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성의 수수께끼와 자연선택
생물학의 철학 2005년 1학기 중간고사 답안
이타성의 수수께끼와 자연선택 : 선택의 단위 문제를 중심으로
들어가며: 진화와 자연선택, 그리고 선택의 단위
다윈에 따르면, 자연은 혹독한 생존경쟁의 장이다. 다양한 변이들 중 어떤 변이가 다른 것들에 비해 유리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 개체를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일반적으로 그 자손들에게 대물림될 것이며 그 자손들도 살아남을 확률이 더 커질 것이다. 다윈은 이러한 원리를 자연선택이라 불렀으며, 자연선택은 진화와 적응을 설명하기 위한 핵심적인 키워드가 되었다.
그러나 생물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정도로 나타나는 이타적 행동들은 기이해 보인다. 이타적 행동을 자신의 적합도(fitness)를 낮추면서 다른 개체의 적합도를 높이는 행동으로 정의한다면, 이타적 행동은 그 정의 자체에서부터 선택되고 대물림되기 어려운 운명을 타고난다. 그럼에도 자신의 적합도를 낮추는 이타적 행동들이 자연선택의 과정에서 도태되지 않고 지금까지 대물림되고 있다는 사실은 진화생물학계의 오래된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
집단 선택 이론과 그 난점
이 수수께끼의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한 개체의 이타적 행동이 그 개체가 속한 집단의 적합도를 높여주는 것으로 상정하는 방법이다. 이타적 행동을 하는 개체가 많은 집단이 다른 집단에 비해 높은 적합도를 갖게 되어, 집단 간의 경쟁에서 선택될 수 있다는 설명인 것이다. 그러나 집단 선택 이론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다. 예컨대, 이타적 개체가 많은 A집단과 이기적 개체가 많은 B집단을 상정해보자. B집단에 비해 높은 적합도를 갖춘 A집단이 선택됨으로써 간단히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문제가 A집단 내에서 발생한다. A집단 내에서 이기적 개체의 확산을 막을 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집단의 선택은 개체 또는 그 유전형질의 대물림을 보장하지 못한다.
유전자 선택론
포괄적응도 이론
위와 같은 집단 선택 이론의 난점을 비롯하여 그 개념 상의 모호함 등을 이유로, 집단 선택으로 보이는 현상들을 개체 또는 유전자 수준으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등장했다. 집단의 선택이 개체 또는 그 유전형질의 대물림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타적 형질이 대물림될 수 있는 근거는 그 형질을 가진 개체의 적합도(fitness)를 높이는 것에서밖에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 이타적 행동이란 자신의 적합도를 낮추는 행동이라 정의한 바 있는데, 이렇게 되면 정의상 모순이 되는 것 아닌가? 해밀턴 등은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포괄적응도 개념을 내놓았고, 이에 따르면, 겉보기에 자신의 적합도를 낮추는 행동은 결국 자신의 포괄적응도를 높이는 행동이기 때문에 대물림된 것이 된다.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타적 행동은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일개미의 번식 포기와 여왕개미에 대한 봉사는 자신의 포괄적응도를 높이는 행위인데, 왜냐하면 개미의 특별한 생식 형태 상, 여왕개미의 번식을 돕는 것이 자신이 직접 번식하는 것보다(또는 만큼)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주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생물학적으로 최고의 이타적 행위라 할 수 있는 번식 포기가 어떻게 대물림될 수 있는지도 설명된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무법 유전자와 같은 특정 유전자이다. 무법 유전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개체에 해를 입히는 유전자임에도 현존하는 유전자이다. 이 사례에서, 유전자‘도’ 선택의 단위가 된다. 다른 하나는 운반자와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영속하는 복제자이다. 개체의 수명은 짧고, 영속하는 것은 유전자의 복제품뿐이다. 개체란 유전자가 자신의 복제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만든 운반자에 불과하며, 운반자의 선택이란 결국 유전자를 위한 것으로 환원된다. 이러한 논의에서, 유전자‘만이’ 자연선택의 궁극적인 단위가 된다. 도킨스는 사실 후자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선택의 단위 문제: ‘왜 선택됐는가’ vs. ‘무엇이 선택됐는가’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선택의 단위’ 문제는 함축적으로 드러났는데, 사실 문제가 혼재된 감이 있다. 소버에 의하면, 선택의 단위 문제는 어떤 유전형질이 왜 선택됐느냐, 즉 ‘어떤 단위의 적합도에 도움을 주었기에 선택된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어떤 형질이 개체의 적합도를 높였기 때문에 선택됐다면 그것은 개체 선택이며, 속한 집단의 적합도를 높였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라면 그것은 집단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도킨스는 궁극적으로 선택된 것은 유전자이기 때문에 유전자 선택론이 맞다고 주장한다. 즉, 도킨스의 고민은 무엇이 선택됐느냐에 관한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소버는 도킨스가 ‘선택의 단위’ 문제를 혼동하고 있다고 불만을 제기한다. 그러나 정말 혼동일까? 이 문제는 결론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일단은 두 문제를 나누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왜 선택됐는가’의 문제
소버의 문제 설정은 한 형질이 유전자/개체/군의 적합도에 미치는 영향이 각각 다를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이는 도킨스의 무법 유전자 사례에서도 이미 함축된 내용이다. 예를 들어, 혈연을 떠난 이타적 행동은 그 자체를 놓고 봤을 때 다른 개체의 적합도에 도움이 되는 행위일 뿐,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러한 이타적 개체의 현존은 집단 내 다른 개체들로부터의 도움 및 그것을 통한 그 개체의 적합도 향상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타적 행위를 하는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서의 성공은 그 행동을 통해 변화시킨 자신의 적합도 때문이 아니라, 집단으로부터 받은 도움으로 변화된 자신의 적합도 때문이다. 즉, 이타적 행동이 개체와 집단에 미치는 대립적인 영향은 명백하다. 그리고, 이타적 행동이 대물림되기 위해 집단의 구조가 중요하다는 소버의 주장은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포괄적응도 이론가는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 있다. 개체의 적합도는 환경에 의존하는 것이 당연하고, 집단의 구조를 환경으로 생각한다면 개체의 포괄적응도 이론이 소버의 다수준 선택 이론과 다를 바 없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이러한 반론은 수학적인 모형 하에서 타당하다. 두 이론은 모두 개체 수준에서 모형을 만들 수 있고, 개체를 넘어서는 적합도를 상정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어떤 이타적 형질이 그 개체의 포괄적응도를 높여주었기 때문에 선택됐다는 말은 여전히 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타적 형질은 분명 그 개체의 적합도를 ‘낮추었기’ 때문이다. 이타적 형질은 그 개체의 적합도를 낮추었‘음에도’ 선택된 것이다. 포괄적응도 이론의 오류는, 수학적 모형이 ‘개체’들의 적합도만 상정했기에 그 안에서 선택된 모든 형질은 ‘개체 자신’의 적합도를 ‘높여야만’ 선택될 것이라는 착각에서 온 것이다.
‘무엇이 선택됐는가’의 문제
집단의 구조를 아무리 따지더라도, 궁극적으로 선택되는 것은 유전자라는 도킨스의 주장은 어떠한가?
개미의 예를 들어보자. 포괄적응도 이론가들은 불임인 일개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으며, 이것이 친족 선택 또는 포괄적응도 이론의 좋은 사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개미에겐 ‘불임 유전자’가 없다. 여왕개미와 일개미 사이의 ‘불임/가임’의 차이는 유전자 상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미들간의 의사소통(페로몬이라는 화학물질)에 의해 결정된다. 여왕개미가 죽으면 일개미 중에서 하나가 여왕개미가 될 수 있으며, 어떤 일개미는 일종의 배신을 하고 경쟁하는 여왕개미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그림에서 선택된 것은 무엇인가? 개미 집단의 재생산 시스템 전체가 선택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몸의 항체의 행동은 어떠한가? 항원에 대항해 이타적으로 싸우다 죽어가는 항체를 포괄적응도의 방식으로도 설명 가능할지 모른다. 자신이 죽는 대신에 자신과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다른 세포와 개체 전체를 살려서 자신을 대물림하게 만든다고 말이다. 그러나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나의 관심은 그 항체 세포의 이타적 행동이 유전자로부터 결정된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항체는 그 위치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항체가 되어 이타적으로 행동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선택된 것은 우리 몸의 재생산 시스템 전체로 보인다. 나의 입장은 발생계 이론과 좀더 친화적이다.
그러나, 도킨스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운반자 이론이나 확장된 표현형에 의하면, 개미의 재생산 시스템이나 우리의 면역 및 재생산 시스템도 유전자 자신의 복제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도킨스에게 궁극적으로 선택되는 것은 유전자이다. 이 문제는 유전자가 얼마나 많은 것을 결정하는가에 관한 경험적 문제에 달려있는 듯하다. 만약, 개체 또는 집단 시스템이 유전자로부터 상당한 자율성을 누린다면 도킨스의 주장은 상당히 약화될 것이다.
여기서는 구체적이진 않지만 두 가지만 언급하려 한다. 첫째, 현재의 환경, 집단, 개체의 구조를 과거 유전자들이 자신의 복제자를 위해 남긴 유산(확장된 표현형)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게 만들어진 외부 구조는 유전자의 계획과 무관하게 변화할 상대적 자율성이 있으며, 거꾸로 현재의 유전자는 과거 유전자의 유산에 제약당하기도 한다. 예컨대, 집단 구조는 우연적인 이주와 전투 등에 의해 급격히 변할 수 있으며, 변화된 집단 구조 하에서 유전자의 생존은 위태로워진다. 현재의 유전자는 과거 유전자들이 만든 것을 하루 아침에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재생산 시스템의 대물림 없이는 유전자도 대물림되기 어렵다. 둘째, 복잡한 신경기관을 가진 개체일수록, 또는 사회성을 가진 집단일수록, 그 개체 또는 집단의 구체적 행동과 유전자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는 듯 보인다. 예컨대, 인간의 경우, 의식적, 심리적 작용이 구체적 행동과 유전자 사이를 매개하고 있는데, 그 매개과정에서 상당한 자율성이 들어오는 듯 보인다. 인간이 만든 문화를 유전자의 확장된 표현형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은 그것의 상대적 자율성 때문이다.
나가며
‘왜 선택됐는가’의 문제와 ‘무엇이 선택됐는가’의 문제는 분리 가능한 것인가? 소버는 분리된 질문을 도킨스가 같은 질문으로 혼동했다고 불만을 제기했지만, 나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어떤 단위의 적합도를 높였느냐’의 답이 있다면, 적합도가 높아진 그 단위가 일단 선택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편, 어떤 단위가 선택됐느냐를 묻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왜 선택됐는가를 찾게 되는데 보통 그 선택의 이유는 그것의 적합도 때문이다. 즉, 두 질문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은 자연선택이란 설명 메커니즘의 본성에 연유한다. 이 논의를 더 끌고 가고 싶지만 주제를 벗어나는 듯하기에, 선택의 단위 문제에 대한 나의 입장을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이 글에서 개체(또는 유전자)의 적합도만 따지는 모형의 가능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다만 첫째, 선택되는 모든 형질이 그 개체의 적합도를 높이기 때문에 선택된 것으로 해석될 수 없다는 점, 둘째, 과거 개체들이 만든 구조물 및 현재의 개체들이 이루는 집단이 보여주는 자율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