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적, 인지적, 사회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20 바이트 추가됨 ,  2022년 1월 7일 (금)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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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에서 나는 과학철학자들이 충분한 검토는커녕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던 문제인 과학철학과 인식론 사이의 관계에 주의를 돌리고자 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간주하는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과학철학자이든, 보다 전통적인 부류의 철학자이든, 과학철학이 일종의 응용 인식론이라고, 즉 과학철학은 분석적 인식론의 범주와 도구를 과학이라 불리는 활동을 이해하는 데 사용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1968년 시드니 모르겐베서(Sidney Morgenbesser)가 “과학철학은 과학적 사례들을 활용한 인식론이다.”라고 조롱했을 때(Morgenbesser 1967, xvi),<ref>1960년대 말, 라카토슈는 런던 정경 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진행한 세미나에서 비슷한 관찰을 많이 했다.</ref> 내가 믿기에 그는 이러한 상식을 말했을 뿐이었다. (물론 과학철학에는 응용 인식론이라기보다 응용 형이상학으로 보이는 또다른 측면 — 전통적으로 과학 “기초론”이라 불리는 — 도 있는데, 이 주제는 여기서 검토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장에서 나는 과학철학자들이 충분한 검토는커녕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던 문제인 과학철학과 인식론 사이의 관계에 주의를 돌리고자 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간주하는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과학철학자이든, 보다 전통적인 부류의 철학자이든, 과학철학이 일종의 응용 인식론이라고, 즉 과학철학은 분석적 인식론의 범주와 도구를 과학이라 불리는 활동을 이해하는 데 사용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1968년 시드니 모르겐베서(Sidney Morgenbesser)가 “과학철학은 과학적 사례들을 활용한 인식론이다.”라고 조롱했을 때(Morgenbesser 1967, xvi),<ref>1960년대 말, 라카토슈는 런던 정경 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진행한 세미나에서 비슷한 관찰을 많이 했다.</ref> 내가 믿기에 그는 이러한 상식을 말했을 뿐이었다. (물론 과학철학에는 응용 인식론이라기보다 응용 형이상학으로 보이는 또다른 측면 — 전통적으로 과학 “기초론”이라 불리는 — 도 있는데, 이 주제는 여기서 검토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무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특히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철학의 기원에 대한 이러한 방식은 무해하지 않다. 반대로, 과학철학이란 기본적으로 사례를 활용한 인식론이라는 생각으로 과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식론자의 오만일 뿐 아니라, 과학철학 내의 특정한 한 접근법, 특히 인식적 실재론이 맞다는 것을 전제하는 동시에 적어도 실재론 이상의 탁월한 실적을 기록한 다양한 다른 과학철학의 적절성을 부정하고 있다. 게다가, 과학철학을 응용 인식론으로 보는 관점은 건전한 과학에서 사용되는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평가 전략들의 대다수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이러한 모든 것은 그런대로 무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특히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철학의 기원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은 무해하지 않다. 반대로, 과학철학이란 기본적으로 사례를 활용한 인식론이라는 생각으로 과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식론자의 오만일 뿐 아니라, 과학철학 내의 특정한 한 접근법, 특히 인식적 실재론이 맞다는 것을 전제하는 동시에 적어도 실재론 이상의 탁월한 실적을 기록한 다양한 다른 과학철학의 적절성을 부정하고 있다. 게다가, 과학철학을 응용 인식론으로 보는 관점은 건전한 과학에서 사용되는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평가 전략들의 대다수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나는 과학철학이 (배타적으로든 주된 것으로든) 인식적 활동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과학이 오로지 인식적 활동인 것도 아니고 주로 인식적 활동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상호 연관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다소 우회적인 길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우선 과학철학이 인식론에 환원될 수 있다는 논제의 익숙하고 특수한 사례에 집중해 볼 것이다. 나는 과학철학을 합리적 재구성으로 본 관점, 특히 1930년대와 1940년대의 한스 라이헨바흐(그리고 다소 약한 정도로는 루돌프 카르납)에 의해 개진된 생각을 검토할 것이다. 나는 라이헨바흐식 재구성이 (흔히 생각되는 것과 같은)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에피소드에 대한 폭넓은 사례 연구가 아니라, 오히려 실제 과학에서 어떤 부분을 재구성할 수 있고 어떤 부분은 재구성할 수 없는지에 대한 엄격한 제약조건들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나는 이 제약조건들이 인식론의 도구들이 가진 극심한 제약으로 인한 것임을 보일 것이다.
나는 과학철학이 (배타적으로든 주된 것으로든) 인식적 활동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과학이 오로지 인식적 활동인 것도 아니고 주로 인식적 활동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상호 연관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다소 우회적인 길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우선 과학철학이 인식론에 환원될 수 있다는 논제의 익숙하고 특수한 사례에 집중해 볼 것이다. 나는 과학철학을 합리적 재구성으로 본 관점, 특히 1930년대와 1940년대의 한스 라이헨바흐(그리고 다소 약한 정도로는 루돌프 카르납)에 의해 개진된 생각을 검토할 것이다. 나는 라이헨바흐식 재구성이 (흔히 생각되는 것과 같은)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에피소드에 대한 폭넓은 사례 연구가 아니라, 오히려 실제 과학에서 어떤 부분을 재구성할 수 있고 어떤 부분은 재구성할 수 없는지에 대한 엄격한 제약조건들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나는 이 제약조건들이 인식론의 도구들이 가진 극심한 제약으로 인한 것임을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