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증 이론
입증 이론이란 어떤 조건에서 증거가 가설을 입증하는지, 반입증하는지, 아니면 가설에 대해 무관한지를 밝히고자 하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가설 H에 대해 생각해보자. 검은 까마귀는 H를 입증하지만, 하얀 까마귀는 H를 반입증하는 것으로 보이며, 까마귀가 아닌 대상은 H와 무관해 보인다. 니코드 기준은 이러한 직관을 반영한다. 가설 H는 “어떤 것이든 그것이 까마귀이면 그것은 검다”라는 보편 조건문 H1과 동등한데, 이때 조건을 명시한 부분인 “그것이 까마귀이면”을 전건, “그것은 검다”를 후건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보편 조건문 형식의 가설에 대해, 니코드 기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건과 후건을 모두 만족하면 가설의 입증 사례이고, 전건을 만족하지만 후건을 만족하지 않으면 가설의 반입증 사례이며, 전건을 만족하지 않는 대상은 가설과 무관한 사례이다.
헴펠은 니코드 기준이 보편 조건문 형식의 가설에만 적용되기에 모든 형식의 가설에 적용되진 못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니코드 기준이 동일한 가설의 표현 방식에 따라 입증 여부를 달리 판정한다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위의 가설 H는 H1뿐 아니라 “어떤 것이든 그것이 검지 않으면 그것은 까마귀가 아니다”라는 조건문 H2로도 표현될 수 있다. 그런데 니코드 조건에 따르면 H1과 무관했던 하얀 분필은 H2의 전건과 후건을 모두 만족하는 입증 사례가 된다. 그러나 동일한 내용을 가진 가설에 대해 동일한 대상이 그 가설과 무관한 사례인 동시에 가설의 입증 사례일 수는 없으므로, 니코드 기준은 입증 이론으로서 부적합하다.
그렇다면 하얀 분필은 가설 H의 입증 사례일까, 아닐까? 일상적인 직관은 아니라고 말한다. 분필에 대한 관찰이 까마귀에 대한 가설을 입증한다는 것은 터무니없어 보인다. 그러나 헴펠은 정말로 하얀 분필이 H의 입증 사례라고 말한다. 단, 헴펠은 하얀 분필과 검은 까마귀가 H를 입증하는 정도는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상대적으로 적은 대상인 까마귀들 중에서 H에 부합하는 사례 하나는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대상인 검지 않은 것들 중에서 H에 부합하는 사례 하나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입증 사례일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헴펠은 입증의 정도에 대한 일반적인 계산법을 제시하진 못했다.
베이즈주의 입증 이론은 가설에 대한 행위자의 믿음의 정도, 즉 신념도를 통해 입증을 정의한다. 증거 E를 획득하기 전 가설 H에 대한 신념도를 사전 신념도 C(H)라고 하고, 증거 E를 획득한 후 갱신된 가설 H에 대한 신념도를 사후 신념도 C+(H)라고 하자. 입증의 정도는 신념도의 변화량인 C+(H)-C(H)로 측정될 수 있는데, 그 값이 0보다 크면 E는 H를 입증하고, 0보다 작으면 E는 H를 반입증하며, 0이면 E는 H와 무관하다.
베이즈주의 입증 이론에서 행위자의 신념도는 다음의 제약을 받는다. 첫째, 한 시점의 신념도는 확률 공리를 만족해야 한다. 모든 가설에 대한 신념도는 0부터 1 사이의 값이어야 하며, 참이라고 확신하는 가설에는 1의 신념도가 부여되어야 한다. 또한 두 가설 A와 B에 대한 신념도가 C(A)와 C(B)일 때, “A 또는 B”에 대한 신념도 C(A∨B)는 C(A)와 C(B)와 C(A&B)의 합과 같아야 한다. “A이면서 B”에 대한 신념도 C(A&B)는 C(A)와 C(B) 중 어느 것보다도 클 수 없고, A와 B가 양립 불가능한 경우엔 0이다. 이에 따라, 가설 A에 대한 신념도 C(A)와 A가 거짓이라는 가설에 대한 신념도 C(~A)의 합은 항상 1이고, 가설 A에 대한 신념도 C(A)는 언제나 C(A&B)+C(A&~B)와 같다.[1] 이러한 규칙을 하나라도 위반한 신념도는 정합적일 수 없다. 둘째, 증거 획득에 따른 신념도의 변화는 ‘조건화 규칙’을 따라야 한다. 조건화 규칙은 “E의 획득에 따른 사후 신념도 C+(H)를 E를 조건으로 한 사전 조건부 신념도 C(H|E)와 같도록 갱신하라”라고 말한다. 이때 C(A|B)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조건부 신념도는 “B를 조건으로 한 A에 대한 신념도”로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예컨대 주사위를 던져 n이 나왔다는 가설 Xn에 대한 행위자의 신념도가 각각 1/6이었다고 하자. 그러면 주사위의 눈이 홀수라는 가설 E(=X1∨X3∨X5)와 주사위의 눈이 3 이하라는 가설 H(=X1∨X2∨X3)에 대한 신념도 C(E)와 C(H)는 1/2이다. 이때 E가 사실임을 알게 되면 H에 대한 신념도는 어떻게 바뀔까? 즉 E는 H를 입증할까? 베이즈주의 입증 이론에 따라 이에 답하려면 사전 신념도 C(H)와 사후 신념도 C+(H)를 구해야 한다. 우선 C(H)는 1/2이다. C+(H)는 E를 조건으로 한 H의 조건부 신념도 C(H|E)로 갱신되며, 이는 C(H&E)/C(E)의 계산을 통해 구해진다. C(E)=1/2이고, 가설 H&E는 가설 X1∨X3과 같기에 C(H&E)=1/3이므로, C(H|E)는 2/3가 된다. 즉 E에 의해 H에 대한 신념도가 1/2에서 2/3로 높아지므로, E는 H를 입증하며, E가 H를 입증하는 정도는 1/6이 된다.
헴펠은 가설과 증거의 내용만을 통해 입증 여부를 판정하려고 노력한 반면, 베이즈주의 입증 이론은 행위자의 믿음이라는 제3의 요소를 끌어들이고 있다. 따라서 동일한 가설과 증거라도 행위자마다 그에 대해 다른 사전 신념도를 가지고 있다면 입증 여부 또는 입증의 정도에 대한 판정은 행위자마다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주
- ↑ “A∨B”는 “A 또는 B”라는 뜻이고, “A&B”는 “A이면서 B”라는 뜻이며, “~X”는 “X가 거짓이다”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