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과학의 역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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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과학철학회 여름 학술대회 발표문


정상과학의 역동성: 범례와 문제의 상호작용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박사과정 1년 정동욱


1. 머리말

토머스 쿤(Thomas S. Kuhn)이 제기한 정상과학과 과학혁명의 구분에 의하면, 정상과학은 매우 전통에 얽매인 활동으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정상과학은 그 전통을 파국으로 몰고가 결국 혁명을 초래한다. 어떻게 전통에 얽매인 활동이 그 전통에 파괴적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정상과학의 본성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쿤에 의하면 정상과학 활동의 핵심은 문제풀이이다. 그리고 이 문제풀이는 범례와의 유사관계에 의존한다. 이에 대한 정당화를 위해, 쿤은 초보적인 게슈탈트 심리학과 학생들의 학습과정 및 아이의 언어습득 과정에 의존하곤 했다. 이러한 문제들이 모두 인지과학적인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은 쿤 본인도 알고 있었고 이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었지만, 결국 당시의 규칙에 편향된 인지과학과 연구의 초보성 때문에 그 길을 꾸준히 밀고 나가길 포기하고 언어적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최근 인지심리학, 신경과학, 인공지능의 연구에서 괄목할만한 성과가 알려지면서, 쿤의 이론을 인지과학적으로 재해석하고 재평가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과학자를 ‘평범한’ 인간의 인지적 능력을 가진 행위자로 보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진 인지능력이 무엇인지 밝혀내어 그것을 이용해 과학활동을 묘사하고 설명하는데 주목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그 연구성과들이 쿤의 정상과학 활동을 새롭게 묘사하는 데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 검토해보고자 한다. 특히 나는 정상과학적인 문제풀이 활동을 범례(패러다임)와 문제 사이의 패턴매치(pattern match)의 활동으로 놓고, 문제풀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범례와 문제의 상호작용을 통한 범례집합의 미묘한 변동과 그로 인한 과학활동의 역동성에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이러한 방식의 문제풀이 활동이 정상과학이라는 시기에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활동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에필로그의 성격으로, 인지과학적 연구의 잠재력과 보완지점에 대해 간략히 언급할 것이다.


2. 가족유사성을 통한 분류

쿤은 문제풀이 활동을 문제와 범례 사이의 유사관계를 통해 해명하고자 했다. 쿤은 그 유사관계에 대한 분석을 위해 분류의 문제(categorization)에 주목했다. 그리고 쿤의 분류 문제는 그의 개념과 의미에 대한 이론을 형성했고, 이는 그의 유명한 공약불가능성 논제로 이어진다. 그의 분류 및 개념체계에 대한 이론은 완전히 독자적인 것은 아니었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의 원리를 개념 체계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원리로 채택했다 (Kuhn 1996, pp. 44-45). 한편, 본인이 인정했듯 ‘변동가능한 범주’의 원리는 칸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Barker, Chen & Andersen 2003 [이후부터 BC&A 2003], p. 212).

쿤에 의하면 개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어떠한 종의 예들은 동일한(혹은 유사한) 특징들을 공유한다. 그래서, 전통적인 과학철학자들은 그 종의 필요충분조건을 통한 정의로 그 종의 개념을 밝히고자 했다. 그러나, 학습과정에서 그러한 필요충분조건이 역할을 하는가? 또는 필요한가? 쿤은 이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쿤은 어떠한 종에 대한 개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예시를 통해 그 대상들간의 유사/비유사 관계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Kuhn 1996, pp.44-45). 그는 어린아이가 다양한 물새들의 개념을 학습하는 과정을 간단하게 보여준다. 동물원의 물새들을 직접 지시하며 ‘저것은 백조야. 이것은 오리야. 또 저것은 거위야’ 하는 훈련만으로도, 아이는 물새들간의 유사/비유사 관계를 확인함으로써 각 물새들의 개념을 쉽게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백조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이나, ‘모든 백조는 희다’와 같은 보편명제는 필요하지 않다 (Kuhn 1977, pp. 309-319).

그러나 위와 같은 방식에 의하면 오리, 백조, 거위의 분류에 성공한 사람들이라도 동형의 개념구조를 가질 필연성이 없다 (BC&A 2003, p. 215). 물새들 간의 분류를 위해 동일한 특징을 뽑아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리와 백조의 구분을 위해 어떤 사람은 ‘목의 길이’에 주목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은 ‘소리’에 주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 추출에서의 다양성은 비트겐슈타인이나 쿤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분류에서의 애매하지 않은 합의가 목적이지 동일한 개념구조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개념 구조의 다양성에 대한 허용은 쿤에게도 환영할 일일 것이라 생각된다. 하나의 개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 변화의 잠재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쿤의 유사관계를 통한 분류법이 여전히 애매하다고 비판할지 모른다.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유사하다고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유사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유사 관계(차이)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유사관계의 획득은 항상 또다른 대상과의 차이의 확인을 필요로 한다. 즉, x와 x‘의 유사성은 y와의 차이에 상대적이다. 따라서 유사관계를 통한 개념정립은 기본적으로 3자관계이다. 여기서 쿤은 대조집합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대조집합은 관심대상과 상위개념을 공유하지만, 관심대상과는 특정한 측면에서 차이를 보이는 집합을 말하는데, 이러한 대조집합의 도입은 개념간의 위계질서를 함축한다. 즉, 유사/비유사 관계의 확인은 위계적인 분류체계를 만들어낸다 (BC&A 2003, pp. 216-217).

한편, 이러한 분류의 성공은 대조집합 사이의 ‘빈 지각 공간(empty perceptual space)’의 확보에 의존한다. 만약 각 개념의 외연이 끝나고 시작하는 지점이 연속적이거나 중첩돼 있다면, 유사성에 의한 종 구분은 애매함의 문제에 시달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BC&A 2003, pp. 217-218). 따라서 그동안 두 대조집합 사이에 ‘빈 지각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영역에서 새로운 사례가 발견되는 일은 개념체계의 변화와 새로운 개념체계의 재정립을 추동하는 원동력이 된다.

쿤이 유사관계의 파악을 통한 개념획득 방식을 강조한 이유는 동일한 방식이 과학의 맥락에서도 적용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들이 과학을 학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학생들은 범례를 통해 학습하며, 새로운 문제를 접할 때마다 이미 풀었던 문제와 유사하게 보는 방법을 찾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Kuhn 1977, p. 305). 이 때 F=ma와 같은 법칙적 개요(law sketch)은 문제들간의 유사관계를 파악하는 지침으로 이용된다 (Kuhn 1977, pp. 300-301).

쿤은 앞서 언급했던 오리나 거위처럼 힘, 질량, 가속도와 같은 이론적 개념도 유사관계로 파악될 수 있는지는 명확히 말해주지 않았으며, 이는 많은 오해를 불러왔다. 그러나, 학생이나 과학자들이 이전에 풀었던 문제상황과 현재 푸는 문제상황 사이의 유사성을 확인함으로써 문제를 푼다는 쿤의 묘사는 여전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3. 인지심리학 연구로부터의 증거

1970년대 로쉬(Rosch) 등에 의해 진행되었던 연구에 의하면, 쿤의 개념체계와 분류 이론은 상당한 지지를 받는 듯하다. 로쉬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등급이 매겨진 (개념) 구조(graded structure)’를 가진다. 로쉬의 연구를 요약하자면, 인간은 하나의 개념에 대해 좋은 사례와 덜 좋은 사례를 구분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개념을 정의 또는 논리 규칙에 의해 규정지으려는 시도에 대해 상당한 반박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필요충분조건에 의해 정의된 개념 하에서는 그 개념의 모든 예화는 동등해야만 하는데, 하나의 개념 하에서도 사례 사이의 등급이 매겨진다는 사실은 그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BC&A 2003, p. 218).

한편, 로쉬의 연구는 개념에 대한 원형(prototype)을 통한 표상을 상정하게 된다. 사례마다의 등급이 매겨진다는 것은 가장 좋은 사례가 있다는 것이고, 그 사례는 원형을 내포하게 된다. 역으로, 어떤 대상을 하나의 분류에 집어넣는 일은 각 종의 원형과 유사성 또는 차이를 비교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쿤에게 좋은 소식이 된다. 왜냐하면, 유사집합으로서의 개념체계를 제시했던 쿤의 이론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적인 성향에 불과한 분류체계 형성 과정을 철학적인 개념이론의 정당화 근거로 사용할 수 있는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정의가 가능한 개념도 있지만, 분류의 성공에 이르는 데 필수적인 것은 아니며, 큰 역할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개념에 대한 정의는 항상 사후적으로 규정되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자연종과 몇가지 이론적 개념 및 인공적 개념을 제외하고는 사후적으로도 정의되기 어렵다. 예컨대 어떠한 생물학적 종도 필요충분조건으로 정의될 수 없다. DNA로부터의 정의 또한 불가능하다. 같은 종의 생물일지라도 그 DNA는 각각 다르며, 어디까지 같아야 같은 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은 세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 생물학적 종은 여러 변이들의 집합으로밖에 볼 수 없으며, 이는 유사관계로서의 개념과 잘 어울린다.

둘째, 원형과의 유사관계를 통한 개념부여는 상당히 효과적이다. 원형은 구체 사례들의 수많은 특징 중 매우 작은 몇 가지 특징에 대해서만 디폴트값을 부여하여 만들어진다 (BC&A 2003, p.222). 우리는 새로운 대상을 접할 때, 그 몇 가지 특징만을 원형과 비교확인(패턴매치)하면 되는 매우 간단한 과정만을 필요로 한다. 즉, 매우 경제적이다. 그러나, 정의를 통한 개념에 따라, 새로운 대상을 파악하려면 모든 필요충분조건을 따져야만 하는 비경제적인 과정을 거치게 된다.

셋째, 정의에 의한 개념은 개념의 역사적 변화를 설명하기 어렵다. 정의된 개념과 사례는 ‘예화’라고 하는 논리적이고 비대칭적인 관계를 갖는다. 정의된 개념은 새로운 사례에 맞추어 변화할 수 없으며, 그 자체로 정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 정의가 바뀌더라도 그것은 합리적이기보다는 규약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으며, 그 정의 변화의 메커니즘은 설명되기 어렵다. 그러나, 원형과 유사집합으로서의 개념은 새로운 사례에 대해 적응적이다. 원형과 새로운 사례의 비교(패턴매치)는 원리적으로 상호적이기 때문이다 (Nickles 2003, p. 169). 따라서, 원형과 그 유사집합으로서의 개념은 새로운 사례와 더불어 조금씩 적응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이렇듯 정의에 의한 개념은 실제적인 역할도 적을뿐더러 옳다고도 보기 어렵다. 다만, 정의는 개념을 명료하게 만드는 데 사후적으로 보조적인 역할은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의 또는 규칙은 기존 개념체계의 위기 상황 또는 애매한 범주의 경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곤 하는데, 이는 눈여겨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아마도 정의, 규칙의 명시화는 위기상황을 명료화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4. 정상과학과 문제풀이 활동

쿤은 정상과학을 매우 틀에 박힌(routine) 활동으로 묘사했다. 그럼에도 그 과정은 방법론적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Nickles 2003, p. 144). 규칙적이지 않으면서 틀에 박힌 활동이 어떻게 가능한가? 쿤은 정상과학을 문제 풀이의 과정으로 묘사했다. 과학자가 풀기 위해 골몰하는 문제는 언제나 과거의 문제풀이 성과를 적용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으로 상정되며, 새로운 문제풀이는 패러다임의 핵심을 부수기보다는 패러다임을 명료화하는 과정으로 묘사된다 (Kuhn 1996, pp. 35-36). 과거의 성공적인 문제풀이는 범례(examplar)로서 패러다임을 구성하며, 과학자의 훈련과정은 그 범례들을 익히고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된다. 성공적인 훈련을 마친 과학자는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 풀이에 나서게 된다. 이 문제풀이 활동에서 중요한 것은 범례와의 유사관계 인식이며, 규칙은 불필요하거나 보조적인 역할만을 담당한다. 이렇게 볼 때, 정상과학은 규칙 의존적이지 않으면서도 틀에 박힌 활동이 된다.

그렇다면, 정상과학 시기에 푸는 문제란 어떠한 문제인가?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은 많은 잠재적 문제들을 부적절한 것으로 보게 만들며, 적절해 보이는 문제더라도 그에 대한 적합한 범례가 없다는 사실은 아직 풀 수 없는 것으로 포기하게 만든다. 이렇게 문제들을 거르는(screen out) 과정을 통해 패러다임은 적은 수의 문제만을 돌출된(salient) 것으로 보이게 만들고, 과학자들은 이 소수의 제한된 문제들을 놓고 씨름하게 된다. 이 소수의 제한된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좋은 문제는 풀 수 있는 문제여야 한다. 풀 수 있다는 것은 기존의 범례들의 조합된 적용으로 풀릴 것으로 기대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훈련과정에서 풀었던 예제와 연습문제들의 연속선상에 있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다만 아직 풀리지 않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둘째, 좋은 문제는 패러다임을 더 명료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사소한 문제는 패러다임을 명료화해주지 못한다. 과학자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다음 단계를 위한 더 세련된 범례를 산출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Kuhn 1996, pp. 35-42).

여기서 전통과 혁신 사이의 ‘본질적 긴장’이 발생한다. 좋은 문제와 풀이는 전통을 너무 벗어나도 안되고 너무 비슷해도 안된다. 전통을 너무 벗어나면 부적절하거나 이해 못할 문제와 풀이로 간주되며, 전통을 너무 벗어나지 않은 문제는 사소해서 패러다임의 명료화에 기여하지 못한다. 문제의 선택과 풀이는 전통과 혁신 사이의 긴장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 하며, 프런티어(frontier)에서 이루어지는 연구는 이러한 임무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러한 임무를 모든 과학자가 성공적으로 수행하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과연 “지금 물리학회지에 실린 수많은 논문 중 얼마나 많은 수가 후대에까지 중요하게 여겨질 것인가? (Nickles 2003, p. 148)” 이러한 질문은 과학활동이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집단적인 활동임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정상과학적인 문제풀이는 여전히 사소하게 보일 여지가 있다. 문제풀이 활동은 다음과 같은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우리는 이미 답을 함축적으로 알고 있다. 둘째, 문제 풀이를 위한 모든 자원은 알려졌다. 셋째, 옳은 답은 함축적인 것을 명시적으로 표현하는 것만으로 해결된다. 이러한 전제는 플라톤의 메논(Meno) 역설에 대한 답과 너무나 흡사하다 (Nickles 2003, p. 150). 그러나 쿤은 분명 플라톤의 노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쿤의 지식은 변화하지만 플라톤의 지식은 이데아라는 고정된 장소에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쿤의 문제풀이는 플라톤의 답과 무엇이 다르며, 문제풀이는 어떤 점에서 사소하지 않을 수 있는가?

첫째, 과학자들은 범례의 모든 함축을 알지 못한다. 논리적인 맥락에서조차 우리는 하나의 전제가 함축하는 모든 귀결을 알 수 없다. 하나의 귀결을 도출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며, 도출이 끝나고 나서야 우리는 그 귀결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범례의 모든 함축을 알지 못하며, 새 문제에 대한 범례의 적용가능성을 암묵적으로 깨닫더라도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풀어보는 수밖에 없다.

둘째, 쿤의 문제풀이는 논리 또는 규칙에 의존하지 않으며, 범례 또는 사례 의존적이며, 문제에 적용할 범례를 찾아내는 일은 절대 사소한 일이 아니다. 물리학에서의 문제풀이는 규칙적인 절차만 밟으면 풀리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물리학을 배우는 학생들은 보통 교과서의 한 장을 다 읽고 완전히 이해하고 나서도 그 장의 마지막에 나오는 문제들을 푸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고 토로한다 (Kuhn 1977, p. 305).” 이러한 어려움은 그 문제에 딱 맞는 범례를 잘 찾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데, 그것을 찾아내는 순간 나머지는 쉽게 해결되곤 한다.

셋째, 문제를 풀기 위해 적용해야 할 범례는 꼭 영역 내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쿤은 실제 과학자들의 문제풀이를 학생들의 연습문제 풀이에 비유하면서, 영역 내의 자원들만으로 정상과학적인 문제들이 쉽게 풀리는 것처럼 묘사해버렸다. 그러나, 프런티어에 있는 과학자들의 문제가 연습문제처럼 풀리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매우 이질적인 자원들이 문제풀이에 쓰인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학사에서는 문제와 동떨어진 분야에서 성공적이었던 문제풀이(범례)를 차용해오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질적인 영역간의 범례 차용은 문제상황에 대한 직관적 모형 사이의 유사성 때문에 차용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단지 수학적 형식의 유사성만으로도 차용되곤 한다. 예컨대 톰슨(William Thomson)의 1842년 에 고안해낸 정전기학 이론에서, 그는 “푸리에의 열 해석이론에서 제시된 열 분포의 수학적 이론과 비슷한 수학적 정식화를 채택했으며, 열 전도와 정전기 끌어당김의 유사성을 지적했다. ... 연속 방정식을 통한 자연현상의 통합은 물리적이라기보다는 수학적이었으며, 열과 전기 사이의 물리적 유비라기보다는 기하학적 형식의 통합이었다 (하만 2000, p. 53).” 또다른 예로, 멕스웰은 “장에서 작용하는 힘의 방향을 공간을 채우고 있는 힘의 선으로 나타냈다. 그는 힘의 세기를 설명하기 위해 힘의 선으로 만들어진 과 속에서 움직이는 비압축성 유체를 상징했다. ... 유체 흐름이라는 개념은 열 흐름과 전기력 흐름 사이의 수학적 유비에 의해 제안된 것이지만, 이 기하학적 표현은 물리적 가설의 지위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를 사용하는 것은 ‘수학적 닮음’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하만 2000, p. 124).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문제풀이는 이전의 범례집합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사소하게 도출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플라톤의 노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5. 인공지능과 사례기반 추론

앞에서 묘사한 문제풀이를 사례기반 추론(case-based reasoning)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풀이에 대한 인지과학의 연구를 살피기 위해서는 인공지능 연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그들의 연구는 애초부터 ‘자동적인 문제풀이’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인공지능 연구는 일단 규칙기반 AI을 구현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의 의욕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규칙기반 AI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AI는 단지 잘 정의되고 매우 제약된 문제에서만 작동했다. 결국, 규칙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결론에 이르러 그들은 AI에 규칙과 함께 ‘관련지식’도 함께 넣어주었다. 이른바 ‘전문가 시스템’이라 불린 지식 기반 계산기계를 구현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구현한 AI는 여전히 실망스러웠다. 지식기반 AI는 두가지 점에서 중요한 문제를 야기했는데, 첫째, 투여한 지식이 많을수록 성능은 지수적으로 느려졌고, 둘째, 지식기반의 변화에 매우 불안정(brittle)했다 (Nickles 2003, pp. 159-160).

직관에 의하면, 지식이 많을수록 성능은 좋아져야 한다. 인간을 흉내내는 좋은 AI를 구현한다면 이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규칙기반 AI와 지식기반 AI에는 전문가들이 가진 규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의 규칙은 어떠한 특징을 보이는가? 사실 전문가들은 자신의 규칙을 명세하고 나열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또한 규칙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더라도 사후적인 합리화인 경우가 많고, 종종 다른 규칙과 모순을 일으키기까지 한다 (Nickles 2003, p. 160). 이 점은 문제를 효율적으로 푸는 전문가들이 규칙에 따라 문제를 풀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8,90년대부터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사례 기반 추론에 기반한 AI를 구현하기 시작했다. 이 기계는 전의 AI보다 유연하게 작동하였고, 이전에는 풀기 어렵다고 얘기되는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스템도 여전히 정보가 많아질수록 느려지는 경향을 보였는데, 현재의 연구자들은 이를 ①효율적인 인덱싱 기법과 ②사례에 맞게 시스템을 수선하는 기법의 문제로 보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아직 미성숙 단계이긴 하지만, ‘경험으로부터의 추론’이라는 오래된 철학적 난제에 일정한 통찰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으며, 인지과학 내의 인공지능 및 신경과학 연구자들은 ‘귀납’의 문제를 비롯한 유사한 문제를 놓고 씨름 중이다 (Nickles 2003, p. 160).

이러한 사례기반 추론에 따르면, 인간은 “현재상황에 대한 지각과 반응을 과거 익숙한 상황과 매치시킴으로써 조직하는 경향 (Nickles 2003, p. 161)”을 보이는 것을 말해주며, 이는 우리의 직관과 잘 맞아떨어진다. 또한 사례기반 추론에서는 사례저장의 용량초과를 방지하기 위해, 사례 정보를 일정정도 손실시킬 필요가 있다. 즉, 구체적 사례는 추상화된 범례로 변형시켜 저장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Nickles 2003, p. 162). 이는 원형(또는 전형)을 통한 표상이라는 인지심리학의 연구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이러한 점까지 고려해보면, 사례 기반추론은 일반적으로 ①추상화 절차 ②사례의 인덱싱 기법 ③시스템의 수선 메커니즘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 안에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물론, 인간의 신경망 수준에서 또는 AI의 구현메커니즘 수준에서는 법칙적인 규칙이 작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의 수준이 아니다. 즉, 우리는 그 규칙을 알더라도 그것을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규칙은 논리적인 규칙이라기보다는 물리적인 규칙에 가까울 것이다. 물리적인 규칙이 논리를 따를지는 알 수 없으며, 우리가 의식적인 수준에서 사용하는 논리 규칙은 오히려 패턴매치로 환원될 가능성도 있으며 그러한 연구도 인지과학에서 진행중이다 (Nickles 2003, pp. 162-163).

이러한 사례기반 추론이 성공적이라면, 우리는 추론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함축을 가질 수 있다. 첫째, (핵심적인) 추론은 언어 없이도 가능하다. 둘째, 추론에 해당하는 프로그램과 경험에 해당하는 자료 사이의 엄격한 분리는 불가능하다. 셋째, 문제와 풀이의 생성과 발견은 검증과 엄격히 분리되지 않는다. 넷째, 혁신의 본질은 수정이다. 마지막으로, 문제풀이는 자연에 대한 복사라기보다는 과거의 풀이에 대한 적응적 모방, 복사이다. 만약 이러한 사례기반 추론에 대한 연구가 성공적인 것으로 드러난다면, 쿤의 정상과학적 활동, 즉 범례를 통한 문제풀이에 대한 경험적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과학확동은 비합리적인 과정이 아닌 (새로운) ‘합리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Nickles 2003, pp. 161-162).


6. 모형기반 추론(model-based reasoning)

문제풀이가 과거의 사례에 의존한다고 해서, 과거의 사례는 구체적인 형태로 바로 문제풀이에 이용되진 않는다. 과거의 사례는 일정하게 추상화된 형태로 문제풀이에 이용되며, 앞서 지적했듯이 사례기반 추론이 용량초과를 초래하지 않고서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라도 일정한 추상화는 필수적이다. 이러한 추상화된 형태의 문제풀이는 너세시안이 제기한 모형기반 추론(model-based reasoning)과 연결된다.

모형기반 추론(model-based reasoning)에서의 핵심은 첫째, 유비와 추상화를 통한 모형화, 그리고 그 안에서의 조작, 추적, 시뮬레이션을 통한 추론이다. 예컨대, 꺾여 올라가는 좁은 계단에서 부피가 큰 가구를 운반할 때, 사람들은 가구를 단순한 기하학적 입체로 가정하여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회전시켜보면서(시뮬레이션) 알맞은 각도를 찾아낸다 (내적 모형화 mental modeling). 이것이 머리 속에서 잘 안될 때는, 주머니에서 작은 입체도형을 꺼내 이리저리 회전시켜봄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외적 모형화 external modeling).

내적 모형화에서 첫 번째 기초는 추상화이다. 먼저 내적 모형은 대상, 상황, 과정의 특징에 대한 ‘선택적’ 표상이다. 내적 모형화에 의한 표상은 실세계의 여러 차원 중 (문제 풀이의) 추론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차원에 대해서(만) ‘동형’인 경향이 있다. 즉, 추상화가 동반된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 스프링에 대한 표상은 3차원이라기보다는 1차원에 가깝다. 이는 추론과 이해에서 ‘유연성’을 부여해준다. 내적 모형에 기반한 문제 해결은 매우 효과적이며, 일상적인 영역에서 이러한 추론은 대부분 성공적이다. 다만, 과학과 같은 복잡한 상황에서는 이러한 추론이 꼭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으며 평가의 과정을 거치게 되고, 주요한 성공 사례는 일종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것은 범례로서 앞서 묘사한 사례 기반 추론의 기초가 될 수 있다 (Nersessian 2003, pp. 197-198). 모형화의 두 번째 기초는 유비이다. 너세시안에 의하면 유비란 추론의 길잡이일 뿐만 아니라 추론의 산출에도 기여한다. 전기 현상에 대한 문제풀이에서 보통 우리는 흐르는 물과 같은 유비를 쓰고, 기체 현상을 다루면서 우리는 당구공과 같은 유비를 도입하여 문제상황을 모형화한다. 개념적 혁신은 이러한 유비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동떨어진 두 영역의 ‘잠재적 유사성’을 인식하는 것은 종종 새로운 개념과 산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곤 한다. 뉴턴의 혁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상계의 행성과 지상계 투사체의 ‘잠재적 유사성’을 인식하여 새로운 모형화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Nersessian 2003, pp. 198-199).

새로운 모형화에 성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내적 모형화 뿐만 아니라 외적(external) 모형화도 사용한다. 외적 모형화는 역시 문제해결을 위해 두드러진 차원만을 추출하여 만들어지며, 보통 다이어그램과 문자, 기호들이 동원된 시각적인 모형을 구성한다. 외적 모형화는 특정한 측면에 대한 집중과 추론의 조직화 및 모형의 저장과 지속적인 수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또한 외적 모형은 모형화의 개인적 성공을 뛰어넘도록 해준다. 외적 모형은 공동체 내부에서 공유할 수 있는 내적 모형을 구성하도록 도모하고 과학적 모형을 널리 퍼지도록 만듦으로써, 과학의 성과가 사회에서 소통, 비교, 평가되어 다음 단계로 이전할 수 있도록 하는 매우 중요한 밑천을 형성한다 (Nersessian 2003, p. 200).


7. 구체적 사례와 추상적 모형

스키마 이론과 신경과학에서의 연구는 앞서 얘기했던 사례기반 추론과 모형기반 추론에 일정한 해명을 해준다. 스키마란 일종의 자료 ‘구조’이다. 대상의 유사관계 집합은 동형의 스키마로 담을 수 있는 자료들의 집합으로 볼 수 있으며, 종 분류는 스키마의 종류에 따른 분류로 볼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F=ma와 같은 스키마에 의해 담을 수 있는 자료들은 유사관계로 묶이게 되어, 고전역학의 부분적인 패러다임을 구성하게 된다. 그리고 스키마 구조에 내장된 F, m, a의 관계는 그 구조 내에서만 상호적인 의미를 획득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신경과학에서는 이러한 스키마가 메모리에 저장된다기보다는, 뉴런의 연결(의 강도) 자체에 함축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 뉴런의 연결과 강도는 계속되는 투입자료에 따라 변화가 가능한 것으로 설명한다 (Nickles 2003, pp.163-164). 이러한 스키마 이론은 사례기반 추론의 한 난점을 해명하면서 모형기반 추론에 대해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 일정한 수준에 있는 과학자들은 과거 자신이 풀었던 문제들을 모두 기억해내지 않는다. 또한 앞서 구체적인 사례는 추상화를 거쳐 저장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과학자는 범례와 연습문제들을 통해 학습하는 것이 최선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들은 구체적 사례와 추상적 모형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데, 다행히 이러한 갈등에 대해 스키마 이론과 신경과학은 일정한 답을 주고 있다. 우리 신경망이 그런 식으로 학습을 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제를 풀기 위해 대상의 특정한 속성만이 중요하다면 그 속성만이 추상화되어 범례로 기억되며, 그렇게 투입되는 정보에 의해 신경망의 연결과 강도가 굳어지면서 스키마를 형성해내는 것이다. 또한 반복적으로 상기하게 되는 몇 개의 대표적인 범례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사례들은 점차 지워지게 된다. 그렇게 일정 강도의 스키마가 굳어진 후, 전문가가 된 과학자는 몇 가지 대표적인 추상적 범례만으로도 유사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풀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점은 사례기반 추론과 모형기반 추론의 인지적 기초를 더 명확히 해준다.


8. 문제풀이의 결과

새로운 문제풀이 중에서 패러다임을 명료화하는 데 기여한다고 여겨지는 것은 새로운 범례가 되어 범례집합에 추가되며, 새로 추가된 범례로 인해 쓸모가 없어진 몇몇 과거의 범례들은 집합에서 축출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상과학은 패러다임을 명료화하고 문제풀이 능력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누적적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풀이를 범례에 대한 패턴 매치(pattern match)의 과정으로 보았을 때, 패턴매치는 언제나 상호적이다 (Nickles 2003, p. 169). 문제풀이에 적용된 범례가 문제와 딱 들어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새로운 문제는 범례들의 조합으로도 정확히 맞지 않을 수 있는데, 이 경우 문제가 범례의 적용으로 풀 수 있는 형태로 바뀔 수도 있지만, 범례가 문제에 맞게 변형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범례에 대해 어느정도 다양한 해석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V=IR을 인정한다고 할 때, 그것을 경험적 일반화로 해석해야할지, 저항에 대한 정의로 해석해야할지는 불분명했고, 그 해석에 있어서 전자에서 후자로의 변형은 전기 이론에 상당한 변화를 초래했다. 또 다른 예로, 멕스웰의 전자기장 이론의 탁월성에 대해서는 당시 과학자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그 이론의 물리적 모형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헤르츠의 “멕스웰의 이론은 곧 맥스웰의 방정식이다”라는 말은 이런 상황을 반영한다 (하만 2000, p. 153).

이런 과정을 거친 문제풀이의 결과가 기존의 범례들과 다소 이질적이라도 그것이 매우 성공적이라면, 그것은 새로운 범례로 인정되어 기존의 범례집합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 새로운 문제풀이가 가진 함축은 과거의 범례들의 함축을 넘어설 수 있으며, 때로는 과거의 범례들과 모순될 수도 있다. 즉, 범례집합에는 매우 이질적인 범례들이 공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질성에 대한 반응은 통일적이지 않다.

첫째, 이질적이라는 것을 아예 모를 수도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범례가 가진 함축을 모두 알 수 없다. 어떤 경우, 그 함축이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혁명이 시작되곤 한다. 쿤은, 양자역학을 탄생시킨 것으로 알려졌던 흑체복사 문제가 당시 물리학자들이 씨름하던 여러 문제 중 하나일 뿐이었으며, 플랑크의 가설이 본질상 고전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설이 지닌 혁명적 함축 또한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쿤은 이어서 그 혁명성을 명시화시킨 장본인은 플랑크가 아니라 또다른 문제를 놓고 씨름을 하던 아인슈타인과 에른페스트이며, 그들은 플랑크의 작업을 ‘오독’함으로써 혁명적 해석을 탄생시켰다고 주장했다 (홍성욱 1999, p. 156; Nickles 2003, p. 154).

둘째, 이질적인 둘을 조화시키려 노력할 수 있다. 18세 말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해석학적 방법은 기하학적인 지형에서 최소거리의 경로를 찾는 순수 수학적인 문제풀이를 역학에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역학에 적용된 이 해석학적 방법에 의하면, 물리적 세계에 대해 ‘힘에 의한 운동의 변화’라는 그림을 상정하지 않아도, 추상적인 해석학적 정리를 가정하는 것만으로 문제를 풀 수 있었다. 그러나, 톰슨과 타이트는 ‘해석 동역학’을 재구성하면서 “힘의 평행사변형의 원리, 가상적 일(virtual work)의 원리, 달랑베르의 원리 모두가 해석학적 정리로부터 유도되었다기보다는 뉴턴의 운동법칙에서 유도될 수 있음에 주목했다 (하만 2000, p. 101). 그들에게 뉴턴 역학과 해석학적 방법은 동등한 것이었다. 둘은 그렇게 동등한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최종적인 결론은 그 이후에 나타난다. 사실상 해석학적 방법은 뉴턴 역학의 함축을 넘어섰다. 해석학적 방법에서 실제 경로를 구하기 위해 도구적으로만 쓰였던 가상적 일의 개념은 양자역학이 정립되면서부터 그 물리적 의미를 얻게 된다. 거꾸로, 해석학적 방법 없이 양자역학이 성립된다는 것 또한 상상하기 어렵다.

셋째, 둘이 이질적이란 것을 알지만, 한쪽만 인정하고 다른 하나는 도구적으로만 이용할 수 있다. 쿤에 의하면, 코페르니쿠스의 지구 운동 개념은 천문학의 기술적인(technical)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부산물로서, 어떻게 보면 지극히 정상과학적인 활동의 결과였다. 그의 우주론은 지극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이었고, 그의 작업도구는 모두 프톨레마이오스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지구 운동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우주론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코페르니쿠스가 이룩한 천문학적 성과는 당시 전문적인 천문학자들에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국면에서 대부분의 천문학자가 취한 태도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계산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물리적 실재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더라도, 몇십년 동안이나 그 물리적 의미에 대한 해명 없이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과 공존하며 케플러와 갈릴레오를 기다릴 수 있었다 (Kuhn 1957, pp. 134-200).

이렇듯, 문제풀이 과정은 과거의 범례의 새로운 문제로의 적응과 재해석을 요구한다. 범례의 해석에 대한 용인된 변이들은 경우에 따라 과학의 변화와 발전에 큰 또는 예측치 못한 역할을 하게 된다 (Nickles 2003, pp. 154-155). 니클즈가 강조하기를, 교과서 속의 범례는 순수히 과거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접하는 범례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재해석되어 살균되고(sanitized) 이상화되어 역사적 맥락이 제거된 역사적 사례이다 (Nickles 2003, p.168)." 이러한 점에서, 쿤의 나쁜 역사서로서의 교과서와 나쁜 역사가로서의 과학자는 역으로도 이해될 수도 있다. 즉, 좋은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쁜 역사가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학자들의 역사 왜곡과 범례의 변형 속에서, 어떤 범례들은 도태되고, 어떤 범례들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남아 지금까지 전수된다. 이러한 점에서 범례는 스스로의 역사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고 범례의 변화와 역사는 항상 각각의 과학자들이 씨름하던 문제가 무엇이었는가에 관련된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범례의 계통발달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Nickles 2003, pp. 168-169. p. 155).


9. 정상과학적 문제풀이 활동과 혁명

지금까지 나는 정상과학을 범례를 통한 문제풀이 활동으로 놓고 이를 인지적인 접근방식을 동원하여 논의했다. 이미 눈치를 챘을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문제풀이 활동은 꼭 정상과학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앞에서 소개한 예들에는 이미 혁명적인 사례까지도 들어있었다. 그렇다면, 똑같은 방식의 문제풀이 활동이 어떠한 조건에서 혁신 또는 혁명을 낳는 것인가? 일차적으로는 계속 언급했던 영역간의 교차에서 그러한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다른 영역에서 이용되던 문제풀이를 유비와 함께 가져다 쓰는 경우, 다른 영역에서의 이질적인 개념체계도 함께 전송되곤 하는데, 이 때 개념적 통합 또는 혁신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는 이와 함께 관련된 요소들을 몇가지 더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혁신적 모형화는 인간의 인지적 추론능력에 달려있다. 둘째, 어떤 문제를 풀고 있었는가에 관련되어 있다. 셋째,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무엇인가에 달려있다. 넷째, 과거성과에 대한 태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각각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혁신적 모형은 인간의 인지적 추론능력에 달려있다. 그러나 앞에서 전제했듯이, 모형기반 추론, 사례기반 추론 등은 모든 인간이 이미 사용하고 있는 능력이다. 물론, 사람마다의 능력 차이가 하나도 없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어느 분야에나 능력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고르게 분포하기 나름이며, 과학자 사회가 꼭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보긴 어렵다. 인간의 인지적 추론능력은 혁신적 모형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통의 전제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둘째, 어떤 문제를 풀고 있었는가에 관련되어 있다. 코아레에 의하면, “근대 물리학에 있어서 그것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하늘에 있다 (Koyre 1968, p. 1).” 만약 코페르니쿠스가 우주론의 문제에 매달렸다면 지구의 운동을 끝까지 밀고 나가 그렇게까지 탄탄한 집을 짓지는 못했을 것이다. 즉, 지구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수리행성 천문학이었지 우주론이나 철학이 아니었다 (Kuhn 1957, p. 144). 또 다른 예로, 카르노가 옛 칼로릭 이론을 전제했음에도 카르노 싸이클과 열역학 제2법칙의 한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바로 열기관에 대한 공학적인 문제를 놓고 씨름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문제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은 과거의 범례를 활용하는 방식도 다르게 만든다.

셋째,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무엇이었는가에 관련되어 있다. 정상과학 또는 사례기반 추론에 의하면, 문제풀이에 동원되는 자원은 보통 과거의 성공적인 사례, 즉 범례이다. 패러다임을 구성하는 범례는 문제풀이에 동원되는 자원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 이야기했듯이 새로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과거의 범례를 변형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다른 영역의 분과 또는 과학 외부의 자원들도 유비 등의 기법에 의해 함께 동원될 수 있다 (Nersessian 2003, p. 195). 멕스웰의 전자기장 이론은 패러데이의 이론뿐만 아니라 (패러데이는 몰랐거나 사용할 수 없었던) 다양한 수학적 모형을 추론의 자원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Giere 1990, p. 423).

아이젠슈타인에 의하면, 르네상스 중기 활판인쇄가 보급되면서 범람한 문헌들 속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이전과는 달리 대규모의 문헌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닥치는 대로 천문 관측 기록을 수집함으로써, 과거 보고서들 간의 모순을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었으며, 장기적 주기에 관한 여러 가지 기술적(technical) 문제에 정열을 쏟을 수 있었다. 이는 광범위한 문헌을 접하기 힘들었던 과거 천문학자들은 할 수 없었던 작업이었다. 엄청난 천체 관측 자료로부터 그는 과거 천문학자로서는 할 수 없었던 또한 코페르니쿠스는 ‘입수 가능한 모든 철학서’를 읽어댔으며, 지명, 달력, 연표, 주화 등까지 조사했다. 한편, 당시 새로이 번역된 학술서나 수학 제표 또한 코페르니쿠스가 사용할 수 있었던 자원이었는데, 당시 출간되어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는 코페르니쿠스 시대의 천문학자에게 감동적인 새 분야를 개척시켜 주었다. (아이젠슈타인 1991, pp. 213-216). 과연 이러한 넘쳐나는 자원이 없었더라면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

넷째, 과거성과에 대한 태도가 관련된다. 기어리는 가상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17세기 전에는, 전염병이 돌면 신성하게 여겨지는 아이를 순교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전염병과 아이를 관련짓는 이론적 모형은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인지능력과 추론능력이 우리와 다를 것이라 생각하긴 힘들다. 기어리는 그들이 그러한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할지 묻는다. 그에 의하면, 그들의 세계에 대한 관념을 바꾸기 위해서는 대안적 모형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보통 회의주의자이기보다는 패턴매쳐(pattern matcher)이다.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과학혁명기에 회의주의가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Giere 1996, pp. 539-540). 전통적 관념에 회의적이기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활용가능한 다양한 모형의 등장 또는 변칙사례의 증가 등은 역사적으로 일정한 시기를 회의적인 분위기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10. 에필로그

지금까지 살펴본 인지적 접근은 그동안 해명하기 어려웠던 과학활동의 동학(dynamics)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한 틀을 제공하고 있다. 그동안 강조되어 왔던 규칙과 정의 및 (정언적) 합리성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그 자리를 유사관계에 의거한 개념 및 표상, 사례-모형 기반 추론을 채우고, 과학활동의 핵심에 과학의 ‘내용’이 아닌 과학을 수행하는 평범한 ‘인지적 행위자’를 둠으로써, 과학활동의 양식과 내용의 변화를 유연하게 설명하는 데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너세시안, 기어리 등이 지적하고 있듯이, 과학활동은 평범한 인간의 인지적 능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패러다임 내의 범례와 인지적 능력만으로는 그 결과가 결정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이 ‘과학자가 어떤 문제를 풀고 있는가’와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무엇인가’이다. 이 점에서 역사는 과학활동을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자원으로 들어와야 한다.

나는 여기에 과학이 사회적 활동이라는 점이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이 하지 못하는 과학을 인간이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인간의 뛰어난 인지능력, 특히 고수준의 추상화 능력을 들 수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성과가 축적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성과를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자원으로 활용될 수 없고, 우리의 능력은 세대가 거듭되더라도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제자리걸음을 끊는 고리는 사람들과의 소통과 내용의 축적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외적 표상의 한 형태인 언어이다. 인지적 접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례-모형 기반 추론에서 언어의 역할이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적 모형을 자기만의 것이 아닌 사회적인 자산으로 만들어 축적을 가능케 하는 언어와 기호 및 문자의 역할을 재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언어 그 자체는 고도의 추상력이 발휘된 표상의 형태로 인간의 인지능력을 보여주는 지표로서도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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