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자들의 다윈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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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와 엥겔스의 다윈에 대한 애착

1859년 󰡔종의 기원󰡕이 출간된 후, 맑스는 엥겔스에게 “다윈의 책은 매우 중요하며, 나에게 계급투쟁에 대한 자연과학적 토대를 제공해준다”고 편지를 보냈다. 한편, 엥겔스는 맑스의 장례식에서 “다윈이 유기체의 발전 법칙을 발견했듯이, 맑스는 인간 사회의 발전 법칙을 발견했다”라는 내용의 조문을 읽기도 했다.

맑스와 엥겔스가 다윈의 진화론을 높이 평가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첫째,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자연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둘째, (변증법적인 관점에서) 자연의 지속적인 변화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의 불편함: 생존경쟁

다윈은 맬서스의 ‘인구법칙’과 ‘생존경쟁’에 대한 비유를 직접 차용하면서 진화의 메커니즘을 설명하였는데, 사회주의자들에게 맬서스 식의 ‘생존경쟁’은 매우 불편한 요소였다. 진화론의 ‘경쟁’과 ‘도태’의 메커니즘을 인간 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자유방임적 경제학이나 스펜서 식의 사회진화론처럼 자본주의 사회를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맑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끊어야 했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째, 자연계의 경쟁적인 진화 메커니즘이 인간사회에는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거나, 둘째, 진화론에서 ‘생존경쟁’이란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자연과 인간의 연속성 끊기

맑스는 “인간의 역사는 자연의 역사와 다르다. … 우리는 전자를 만들어 왔지만, 후자는 아니다”라면서, 인간 역사의 자연과의 차이를 강조했다. 엥겔스도 “(동물과 달리) 인간은 생산을 한다. … (따라서) 동물계로부터 나온 범주들을 (인간사회에)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엥겔스는 “자유경쟁, 생존경쟁 ― 경제학자들은 이를 최고의 역사적 성과라고 칭송해 대고 있는데 ― 이 바로 동물왕국의 정상적 상태임을 증명했을 때, 다윈은 자신이 인류와 특히 영국 국민들을 얼마나 쓰라리게 풍자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면서, 당시의 경쟁적인 영국사회가 일시적인 상태임을 반어적으로 표현했다.

‘생존경쟁’의 제거와 ‘협동’의 강조

이어 엥겔스는 “자연물들의 상호작용은 의식적․무의식적 협력과 의식적․무의식적 투쟁을 포함한다. 즉 일방적으로 ‘투쟁’만을 기치로 내세우는 것은 이미 자연에 있어서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자연선택 이론의 공동발견자인 월러스조차도 사회 변혁의 문제에 관심을 가짐에 따라, ‘생존경쟁’이라는 비유는 단지 자연선택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해주는 도구일 뿐 그 이상은 아니라는 입장으로 기울어진다.

러시아에서는 ‘생존경쟁’이라는 표현이 제거된 다윈주의가 유통되기도 했는데, 당시 러시아 생물학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회주의적 성향의 티미리아제프는 1910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생존경쟁이라는 불편한 표현을 언급하지 않고도 20년간 다윈주의를 방어했다”

즉, 이들에게 자연선택이란 잔인한 경쟁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조화를 만들어가는 자연의 방식에 대한 기술이었다.


다윈의 설명적 약점과 라마르크주의의 선호

‘선택’은 적응하지 못한 개체를 제거하는 데에만 유용한 요인이다. 그렇다면, 적응적인 결과를 내게 하는 긍정적인 요인이 있어야 할 텐데, 그것이 ‘무작위적인 변이’만으로 가능하다는 다윈의 설명에 충분히 만족하는 사람은 드물었으며, 이는 다윈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목적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사회의 변혁을 꾀하였던 사회주의자들은 ‘후천적 노력의 결과가 전수될 여지가 있는’ 라마르크적인 해석을 선호하였다. 크로폿킨과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19세기 말 신라마르크주의에 대한 선호는 사회주의자뿐만 아니라 여타 지식인들에게도 일반적이었다.

유전학의 성립과 논쟁의 전문화

20세기 초 드 브리스와 모건에 의해 성립된 (돌연변이) 유전학은, 불충분한 설명력에 시달리던 다윈의 진화론에 새생명을 불어넣었다. 유전학의 성립과 함께 사회주의 내부의 라마르크주의적인 편향도 약화되었다. 러시아 맑스주의의 아버지라 불린 플레하노프와 독일의 카우츠키는 드 브리스의 돌연변이 이론을 적극 수용하였는데, 그들은 불연속적인 돌연변이에 대해 혁명의 자연스러움을 확증해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에 따르면 도약적으로 진보하는 자연과 인간의 역사는 동일하게 변증법적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진화론과 유전학에 대한 통일된 입장이 존재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진화론에 대한 구체적인 논쟁은 점차 과학자 집단 내부로 이전되었으며, 1920년 전까지는 유전학과 신라마르크주의 사이에 명확한 쟁점이 그어진 적도 없었다.

「소비에트 맑스주의 생물학의 모건학파」를 세운 세레브로브스키는 유전학과 신라마르크주의 사이의 논쟁을 촉발시켰는데, 이 논쟁은 맑스주의 대 비맑스주의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맑스주의 내부의 유전학 진영과 신라마르크주의 진영의 대결이었다. 정치적 노선에 따라 입장을 정하려 한 참가자는 거의 없었으며, 1929년까지는 모간 유전학 진영이 라마르크주의를 압도했었다.

그러나 같은 해, 스탈린에 의해 “거대한 단절”이 선포되었고, “과학의 볼세비키화”라는 명목 아래 생물학 논쟁은 어이없게 종결되어 버렸다. 그 유명한 리센코주의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탄생했다. 이러한 사실은 리센코주의가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적 선호에 의한 자동적 귀결이라기보다는 스탈린의 ‘실용주의’적 노선의 귀결로 보아야 함을 시사한다.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은 과학에 무엇을 했을까?

위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진화론에 대한 우려와 문제제기로 언급되었던 자연과 인간의 연속성 문제, 진화에서의 ‘협동’의 역할, 그리고 진화에서의 ‘생존경쟁’의 실체성 문제는 사실 아직까지 해결된 것이 아니다. 또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생물학적 결정론 대 환경 결정론의 논쟁도 사회주의적인 이념과 철학이 기본적인 촉매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이후 페미니스트에 의해 더욱 큰 논쟁이 되었지만)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여겨지는 ‘이기성’이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라고 보았으며,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킴과 동시에 인간의 본성도 함께 변화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생물학적 결정론을 불편해했고, 그것을 반박하기 위한 근거를 찾곤 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과학의 논쟁에 촉매가 도었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이념과 철학은 세계에 대한 직관을 제공하면서, 19세기 이래 현재까지 과학에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내는 데 유의미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앞으로 언제까지 생산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겠지만.

관련문서: 급진파들의 다윈 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