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적, 인지적, 사회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3 바이트 추가됨 ,  2022년 1월 7일 (금)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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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모든 것은 그런대로 무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특히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철학의 기원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은 무해하지 않다. 반대로, 과학철학이란 기본적으로 사례를 활용한 인식론이라는 생각으로 과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식론자의 오만일 뿐 아니라, 과학철학 내의 특정한 한 접근법, 특히 인식적 실재론이 맞다는 것을 전제하는 동시에 적어도 실재론 이상의 탁월한 실적을 기록한 다양한 다른 과학철학의 적절성을 부정하고 있다. 게다가, 과학철학을 응용 인식론으로 보는 관점은 건전한 과학에서 사용되는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평가 전략들의 대다수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이러한 모든 것은 그런대로 무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특히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철학의 기원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은 무해하지 않다. 반대로, 과학철학이란 기본적으로 사례를 활용한 인식론이라는 생각으로 과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식론자의 오만일 뿐 아니라, 과학철학 내의 특정한 한 접근법, 특히 인식적 실재론이 맞다는 것을 전제하는 동시에 적어도 실재론 이상의 탁월한 실적을 기록한 다양한 다른 과학철학의 적절성을 부정하고 있다. 게다가, 과학철학을 응용 인식론으로 보는 관점은 건전한 과학에서 사용되는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평가 전략들의 대다수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나는 과학철학이 (배타적으로든 주된 것으로든) 인식적 활동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과학이 오로지 인식적 활동인 것도 아니고 주로 인식적 활동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상호 연관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다소 우회적인 길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우선 과학철학이 인식론에 환원될 수 있다는 논제의 익숙하고 특수한 사례에 집중해 볼 것이다. 나는 과학철학을 합리적 재구성으로 본 관점, 특히 1930년대와 1940년대의 한스 라이헨바흐(그리고 다소 약한 정도로는 루돌프 카르납)에 의해 개진된 생각을 검토할 것이다. 나는 라이헨바흐식 재구성이 (흔히 생각되는 것과 같은)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에피소드에 대한 폭넓은 사례 연구가 아니라, 오히려 실제 과학에서 어떤 부분을 재구성할 수 있고 어떤 부분은 재구성할 수 없는지에 대한 엄격한 제약조건들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나는 이 제약조건들이 인식론의 도구들이 가진 극심한 제약으로 인한 것임을 보일 것이다.
나는 과학철학이 (배타적으로든 일차적으로든) 인식적인 작업이 아니며, 그렇게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는 과학이 오로지 인식적인 것도 아니고, 일차적으로 인식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서로 연관된 이 두 가지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조금 먼 길을 돌아갈 것이다. 나는 우선 과학철학이 인식론에 환원될 수 있다는 논제의 익숙하고 특수한 사례에 집중해 볼 것이다. 나는 과학철학을 합리적 재구성으로 본 관점, 특히 1930년대와 1940년대의 한스 라이헨바흐(그리고 다소 약한 정도로는 루돌프 카르납)에 의해 개진된 생각을 검토할 것이다. 나는 라이헨바흐식 재구성이 (흔히 생각되는 것과 같은)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에피소드에 대한 폭넓은 사례 연구가 아니라, 오히려 실제 과학에서 어떤 부분을 재구성할 수 있고 어떤 부분은 재구성할 수 없는지에 대한 엄격한 제약조건들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나는 이 제약조건들이 인식론의 도구들이 가진 극심한 제약으로 인한 것임을 보일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로 확립하고자 하는 첫 번째 요점은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한데) 라이헨바흐가 합리적 재구성을 임의의 주어진 과학적 사건에서 인식적으로 중요한 특징들을 규정하는 도구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오직 매우 약화되고 특이한 의미에서만 합리적 재구성이며, 이 점은 내가 이에 대해 지적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점이다.  『경험과 예측』의 첫 장에서 라이헨바흐가 생각했듯이, 합리적 재구성이란 그 사건의 요소들이 어떻게 또는 얼마나 탐구자의 목표를 추동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과학적 사건의 세부사항을 치우려는 시도가 아니다. 라이헨바흐가 합리적 재구성에 관해 얘기할 때 머릿속에 품었던 것은 도구적 합리성과 같은 것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그 문구에서 ‘합리적’이라는 용어가 싣고 있는 것은 순수히 인식적인 것이다. 그는 임의의 실제 사건에서 합리적 재구성에 적절히 포함된 오직 그 특징만이 문제가 되는 사건에서 평가 중인 이론 혹은 가설의 참 또는 거짓과 관련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반복하자면, 라이헨바흐에게 합리적 재구성은 순전히 그리고 단순히 인식적 재구성이었다. 가설의 진위를 결정하는 일과 무관한 활동이나 원리가 관련된 사례의 경우, 그러한 활동과 원리는 그 사례의 소위 합리적 재구성에서는 적절한 자리를 찾지 못한다. 똑같은 요점이 라이헨바흐의 자주 언급되지만 제대로 이해되지는 못한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의 구분에도 적용된다. 이러한 이분법은 그에게 한 연구자의 탐구에서 나타나는 시기적 단계의 구분이 아니라 당신이 역사책에서 볼 수도 있는 사건에 대한 기술적으로는(descriptively) 풍부하지만 철학적으로는 무관한 이야기와 그에게 그 사건의 합리적 재구성을 구성할 순전히 인식적인 이야기 사이의 구분을 말할 뿐이다. 라이헨바흐에게 정당화의 맥락은 문제가 되는 이론에 대한 인식적 평가에 필요한 그러한 모든 요소들과 오직 그러한 요소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즉 비인식적인 모든 것은, 발견의 맥락과 관련되어 있고, 그에 대한 심화된 탐구는 심리학자나 인류학자에게 맡겨진다. 그 사건에서 철학자의 관심은 인식적 검열을 통과한 그러한 요소들에만 엄격히 제한되었다.  
여기서 첫 번째로 확립하고자 하는 첫 번째 요점은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한데) 라이헨바흐가 합리적 재구성을 임의의 주어진 과학적 사건에서 인식적으로 중요한 특징들을 규정하는 도구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오직 매우 약화되고 특이한 의미에서만 합리적 재구성이며, 이 점은 내가 이에 대해 지적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점이다.  『경험과 예측』의 첫 장에서 라이헨바흐가 생각했듯이, 합리적 재구성이란 그 사건의 요소들이 어떻게 또는 얼마나 탐구자의 목표를 추동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과학적 사건의 세부사항을 치우려는 시도가 아니다. 라이헨바흐가 합리적 재구성에 관해 얘기할 때 머릿속에 품었던 것은 도구적 합리성과 같은 것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그 문구에서 ‘합리적’이라는 용어가 싣고 있는 것은 순수히 인식적인 것이다. 그는 임의의 실제 사건에서 합리적 재구성에 적절히 포함된 오직 그 특징만이 문제가 되는 사건에서 평가 중인 이론 혹은 가설의 참 또는 거짓과 관련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반복하자면, 라이헨바흐에게 합리적 재구성은 순전히 그리고 단순히 인식적 재구성이었다. 가설의 진위를 결정하는 일과 무관한 활동이나 원리가 관련된 사례의 경우, 그러한 활동과 원리는 그 사례의 소위 합리적 재구성에서는 적절한 자리를 찾지 못한다. 똑같은 요점이 라이헨바흐의 자주 언급되지만 제대로 이해되지는 못한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의 구분에도 적용된다. 이러한 이분법은 그에게 한 연구자의 탐구에서 나타나는 시기적 단계의 구분이 아니라 당신이 역사책에서 볼 수도 있는 사건에 대한 기술적으로는(descriptively) 풍부하지만 철학적으로는 무관한 이야기와 그에게 그 사건의 합리적 재구성을 구성할 순전히 인식적인 이야기 사이의 구분을 말할 뿐이다. 라이헨바흐에게 정당화의 맥락은 문제가 되는 이론에 대한 인식적 평가에 필요한 그러한 모든 요소들과 오직 그러한 요소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즉 비인식적인 모든 것은, 발견의 맥락과 관련되어 있고, 그에 대한 심화된 탐구는 심리학자나 인류학자에게 맡겨진다. 그 사건에서 철학자의 관심은 인식적 검열을 통과한 그러한 요소들에만 엄격히 제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