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기 과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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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은 내용이나 방법만의 혁명이 아니라 제도상의 혁명도 포함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새로이 등장한 과학단체들과 거기에서 행해진 과학활동이다. 과학혁명기 과학자들의 주된 활동무대는 대학이 아니라 새로이 출현한 과학단체였다. 유럽의 대학들은 17세기 말까지 중세의 교과과정을 고수하고 철저하게 아리스토텔레스 위주였으며, 새로운 과학에는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새로운 과학을 위한 새로운 장소 및 제도가 필요하게 되었고, 과학단체들이 탄생한 것이다.

베이컨의 자연철학 개혁을 위한 제안들

베이컨은 당시까지의 자연철학의 폐단 및 타락을 네 가지 우상(종족, 동굴, 시장, 극장)을 통해 비판학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실의 수집, 과학기구의 사용, 협동연구와 상호비판, 실험, 귀납적 방법의 사용 등의 개선방안을 제안했다. 이런 제안들은 베이컨이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 제안한 과학자들의 이상향인 솔로몬의 집으로 구체화(과학자에 대한 재정적 지원, 실험과 귀납에 의한 과학연구, 유용하고 실제적인 지식 생산을 통해 인류의 복지에 기여)되었고, 이후 과학단체들에서 채택되었다.

17세기 중반까지의 과학단체들

중요하고 본격적인 과학단체들은 1660년경에야 창립된다. 이들의 전신이라 할 만한 로마의 린체이 아카데미(1601년)나 피렌체의 치멘토 아카데미(1657년)가 창립되었고, 프랑스에서는 보다 비공식적인 형태로서 메르센느 집단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들은 비공식적인 조직이거나 개인적 친분을 통한 후원에만 의존해 있어서 조직이 취약했고 그래서 곧 단명하고 말았다. 예컨대 메르센느 집단은 메르센느가 죽자 와해되었고, 치멘토 아카데미는 그 후원자였던 레오폴드 경이 추기경이 되어 떠나자 와해되었다.

이를 통해 과학자들은 점차 공식적인 제도의 형태를 갖춘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단체와 그를 통한 지식의 상호교관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실험을 위한 시설과 경비가 필요했다. 결국 이와 같은 필요가 왕립학회나 과학아카데미와 같은 단체를 결성하도록 했다.

런던의 왕립학회

왕립학회는 윌킨스를 중심으로 그레샴 칼리지에 모이던 집단(철학 칼리지)이 1660년에 새로운 국왕인 찰스 2세의 헌장을 받으면서 구성되었다. 그러나 공화파가 다수였던 그들에게 국왕은 실질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고, 학회는 스스로의 재원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임의적이고 자발적인 단체로 자라났다. 회비에 의존했던 재정은 빈약했고, 실험을 위한 경비와 설비는 개인적으로 마련해야 했으며, 초보적인 실험 외에는 일관된 연구 방향이나 이론 체계도 없었다. 회원들이 모두 베이컨주의자였고 기계적 철학을 수용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학회의 주된 기능은 과학 지식과 정보의 수집이었다. 학회의 서기였던 올덴버그는 대규모의 서신교환을 통해 정부를 수집해 출판했는데, 처음에 그가 개인적으로 출판하던 철학회보는 곧 학회의 공식회보가 되었다. 학회의 또 다른 기능은 과학지식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는 것이었다. 학회에 제출된 업적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었고, 발견의 우선권을 확인해주는 역할도 하게 되었다. 이는 과학자들의 태도에서 중요한 변화를 나타내는데, 이전에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결과를 비밀로 하는 일이 흔했으나, 조직화된 단체가 생겨나면서 과학적 업적을 공표하는 관행이 정착되었다.

파리의 왕립과학아카데미

파리의 왕립과학아카데미는 창립과정부터 왕립학회와 달랐다. 메르센느 집단의 일부가 새로운 후원자인 테베노를 만나 테베노 집단을 구성했는데, 이 집단이 1664년 베이컨적 공리주의를 표방하면서 재상인 콜베르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는 중상주의 정책을 펴면서 왕권 강화와 강력한 관료제의 구축을 추진하고 있던 콜베르의 노선과 잘 맞아 떨어졌다. 또한 콜베르는 학문적 과학적 탁월함이 왕권의 신장과 프랑스의 영광을 드높이는 일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러한 이유로 그는 테베노 집단의 요청을 받아들여 왕립과학아카데미를 정부 기구로서 조직했다.

과학자들은 아카데미에 전임으로 속해 정부에서 보수를 받고 정부의 시설(도서관, 천문대, 식물원 등)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정부의 공공기능도 일부 맡아 출판검열과 특허심사 등의 임무도 겸하였다. 런던 왕립학회와의 이같은 차이는 과학활동에서의 차이에서도 나타났다. 왕립학회가 별다른 연구프로그램 없이 산발적인 연구활동을 보여준 반면, 아카데미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연구활동을 보여주었다. 영국의 개인적인 연구와 달리, 프랑스에서는 협동연구가 정착되었고 풍부한 재정지원 하에서 대규모의 연구과제(e.g., 지구의 크기 측정 사업)도 수행할 수 있었다.

단체의 설립 이후

두 단체의 발전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왕립학회는 재정의 빈곤으로 인해 한동안 침체되어 있었다. 회원수를 늘리기 위해 회비 부담 능력을 기준으로 회원을 받았고, 과학적 업적이나 고려 없이 모여든 회원들로 구성된 학회의 활동은 질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1680년대에 학회의 발표를 보면 과학적 가치는 별로 없고 순전히 호기심을 자아내는 기이한 현상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과학아카데미의 경우, 실용적 결과에 큰 기대를 걸었던 것에 실망하여 왕실의 재정적 지원이 줄어들었고 침체는 심해졌다. 1699년 대개혁을 통해 활기를 되찾는데, 더욱 관료적인 형태로 조직화되었고 과학의 실제적 효용을 강조하던 베이컨주의적 경향은 퇴조했다. 데카르트주의와 라이프니츠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이론적이고 수학적인 색체가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