정하게 유지될 것이란 생각에 노트 175에 그려져 있는 방식대로 그것을 실험했으나 그 결과 의도하지 않았던 포물선 궤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갈릴레오의 실험이 대부분 theory-driven된 입증 실험이었더라도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발견을 이끌어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갈릴레오는 원칙적으로 자연이 직접 말해주는 바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의 경험은 대부분 일상적인 경험에 강조점이 있었으며, 따라서 그의 혁신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보다는 대부분 사고 실험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실험은 그의 이론이 원칙적으로 자연에 부합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후적으로 수행되었다. (발견 실험과 같은 것은 사실상 수행된 적이 없다.) 그러나 실험 상황은 마찰이나 공기의 저항과 같은 것들 때문에 항상 불완전했고, 따라서 그 신뢰성은 본인에게도 의심받곤 했다. 그럼에도 그의 실험은 일상적인 경험을 보다 관측가능한 형태의 실험(e.g., 경사면 실험)으로 설계하고 수행했다는 점에서 현대적 역학 실험의 초보적인 원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는 데 실험적 논증보다는 수학적 선험적 논증에 많은 부분 기댄 것이 사실이다. 이는 실험적 논증이 널리 인정받지 못하던 당시 사회의 맥락에서 보다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전략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당시 인간에 의해 조작된 실험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자연의 실재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지지도 않았다. 또한 실험은 불완전하여 매번 다른 결과를 산출하기 때문에, 결정적인 논증으로 사용되기 어렵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갈릴레오는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는 데 최선의 전략을 택한 셈이다. 실험이 하나의 논증 유형으로 완전히 채택된 것은 17세기 수많은 논쟁을 거친 이후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사족: 당시 실제적인 일에 종사하던 타르탈리아는 포탄 궤적을 연구했었는데, 갈릴레오도 그 전통에 한 발을 담그고 있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쪽의 영향을 인정한다면 그들의 실제적 연구로부터 경험/실험의 중요성도 함께 들어왔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진자 실험은 중력이 지역이나 높이에 따라 다르다는 증거로 뉴턴에게 사용되는데, 이는 살펴볼 가치가 있어 보인다.

화학, 연금술

실험실의 원형. 물질의 조작/변형 원래부터 이루어짐. 파라켈수스는 자신의 경험적 태도 강조. 17세기를 거치면서 신비주의적 색체 점차 사라지고, 실험적인 방법만 남음.

기체학, 빛, 열, 전기, 자기

새로운 실험사/실험철학의 방법을 통해 활발히 연구되기 시작한 분야. 새로운 분야로 확립되기 시작.

자연사, 의학, 해부학

자연사는 여러 동기에 의해 과학혁명기 매우 활발히 이루어진 분야. 기본적으로 사실의 수집, 정리, 체계화. 특히 새로운 사실의 수집이 중요. 마술이나 헤르메수주의까지를 포함하는 아주 폭넓은 개념은 ‘엠블렘적 세계관’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애쉬워스(Ashworth)의 연구는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애쉬워스에 따르면 르네상스기의 자연사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사와 그 성격이 크게 달라서 동식물을 과학적 탐구나 기술의 대상으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비유, 상징의 대상으로도 보았는데, 이같은 자연사가 과학혁명기를 거치면서 커다란 변화를 겪어 엠블렘적 자연사가 퇴조하고 동물의 물리적, 해부적, 생리적 기술과 이해에 주된 관심을 지니는 근대적 자연사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같은 변화의 배경으로 애쉬워스는 지리상의 발견과 탐험에 의해 얻어진 신대륙 동물들이 기존 엠블렘들에 들어맞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말과 사물을 분리하는 베이컨주의적 경향의 영향 등을 들고 있다.

교육받은 의사는 단순한 질병의 치료만이 아니라 건강과 질병에 대한 이해에 바탕해서 건강한 생활의 안내자의 역할을 담당했고, 따라서 이들에게는 대학에서 교육받은 자연철학적 지식이 유용했다. 그러나 늘어나는 의료종사자들의 수와 확대되는 의료시장의 영향으로 그같은 이해나 건강 안내보다는 우선 당장 빠르고 확실한 치료에 대한 수요가 커져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의사들은 이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실용주의적, 경험적 태도를 채택하게 되고, 약재 재배와 개발을 위해 자연사 연구에 나서기도 했다.

15세기까지 해부는 단지 교육용. 그러나 점차 새로운 해부학적 사실을 발견하는 데

수리과학

당시 수학은 순수 수학 자체만이 아니라 수학을 사용하는 다른 여러 분야들이 함께 ‘수학’이라 불리었다. 근세 초기 유럽에서 수학은 유용한 기술이기도 했다. 우선 전쟁기술이 변화함에 따라 수학은 군사기술 분야에서 필수적인 지식이 되었다. 총포술, 축성술 등은 물론 전쟁 물자 보급에서 수학적 지식이 유용했다. 군사 기술 이외에, 증대된 교역과 지리상의 발견에 따라 중요성이 커진 항해술이나, 개간, 관개, 급수 및 배수 등을 위해 필요한 측량술 등에도 수학적 지식은 유용했다. 이렇게 볼 때, 수리과학에서도 경험적 지식은 매우 중요했고, 총포술이나 축성술과 같은 경우엔 일종의 실험이 수행되었을 가능성도 타진해볼 수 있다.(e.g., 타르탈리아의 투사체 연구)

한편 수학적 기구들, 자, 천문관측의, 상한의 등이 점차 자연철학적 기구로 변용되어 사용되기 시작.

각주

  1. 김영식은 단순한 경험법칙처럼 보이는 낙하법칙 조차 이론적 수학적 추론의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클래블린(Clavelin)에 따르면, 갈릴레오가 한 일은 낙하법칙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이미 어떤 식으로 알려져 있던 그 법칙을 수학적으로 유도한 일이었다.
  2. Galileo, Two New Science; Kepler, New Astronomy; Boyle, New Experiment; Pascal, New Experiments about the Void; von Guericke, New Magdeburg Experiments on Empty Space; Bacon, New Organon; Bacon, New Atlantis.
  3. 종교개혁, 상호 모순되는 고대 문헌들의 범람, 피론주의의 유행 등을 들 수 있다.
  4. 중세 1277년 금지령과 그에 이은 14세기 유명론적인 조류가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대한 인식론적인 공격, 즉 대안적 설명의 가능성에 대한 주장이었다면, 르네상스 시기에 쏟아진 새로운 사실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대한 반례를 통한 공격, 즉 실제로 틀렸음에 대한 주장으로서 기능했다고도 볼 수 있다. 어느 쪽이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대한 더 심각한 공격이었을까?
  5. 데카르트도 그런 면에서는 전통적인 철학의 임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6. 천문학이나 역학의 경우엔 여전히 일회적인 경험보다는 보편적인 경험이 중요했다. 다만 혜성이나 초신성의 관측의 경우도 일회적인 관찰이 모종의 역할을 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7. 피터 디어는 관찰자도 그 구체적 경험의 일부가 됨을 주장했는데, 특히 실험을 통해 인공적으로 얻어진 데이터들은 그러한 경험적 지식의 예였다. 경험적 지식의 이같은 성격은 과학의 저술에 있어 그간의 주해서 형태를 대체해서 주종을 이루게 된 연구 보고서에 반영되었다. 이제 실험보고 기록들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의 행위자(관찰자)의 구체적 경험의 보고기록이 되었던 것이다. 일례로, 보일은 수많은 실험보고 기록들에서 1인칭 능동태를 사용해서 실험의 과정과 상황에 대해 자세하고 주의깊게 기술함으로써 구체적 사건이 일어나는 모습을 실제로 목격하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고, 아울러 실험과정에서의 관찰자의 핵심적 역할을 드러내 주었다.
  8. 갈릴레오나 데카르트는 이성적인 방법을 통해 경험을 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어떤 이들은 망원경이나 현미경과 같은 도구를 통해 감각을 보완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갈릴레오와 데카르트가 주로 강조한 경험은 일회적이거나 사적인 경험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경험에 가까웠으며, 따라서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의 제언은 보편적인 경험이라도 제대로 하려면 올바른 이성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9. 이는 기계적 철학의 한 가지 원인으로 파악할 수 있다.
  10. 쿤은 코페르니쿠스로 하여금 지구를 움직이게 한 것은 우주론이 아니라 다분히 구체적인 문제, 즉 수리 행성 천문학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만약 코페르니쿠스가 우주론과 같은 문제에 몰두해 있었다면 지구를 움직이게 하는 그러한 과감한 시도는 하지 못했을 수 있다. 오히려 코페르니쿠스가 현상 구제의 정신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런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쿤의 주장이다.
  11. 물론 코페르니쿠스가 기존 체계에 대해 등속 원운동의 원리를 훼손하고 미적으로 불만족스러워 했다는 점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면 자료가 추동하는 힘과 비교하여 어느 것이 더 중요했을까? 나는 코페르니쿠스가 두 가지 정신에 매우 충실했다고 생각하는데, 첫째는 프톨레마이오스 이래의 천문학이 가지고 있었던 현상 구제의 정신이고, 둘째는 플라톤 이래의 천문학의 패러다임, 즉 모든 천체의 운동은 원운동의 합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정신이다. 코페르니쿠스는 두 원리를 완벽한 형태로 구현하고자 노력한 듯 보인다. 어떤 면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충실한 인문주의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12. 지상에서 수평방향으로 돌을 던지면 얼마 가서 땅에 떨어진다. 돌을 더 세게 던지면 더 멀리 가서 떨어질 것이다. 만약 지구 한 바퀴를 돌 정도로 힘껏 던진다면? 이런 식의 사고실험은 뉴턴의 󰡔프린키피아󰡕 도입부에 소개되어 있는 사고실험이다.
  13. 팔의 피로감 때문에 항상 가벼운 공을 먼저 놓게 마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