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내 용어는 어떻게 경험적 의미를 획득하는가?
- 과학철학통론 I 기말보고서
- 제목: 이론 내 용어는 어떻게 경험적 의미를 획득하는가?: 논리경험주의의 견해에 대한 비판과 대안
- 제출일: 2005.6.14.
- 작성자: 정동욱
- 첨부파일: media:tp_ps1_2005.hwp
머리말
과학이론에는 '힘', '전자', 'ψ', '유전자'와 같은 '이론적' 용어 또는 기호가 자주 등장한다. 만약 이러한 용어 또는 기호가 경험세계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과학이론은 경험적 토대를 상실한 상상의 체계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현상에 대한 과학이론의 설명력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20세기 중반까지 과학철학계의 주류를 차지했던 논리경험주의자들 또한 이 문제를 중요한 문제로 인식했다. 그들은 이론적 용어 스스로는 경험적 의미를 획득할 수 없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경험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관찰적 용어와의 '대응규칙'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경험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처음에는 '대응규칙'이 '명시적 정의'와 같은 방식으로 기능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논리경험주의 내부의 논의 끝에 '대응규칙'은 이론적 용어에 부분적 해석만을 주는 것으로 상당히 완화되었다.
논리경험주의 내부의 합의와는 반대로, 급진적인 비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단지 관찰용어과 이론용어의 구분이 자의적일 수 있다는 내부적 고찰을 넘어서, 관찰용어와 이론용어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외부의 비판이 제기되었으며(Putnam 1962), 의미를 이론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에 대한 전체론적인 견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쿤 1962). 한편, 이론을 진술들의 집합으로 본 논리경험주의의 핵심전제 자체를 문제삼으며 이론을 진술들로 환원할 수 없는 모형들의 집합으로 보아야 한다는 비판도 힘있게 제기되었다(Suppe 1977, Giere 1988).
특히 이러한 급진적인 비판과정에서, '이론적 용어는 관찰용어와의 대응을 통해 경험적 의미를 획득한다'라는 기존의 관념은 산산조각이 난다. 그럼에도 이론이 상상의 체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경험세계와 연결되어야 했다. 따라서, 논리경험주의자들의 표준적 견해에 대한 급진적 비판자들 또한 이에 대한 대안적 해결방식을 내놓아야 했다. 그러나 이 비판자들의 대안은 기존의 '용어와 용어 사이의 대응' 식의 구문론적 해결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통찰을 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첫째, 이론적 용어가 경험적 의미를 획득하는 방식에 대한 논리경험주의자들의 구문론적 관점을 정리하고, 둘째, 이들에 대한 비판지점을 정리한 후, 셋째, 대안적 견해들을 나의 입장에 맞추어 재정식화하고자 한다.
구문론적 관점
논리경험주의의 배경
20세기의 중반까지 과학철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논리경험주의자들은 인식론적으로는 경험주의를 계승하면서, 현대 기호논리학을 철학적 작업의 주된 도구로 삼았다.
이들은 문제를 공식화하는 과정에서 수리논리학의 전문적 기술들에 지나치게 의존했는데, 이 때문에 과학철학은 '과학의 논리'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이들의 과학철학은 과학의 '내용'보다는 '형식'을 다루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개개의 법칙보다는 법칙임을 주장하는 모든 가능한 진술의 논리적 구조를, 개개의 과학이론보다는 모든 가능한 과학 이론의 논리적 체계를 다루었다. 그리고 이론, 설명, 법칙 등의 본질적 특성들을 그것의 형식 또는 그것의 구조적 특징들에 의해 순전히 논리적인 용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하였다(셰피어 1966, pp. 69-72).
한편, 이들은 '경험주의자'로서 과학 이론 안에 있는 용어들의 의미와 주장들의 수용가능성이 철저히 경험에 근거를 두어야 하며, 그 근거를 확보하는 방식 또한 형식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보았다(셰피어 1966, pp. 73).
부분적으로 해석된 공리적 계산체계로서의 이론
위와 같은 관점 하에서 이들은 처음으로 과학 이론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을 시도했는데, 이들의 최종적인 표준적 견해에 따르면, 과학이론이란 그 안에서 이론용어들이 대응규칙에 의해 부분적으로 해석된 언어들의 공리적 계산체계로 간주된다. 즉, 이론이란 경험으로부터 부분적으로 의미가 해석된, 어떤 공리들과 그로부터 연역된 이론적 진술들로 구성된 언어적 존재자이다(이중원 1997, p. 131).
수피는 이들의 견해를 아래와 같이 재구성한다(이중원 1997, pp. 131-132).
- 이론은 일계언어 L에 의거하여 공식화된다. 그리고 L에 의해 정의된 계산규칙 K가 존재한다.
- (관찰적/이론적 구분) 언어 L은 관찰언어 LO와 이론언어 LT로 나뉘며, 계산규칙 K도 관찰언어에 관한 계산규칙 KO와 이론언어에 관한 계산규칙 KT로 나뉜다. 언어 L의 비논리적 용어들(혹은 기술적인 원초상수들)도 관찰용어들 VO와 이론용어들 VT의 두 부류로 구분된다. 여기서 관찰언어는 어떤 양화사나 양상성 그리고 이론용어도 포함하지 않고 관찰용어만을 포함하며, 계산규칙 KO를 따른다. 이론언어는 관찰용어를 포함하지 않으며 계산규칙 KT를 따른다.
- (부분적 해석) 이론용어들과 이를 포함하는 이론문장들에 대한 부분적 해석은, 이론적 가설들 T와 대응규칙 C에 의해 제공된다. 여기서 이론적 가설들은 오직 이론용어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대응규칙은 유한수의 규칙들의 집합으로 구성되는데, 각각의 규칙은 이론용어와 관찰용어를 적어도 하나 포함해야 한다. (이를 포함한 문장을 흔히 혼합문장이라 부른다.) 그리고 C는 관찰용어나 이론용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어떤 비논리적 용어도 포함하지 않는다.
- 언어 L, 이론적 가설들의 연언 T, 그리고 대응규칙 C에 기초하여, 과학이론은 T와 C의 연언으로 구성되며, TC로 표시된다.
요약하면 과학이론이란 이론적 진술들(T)와 이 진술들의 경험적 의미를 규정하는 대응규칙(C)과의 연언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관찰언어의 진술들은 직접적으로 관찰가능한 대상을 지시함으로써 그 의미를 '직접적이고 완전하게' 획득한다. 그러나 이론언어에 대해서는 "완전한 해석을 요구할 수 없으며, 대응규칙에 의해 간접적이고 부분적인 해석만이 주어질 수 있을 뿐이다(#Carnap 1956, pp. 46-47)." 즉, 공리적 계산체계를 구성하는 이론적 진술들은 그 자체로는 경험적 내용을 획득할 통로가 없기 때문에, 이론적 진술들은 그 안의 이론적 용어들을 의미를 자체적으로 획득한 관찰적 용어와 대응시킴으로써만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로써 경험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부분적 해석과 이론적 용어의 지위
애초에 논리경험주의자들은 대응규칙이 명시적 정의(explicit definition)와 같은 방식이어야 한다고 기대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명시적 정의에 기초한 대응규칙은 첫째, 이론적 용어를 정의하거나, 둘째, 이론적 용어의 인지적 유의미성(cognitive significance)을 보증하거나, 셋째, 이론을 현상에 적용하기 위해 용인가능한 실험과정을 명세하는 기능을 제공할 것이라 생각했다(#Suppe 1977, pp. 16-17). 그러나, 관찰적 용어에 기반한 이론적 용어의 명시적 정의는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1] 대응규칙의 후보로서 카르납의 환원문장(reduction sentence) 등의 대안이 제시되었지만 일반적으로 채택되기엔 무리가 있었다. 결국, 대응규칙은 이론적 용어의 관찰적 용어에 의한 (어떠한) 부분적 해석으로 합의를 보게 된다.
여기서 부분적 해석(partial interpretation)이란 무엇이며 그 함의는 무엇인가? 수피가 정리한 논리경험주의(헴펠)의 수정된 최종견해에 따르면, 이론적 용어는 더 이상 (명시적으로) 정의되어야 할 대상도, 인지적 유의미성을 보증받아야 할 대상도 아니게 된다. 이론 내의 용어들은 대응규칙을 통해 관찰용어와 연결됨으로써 (어떤 방식으로든) 부분적으로 해석되기만 하면 된다. 그 결과, 애초에 기대했던 대응규칙의 기능 중에서는 셋째 기능 정도만이 남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Suppe 1977, pp. 23-53]]).
그렇다면 이론적 용어의 지위와 그 의미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카르납의 아래 진술은 그 대표적인 방식이다.
- 만약 우리가 현대 물리학자에게 그의 계산에 쓰이는 기호 가 무슨 의미인지 답하길 요구한 후, 그가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에 놀란다면, 우리는 그 상황이 이미 고전 물리학에서도 같았음을 깨달아야 한다. 맥스웰 방정식의 기호 E가 무슨 의미인지 답하지 못하는 물리학자가 있다. 아마도 그는 답을 거절하지 않기 위해, E는 전기장 벡터를 지시한다고 말할 것이다. 확실히, 이 진술은 의미론적 규칙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그 진술은 우리에게 이론을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된다. 그 진술은 단지 기호로 이루어진 계산식 내의 기호를 언어로 이루어진 계산식 내의 언어표현과 대응시킨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E에 대한 해석을 요구하는 것을 적법하다. 그러나 그것은 E와 기초기호를 연결하는 식과 함께 기초기호를 지시하는 의미론적 규칙에 의해 간접적으로 주어질 수 있다. 이 해석은 우리에게 예측을 위한 도출과정에 E가 포함된 법칙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표현, 진술, 또는 이론에 대한 "이해"가 알려진 사실의 기술이나 새로운 사실의 예측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능력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E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다. "직관적인 이해" 또는 E의 관찰가능한 속성으로의 번역은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현대 물리학자의 상황도 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는 관찰에 의한 검증을 위한 예측을 도출하기 위해 기호 를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 물리학자는, 그것을 일상언어로 번역하지 못하더라도, 기호 와 양자역학의 법칙을 이해하고 있다(#Carnap 1939, p. 12).
이러한 방식에 따르면, 이론적 용어는 간접적이고 불완전하더라도 경험적 의미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귀결은 논리경험주의의 이상과 점점 멀어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처럼 약화된 대응규칙에 따르면, 관찰적 진술이 참이라 하더라도 이론적 진술은 참을 보장받을 수가 없어진다. 이는 어쩌면 가설연역방법에 따른 당연한 문제이겠지만, 대응규칙을 명시적 정의로 보려고 했던 단계에서는 그 문제가 가려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2]
이렇듯 이론적 진술의 진리값을 보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론적 진술 및 그 안의 용어들의 지위를 실재론적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점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논점이 이론적 용어의 경험적 의미 획득 방식에 대한 의심을 고조시켰다는 점은 확실한 듯하다.
구문론적 관점에 대한 비판들
과학이론에 대한 구문론적 관점은 많은 비판을 받아왔지만, 그 중 이론 내 용어의 의미와 관련된 대표적인 비판들은 아래와 같다.
첫째, 경험주의적 측면에 대한 비판이다. 구문론적 관점은 과학이론의 비논리적 용어들을 이론적 용어와 관찰적 용어로 엄격히 구분한 기초 위에서 논변을 전개하고 있는데, 과학언어에 대한 이같은 구분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흔히 그 구분의 기준으로 "직접적인 관찰가능성" 개념이 제시되었지만, 이 기준 자체가 맥락의존적이거나 (존재론적으로) 매우 임의적이어서 구분을 위한 일반적인 기준으로 간주되기 곤란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구분이 아예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명확한 구획 기준이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나아가 관찰적/이론적 구분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비판들도 제기되었다. "관찰의 이론적재성" 주장에 따르면, 서로 다른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동일한 현상을 볼 때에도 서로 다른 관찰을 하게 되어 관찰의 무오류성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고, 의미도 이론 종속적이어서 오히려 이론의 변화가 의미의 변화를 수반하게 된다. 이는 논리경험주의자들에게 상당히 치명적인 비판이 되는데, 이론의 입증 또는 반증의 객관적 토대이며 용어들의 의미에 대한 확고한 토대로 여겼던 관찰 및 관찰진술이 더 이상 기대했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관찰의 역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 외에도 관련된 비판이 다수 존재한다. 이러한 비판 지점은 의미에 대한 전체론적 견해의 배경이 되었다.
둘째, 논리주의적 측면에 대한 비판이다. 진술들의 집합 또는 언어적 공리체계로서의 이론의 특성들을 현실 과학이론에 적용하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보다 세분화시켜 말하면, 첫째, 이론과 현상을 연결시키는 과정이 현실 과학이론에서 매우 복잡한 절차들과 단계들을 거쳐 이루어지고 있어서 단순히 언어적 정의(혹은 대응) 수준에서 그 연결관계를 규명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으며, 둘째, 현실과학에서 과학이론을 공식화하는 방식이 다양하게 존재하여 과학이론을 (연역적으로 구성된) 어떤 하나의 언어적 공리체계로 규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한마디로 구문론적 관점이 이론과 현상 사이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함으로써, 이론과 현상을 연결하는 과정의 구조적 특성들을 매우 모호하게 한다는 비판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지점들은 곧바로 이론에 대한 의미론적 관점이 형성되는 배경이 되었다.
관찰적 용어는 존재하는가?
관찰적/이론적 구분에 대해, 퍼트남은 아래와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 이분법을 야기했던 ('어떻게 이론적 용어를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물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이분법 제안의 기본적 근거 잘못되었다: 사실, 과학에서의 정당화는 양방향 (관찰→이론/이론→관찰) 어느방향으로도 진행된다. 더구나, 관찰 보고(observation report)의 관념이 과학철학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함에도, 그 보고들은 그 보고 안에 있는 용어이든 없는 용어이든 그것의 기초위에 규정될 수 없다.
- 위의 물음이 존재하든, 근거가 옳든 상관없이, 이분법 자체가 불가능하다.
위의 (3)번째 제기의 근거로서, 퍼트남은 관찰적 용어만으로 관찰불가능한 대상을 지시할 수 있음을 얘기한다. 그에 따르면, 3살짜리 아이도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동화를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과학 내에서도 '붉은'과 같은 관찰적 용어를 관찰불가능한 대상 '입자'에 적용하여 '붉은 빛은 붉은 입자로 구성된다'와 같은 진술을 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즉, 관찰적 용어가 관찰가능한 대상만을 지시해야 한다면, 관찰적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만약 이러한 기준(관찰적 용어는 관찰가능한 대상만을 지시해야 한다)을 포기한다면, 세계의 관찰불가능한 부분에 대한 이론이 '이론적 용어(=관찰불가능 용어)'를 포함해야 한다거나 '어떻게 관찰불가능(이론적) 용어를 지시하는 용어를 제시할 것인가' 하는 일반적 질문이 존재한다는 것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다.
이러한 논의에서, 대상 인식 수준에서는 관찰가능한/관찰불가능한 대상 사이의 구분이 가능할 수 있지만, 용어 수준에서는 그러한 구분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논증과 함께, 퍼트남은 "이론적 용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해 어려움을 발견한 철학자라면 '붉은', '더 작은'이란 용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똑같이 어려움을 발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흔히, 관찰적 진술이라면, "이것은 무엇이다" 또는 "이것은 어떠하다"와 같은 진술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것은 물이다", "이것은 딱딱하다"와 같은 진술이 가능할 텐데, 이러한 진술은 엄밀히 볼 때 현상 그 자체와는 구분된다. 또한, 논리경험주의자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그 의미를 '직접적이고 완전하게' 획득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위의 진술의 진리치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물' 또는 '딱딱하다'에 대해 '무엇인가' 알아야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한편, '물'이란 용어는 지금 가리키고 있는 그 개별적인 '물'과는 명백히 인식론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렇게 볼 때, '물', '딱딱하다' 등의 용어들 또한 소위 이론적 용어라 불리는 용어 못지 않게 추상적이라 할 수 있으며, 위의 진술 또한 화자가 이미 소유하고 있던 개념체계 하에서만 성립되는 진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추상적인 용어 없이는 관찰진술이 불가능한가? 이러한 용어 없이는 고유명사 또는 대명사들로만 구성된 진술들, 즉 '이는 정동욱이다', '이것은 이것이다' 등과 같은 진술밖에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들은 오히려 의미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대상에 우리가 이미 소유한 개념체계로 분류를 하거나 속성을 부여하거나 하는 방법으로 관찰을 진술할 수밖에 없다. 물론 언어가 아닌 방식으로 관찰을 기록한다면 조금 다른 문제이겠지만, 그 또한 상황이 질적으로 다를 것이라 예상하진 않고 있다.
개념체계 또는 분류체계의 형성: '유사관계'의 인지 훈련을 통해
그러나, 그렇다면 이러한 개념체계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쿤은 비트겐슈타인에서 그 이유를 찾으며 일정한 해답을 제시한다.
- 비트겐슈타인은 '의자'니 '잎사귀'니 '게임'이니 하는 말들을 애매하지 않게 그리고 논쟁거리가 되지 않게 적용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
- 이러한 물음은 아주 오래된 것이며 대체로 우리는, 의식적이든 또는 직감적이든 간에, 의자니 잎사귀니 게임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대답하여 왔다. 말하자면 오로지 게임들만이 공통으로 지니는 어떤 속성들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주어지고 우리가 그것을 적용하는 세계의 유형이 정해지는 경우, 그런 공통의 특성은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지었다. 다수의 게임이나 의자나 나뭇잎에 공유되는 어떤 속성들을 논의하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용어를 어떻게 적용하는가를 익히는 데 도움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분류층의 모든 구성 요소들에 대해서 동시에 모조리 그리고 거기에만 유일하게 동시에 적용할 수 있는 특성의 묶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전에는 관찰되지 않았던 어떤 활동에 직면하여 우리는 '게임'이란 용어를 적용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이미 그런 이름을 부르도록 배웠던 많은 활동에 아주 가깝게 '가족처럼 닮음(family resemblance)'을 지녔기 때문이다. 요컨대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게임, 의자, 잎사귀는 자연의 가족에 해당하는 것으로, 각 족은 서로 포개지고 교차되는 유사성이 얽혀 구성된다. 이러한 조직망의 존재는 상응하는 대상이나 활동을 확인하는 것에 우리가 성공을 거두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준다. 우리가 이름 붙인 가족들이 포개지고 점진적으로 서로 병합되기만 한다면 ― 즉 다른 자연의 족들이 존재하지만 않는다면 ― 확인과 명명에서의 우리의 성공은 우리가 쓰는 족 이름의 각각에 상응하는 공통적 특성에 대한 증거를 제공할 것이다.
한편, 호이닝겐-후엔(Hoyningen-Huene, P.)은 위에서 제안된 '유사관계'에 대한 학습과정이 인지, 언어의 사용, 분류체계의 형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쿤의 입장을 재정리하면서 보여준다.
- 세계 구성에 대해 배워야 할 핵심적 요소는 각 세계 속에서 서로 비슷한 것으로 분류되는 대상이나 상황들 사이에 성립하는 유사 관계이다. 이 유사 관계들에 대한 학습은 각 유사 집합의 전형적인 사례들을 지시하고 그것들을 그 집합에 소속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덧붙여서, 이웃하는 유사집합의 구성원들도 지시하고 그들은 원래의 집합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이 반드시 지적되어야 한다.
- 이와 같은 유사관계는 지각뿐만 아니라 일부 경험적 개념들과 현상의 세계에서 각 개념이 적용되는 영역을 구성하는 데 동시에 사용된다. 쿤의 예를 사용하면, 어떤 사람이 오리와 거위 그리고 백조 사이에 성립하는 유사점과 차이점을 학습할 때, 세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첫째, 그 사람은 각 동물이 눈앞에 등장할 때, 분간되지 않은 물새로서가 아니라, 오리와 거위와 백조로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자신의 지각을 훈련시킨다. 둘째, 그 사람이 유사 집합들의 지시어들, 즉 '오리', '거위', '백조' 같은 용어들을 동시에 배운다면, 그는 그 개념들의 사용 방법도 배우게 된다. 마지막으로 물새의 영역에 해당되는 현상 세계의 부분이 어떤 구조, 즉 소위 분류 체계를 가지게 된다. 유사 관계는 그것이 가진 삼중의 기능으로 말미암아 쿤의 세계 구성 이론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일상적인 인지, 언어, 분류체계의 형성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한 이유는, 이러한 상황이 과학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물리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이론의 중요한 법칙들을 배우지만, 그것이 전부도 아니며 핵심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물리학의 전형적인 적용사례, 즉 예제들을 푸는 과정에서 각 문제들 사이의 유사관계를 인지하고, 계산에 쓰이는 용어와 기호들의 사용법을 배우며, 물리학자 공동체가 공유하는 분류체계를 학습해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 개념이 적용되는 현상 세계의 영역은 유사 관계를 통해서 그 구조를 획득하게 된다."
유사관계의 인지를 통한 경험적 세계와의 연결
그런데, "쿤은 매우 자주 앞서 설명한 유사관계를 직접적인 관계로 서술한다. 이 표현으로 그가 의미하는 바는, 그 관계들에 대한 학습이 각 유사집합에 대한 정의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쿤이 '이론적 용어'의 지위를 어떻게 보았는지 말하는 부분에서 더 명확히 드러날 수 있다. 쿤은 '이론적 용어'가 그것으로 이루어진 진술들로부터 도출된 관찰가능한 귀결로부터 경험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만이 유일한 경로는 아님을 아래의 근거를 통해 주장한다.
- 과학에서 나타나는 형식화들은 이론적 용어들을 제거해 가는 연역 과정에 끼어들 필요 없이 제일 윗 부분에서도 자연과 닿아 있다. 측정 장치의 눈금들에 대한 예측을 산출해 낼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조작들을 시작할 수 있기 전에, 과학자는, 예를 들어, 진동하는 현에 적용되는 의 특정한 형태나 자기장 안에 있는 헬륨 원자에 적용되는 슈뢰딩거 방정식의 특정한 형태를 적어 넣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그가 채택하는 절차가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순수하게 구문론적일 수 없다. … 우선 과학자들은 기호적 일반화의 어떤 특정한 변형이 어떤 문제에 적용되어야 하는지 말할 수 있는 기준을 여전히 필요로 할 것이고, 이 기준들은 기초 어휘로부터 이론적 용어로 의미를 전달해 주는 것으로 이야기되는 상관규칙과 마찬가지로 경험적 내용의 전달자가 될 것이다. 게다가 특정한 기호적 형태들의 어떠한 연언도, 한 과학자 집단이 기호적 일반화들의 적용 방법에 대해 알고 있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괄하지 못할 것이다. 새로운 문제에 직면해서 그들은 자주 그것에 적합한 특정한 기호적 표현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이곤 하는데, 이는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이전에 그 특정한 표현을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쿤은 이론적 용어가 언어적인 대응관계를 통해 경험적 내용을 획득하기도 하지만, 사전에 '새로운 문제에 적합한 특수한 공식을 식별해내는 비언어적이며 비형식적인 기준' 또한 경험적 내용을 '직접적으로' 전달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상언어적인 측면에서 또는 인지적 측면에서 나름의 정당화가 가능하다.
맨 처음 얘기했던 '이것은 물이다' 또는 '우리는 게임을 하고 있다' 등의 진술을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조금씩은 다른) 물을 만나고 새로운 게임을 접하게 마련이다. 그 때마다 우리는 그 대상에 또는 그 상황에 적용할 용어를 식별해야 하며, 그 작업은 대부분의 경우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새롭게 접한 좀더 복잡한 상황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것은 파랗고 짭짤한 물이다' 식으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스키마를 적절히 선별하여 진술을 구성할 수 있다. 이러한 진술들의 경험적 내용은 어디서 오는가? 쿤 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접한 상황에 적합한 특수한 용어를 식별해내는 기준에서 온다. 물론 그 기준은 '유사관계'의 인지일 것이다.
이론적 용어와 관찰적 용어의 구분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일상적 용어의 경험적 내용의 획득과정은 이론적 또는 이론 내 용어의 경험적 내용의 획득과정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쿤이 강조하기를, "특수한 공식들은 보통 실험이 수행되기 전에 그럴 듯한 것으로 수용되거나 그럴 듯하지 않은 것으로 거부된다. 게다가 상당한 빈도로 그 과학자 집단의 판단은 옳은 것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논의에서 드러난 점을 명확히 하는 데, 쿤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 도움이 될 것이다.
- 언어의 습득은 자연에 대한 지식을 동반한다. 사례들이 보여 주는 것이 '운동'이나 '단위전지' 혹은 '에너지 요소' 등과 같은 용어들을 배우는 과정의 일부라면,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언어와 세계에 대한 지식 둘 다일 것이다. 한편으로 학생은 이 용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들을 자연에 부착하는 데 유관한 특징들이 무엇인지, 자기 모순을 범하지 않고서는 그것들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등에 배운다. 다른 한편으로 학생은 세계를 채우고 있는 사물들의 범주가 무엇인지, 그 범주들의 현저한 특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에게 허용되는 행동과 그렇지 못한 행동에 관한 것을 배운다. 많은 언어 학습에서, 이 두 부류의 지식 ― 낱말들에 대한 지식과 자연에 대한 지식 ― 은 함께 습득된다. 그것은 실은 두 부류의 지식이 결코 아니며, 어떤 언어가 제공하는 한 동전의 양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논의가 경험적 실험을 통한 검증절차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과학의 필수조건이다. 실제로 위의 '이것은 물이다'와 같은 진술 또한 틀릴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맞겠지만 어떤 경우, 먹어봤더니(또는 시약을 떨어뜨려봤더니) 실제로는 알콜로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적 검증절차는 분명 그 진술의 경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상당히 큰 역할을 하지만, 확실성을 준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험적 실험절차는 무한히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며, 그에 대한 의심은 끊임없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론 내의 용어가 경험적 내용을 획득하는 과정은 두 가지 방향이 있을 수 있으며, 둘은 상호보완적인 것 같다.
이론적 모형과 경험세계 사이의 유사관계
카트라이트(Cartwright, N.)는 물리학의 법칙은 엄밀히 볼 때 모두 거짓이라면서, 진리임과 설명력은 서로 별개라는 주장을 했다. 상술하면, 물리학의 법칙들은 경험세계에 대한 경험적 일반화가 아니며, 엄밀히 볼 때 이상화된 추상적 세계 속에서만 성립 가능한 법칙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의 법칙들은 경험세계에 대한 설명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이론이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하는 것은 이상화된 추상적 모형이다. 이는 사소하게 참인데, 그 모형은 그것이 기반한 이론을 만족하도록 구성된 모형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뉴턴의 이론은 자신의 이론을 만족하는 두 개의 질점으로 이루어진 고립된 중력계, 즉 두 질점이 공통의 중심을 두고 원운동하는 상황을 하나의 모형으로 구축할 수 있는데, 뉴턴의 이론이 이러한 계를 설명한다는 것은 사소하게 참이다. 그런데, 그렇게 구축된 모형이 쌍둥이별의 운동을 설명한다고 하면 이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수피는 과학이론을 통한 설명과 예측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식론적 특성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가 보기에 이론이 적용되는 현상자료는 현상 그 자체가 아니다. 이론의 적용에 관련이 없다고 판단되는 여러 변수들은 무시되며, 결국 현상은 이상화한 형태로 현상자료에 반영된다. 앞서의 절에서도 계속 언급되었지만, 이러한 현상자료 또는 관찰진술은 이론 적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피는 이러한 특성을 반영하여, 실제 현상과 현상자료를 인식론적으로 엄격히 구분하였다. 그는 후자를 "견고한 자료"라고 불렀는데, 이는 실제의 관측결과들을 특정한 변수들의 형태로 추상화하고 이상화한 간접적 자료들이다. 실제로 측정이 이루어져 현상이 이상적인 조건하에서 발생하는 않는 경우에도, 문제의 이론은 (일부의 조건들을 무시하는) 반사실적 가정의 방식으로 문제의 현상들을 설명한다.
예를 들면, 뉴턴의 이론으로 쌍둥이별의 운동을 설명하는 일은 먼저 쌍둥이별에 대한 관측하여, 그것을 견고한 자료로 변경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두 별이 한 점을 중심으로 어떠한 반지름에 어떠한 속도로 원운동하고 있다"고 하는 진술 또는 시간, 속도, 위치에 관한 표, 그래프 또는 그에 상응하는 초상모형 등이 바로 쌍둥이별에 대한 '견고한 자료'의 한 예이다. 이제, 뉴턴의 이론은 두 개의 질점으로 이루어진 고립된 중력계 모형을 구축할 수 있고, 이 모형과 앞서의 견고한 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설명을 완성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설명은 어떤 면에서 경험세계에 대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는가? 기어리는 "이론적 모형이 어떤 측면에서 어느 정도로 세계와 유사하다"라는 형식의 '이론적 가설'을 통해 모형과 경험세계와의 연결을 명시적으로 표현하기를 제안한다. 이러한 이론적 가설이 유의미하다면 이 설명은 일단 경험세계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유사관계를 평가할 것인가?
기어리의 경우 견고한 자료와 실제 현상의 구분이 정확히 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이 구분법을 계속 이용하는 것이 유효해보인다. 만약 기어리의 이론적 가설이 '위치와 속도의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유사함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이 이론적 가설의 평가는 모형과 '견고한 자료' 사이의 정량적인 비교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어리가 이론적 가설을 통해 진정으로 의도한 바는 모형과 실제 세계 사이의 유사관계로 보인다. 그렇다면 '위치와 속도의 측면에서' '견고한 자료'와 실제 현상 사이의 유사성 또한 보장받을 필요가 있는데, 이는 다소 사소하게 보장된다. 왜냐하면 애초에 견고한 자료라는 것이 곧 실제 현상에서 '위치와 속도의 측면'만을 뽑아냈다고 믿어지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후자의 유사관계의 보장은 전자보다 사전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위의 해명은 실제 인식과정과 순서가 뒤바뀌었다. 합리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해보자.
우리는 경험세계에 대해 그 자체로 보기보다는 항상 이해하고 싶은 측면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견고한 자료'가 구성되고 이론이 선택되며 '이론적 모형'이 만들어진다. 이미 이 과정에서 경험세계는 '견고한 자료' 및 '이론적 모형'과 선택된 '측면'에서 유사하다는 것이 보장된다. 왜냐하면 그러하도록 선택하고 구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견고한 자료와 이론적 모형을 정말로 제대로 선택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보통 그 둘을 제대로 선택했다면 그 둘은 정량적으로도 작은 차이를 보일 것이라고 기대하곤 한다. 따라서, 견고한 자료와 이론적 모형을 정량적으로 비교하는 작업을 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 모형과 경험세계가 '어느 정도'로 유사한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정에서 이론 내 용어는 어떻게 경험적 의미를 획득하는가? 이론에 대한 의미론적 관점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은 대부분 모형과 경험세계의 일정한 측면이 유사관계에 의해 '통째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는 듯하다. 그리고 모형 내 구성요소와 경험세계의 구성요소들 사이의 개별적인 대응은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인지적인 특성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데, 우리는 사물을 인지할 때, 구성요소들을 분석함으로써 인식하지 않는다. 우리가 "_"과 같은 상징(icon)을 보고 얼굴이라고 인지하는 것은 각 구성요소를 뜯어봄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전체를 한꺼번에 봄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글자들을 볼 때에도, 우리는 이 글자들을 자음과 모음을 분석해가며 읽지 않는다. 또는 점들을 따라가며 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글자 전체를 통째로 보거나 더 나아가 낱말 단위로 보며, 심지어는 문장, 문단 단위로 보기까지 한다. 이러한 예는 수도 없이 많으며, 이러한 면은 패턴을 인지하는 고유한 특성으로 볼 만하다. 즉, 우리는 세계를 인식할 때, 세계의 구성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기보다는 통째로 모형화하여 이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론 내의 용어들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경험적 의미를 부여받는다고 할 수 있다.
'견고한 자료'와 '이론적 모형' 사이의 공진화
세계의 어떠한 측면에 대해 보기 위한 '참된' 이론과 그것의 표준적인 예제들이 존재한다면, '견고한 자료'와 '이론적 모형'의 비교는 '이론적 모형'을 기준으로 얼마나 제대로 측정했는지를 판단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학생들이 과학을 학습해가는 과정에서 수행하는 실험은 대부분 이러한 종류의 실험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실제로 수행하는 실험은 그와 같은 실험이 아니다. 실제 현장에서 수행하는 실험에서 과학자는 '견고한 자료'와 '이론적 모형' 모두를 신뢰하면서도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표준 온도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일단 온도계는 "어떤 물질의 부피는 온도의 증가에 따라 늘어난다"는 가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가설의 검증을 위한 '견고한 자료'는 우리의 '더 뜨겁다' 혹은 '더 차갑다'라는 매우 정성적인 감각 자료에 의존한다. 최초의 온도계는 이러한 정성적인 '견고한 자료'와의 정합성을 만족하는 장치로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각각의 온도계는 서로 다른 눈금이 매겨져 있을 것이고, 표준이 필요했다. 이 상황에서는 "어떤 현상은 특정한 온도에서만 일어난다"는 가설이 적용됐다. 이 가설의 검증을 위한 '견고한 자료'는 제작된 온도계의 눈금이다. 온도계의 표준적인 기준점을 찾기 위해 온도계를 사용한다는 것이 순환성을 산출할 것 같지만 이는 피해갈 수 있다. 모든 온도계에서 항상 특정한 ― 온도계마다 다르겠지만 ― 눈금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있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온도는 개별 온도계의 눈금으로 조작주의적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여러 다른 온도계들을 생각했을 때에는 그렇지 않다. 반복된 실험 결과, 물의 어는점과 끓는점이 표준적인 기준점으로 '합의'된다. 이렇게 볼 때, 0℃의 온도와 100℃의 온도는 규약주의적으로 정의된 듯하다.
이제부터 0℃와 100℃ 사이에 있는 눈금의 온도와의 선형성이 문제가 된다. 여기서 온도는 조작주의적으로 이해되어야 하기도 하고 그러면 안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알콜과 수은 및 다수의 섭씨 온도계가 있을 때, 그들은 0℃와 100℃에서는 모두 일치하지만 그 사이 구간에서는 모두가 조금씩 달랐다. 온도와 직접 비교하여 선형적인 관계를 갖는 온도계를 찾으면 쉽겠지만, 온도를 x축으로 놓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우, 과학자들은 0℃와 100℃라는 온도는 온도계의 눈금에 의해 조작주의적으로 이해해도 좋지만, 그 사이의 온도는 조작주의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 사이의 온도에 대한 이론적 모형이 필요하다. 이 때 고안해낸 방법이 0℃와 100℃의 물을 비율별로 섞은 물은 특정한 온도를 가진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은 온도계에 의해 평가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경우엔 온도계가 시험된다. 따라서 이는 '규약'에 가깝다. 이러한 '규약'과 온도계 측정값과의 비교를 통해 더 적합한 온도계를 선택할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수은주 온도계이다. 이제 0℃부터 100℃ 사이 구간의 온도는 수은주의 높이 또는 그것의 보정치라는 '합의'가 이루어진다.
이제 0℃와 100℃까지의 온도에 대해서는 수은주 온도계의 온도를 조작주의적으로 이해해도 별 문제는 없다. 그러나 수은주의 어는점 이하의 온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너무 높은 온도에 대해서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체의 부피는 온도에 따라 선형적으로 늘어난다"는 가설이 제안된다. 물론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기의 온도의 선형적인 상관관계를 기존의 수은주 섭씨 온도계를 통해 0℃와 100℃ 구간 내에서 검증해야 했다. 이 검증 과정에서의 '견고한 자료'는 수은주 섭씨 온도계의 눈금과 기체의 부피가 되며, 반복된 실험을 통해 위의 가설은 만족할 만하게 검증이 됐다.
이제부터는 0℃와 100℃ 사이의 온도에 대해서는 수은주 온도계나 기체 온도계나 큰 차이가 없으므로 기체온도계를 쓰는 것이 정당화되고, 또한 0℃와 100℃ 바깥 구간에 대해서는 기체온도계가 훨씬 더 큰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약간의 정당성 확보절차를 더 밟은 후, 기체 온도계는 온도를 재는 표준적인 장치로 합의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체의 부피와 섭씨온도 사이의 관계 및 여러 증거들로부터 절대온도 개념이 제안되는데, 이 절대온도 개념은 열역학이론을 동반했다. 이 때, '이론적 온도'와 '온도계의 온도' 사이에는 갈등의 소지가 있으며, '이론적 온도'에 의해 '온도계의 온도'를 보정하려는 시도와 '온도계의 온도'를 통해 '이론적 온도'을 검증하려는 시도 모두 가능하며, 두 시도는 순환적으로 보이지만 단순히 순환적인 것만은 아니며 둘은 서로의 틈새를 공략하며 끊임없이 경쟁한다.
지금까지 보여준 것은 정리하자면, 첫째, '견고한 자료'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현상 자체가 아니며, 이전까지의 잠정적 가설들을 등에 업은 자료이다. 둘째, 새로운 가설은 가장 최신의 가장 엄밀하다고 합의되는 '견고한 자료'의 기준을 만족해야 하며, 이를 만족하면 '견고한 자료'는 다시 새로운 가설을 등에 업은 형식으로 진화한다. 셋째, 일치를 보였던 '견고한 자료'와 '이론적 모형'은, 영역의 확장 또는 영역 내의 정확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시 불일치를 보이면서 경쟁한다. 넷째, 이러한 과정을 반복적으로 거치면서 '견고한 자료'와 '이론적 모형'은 함께 공진화해간다. 즉, '견고한 자료'와 '이론적 모형'은 서로에게 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적 군비확장 경쟁(evolutionary arms race)'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결론
논리경험주의자들은 실제 현상과 '견고한 자료' 사이의 구분을 너무 쉽게 무시했다. 그러나 실제 현상과 '견고한 자료' 사이에는 인식론적으로 엄격한 단절이 있다. 전자가 인식되기 전의 것이라면 후자는 인식된 후의 것이며, 전자가 인식의 대상 그 자체라면 후자는 인식의 결과이다. 그리고, 견고한 자료에는 그러한 인식에 이르게 된 근거들이 녹아있으며, 그 근거들은 어떠한 정합적인 체계를 형성한다.
우리가 경험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보고 싶은 '측면'에서의 '유사관계'를 바탕으로 '견고한 자료'와 '이론적 모형'을 동시에 선택한다. 이 과정에서 '견고한 자료'가 경험적 내용을 획득한다고 볼 수 있다면, '이론적 모형' 또한 경험적 내용을 직접 획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둘의 선택이 정말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알고자 한다면, 둘 사이의 '정합성'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며, 이 과정에서 '이론적 모형'은 다시 한번 경험적 내용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론 내의 용어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경험적 내용을 획득하게 된다. 한편, '견고한 자료'와 '이론적 모형' 사이에 빠질 수 있는 해석학적 순환은 '공진화'의 방식으로 극복 가능하며, 둘은 나선형으로 진화한다. □
각주
- ↑ 명시적 정의를 위한 대표적인 시도는 브리지만의 조작주의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용어를 정의하기 위한 조작들의 집합이 닫혀있지 않기 때문에 완전한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제기가 있었으며, 한편 성향적 용어의 경우엔 완전한 정의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난점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만약 이론적 용어가 관찰적 용어에 의해 명시적으로 완전히 정의될 수 있다면, 관찰적 용어의 더미에 불과한 이론적 진술이 어떻게 설명력을 지닐 수 있겠는가라는 제기도 있었다. 자세한 논의는 #Suppe 1977 참고.
- ↑ 명시적 정의에 따르면, 관찰 진술이 참이면 사소하게 이론적 진술도 참이 되게 된다. 이는 법칙적 진술(가설)을 통해 현상을 설명하거나, 관찰사실을 통해 가설을 입증한다는 논제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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