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라철학과 역학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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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통론1 기말보고서

스콜라철학과 역학혁명 : 회의주의와 비판적 상상력, 그리고 실재론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2004-20309 정동욱 | 담당교수 : 홍성욱 | 제출일 : 2006년 6월 18일


들어가며

근대과학의 형성과정에서 중세는 어떠한 역할을 했을까? 삐에르 뒤앙(Pierre Duhem, 1861-1916)은 “만일 우리가 근대과학의 탄생날짜를 명시해야 한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는 파리 주교가 여러 개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으며, 모든 하늘들[천구들]이 모순 없이 직선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엄숙하게 선언한 1277년을 선택할 것이다”라는 대담한 주장을 남겼다. 1277년 파리 주교의 선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및 그 함의 중에서 219가지 명제를 금지시킨 것을 말한다. 즉, 뒤앙은 학문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 근대과학을 탄생시켰다는 역설적인 주장을 한 셈인데, 과연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뒤앙의 주장의 핵심은 “[1277년 금지령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포함된 결정론적 주장들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림으로써 ... 중세 과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적․철학적 편견과 논의의 방식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고, 중세 과학에 과학적 상상력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것이다. 뒤앙의 지적대로, 윌리엄 오캄(Willam of Ockham, 1280-1349년경)을 비롯한 14세기 소위 유명론자들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과감한 상상력을 펼쳤으며, 그들이 개발한 아이디어와 수학적 기법들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에 의해 분명히 차용되었다.

그러나, 뒤앙에 대한 반대자들은 유명론자들의 반실재론적 태도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과학을 파괴하고 그것을 새로운 우주론과 물리학으로 대체하는 데 무기력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유명론자들의] 영리한 결론들과 해답들은 그것들이 <상상에 따라서> 그리고 <현상을 구제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 자연에 대한 접근 방법으로부터 분리되어서 물리적 실재에 대한 추구와 결합될 때까지는 새로운 과학의 발전에서 어떤 역할도 담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은 지구의 운동에 실재성을 부여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에 이르러서였다는 것이다.

1971년 󰡔중세의 과학󰡕에서 그랜트는 “[유명론자들이] 그들의 결과를 물리적 실재에 적용했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를 파괴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과연 유명론자들의 아이디어들에 실재론적 태도만 장착하면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또한 당시의 상황과 조건에서 대안에 대한 실재론적 태도가 생겨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나의 의문은 여기서 시작됐다. 반실재론적 태도의 확산에 1277년 금지령과 같은 사건이 동기를 부여했다고 했듯이, 실재론적 태도의 형성에도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회의를 통한 만족스런 대안의 마련이 (새로운 대안에 대한) 실재론적 태도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뒤앙의 정신을 가장 잘 살리는 길이자 뒤앙의 약점까지도 밝히는 방법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배경이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용과정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용과정과 1277년 금지령

“1200년 경에는 파리, 볼로냐, 옥스퍼드의 대학들이 학문의 중심으로 크게 번성했다. ... 이들 대학이 자연스럽게 출현한 것은 12세기를 통해 라틴어로 번역되었던 새로운 지식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대학은 서유럽이 방대한 양의 새로운 지식을 정리하고 흡수하고 확장하는 제도적 수단이었으며, 그 후 몇 세대를 통해서 공통된 지적 유산을 형성하고 전하는 도구였다.” 대학의 활성화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은 서구 유럽에 급속도로 확산되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이 커져갈수록 그에 대한 의심과 적대감도 함께 증가했다. 그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몇몇 요소들이 기독교 신앙 및 교리와 충돌했기 때문이다.

교양학부의 교수들은 신학의 진리와 자연철학의 진리를 별개로 둠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변호하고자 했고,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절충주의자는 서로를 재해석하여 신학과 자연철학을 조화시키려 했다. 반면,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경우엔 앞의 둘 모두를 못마땅해 했다. 마침내 1277년 파리 주교 탕피에(Etienne Tenpier)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및 함의 중 219개의 명제를 골라 일괄 유죄선고를 내렸으며 그 명제들 중 어느 하나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파문에 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신의 절대적 능력에 가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주의적이고 결정론적인 제한들, 예컨대 “신도 여러 개의 세계를 만들 수 없다(34번)”거나 “신도 하늘을 직선운동으로 움직이게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진공이 생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49번)”와 같은 명제는 더 이상 옹호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신은 여러 개의 세계도 진공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자신의 절대적 능력을 회복한 14세기 ‘주의주의적(主意主義的, voluntaristic)’ 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를 초월하여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물론 탕피에에게 진짜로 중요했던 것은 신의 절대권과 자유의지를 완전히 인정하는 일뿐이었지만, 이들에 대한 어떤 제약도 거부함으로써 그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과학적 이론전개에 대한 제약들도 함께 제거해버린 셈이 되었다.”

반실재론의 확산과 스콜라 학자들의 상상력

1277년 금지령으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은 진리로서의 지위를 뺏기게 되었는데, 이와 함께 14세기에는 반실재론적인 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오캄의 급진적 경험주의(radical empiricism) 또는 그의 영향으로 나타난 유명론(nominalism)이었다. 이에 따르면, “완전히 자유로운 작인인 신은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 한 어떤 일도 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현존하는 모든 사물들은 우연적이 되었으며, 하나의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그것을 초월하는 지식으로 나아가는 추론이 모두 봉쇄됐다. 그리고 이는 “명확히 알 수 있는 필연적인 원인-결과 관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믿음 ― 13세기에 그렇게 넓게, 그리고 아마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던 ― 을 깨뜨렸다.”

14세기의 모든 철학자가 오캄과 같은 극단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었지만, 물리적 현상에 대한 설명이 ‘현상구제’ 또는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널리 퍼졌다. 이에 따라, 스콜라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물리적) 필연성에서 벗어나 모든 가능성을 자유롭게 상상하는 경향에 고무됐다. 이러한 접근법의 특징적 신호는 ‘상상에 의하면’이었다.

이제 중세 자연철학자와 신학자들은 ‘상상에 의해’ 신에게 (그동안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의해 제한되었던) 다른 세계를 만들고, 진공을 만드는 임무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작업이 단순히 ‘신이라면 얼마든지 여러 개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식상한 말로 그친다면 신학자들에게 그것은 매우 싱거운 일이자 재미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만약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 세계는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할 것인가 아닌가?’ 또는 ‘진공이 존재한다면, 진공 속에서 물체는 어떻게 운동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재미있으면서도 도전적인 과제로 생각했다.

니콜 오렘(Nicole Oresme, 1323-1382)은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에 해당했던 ‘현 세계와 동등한 세계의 가능성’ 문제를 인상적으로 풀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우주에는 하나의 진정한 중심만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무거운 물체라면 그 중심을 향해 낙하하려 할 것이기 때문에 다른 세계는 불가능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렘은 ‘위’와 ‘아래’를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 사이의 상대적 개념으로 변환했다. 만약 우리 세계 외부에 무거운 물체가 존재하고 진공에 의해 우리의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들은 우리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즉, 오렘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위치 개념을 상대화시킴으로써, 복수 세계 가능성을 논증했다. 그러나, 오렘은 자신이 고안해낸 상대적 장소 개념을 이용해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과 물리학을 수정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은 당시로서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는데, 이는 아마도 오렘을 비롯한 스콜라 학자들이 다른 세계의 존재를 진자로 믿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렘은 자신의 논증을 마치면서 “결론적으로, 신은 그의 전지전능을 통해 이와 같거나 다른 방식으로 또다른 세계를 만들 수 있으며 만들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든 다른 누구라도 이를 완전히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도 하나의 실체적인 세계 외에는 존재한 적도 없으며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지구의 일주운동 가능성을 인상깊게 논증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천체와 지구 중에 어느 것이 일주운동을 하는지는 경험에 의해 결정할 수 없다고 결론지은 후에, 신학적 이유에서 전통적 입장으로 회귀해버렸다.

이렇듯 자신이 궁극적으로 부정할 가정을 정교하고 눈부시게 논증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이러한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들이 비록 매우 있음직하지 않다(improbable) 할지라도 사실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not impossible)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즉, “이성을 통한 이성의 교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그는 자연철학자들의 콧대를 꺾고 신앙을 이성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었다. 둘째, 이러한 논증은 “가능세계에 대한 이성적 상상의 훈련(exercise of reasoned imagination)”의 역할을 수행했다. 앞서 언급했던 복수 세계 가능성의 문제를 비롯해, 진공 속에서의 운동 문제는 철학자 또는 신학자의 능력을 검증하기 좋은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는 자연철학의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았는데, ‘신은 동시에 모순적인 일을 할 수 있는가?’, ‘천사는 장소에 존재하는가? 천사는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는가?’ 등 또한 비슷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중 가장 난제에 해당하는 문제는 ‘신은 무한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하는 문제였는데, 신학자들에게 이는 매우 매력적인 문제로 다루어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 문제가 “상상력의 훈련이자 논리-수학적 분석 능력에 대한 날카로운 검증대(keen test)”로 기능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스콜라적 논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훗날 차용될 가상적인 모형과 근거들을 고안해내는 업적을 이뤄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오렘의 지구 일주운동에 대한 논증은 코페르니쿠스에게 (코페르니쿠스가 그 논증을 알았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더라도) 유사한 방식으로 차용되었으며, 무한에 대한 논의처럼 전혀 생산적이지 않아 보이는 질문조차도 (곧바로 그 성과가 이어지진 않았더라도) 현대 집합론의 중요한 가정을 산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는 마지막 천구를 뚫고 나가면 그곳에 무엇이 있을까와 같은 허무맹랑한 질문조차도 근대 역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질 진공 개념을 자리잡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이라는 이들의 방법 그 자체일 것이다. 이 방법은 전통을 파괴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갈릴레오에게 전수되었고, 또한 아인슈타인에게도 전수되었다. 물론, 스콜라 학자들이 사고실험에 그러한 혁명적인 역할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임페투스 이론과 평균속도 정리에서 갈릴레오까지

연속론자들이 중세 스콜라 철학의 성과 중 가장 주목했던 부분은 뷰리당(Jean Buridan, 1300-1358)의 임페투스 이론과 14세기 옥스퍼드 대학 머튼 칼리지(Merton College)의 평균속도 정리이다. 그 이유는 갈릴레오의 관성 개념과 자유낙하 법칙(s∝t2)과의 연관 때문이다. 임페투스 이론은 운동의 원인을 내부화함으로써 외부의 작인을 제거하는 효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관성 개념과의 연결을 보여주며, 평균속도 정리는 등가속도 운동을 기술하는 수학적 기법을 제시함으로써 자유낙하 현상을 기술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그러나, 스콜라 학자들의 임페투스 개념과 갈릴레오의 관성 개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지적이 있다. 꼬아레(Alexandre Koyré) 등이 지적했듯이, 임페투스 이론에서는 운동의 원인으로서 임페투스가 필요했지만, 갈릴레오의 운동에는 원인이 필요하지 않다.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꼬아레는 갈릴레오가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임페투스 개념을 종국에는 버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이어(Anneliese Maier)는 갈릴레오가 수용했던 초기의 임페투스 개념이 이미 14세기의 임페투스와 사뭇 달랐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후기 저작인 Two New Science의 관성 개념과 오히려 비슷했음을 강조했다. 14세기 임페투스 이론에서 갈릴레오 초기 이론까지의 변화가 더 큰지, 갈릴레오 초기에서 후기로의 변화가 더 큰지의 문제는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마이어의 지적은 14세기의 임페투스 이론이 갈릴레오 이전에도 꾸준히 변화되어 왔음을 함축한다.

월러스는 머튼 칼리지의 방법도 갈릴레오로 오는 과정에서 변형과정, 특히 실재론적인 변형 과정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애초에 머튼 칼리지의 방법은 추상적 세계에서의 가상적인 운동 상황만을 다루는데다가, 운동의 실재적 원인을 제거한 채 그 효과만을 기술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반면, 갈릴레오는 자유낙하와 같은 실재의 운동을 기술하고자 했으며, 그 원인까지도 다루고자 했다. 월러스는, 머튼 칼리지의 순수 추상적인 방법이 그보다 실재론적인 이론이었던 뷰리당의 임페투스 이론과 섞이면서 원인과 결과에 대한 관심을 흡수하게 되었고, 이후 몇단계를 더 거치면서 실재론적 성격을 점점 띠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연장선 상에서, 크롬비(A. C. Crombie)와 월러스(W. A. Wallace)는, 갈릴레오가 14세기 이론들을 접할 수 있었고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넘어, 갈릴레오가 누구로부터 어떤 견해를 입수했는지 구체적인 경로를 추적했다. 월러스에 따르면, 첫째, 파두아 대학 강사 시절의 갈릴레오는 자연철학과 관련한 자료를 예수회 계열 신학자 양성학교인 Collegeo Romano의 교수들로부터 얻었는데, 그 자료 중에는 갈릴레오보다 먼저 등가속도 운동을 자유낙하에 적용하고 관계까지도 올바르게 도출했던 스페인의 Domingo de Soto에 대한 언급도 포함되어 있었다. 둘째, 당시 갈릴레오의 노트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언급이 그 누구보다도 가장 많았다. 셋째, 갈릴레오 스스로의 인식론적 언급에서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구절을 자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월러스는 뒤앙이 자신의 실증주의 노선의 선배격인 유명론자들만을 너무 강조함으로써 유명론자와 갈릴레오의 근본적인 차이를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단절론자와 유사한 면이 있지만, 그는 오히려 뒤앙보다도 더 강한 연속론으로 나아간다. 그가 보기에, 갈릴레오는 인식적 태도 면에서 실재론자인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분석의 가장 큰 동기는 갈릴레오가 유명론자와 달리 실재론적 태도를 가졌기 때문인데, 크롬비와 월러스는 그 원천을 밝혀내고자 한 것이다.

중세의 실재론자들

위와 같은 월러스의 연구 성과는 그 피나는 노력에 대해 높이 평가해줄 만 하지만, 그 결론에 대해서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갈릴레오의 실재론적 태도가 형성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가 결정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도를 넘어선 해석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월러스의 한 근거는 갈릴레오 초기 노트의 인용 수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아베로에스의 인용수가 가장 많다는 것인데, 이는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적과 토마스 아퀴나스 및 아베로에스의 주해가 가장 널리 읽혀졌다는 점에서 너무나 당연한 수치로 보인다. 한편 그 노트를 갈릴레오의 자연철학 강의 준비 노트라고 본다면, 당시 자연철학 강의는 아리스토텔레스 강의를 말한다는 점에서 당연한 수치였을 수 있다. 앞의 두 가지가 약간 지엽적인 반론이라면, 더 중요한 반론은 다음과 같다. 14세기이래 모든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었을 텐데, 16세기 갈릴레오에게서 나타난 태도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찾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 월러스는 실재론적 태도가 갈릴레오만의 것이 아니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내려오는 ‘비판적 실재론’의 전통이 끊이지 않고 살아있었으며, 갈릴레오가 그 전통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반박하려 할 것이다. 월러스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실재론자이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비판적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정신을 꼭 1277년에서 찾지 않더라도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비판적이었다고 말한다. 이에 더해 갈릴레오가 자료를 구했던 Collegeo Romano는 신학자를 양성하는 학교로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비판적이었던 것은 당연하다면서, 이와 대비하여 파두아(Padua) 대학 등 세속적인 대학의 교수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에 불과했다고까지 표현한다. 월러스의 이러한 주장은 중세 과학의 성과를 극단적인 유명론자들의 공으로만 돌렸던 뒤앙의 과장법을 완화시켜주는 효과는 있겠지만, 반대로 중세 실재론적인 토마스 아퀴나스주의자들이 가졌을 비판적 태도를 과장하는 면이 있으며, 16세기 파두아 대학을 비롯한 교회 외의 세속적인 영향을 깡그리 매도하는 해석이다. 레어드(W. R. Laird)에 따르면, 파두아 대학은 16세기에 처음으로 역학(mechanics) 강의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중요했다. 또한 그 강의가 새로이 발굴된 󰡔역학 문제들(Mechanical Problems)󰡕을 교재로 삼았다는 점, 그 책이 수학적 장인(mathematical practitioner)을 거쳐 전달됐다는 점, 마지막으로 그 강의를 자연철학 교수가 아닌 수학 교수들이 담당했다는 점은 당시의 세속적이고 실용적인 영향이 상당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월러스가 던진 질문, “갈릴레오의 실재론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 초점을 다시 맞출 필요가 있다. 월러스는 갈릴레오의 실재론이 어떠한 학파의 인식적 태도를 계승한 결과일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는데, 실재론이 꼭 그렇게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레어드의 연장선 상에서 갈릴레오가 수학적 장인의 전통에 일정정도 속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갈릴레오의 실재론은 그 전통이 다루었던 문제의 속성 때문에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수학적 장인이 다루는 문제가 기본적으로 실용적 또는 실제적인 목적을 띠고 있고 따라서 그들은 기본적으로 실재론적인 태도를 가지지 쉬울 것이란 것이다. 여기에 더해 나는 갈릴레오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대한 총체적인 대안을 구성하고 그것을 믿는 방식의 실재론을 위해서는 그에 대한 상당한 확신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즉, 이러한 실재론은 만족스러운 대안이 나오기 전까지는 힘들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기본적으로 실재론이란 태도는 혁신적이기보다는 보수적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물리적 실재론자였다. ... [그러나] 그들의 물리적 실재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우주론의 전폭적 수용과 구별될 수 없었다.” 실재론적 태도 하에서는 두 개의 대립하는 이론이 모두 수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재는 하나이고 그것을 올바르게 표상하는 것도 하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명론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초월해 자유로운 상상의 자유를 누리며 신선한 아이디어를 산출하는 동안, 실재론자들은 그 신선한 아이디어와 아리스토텔레스 체계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고 조화시켜야할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상상 속에서 운동학을 기초했던 머튼 칼리지의 브래드와딘이 자기 이론 내의 비일관되고 이질적인 요소들에 무심했던 반면, 유명론자로 분류될만한 뷰리당조차도 임페투스 이론을 물리적 실재로서 적용하려 할 때만은 상대적으로 일관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의 면모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실재론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외의 요소를 모두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는 상호적인 조절이 가능했으며 그러한 조절과 검사를 거친 후에는 새로운 아이디어는 조정된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의 일부로 편입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조절과 검사는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에 이루어진 각종 보완과 수정은 하나로 수합되어 정리되고 체계화되지 못한 채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대한 수정 보완 작업을 수행한 주석가들은 아마도 실재론적인 경향이 있었을 것이며, 월러스가 강조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주의 전통 또한 이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갈릴레오는 이러한 실재론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두 가지 주된 우주체계에 대한 대화󰡕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갈릴레오는 두 개의 완전한 체계를 놓고 비교하는 노선을 택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와 무관한 대안을 상정했다는 점에서, 그는 14세기 유명론자들의 전통에 서있다. 하지만, 그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는 실재론적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새로운 대안을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와 대등하게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완전한 체계로 만들었는데, 이는 그동안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던 조각들을 모아 일관된 새로운 체계로 정리했던 그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그러고 이러한 헌신은, 그가 그러한 조각들을 모으면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대한 완전한 대안체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확신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갈릴레오가 있기 위해서는 두가지가 필요했다. 첫째로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더욱더 강한 회의이며, 둘째로는 새로운 대안체계 구성을 위한 충분한 자원과 그에 대한 용이한 접근이다. 갈릴레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두 조건은 아직 완전히 충족되지 않았다.

또다른 회의주의와 새로운 자원의 발굴

뒤앙은 1277년의 금지령이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에 대한 회의를 불러옴으로써 과학에 새로운 상상력을 가져다준 중대한 사건이라 평가했는데, 그가 일관된 논지를 펼치고자 한다면 15세기 말부터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도 그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평가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 사건들이란 1492년 신대륙 발견으로 대표되는 지리상의 발견 및 고대문헌의 발굴과 인쇄술의 발명을 말하는데, 이 세 사건은 함께 어우러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상당한 회의를 불러옴과 동시에 과학적 상상을 위해 필요한 다양한 자원까지도 제공했기 때문이다. 과학적 상상력이라는 것이 무(無)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고대문헌 속의 아이디어들은 직접적이든 유비적이든 과학적 상상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277년의 금지령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인식론적 권위만을 끌어내렸다면, 이 세 사건은 그 내용적 권위까지도 끌어내렸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1277년의 금지령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내용을 수정하게 만들기보다는, 이성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게 만들었는데 반해, 지리상의 발견 등은 아리스토텔레스 및 고대인의 지식이 ‘틀렸다’는 것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고대인의 지식이 쉽사리 포기되진 않았지만, 당시 적어도 지도제작자들의 경우엔 고대인들보다 자신들이 훨씬 많이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620년 베이컨은 고대인들에 대해 “그들은 세계의 지역과 지방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 신세계 지역에 대해서는 믿을 만한 풍설은 물론 소문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 데모크리토스나 플라톤, 피타고라스가 여행을 한 지역도 어디 먼 곳이 아니라 그저 교외를 산책한 것 정도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광활한 지역이라도 누빈 것처럼 법석을 떨었다”고 조롱했다.

고대문헌의 발굴은 지리상의 발견 전부터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시작됐는데, 새롭게 번역되어 유통된 번역된 피타고라스, 플라톤 등의 저작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지적인 혼란을 초래함과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 유일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또한, 16세기 말에 완전히 번역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Almagest)󰡕나 아르키메데스의 저작들은 중세인들이 그 전까지 이룬 적이 없었던 지적 성과를 보여줌으로써, 각 분야에 새로운 문제풀이의 자원을 제공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오그래피아(Geographia)󰡕는 지리상의 탐험을 추동하기도 했는데, 그러나 일단 시작된 탐험은 그것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귀결을 낳기도 했다.

인쇄술은 지식의 보존과 전달 방법을 바꿈으로써, 고전에 대한 경외감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필사의 시대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류가 누적된다는 믿음이 있어왔지만, 인쇄의 시대에서는 시간에 따라 오류가 수정되는 시스템이 확립되었고, 지식의 교정과정은 역전되었다. 과거 희소했던 원전은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될 경외의 대상이었지만, 인쇄의 시대에서 원전의 보존은 인쇄가 대신 그리고 완벽하게 담당해줌으로써, 학자들의 임무는 원전의 보존보다는 새로움의 창조 쪽으로 무게중심이 바뀌었다. 지리상의 발견, 고대 문헌의 발굴, 인쇄술의 발명이 미친 영향을 세 가지로 요약하자면, 첫째,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일 권위의 훼손, 둘째, 새로운 문제풀이 자원의 획득, 셋째, 지식의 축적적 발전의 시스템 마련이다. 그 영향은 한 분야에만 귀속되지 않았다. 세 영향이 한꺼번에 일어났던 지도제작 분야에서 가장 즉각적이고 명백한 방식으로 드러났지만, 천문학을 비롯한 다른 분야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역학 분야의 경우는 어땠을까? 첫째, 플라톤의 확산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가 아닌 일반 이론체계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유일의 권위를 약화시켰을 것이다. 플라톤을 그대로 믿지는 않았더라도 총체적인 대안 구성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부추겼을 공산이 크다. 둘째, 아르키메데스의 저작과 그리스의 역학 저작의 보급으로 인해 역학 내에서 풍부한 문제풀이 자원이 확보되었다. 셋째, 인쇄술의 보급으로 고대의 저작뿐만 아니라 중세의 저작까지도 접근이 용이해졌다.

아르키메데스의 저작은 중세에도 그 번역본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번역의 질은 매우 낮은 수준이었고, 그것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1460년경 인문주의자에 의해 재번역되었고, 1503년에는 최초의 인쇄본이 출간됐다. 아르키메데스에 대한 이해는 조금씩 성장했고, 그 번역의 질도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조금씩 나아졌다. 이러한 교정과정은 인쇄술의 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만족스런 번역본은 1558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될 수 있었는데, 이때부터 아르키메데스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했던 󰡔역학 문제들󰡕는 작자 미상의 그리스의 역학 책으로서, ‘원의 신기한 특성’을 기본원리로 삼아 저울(balance)와 지레(lever)를 비롯해 도르래, 쐐기, (배의) 노와 키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이 책은 16세기 초 인문주의 철학들에 의해 최초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는데, 점차 수학적 장인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1560년대에는 파두아 대학에 처음으로 개설된 역학 강의의 교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592년 파두아 대학의 수학교수로 채용된 갈릴레오 또한 이 책을 교재로 역학을 강의했다.

인쇄술로 인해 접근이 용이해진 것은 고대 문헌만이 아니었다. 인쇄술의 혜택은 중세 저작들에게도 해당됐다. 중세에 산만하고 개별적으로 이뤄지던 연구작업 또한 출판을 통해 접근이 용이해졌으며,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같이 놓고 비교하는 것이 전보다 훨씬 수월해진 것이다. 임페투스 이론과 머튼 방법도 15, 16세기의 변형을 거쳐 갈릴레오에게 전해졌다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으며,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던 사고실험 또한 갈릴레오에게 익숙한 것이었을 것이다.

즉, 갈릴레오는 위의 모든 것에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역학 내의 자원뿐만 아니라, 역학 밖의 자원도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데, 그중 천문학계에서 유통되던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존재는 그 자체로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갈릴레오는 각각을 조작해보고 서로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대한 총체적인 대안을 구성할 수 있다는 믿음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갈릴레오에게 새로운 역학의 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의 원동력이 되었다.

나가며

과학의 변화를 위해 회의가 필요하다는 뒤앙의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1277년의 금지령만이 중요한 계기는 아니었다. 15, 16세기에 걸친 지리상의 발견과 고대 문헌의 발굴, 인쇄술의 발명도 그만큼 또는 그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다. 과학의 변화를 위해 상상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지적 또한 타당하다. 그러나 상상력은 무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상상력은 다양한 자원을 유비적으로 끌어들이는 활동과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유명론자들의 반실재론적 경향 속에서 나타난 사고 훈련만큼이나 고대 문헌에 수록된 다양한 자원을 획득하는 일 또한 상상력의 증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반실재론적이냐 실재론적이냐와 같은 인식론적 태도는 과학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반실재론적 태도는, 유명론자들에서 보았듯이 기존의 체계에 얽매이지 않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이 경향은 그 결과물을 최종적으로 밀고 나가도록 하는 추진력을 뺏곤 한다. 반면, 실재론적 태도는 기본적으로 기존의 체계에 안주하도록 하는 경향을 심어준다. 대신 유일한 실재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각종 이질적인 요소들을 조화롭게 만들려는 노력을 하게끔 한다. 그리고, 새로운 대안을 믿었을 경우에는, 갖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끝까지 밀고나가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인식론적 태도가 사회적 활동과 과학활동에 영향을 준다면, 반대로 사회적 활동이나 과학활동의 결과물 또한 인식론적 태도에 영향을 준다. 1277년 금지령은 반실재론적 태도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고대 문헌 속에 나타난 각종 대안의 난립 또한 기존 체계에 대한 회의주의를 확산시켰다. 그러나, 이질적인 자원들이라도 충분한 수가 축적된다면, 그것을 이용해 대안적인 체계를 구성함으로써 새로운 대안에 대한 실재론자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살았던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대한 총체적인 대안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갈릴레오의 개인적인 성향에 의한 것만이 아닌, 역사적 조건이 만들어 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부조화스럽게 붙어있었던 이질적인 조각들과 유명론자들의 기발한 상상의 조각들과 사고실험이라는 강력한 도구, 그리고 15, 16세기에 발굴된 새로운 문제풀이의 자원들 모두가 그 조건을 형성했다. 결론적으로, 스콜라 철학이 없이는 역학혁명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시간이 필요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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