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튼 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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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처음 발표된 소위 '머튼 명제'는 과학혁명기 과학과 종교 사이의 긍정적 연결을 주장한 명제이다. 이는 막스 베버의 주장을 과학과 청교도의 관계로 옮겨 적용시킨 것으로, 17세기 영국의 새로운 과학이 청교도 윤리와 부합했으며 그것의 도움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 Merton,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in Seventeenth Century England," Osiris 4 (1938), 360-632.

청교도 윤리와 과학의 공통점과 인적 교집합

우선 청교도 윤리와 과학은 여러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청교도들은 직접 관찰과 경험을 중요시하는 교육의 역할을 강조했고, 현세를 긍정하는 신앙을 지니고 있으면서 인류에 공헌하는 것을 높이 평가했다. 이는 과학활동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해 주었는데, 자연에 대한 탐구가 인류의 복지에 공헌해 결국 신의 영예를 드높인다는 생각을 뒷받침해 주었다. 더 나아가, 머튼은 영국 과학자 중에서 청교도가 많았음을 보여줌으로써 둘 사이의 실제적 관계를 보여주려 했다.

'청교도' 개념의 모호함: 청교도를 포함한 종교개혁과의 연관성 주장?

머튼 명제가 한정된 범위에서는 수긍이 가는 주장이지만, 원래의 주장을 확대해석해서 청교도 윤리가 과학혁명에 기여했다거나(본래: 원인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음) 근대과학의 형성(본래: 영국만의 이야기)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면 무리가 따르게 된다. 사실은 머튼 명제 자체도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청교도'의 의미가 정확하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청교도인지 결정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이 청교도였다고 하더라도 과학에 대한 그의 태도가 '청교도'이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지도 의문시된다.

당시 과학자가 청교도와 겹치는 정도가 심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자가 개신교 전체와 겹치는 정도도 그만큼은 되었다. 이러한 사태 분석으로부터 김영식은 머튼 명제가 사실은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사이의 연관을 지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종교개혁은 과학혁명은 다음의 지점들에서 유사한데, (i) 신의 책인 성경을 직접 읽자 vs. 신의 책인 자연이라는 책을 직접 읽자. (ii) 신앙을 교회와 교황의 권위에서 해방시키자 vs. 과학의 고대의 권위에서 해방시키자. 즉 개신교와 과학 모두 기존의 권위로부터 벗어나 '개인이 직접 읽고 주장할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가치로서의 '종교'와 가치로서의 '과학': 머튼의 '종교'와 '제도'

  • Gary A. Abraham, "Misunderstanding the Merton Thesis: A Boundary Dispute between History and Sociology," Isis 74 (1983), 368-387.

아브라함은 머튼 명제가 오해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먼저 머튼의 말하는 청교도주의는 특정한 신학적 교리가 아니다. '종교'는 지배적인 문화적 가치와 정서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제도'란 공식적 조직이 아니라 문화적 가치를 구현하는 지속적인 행동양식을 뜻한다. 즉 그는 사회문화적 가치로서의 과학에 대해 말했던 것이며, 따라서 머튼 명제는 청교도주의가 과학지식을 진보시킨다는 주장이 아니었다.

둘째, 과학의 진보는 과학의 제도화와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머튼이 설명하고자 했던 것은 과학의 내용이나 내적 과학사가 아니라, 과학에 대한 관심의 증대였다.

셋째, 머튼은 과학과 청교도주의를 (권위에 비판적이었던) 급진주의로 정의하지 않았다. 또한 과학의 청교도적 기원을 (교리를 합리화하려는) 개인적 동기와 연결시키지도 않았다.

넷째, 왕립학회가 설립된 1660년은 머튼적 의미에서 제도화의 정점이 아니었다. 제도화는 지속적인 가치의 변화이기 때문에 창립 당시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머튼 명제의 본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7세기 과학의 가치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정당화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청교도적 가치가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교의 금욕주의는 신교의 정통교리를 넘어서는 행동양식(style of behavior)이었고, 바로 그것이 가치로서의 과학을 제도화하는 데 효과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머튼의 제도적 분화 가설의 오류: 분화가 아닌 구성! 이는 수사적 성취

17세기 당시 과학과 종교와의 일치를 강조하는 수사학뿐 아니라 분리를 강조하는 수사학도 공존했음

  • Thomas F. Gieryn, "Distancing Science from Religion in 17th England"

기어린은 머튼 명제가 표현된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의 외적 접근과 근래 머튼의 내적 접근을 관통하는 제도적 분화 가설을 지목한다. 그는 이 머튼 명제가 17세기 과학과 종교적 가치를 연결하는 수사에만 초첨을 맞춤으로써 당시 거리두기의 수사적 노력이 공존했음을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제도적 분화 가설은 사회가 (과학, 종교, 정치 등) 다양한 제도를 통해 분석될 수 있고, 이 제도들이 각기 자율성을 얻어가면서 분화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므로 머튼의 외적 접근과 내적 접근의 차이는 단지 제도화의 초기단계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아니면 상당히 자율성을 획득한 후기 단계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반면, 구성주의를 과학에 적용한 '제도적 구성 가설'이 대안이 될 수 있는데, 이는 제도를 하나의 사회적 구성물로서 파악한다. 제도적 분화는 근대화 과정의 필요요소나 부산물이 아닌 수사적 성취이다.

17세기 자연철학자들은 과학과 종교를 포갬으로써 신과 신앙을 사회질서의 중심에 놓는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다른 한편 과학을 종교와 분리시킴으로써 분파주의나 광신을 꺼려하는 사람들로부터도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17세기 과학의 지위와 실천이 증가한 것은 과학과 종교가 공유하는 가치를 통해 두 제도를 연결하려는 수사적 노력만큼이나 두 제도를 분리하려는 수사적 노력 덕분이다. 그러므로 일치의 레퍼토리만을 강조하고 분리의 레퍼토리를 무시한 머튼의 논제는 불완전하다.

설명항과 피설명항에 대한 오해

  • Steven Shapin, "Understanding the Merton Thesis"

섀핀은 역사가들이 머튼 논제를 오해한 탓에 그것에 고무되었다고 진단하면서, 머튼의 이론이 파레토적 개념에 기초해 있어서 이해되기 어려웠다고 주장한다. 섀핀이 보기에 역사학자들은 머튼 명제의 피설명항과 설명항을 모두 오해했다. (i) 피설명항: 사실 머튼은 과학적 발견의 내용이나 방법을 종교에 의해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블랙박스로 간주된) 과학의 사회적 입지를 설명하려 했을 뿐이다. (ii) 설명항: 단선적인 인과적 설명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그 또한 설명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했다.

아브라함은 역사가들이 '종교'의 의미를 오해했다고 지적하면서, 머튼의 '종교'는 지배적인 문화적 가치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섀핀은 청교도주의로 표현되는 문화적 가치 이면의 사회적으로 패턴화된 심적 구조, 혹은 정서(sentiment)가 머튼의 본래 의도라고 주장하면서, 이는 파레토 사회학에서 영향받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인과적 언어를 제한적인 상호의존으로 대체하려 했던 머튼의 노력도 절충적인 파레토적 접근으로 이해된다.

유물론의 몇몇 요소들을 보존하면서도 관념론과 혼합해서, 맑시즘과 관념론을 절충하려 했고 이것이 역사학자들의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머튼 명제는 유물론적인 것도 관념론적인 것도 아니다. 부분적으로 사회적이며 부분적으로 심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