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에 대한 모의 실험
생물학의 철학 기말보고서
진화에 대한 모의 실험 이타성 진화 모형에서 일반적 모형까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2004-20309 정동욱 | 담당교수 : 장대익 | 제출일 : 2006. 6. 20.
1. 들어가며: 자연선택과 이타성
다윈에 따르면, 자연은 혹독한 생존경쟁의 장이다. 다양한 변이들 중 어떤 변이가 다른 것들에 비해 유리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 개체를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일반적으로 그 자손들에게 되물림될 것이며 그 자손들도 살아남을 확률이 더 커질 것이다. 다윈은 이러한 원리를 자연선택이라 불렀으며, 자연선택은 진화와 적응을 설명하기 위한 핵심적인 키워드가 되었다. 그러나 생물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정도로 나타나는 이타적 행동들은 기이해 보인다. 이처럼 이타적 행동을 자신의 적합도(fitness)를 낮추면서 다른 개체의 적합도를 높이는 행동으로 정의한다면, 이타적 행동은 그 정의 자체에서부터 선택되고 되물림되기 어려운 운명을 타고난다. 그럼에도 자신의 적합도를 낮추는 이타적 행동들이 자연선택의 과정에서 도태되지 않고 지금까지 대물림되고 있다는 사실은 진화생물학계의 오래된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
2. 집단 선택 이론과 그 난점
이 수수께끼에 대한 전통적이면서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한 개체의 이타적 행동이 그 개체가 속한 집단의 적합도를 높여주는 것으로 상정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꿀벌은 둥지에 침입한 자를 쏘면 창자가 쏟아져 죽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의 목숨을 희생하여 자기가 속한 집단을 돕는다. 마찬가지로 까마귀는 포식자가 접근하면 종종 경계의 울음소리를 낸다. 이런 행동은 자기 자신에게 해롭지만, 그가 속한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에겐 이익이 된다 (소버 2004, p. 178).
다윈도 사회성 곤충에서 나타나는 불임 계층에 대해서 비슷한 답을 했다. 종의 기원에서 이 문제에 대해 그는 “어떻게 일꾼들이 불임이 되었는가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구조상의 놀라운 변형들이 주는 문제보다 크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 만일 그러한 곤충들이 사회성 동물이었다면, 그리고 일정 수가 매년 증식은 할 수 없고 일만 하도록 태어나는 것이 그 공동체에 유익한 것이었다면, 나는 이것이 자연선택에 의해서 의루어지는 데에 어떤 대단한 난점도 볼 수 없다 (Darwin 1859, p. 236 ; 소버 2004, p. 181에서 재인용).”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자연선택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집단과 집단 사이의 경쟁이라는 것이다. 개체들이 단일한 집단의 테두리 내에서 다른 개체들과 경합한다면 자연선택은 이타적인 개체보다는 이기적인 개체를 선호할 것이다 (소버 2004, p. 179). 그러나 집단 간에도 경쟁이 일어난다고 가정하면, 이타적 행동을 하는 개체가 많은 집단이 다른 집단에 비해 높은 적합도를 갖게 되어, 집단 간의 경쟁에서 선택될 수 있다는 설명인 것이다. “불임은 그 유기체에게는 불이익이다. 그러나 불임 일꾼을 보유하는 군들은 그렇지 않은 군보다 더 잘해낼 수 있을 것이다 (소버 2004. p. 182). 그러나 집단 선택 이론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다. 예컨대, 이타적 개체가 많은 A집단과 이기적 개체가 많은 B집단을 상정해보자. B집단에 비해 높은 적합도를 갖춘 A집단이 선택됨으로써 간단히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문제가 A집단 내에서 발생한다. A집단 내에서 이기적 개체(무임승차자)의 확산을 막을 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집단의 선택은 개체 또는 그 유전형질의 대물림을 보장하지 못한다. 둘째로, 집단과 그 집단의 적합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자의성 문제가 있었다. 집단의 적합도는 인위적으로 설정하거나, 집단 내 개체들의 적합도의 평균 정도로 계산될 수 있을 뿐인 것처럼 보였다. 즉, 집단의 개념은 모호했다.
3. 포괄적응도 이론
위와 같은 집단 선택 이론의 난점을 이유로, 집단 선택으로 보이는 현상들을 개체 또는 유전자 수준으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등장했다. 이는 개념적인 문제에서 시작했다. “[윌리엄즈에 의하면] 군 선택 가설은 부주의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소버 2004, p. 184). 그리고, 해밀턴은 “어떻게 협조적 행동이 협조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소버 2004, p. 184). 집단의 선택이 개체 또는 그 유전형질의 대물림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타적 형질이 대물림될 수 있는 근거는 그 형질을 가진 개체의 적합도(fitness)를 높이는 것에서밖에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 이타적 행동이란 자신의 적합도를 낮추는 행동이라 정의한 바 있는데, 이렇게 되면 정의상 모순이 되는 것 아닌가? 해밀턴 등은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포괄적응도 개념을 내놓았고, 이에 따르면, 겉보기에 자신의 적합도를 낮추는 행동은 결국 자신의 포괄적응도를 높이는 행동이기 때문에 대물림된 것이 된다. 이에 따라, “해밀턴의 논문들은 겉보기에 이타적인 행동들이 진짜로 이타적이라는 생각을 허물어뜨린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 논문들은 또한 돕는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군 선택이 도입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소버 2004, p. 184).”
예컨대, 일개미의 번식 포기와 여왕개미에 대한 봉사는 자신의 포괄적응도를 높이는 행위인데, 왜냐하면 개미의 특별한 생식 형태 상, 여왕개미의 번식을 돕는 것이 자신이 직접 번식하는 것보다(또는 만큼)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주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생물학적으로 최고의 이타적 행위라 할 수 있는 번식 포기가 어떻게 대물림될 수 있는지가 군 선택과 같은 의심스러운 개념에 호소하지 않고서도 완벽하게 설명되는 것처럼 보였다.
4. 집단 선택 이론의 귀환
그럼에도 소버(Elliot Sober)는 집단 선택 이론을 구출하고 싶어했다. 그는 먼저, ‘선택의 단위’ 문제를 자신의 입맛에 맞는 형태로 설정한다. 소버에 의하면, 선택의 단위 문제는 어떤 유전형질이 왜 선택됐느냐, 즉 ‘어떤 단위의 적합도에 도움을 주었기에 선택된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어떤 형질이 개체의 적합도를 높였기 때문에 선택됐다면 그것은 개체 선택이며, 속한 집단의 적합도를 높였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라면 그것은 집단 선택이라는 것이다 (소버 2004, p. 176). 이러한 문제 설정은 한 형질이 유전자/개체/군의 적합도에 미치는 영향이 각각 다를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는 공격의 대상인 도킨스에게서도 그 근거를 뽑아낸다. 도킨스가 제시한 무법유전자는 유전자 본인에게는 이롭지만, 그것을 포함한 개체나 집단에게는 해롭기 때문이다. 소버는 이런 예시들을 통해 여러 수준에서의 선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무법유전자의 형질은 유전자 선택인 반면, 이타적 형질은 집단 선택이 된다. 소버의 전략은, 이타적 형질이 선택되었더라도 꼭 그것이 그 개체에 이익이었어야 할 필연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둘째로, 그는 부분과 전체 사이에 존재하는 통계의 오류를 지적한다 (소버 2004, pp. 193-197). 한 집단의 궤적을 결정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우리의 직관은 적합도가 더 높은 형질은 빈도가 증가하고 더 낮은 형질은 감소한다는 것일 것이다. 이것은 “선택 과정이 단일한 군의 틀 내에서 일어난다면” 사실이지만, 그 집단들의 집합체까지도 고려되는 체계에서는 오류이다 (소버 2004, p. 193). 이러한 지적에 따르면, 적절한 집단 설정 하에서 “이타주의는 각 군 내에서는 빈도가 감소하지만 전체 집합체에서는 빈도가 증가”할 수 있다 (소버 2004, p. 195).
셋째로, 집단의 분화가능성을 제기한다 (소버 2004, pp. 197-198). 앞의 문단에서 지적했듯이, 한 집단 내에서는 이기주의가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각 집단에서는 이기주의가 고정될 위험이 있다. 이것이 바로 도킨스가 말하는 내부로부터의 전복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소버는 집단이 분화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예컨대, [이타주의:이기주의=45:5]인 집단을 가정하여 이 집단이 다른 [5:45]의 집단과 경쟁하여 선택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세대를 거치면서 이 집단은 점점 성장하는 반면, 이타적 개체의 빈도는 줄어 [80:20].. [140:60]와 같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정도 성장했을 때, 집단이 [45:5], [45:5], [45:5], [5:45]로 분화된다면, 앞의 세 집단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게 되고, 마지막 집단은 도태될 것이다.
넷째로, 집단의 구조가 이타적 형질의 핵심적인 요건임을 강조한다. 그의 요점은 이타적인 개체가 집단 내에서 이타적인 개체와 자주 상호작용한다면, 즉 이타적인 개체가 많은 집단에 속한 이타적인 개체는 지속적인 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의 강점은 개체들간의 상호작용이 혈연과 무관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며, 이러한 논의를 통해 소버는 이타주의가 진화할 수 있는 집단의 구조적 조건에 대해서 정당한 조건을 제기한 셈이다.
5. 이타주의 진화의 전제조건과 홀랜드의 모의 실험
소버의 집단 선택 모형은 이타주의가 진화하기 위한 조건을 해명해주고 있다. 첫 번째로, 이타적 개체는 이타적 개체와 상호작용할수록 좋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집단이 분화가능한 유연한 구조일수록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버는 어떻게 이러한 구조와 상호작용이 가능할 수 있는지, 또 그런 방식으로 형성되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소버의 모형에서, 집단의 분화는 그 모형을 가지고 조작하는 사람에 의해 인위적으로 또는 자의적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이타적 개체들이 다수인 집단이 어떻게 형성가능한지, 또는 이타적 개체가 이타적 개체와 선택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연스런 메커니즘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한 과정이 인위적인 모형 조작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홀랜드(John H. Holland)의 에코(echo) 모형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일정한 해답을 준다 (홀랜드 2001). 에코 모형의 출발점은 행위자의 꼬리표(tag)와 내부모형(internal model)이다. 각 행위자는 다른 행위자의 꼬리표를 보고 자신의 내부모형을 통해 예측을 하고 행동을 한다. 이를 통해, 각 행위자는 다른 행위자와 만나 선택적으로 다른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 다음은 그의 모의 실험을 요약한 것이다.
그는 ‘집단화된 죄수의 딜레마’ 실험을 통해, 꼬리표 없는 상호작용과 꼬리표 없는 상호작용을 비교한다 (홀랜드 2001, pp. 195-200). 그의 모형에서 행위자의 활동양식은 다음과 같다.
(i) 각 행위자는 일련의 규칙들에 의해 결정되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ii) 접촉이 무작위로 이루어지고, 접촉한 쌍은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한 번 한다. (iii) 행위자는 여러 차례 게임을 하여 점수가 누적된다. (iv) 행위자의 점수가 미리 정한 값보다 커지면, (돌연변이를 넣어) 자기 복제를 한다.
첫 번째 실험에서 각 행위자는 전략을 지정하는 염색체를 가지지만, 행위자들은 꼬리표가 없기 때문에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 경우 행위자의 전략(내부 모형)은 숨어 있다. 두 번째 실험에서는 각 행위자의 꼬리표가 노출된다. 그러나 꼬리표와 전략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 관계는 없다. 그 모든 것이 염색체의 개별적인 부분이고, 모든 것이 적응에 의해 변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홀랜드 2001, p. 197).
전자의 실험을 생각해보자. “게임의 대상이 마구잡이로 선택되기 때문에 상대방이 어떤 개체인지 확인할 수 없다. 여기에는 조건부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없다. 이 집단에서 생산적인 맞대응 전략은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도 성립되지 않는다. 상호작용은 대개 서로 배신하는 형태로 이루어져서, 서로 협력하는 것보다 명백히 불리하게 일어난다. (홀랜드 2001, pp. 198-199).”
반면, “꼬리표를 가진 행위자는 완전히 다른 경로로 진화한다. 전략이 진화함에 따라 어느 시점에서 (1) 맞대응(tit for tat) 전략을 채택하는 행위자가 나타나고, 맞대응 개체만이 가진 꼬리표에 대해 조건부 상호작용을 하는 행위자가 나타난다. 그것은 행위자가 맞대응 하에서 (자주) 서로 협력하는 개체들끼리만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로 변식률이 높아져서 이 행위자와 거기에 협력하는 동반자들이 집단 내에 퍼진다. 재조합이 계속되어 맞대응 전략을 가진 행위자에 대해서만 상호작용을 하는 행위자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하위 집단은 한번 만들어진 다음에는 다른 전략의 침입에 강하게 저항한다 (홀랜드 2001, p. 199).”
이로써 행위자들은 안정적인 집단의 테두리 안에서 정착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홀랜드의 모형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협력적 집단의 안정화’ 이상이다. “예를 들어 의태 전략이 가능하다. 어떤 행위자가 다른 전략을 쓰면서 꼬리표만 맞대응 행위자와 같은 것을 가진다. 행위자들이 명확한 기능적 의미를 띤 꼬리표를 가지기 때문에 다른 행위자들에게 새로운 생태적 지위가 생긴다. 이 생태적 지위는 대개 그것이 <기초하는> 행위자가 계속 존재한다는 조건에 묶여 있으므로 숫자가 많아질 수 없다. ... 흉내내는 개체가 증가함에 따라 대상들도 속임수에 대처하기 때문이다. 음의 되먹임(negative feedback)이 생겨서 의태의 확산을 제한한다 (홀랜드 2001, pp. 199-200).”
이러한 홀랜드의 모형은 소버가 말한 집단의 구조가, 무작위적인 전략을 가진 행위자들의 집단에서 출발하여 점차 형성될 수 있음을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건은 행위자들의 꼬리표와 내부모형이다. 이러한 꼬리표와 내부모형은 소버가 지적한 집단의 분화에서도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모형화하기 위해서는 자리(place) 개념과 행위자의 이동가능성이 필요하다.
위의 죄수의 딜레마 실험에서는 단순화를 위해 그것을 제외했지만, 원래 홀랜드는 일반적인 에코 모형에서 행위자의 이동가능성을 부여했었다 (홀랜드 2001, p. 139). 각 자리(place)에서는 자원이 공급되고, 자리에도 꼬리표가 있다. 즉, 각 행위자는 자리와도 상호작용한다. 한편, 행위자는 동일한 자리에 있는 다른 행위자와만 상호작용할 수 있으며, 한 싸이클(cycle)이 도는 동안 아무런 자원도 획득하지 못한 행위자는 옆자리로 이동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개념을 추가하여 ‘집단적 죄수의 딜레마 실험’을 다시 돌린다면, 소버가 지적한 ‘집단의 분화’까지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왜냐하면, 사기꾼(무임승차자)가 확산되는 상황이 닥쳤을 때, 그 속임수에 대처하는 방법이 진화할 수도 있겠지만, 피해를 본 어떤 개체들은 옆자리로 이동하여 새로운 집단을 형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6. 홀랜드 모형의 가정들
홀랜드의 모의 실험은, 소버가 말한 이타주의 진화의 전제조건들이 전제가 아닌 진화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홀랜드의 모형은 무작위적인 개체들의 전략과 상호작용으로부터 진화하기 시작된 계가 소버의 전제조건에 해당하는 패턴들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행위자들은 점차 전략을 진화시켰고, 이타적 또는 맞대응 행위자들은 자기들끼리만 상호작용하도록 적응하여 배타적인 집단을 형성한다. 또한, 사기꾼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행위자는 이웃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집단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의실험의 결과는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혹시 이러한 결과는 자의적인 가정에 의해 결과가 예정되었던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 모의실험에서 배울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홀랜드가 에코 모형을 만들면서 가정한 것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홀랜드는 첫째, 적응성 행위자를 가정한다. 그 행위자는 규칙기반 행위자이면서도 규칙은 변경가능하다. 에코 모형에서 행위자들간의 (자원교환) 상호작용은 규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 규칙은 서로의 꼬리표(표현형)와 조건표(내부모형)에 의해 결정되며, 꼬리표와 조건표는 염색체에 의해 바로 결정된다. 행위자는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염색체를 변경할 수 없다. 다만, 행위자의 자원이 쌓이면 그는 배우자를 찾아 자식을 생산하고 자원을 물려준다. 이 과정에서 자식의 염색체는 교차(crossing over)와 돌연변이(mutation)를 통해 부모와 달라진다. 여기서 기대하는 효과는 명확하다. 여러 행위자들간의 상호작용에서 성공적인 행위자는 자식을 낳을 확률도 높아질 것이고, 또한 자식은 두 부모의 염색체의 교차 결과를 물려받을 뿐이다. 이러한 가정의 결과는 복제자와 상호작용자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진화의 일반적인 메커니즘을 잘 모방한 것으로 보이며, 이 가정이 소버의 결론을 곧바로 함축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둘째, 적합도는 명시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각 행위자는 주변의 다른 행위자 및 자리(place)와의 상호작용을 통한 자원교환만을 할 뿐이고, 자원이 쌓이면 자식을 낳을 뿐이다. 이 모형은 행위자에게 적합도값을 부여하지 않는다. 또한 적합도를 유전자나 집단에도 귀속시키지 않는다. 이 모형에서 “모든 행동의 가치는 게임에서 현재 위치와 저장고의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 (홀랜드 2001, p. 124).” 실제로 각 개체의 적합도는 맥락에 따라 크게 변한다. “의태나 공생의 경우에 한 행위자의 복지는 다른 행위자의 존재에 크게 의존한다. 이런 경우에 적응도(보상)은 묵시적으로 정의된다. 우리는 염색체에 고정된 적응도를 부여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적응도가 어떻게 정의되는 맥락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 따라서 우리의 첫 번째 과업은 적응성 행위자의 복지가 미리 결정된 적응도 함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들끼리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되는 모형을 만드는 것이다 (홀랜드 2001, p. 134). 즉, 그동안 자의적으로 규정된 적응도 함수를 잣대로 개체를 죽일지 말지 결정했던 모형에 비해, 홀랜드의 모형은 장점을 가지는데, 그것은 ‘적응도의 진화’까지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앞에서 예시했던 ‘집단적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집단의 안정화 이후 사기꾼의 출현은 집단의 안정화에 따른 변화된 적응도를 반영한다.
셋째, 행위자는 내부모형이 가정된다. 이는 포유류에만 해당되는 능력을 부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홀랜드 모형에서 가정한 내부모형은 매우 원시적인 형태의 내부모형만을 가정했다. 즉, 이 모형의 행위자들은 명시적 형태의 추론을 할 줄 모르며, 단순한 문자열의 일치만을 비교하여 원시적인 ‘예측’을 할 뿐이다. 이는 매우 간단한 ‘자극-반응’이라는 무조건 반사의 진화에 해당한다. ‘집단적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진화된 규칙을 가지고 상대방을 가려가며 상호작용을 했던 행위자는 다만 자신의 조건표와 일치하는 꼬리표를 가진 상대와만 상호작용하는 규칙을 형성했던 것인데, 이는 원시적인 형태의 ‘예측’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예측활동은 모든 생물에게 공통적이거나 모든 고등한 예측활동의 원형일 것이다. 새는 학습에 의해 제왕나비를 싫어하게 되었는데, “곤충을 먹는 새는 오렌지색과 검은색의 특정한 날개 무늬를 가진 나비는 맛이 엉망이라고 예측한다 (홀랜드 2001, p. 56).” 이러한 새는 그와 겉모양만 비슷한 부왕나비마저 싫어하게 된다. 이러한 예측활동의 원형은 박테리아에게도 나타난다. “박테리아는 화학물질의 농도가 가장 크게 변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서, 은연중에 그 방향에 먹이가 있을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예측한다 (홀랜드 2001, p. 57).” 이를 위한 박테리아의 도구는 홀랜드의 모형에서 설정한 묵시적 내부 모형과 비슷하다. 포유류의 경우에는 몇몇 종류의 명시적 내부 모형을 사용하여 예측을 할 수 있으며, 인간의 경우에는 명시적 외부 모형까지도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은 박테리아의 예측능력에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홀랜드의 묵시적 내부모형 가정은 최소한의 것으로서 정도를 넘어서는 가정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요컨대, 홀랜드의 가정들은 최소한의 것으로, 결론을 미리 가정하지 않는다. 또한, 적응도 부여의 방법에서 보여지듯이, 홀랜드의 모형은 그동안의 모형작업에서 이루어졌던 것들보다도 더 현실에 부합한다.
7. 에코 모형이 보여주는 시사점
에코 모형에서, 꼬리표의 역할은 자신을 다른 행위자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각 행위자는 다른 행위자의 꼬리표를 자신의 조건표(내부모형)과 일치 여부를 따져 상호작용을 결정한다. 이는 상대와의 접촉 시에 일종의 무조건 반사와 같은 행동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꼬리표와 내부모형을 가진 염색체는 자신의 자원의 축적여부에 따라 (교차와 돌연변이를 통해) 자신과 비슷한 자식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싸이클의 반복은 어떠한 모습을 만들어낼까?
첫째로, 이 모형의 궤적은 비선형적이다. 꼬리표가 없는 경우에는 상대가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행위자는 어떤 상대와 만나도 무차별적으로 동등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상호작용 하에서, 시간이 흐르면 그 결과는 수렴 또는 진동하는 모양새를 띠게 된다. 그러나, 각 행위자들에게 꼬리표를 부여하고 그에 따라 다른 상호작용을 할 수 있도록 하면, 각 행위자는 자기 주변의 맥락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며, 전통적인 수학과 통계의 방식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궤적을 갖게 된다. 즉, 외삽을 통한 동향분석, 평균을 이용한 평형점 찾기, 표본을 이용한 통계적 추정 모두 쓸모가 없어진다. 예컨대, 같은 ‘집단적 죄수의 딜레마 실험’과 비슷하게 주식시장 모형을 만들어 돌려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행위자들은 ... 사고팔기 규칙을 개발한다. ... [예컨대] 가격이 40 이상이면 팔고, 40 이하이면 산다. 시장은 금방 진정되어 고전 경제학의 행위자들로 구성된 시장처럼 된다. 그러다가 어떤 행위자가 시장의 <관성>을 이용하는 전략을 개발하여, 값이 오를 때 조금 늦게 팔아서 돈을 번다. 다른 행위자들도 경향을 예측하기 시작하고, ... 시간이 지나 예측의 자기 실현이 충분히 이루어진 뒤에, 이 행동은 점점 더 과장되어 거품이 생기고 결국 공황에 빠진다 (홀랜드 2001, pp. 120-121).”
둘째로, 끊임없이 변하는 염색체에도 불구하고 보존되는 것이 있다. 에코 모형을 돌려보면, 염색체의 일부 패턴은 거의 전체가 공유하게 되고, 또다른 어떤 패턴은 집단에서 공유하여 몇 세대 동안 계속 유지된다. 이는 부모의 스키마들이 재조합되어 자식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유전 알고리즘에서는 이를 스키마라 부른다. 예컨대 염색체배열이 {1,0,#}100로 구성된다고 할 때, [1#0★★…★]형태의 것을 스키마라고 부르는데, 염색체는 이러한 여러 길이의 스키마들을 구성단위(building block)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에코 모형의 실험 결과를 철저히 해부해보면, 어떤 스키마들은 명백히 하나의 단위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며, ‘사후적인 계산’을 통해서는 스키마들마다 적합도를 부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에코 모형은 염색체에 해당하는 전체 “문자열을 한 덩어리로 다루면서도 그 속의 구성단위들을” 조작하고 재조합한다 (홀랜드 2001, p. 111). “이 과정은 묵시적으로만 이루어진다. 문자열은 전체로서만 조작(복제, 교차, 돌연변이)되고, 스키마를 직접 다루거나 거기에 관련된 계산을 하는 법도 없다 (홀랜드 2001, p. 112).” 그러나 이 모형은 “마치 그러한 계산 결과를 이용하는 것처럼 작용한다. 한 세대에서 [사후적인 계산에 의한] 평균 점수 이상인 스키마는 다음 세대에 더 자주 나타나고, 평균 이하인 스키마는 더 드물게 나타난다 (홀랜드 2001, p. 112).”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 세대와 다음 세대 사이에 동일한 개체는 절대로 생기지 않지만, “각 개체가 가졌던 구성 단위는 되풀이된다 (홀랜드 2001, p. 112).“ 실제 세계의 자연선택이 하는 일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자연선택은 보존할 유전자를 결정하기 위해 그것의 적합도를 사전에 계산하지 않으며, 자연선택은 항상 염색체를 전체로서 조작한다. 그럼에도 적합도가 높은 어떤 구성단위는 매우 견고하게 유지된다. 예컨대, ”크렙스 순환은 워낙 견고해서 모든 생물군에서 나타난다 (홀랜드 2001, p. 113).“
8. 결론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홀랜드의 에코 모형은 매우 일반적인 모형으로 진화 현상을 다루는 데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며, 이타주의의 진화와 같은 문제에 대한 일정한 시사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타주의의 진화와 관련하여, 에코 모형은 집단을 가정하지 않고, 적합도 함수를 설정하지 않고도 소버가 지적한 이타성 진화의 전제들(이타적 행위자들끼리의 상호작용 및 집단의 분화)을 그 결과로 보여준다. 에코 모형이 보여준 흥미로운 결과는 그 모형이 가정한 적응성 행위자가 가진 꼬리표와 내부모형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에서 출발한 모형은 이타주의의 진화뿐만 아니라 진화의 복잡한 여러 패턴(다양성, 의태 등)을 그럴듯하게 가시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면 에코 모형은 소버의 다수준 선택 이론 또는 집단 선택 이론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해줄 수 있는가? 에코 모형은 소버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에코 모형은 각 개체가 가진 형질이 어느 단위에 도움이 되었기에 선택되었는지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부분은 여전히 해석의 영역에 남는다. 소버는 여전히 이타적 형질이 집단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에코 모형은 오히려 그러한 판단이 왜 중요한지 모르겠다고 답해주는 듯 하다. 이타적 형질이 어디에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굳이 하지 않아도, 결국에 그 형질은 특정한 맥락 속에서 선택이 됐으며,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형 속에서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소버의 ‘선택의 단위’ 문제에 흥미가 없다. 나는 소버와 그의 반대자(포괄적응도 이론가) 모두 같은 전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형질의 적합도를 계산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렇지만 자연에서는 적합도를 계산하지 않아도 진화가 이루어지며 자연선택은 작동할 수 있다. 적합도 값을 계산하더라도 그것은 사후적인 작업일 뿐이다.
자연선택은 그 값을 계산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계산한 것처럼 행동할 뿐이다.
참고문헌
- 소버, E., 민찬홍 옮김 (2004), 생물학의 철학 (철학과 현실사).
- 홀랜드, John H., 김희봉 옮김 (2001), 숨겨진 질서: 복잡계는 어떻게 진화하는가 (사이언스 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