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상하기와 개입하기
이언 해킹 지음, 이상원 옮김, 『표상하기와 개입하기: 자연과학철학의 입문적 주제들』 (한울 아카데미, 2005), 68-72, 340-342쪽에서 발췌.
이 글은 이언 해킹(Ian Hacking)의 『표상하기와 개입하기』에서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그의 견해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들을 짧게 발췌하였다. 이언 해킹은 이 글에서 조작가능성을 기준으로 한 존재자 실재론을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여러분이 (다른 목적을 위해) 그것을 조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실재한다.” 한편, 해킹은 현미경 관찰을 일상적인 관찰만큼 신뢰할 수 있는 이유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격자 논변"이라는 흥미로운 논변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논변은 과학의 비통일성에 대한 건강한 인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1장. 과학적 실재론이란 무엇인가?
과학적 실재론은 올바른 이론에 의해서 기술되는 존재자, 상태, 구조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양성자, 광자, 역장, 블랙홀은 손톱, 터빈, 개울의 소용돌이, 화산처럼 실재한다. 입자 물리학의 약한 상호작용은 사랑에 빠지는 일처럼 실재한다. 유전 부호를 운반하는 분자 구조에 관한 이론은 참이거나 거짓이며, 진정으로 올바른 이론은 참인 이론이 될 것이다.
우리의 과학이 아직 사태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을 때조차도, 실재론자는 종종 우리가 진리 가까이에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사물의 내부 구성을 발견해내는 일, 우주의 가장 먼 곳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일을 목표로 한다. 너무 겸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알아내 왔기 때문이다.
반실재론은 정반대로 말한다. 전자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확실히 전기 현상과 유전 현상은 존재하지만 우리가 아주 작은 상태, 과정, 존재자에 관한 이론을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거리인 사건을 예측하고 산출시키기 위해서일 뿐이다. 전자는 허구이다. 전자에 관한 이론은 사고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이론은 적절하거나 유용하거나 보장되었거나 적용가능하겠지만, 우리가 자연과학의 사변적 승리와 기술적 승리를 아무리 많이 숭배할지라도, 자연과학의 가장 유효한 이론조차도 참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어떤 반실재론자는 이론은 세계가 어떠한가에 관한 글자 그대로의 진술로서 이해될 수 없는 지적 도구일 뿐이라고 믿는다. 다른 반실재론자는 이론을 글자 그대로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론을 이해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러한 반실재론자는 우리가 이론을 아무리 많이 사용할 수 있을지라도 이론이 올바르다고 믿게 할 확신을 주는 이유는 우리에게 없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양쪽의 반실재론자는 세계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의 종류 속에 이론적 존재자를 포함시키지 않을 것이다. 터빈은 실재하지만, 광자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자연 속의 여러 사건을 정말로 정복해 왔다고 반실재론자는 말한다. 유전공학은 제강 작업처럼 상식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지만, 현혹하지 말라. 분자의 긴 사슬이 실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고 가정하지 말라. 생물학자는 철사와 색이 칠해진 공으로 분자 모형을 만들면 아미노산에 관해서 더 명확하게 사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모형은 우리의 정신 속에서 현상을 배치하는 것을 도와준다. 그것은 새로운 미시기술을 제안해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실제로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느냐에 관한 글자 그대로의 그림이 아니다. 나는 도르래, 지레, 볼 베어링, 저울추로 경제에 관한 모형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저울 추 M(돈의 공급)의 모든 감소는 각도 I(인플레이션율)의 감소와 저울 접시 안의 볼 베어링의 수 N(실업 노동자의 수)의 증가를 산출한다. 우리는 올바른 입력과 출력을 얻을 수 있지만, 어떤 이도 이것이 경제가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제안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그것을 흩뿌릴 수 있다면 그것은 실재한다
내 사정을 말하자면 한 친구가 내게 분수 전하(fractional electric charge)의 실재를 탐지하기 위해서 계속 수행되고 있던 실험에 대해서 이야기해줬을 때까지 나는 과학적 실재론에 관해서 전혀 재고하지 않았다. 그것은 쿼크라 불린다. 현재 나를 실재론자가 되게 했던 것은 쿼크가 아니라 전자다. 그 이야기를 했으면 한다. 그것은 단순한 이야기는 아니며, 실제 이야기, 일상적인 과학 연구와 연결된 이야기이다. 전자에 관한 오래된 실험에서 출발하기로 하자.
전하의 근본 단위는 오랫동안 전자라고 여겨졌다. 1908년 밀리컨은 그 양을 측정하는 아름다운 실험을 고안했다. 음전하를 띠는 아주 작은 기름방울이 하전된 판 사이에 떠 있다. 먼저 전기장을 꺼서 기름방울이 떨어지게 한다. 이어 떨어지는 속도를 크게 하기 위해 전기장을 가한다. 기름방울을 관찰한 두 가지 종결 속도는 공기의 점성 계수, 공기와 기름의 밀도와 결합되어 있다. 이것들은 알려진 중력의 값과 전기장의 값과 함께 어떤 이로 하여금 기름방울의 전하를 계산하도록 해준다. 반복된 실험에서 기름방울의 전하는 일정한 양의 작은 정수배가 된다. 이 일정한 양을 최소 전하, 즉 전자의 전하로 취하게 된다. 모든 실험처럼, 이 실험은 대충만 옳은 가정을 만들어낸다. 즉 기름방울은 구형이라는 것이 그 예다. 밀리컨은 맨 처음에는 기름방울이 공기 분자의 평균 자유 행로에 비해 크지 않기 때문에 기름방울이 약간 충돌하게 된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그러나 실험의 착상은 최상이다.
전자는 오랫동안 전하의 기본 단위로 주장되었다. 우리는 그 전하의 이름으로 e를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자 물리학은 1/3 e의 전하를 갖는 쿼크라 불리는 한 존재자를 점증적으로 제안해왔다. 이론 속의 어떤 내용도 쿼크에 독립적 존재성이 있다고 제안해주지 않는다. 이론이 함축하듯 만일 쿼크가 실재한다면, 쿼크는 즉각적으로 반응할 것이고, 즉시 없어질 것이다. 이것이 스탠퍼드 대학교의 라뤼, 페어뱅크, 헤버드가 시작한 교묘한 실험을 그만두게 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밀리컨의 기본 착상을 이용해 ‘자유’ 쿼크를 사냥하게 된다.
쿼크는 희귀하거나 짧은 시간 동안만 존재할 수가 있으므로, 아주 작은 방울보다는 커다란 공이 있으면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그때 쿼크가 공을 때리게 되는 기회가 더 많기 때문이다. 사용된 방울은 질량이 10-4그램보다 작았지만 이는 밀리컨의 방울보다 107배나 큰 것이다. 만일 그것이 기름으로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거의 돌처럼 떨어질 것이다. 그 대신에 그것은 니오브라고 하는 물질로 만들어지는데, 니오브는 그것의 초전도 전이 온도인 9K 이하로 냉각된다. 하나의 전하가 이 몹시도 차가운 공 둘레를 일단 회전하게 되면, 그것은 영원히 도는 채로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방울은 자기장 속에 떠 있을 수 있고, 장을 변화시킴으로써 실제로 앞뒤로 움직이게 할 수 있다. 또한 자력계를 사용해 어디에 방울이 존재하며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를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다.
공에 있는 최초의 전하는 점차 변화하며, 밀리컨과 같은 방식으로 현재의 우리의 기술을 적용하면 양전하에서 음전하로 가는 경로가 0 또는 ±1/3 e에서 일어나는지를 결정해낼 수 있다. 만일 후자의 경우가 확인된다면, 공에 매여 있지 않은 하나의 쿼크가 확실히 존재해야 한다. 가장 최근의 미출판 원고에서, 페어뱅크와 그의 동료는 +1/3 e와 일치하는 4개의 분수 전하, -1/3 e와 일치하는 4개의 분수 전하, 0의 전하를 갖는 13개를 보고했다.
그런데 어떻게 니오브 공 위에 있는 전하를 바꿀 것인가? 내 친구가 말하기를, “음, 이 단계에서 우리는 전하를 증가시키기 위해 그것에 양전자를 흩뿌리거나 전하를 줄이기 위해 전자를 흩뿌리지요.” 그날 이후로 나는 과학적 실재론자가 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만약 당신이 그것을 흩뿌릴 수 있다면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오래 살아 있는 분수 전하는 논쟁거리이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실재론을 확신하도록 한 것은 쿼크가 아니다. 아마도 내가 1908년의 전자에 관해서 확신하게 되었던 것도 아닐 것이다. [그 때에는] 회의적인 사람이라면 지적할 수 있는 것이 훨씬 많이 널려 있었다. [예를 들어] 기름방울에 작용하는 분자간 힘에 관한 계속된 우려가 있었다. 밀리컨이 실제로 측정한 것은 그 힘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의 수치들이 전자라는 것에 관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의 쿼크 사례에서도 똑같은 종류의 고민거리가 있다. 마리넬리와 모르푸르고는 최근의 한 미출판 원고에서, 페어뱅크 집단은 쿼크가 아니라 어떤 새로운 전자기력을 측정한 것이라고 제안한다. 내가 실재론을 확신하게 된 것은 쿼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가 실재론을 확신하게 된 것은 현재 양전자와 전자를 흩뿌릴 수 있는 표준적인 방출기가 존재한다는 사실 덕분이었으며, 다시 말하자면 정확히 우리가 양전자와 전자를 가지고서 하는 일 덕분이었다. 우리는 결과를 이해하고, 원인을 이해하며, 이를 그밖의 어떤 것을 알아내는 데 사용한다. 이와 똑같은 과정이 그 일에 관계되는 모든 종류의 여타의 도구들, 즉 과냉각된 니오브 공 위에 회로를 만들기 위한 장치들과 ‘이론적인 것’에 대한 거의 끝없는 여타의 조작(manipulations)에도 적용된다. …
표상과 개입
과학에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고 이야기된다. 이론과 실험이 그것이다. 이론은 세계가 어떠한가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실험과 그 결과로 생겨나는 기술은 세계를 변화시킨다. 우리는 표상하고 개입한다. 우리는 개입하기 위해 표상하고, 표상에 비추어 개입한다. 오늘날 과학적 실재론 논쟁의 대부분은 이론, 표상, 진리로 표현된다. 이러한 토론은 계몽적이되 결정적이지 못하다. 이는 부분적으로 이들 논쟁이 다루기 힘든 형이상학에 감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표상의 수준에서 실재론의 옹호를 위한 또는 반대를 위한 어떠한 궁극적 논의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표상에서 개입으로 전환할 때, 니오브 공 위에 양전자 흩뿌리기로 전환할 때, 반실재론의 지배력이 약해진다. 이제 나는 존재자에 관한 실재론에 대한 다소 오래된 우려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이것은 곧 진리와 표상, 즉 실재론과 반실재론에 대한 현대의 주요한 연구로 이끌 것이다. 뒤로 가면서 나는 개입, 실험, 존재자로 되돌아올 것이다.
철학의 최종적 중재자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이다.
11장. 현미경
현미경의 철학자들
대략 20년마다 철학자는 현미경에 관해서 무언가를 이야기해 왔다. 논리실증주의의 정신이 미국으로 오게 되자, 어떤 이는 구스타프 베르크만이 철학적 용어를 사용해 우리에게 “현미경적 대상은 글자 그대로의 의매에서 물리적인 것은 아니며, 그저 언어와 형상적 상상에 의한 것이다. ... 내가 현미경을 통해서 볼 때, 내가 보는 것은 벽 위의 그림자처럼 시야로 기어들어 퍼지는 색의 조각이다.”[1] 머지않아 그로버 맥스웰은 관찰적 존재자와 이론적 존재자 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구별이 존재하다는 것을 부정하면서 시각의 연속체를 주장했다. “창유리를 통해서 보기, 안경을 통해서 보기, 쌍안경을 통해서 보기, 저배율 현미경을 통해서 보기, 고배율 현미경을 통해서 보기 등.”[2] 몇몇 존재자는 한 시점에 보이지 않을 수 있고 나중에 새로운 기술의 비결 덕분에 관찰 가능하게 된다. 관찰 가능한 것과 그저 이론적인 것 사이의 구별은 존재론에서 아무런 관심사가 되지 못한다.
그로버 맥스웰은 우리의 이론에 수반되는 관찰 가능한 존재자만의 실재성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실재론을 거부하면서 과학적 실재론의 한 형태를 주장했는데, 『과학적 이미지(The Scientific Image)』에서 반 프라센은 이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한다. ... 그는 자신의 철학을 구성적 경험론이라 부르며, “과학은 우리에게 경험적으로 적합한 이론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이론의 수용은 오직 그것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는 믿음과만 결부된다”고 주장한다. 여섯 쪽 뒤에서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주해하려 한다. “이론을 수용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고, 즉 이론이 관찰 가능한 것에 관해 (우리에게) 말하는 바가 참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찰 가능한 것과 관찰 불가능한 것 사이의 구별을 복원시키는 일은 반 프라센에게 분명히 필수적이다. 그러나 정확히 어디서 우리가 그 구별을 끌어내야 할지는 그에게 필수적이지 않다. “관찰 가능한”은 그것의 외연이 우리의 이론에 의해서 결정될 수도 있는 애매한 용어임을 그는 인정한다. 이와 동시에 그는, 그에게, 가장 즉각적으로 방어 가능한 곳에서 그 선이 그어지기를 원하며, 그렇게 되면 논쟁의 과정에서 그가 약간 밀리게 되더라도, 그는 그 담장의 “관찰 불가능한” 쪽에 남겨진 제비를 여전히 갖게 될 것이다. 그는 그로버 맥스웰의 연속체를 불신하며 추론된 존재자로 미끄러지듯 넘어가는 것을 되도록 일찍 중단시키고자 한다. 그는 연속체의 관념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반 프라센에 따르면, 그로버 맥스웰의 목록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실상 구별되는 그룹이 존재한다. 여러분은 창문을 열 수 있고 전나무를 직접 볼 수 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쌍안경을 통해서 보는 대상의 적어도 몇몇에 걸어 다가갈 수 있고, 그 주위에서 그것들을 맨눈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혈소판을 맨눈으로 보는 방법은 없다. 확대경에서 저배율 현미경으로 넘어가는 길목은 맨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에서 도구를 쓰지 않고는 관찰할 수 없는 것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다. 반 프라센은 우리가 현미경을 통해서는 보지 못한다고 결론 내린다. 하지만 우리는 몇몇 망원경을 통해서는 본다. 우리는 목성으로 갈 수 있고 목성의 달을 볼 수 있으나, 우리가 짚신벌레 크기로 줄어들 수는 없으며 그것을 볼 수 없다. 그는 또한 제트기가 만드는 수증기 꼬리와 구름 상자의 이온화 궤적을 비교한다. 둘 다 비슷한 물리적 과정에 의한 결과이지만, 여러분은 그 꼬리의 앞쪽을 가리켜 제트기를 식별할 수 있거나 적어도 그것이 착륙하기를 기다릴 수 있지만, 여러분은 전자가 착륙해 보이기를 결코 기다릴 수 없다.
단지 응시만 하지 말고 개입하라
철학자들은 현미경을 한 끝에 광원을 갖고 있으며 다른 끝에는 들여다 볼 구멍을 갖고 있는 암흑 상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로버 맥스웰이 제시하듯, 저배율 현미경, 고배율 현미경, 똑같은 종류의 더욱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옳지 않으며, 현미경이 단지 들여다보기 위한 것도 아니다. 사실상 철학자는 확실히 그가 몇 가지의 현미경을 사용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현미경을 통해 보지 못할 것이다. 그가 보는 것을 그리라는 요청을 받을 때, 그는, 제임스 서버처럼, 반사된 그 자신의 안구를 그리거나, 구스타프 베르크만처럼, “벽 위의 그림자처럼 시야로 기어들어 퍼지는 색의 조각”만을 볼 수도 있다. 그는 적당한 확대 능력을 지닌 현미경 아래서 초파리를 절개하기 시작할 때까지 먼지 입자와 초파리의 타액선을 확실히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교훈이다. 즉 여러분은 단지 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기에 의해서 현미경을 통해서 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 버클리의 1710년 책 『시각에 관한 새로운 이론』과의 유사성이 존재하는데, 이 책에 따르면 세계 안에서 돌아다니고 세계 안에서 개입한다는 것이 무엇과 같은지를 배운 이후에야 우리는 3차원 시각을 갖게 된다. 촉각은 우리의 이른바 2차원 망막의 상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 학습된 신호발생이 3차원 지각을 산출시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스쿠버다이버는 오직 이리저리 헤엄치는 것에 의해서만 바다라는 새로운 매질 속에서 보는 법을 배운다. 일차 시각에 대해서 버클리가 옳았든 그렇지 않았든, 유아기 이후에 습득된 새로운 방식의 보기는 하기에 의한 학습과 연루되는 것이지, 단지 수동적인 보기와 연루되는 것이 아니다. 세포의 특수한 부분이 저기에 상상한대로 존재한다는 확신은 직접적인 물리적인 수단을 사용해 여러분이 세포의 바로 그 부분에 어떤 유체를 미시적으로 주입할 수 있을 때, 적어도, 강화된다. 우리는 아주 작은 유리 바늘이 세포벽을 재빨리 관통하는 것을 본다. 커다란 — 철저하게 거시적인 — 플런저에 달린 미동 측정 나사를 천천히 돌리면서, 우리는 지질이 바늘 끝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본다. 펑! 나는 서툴렀기에 그만 세포벽을 터뜨렸고, 다른 표본으로 다시 시도해야 한다. 존 듀이의 ‘지식 관망자 이론(spectator theory of knowledge)’에 대한 조롱은 현미경에 관한 관망자 이론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절하다. ...
현미경 관찰 속의 진리
… 저배율 전자 현미경의 관찰은 적혈구 속의 작은 점들을 드러내준다. 이것들은 조밀한 물체라고 불린다. 즉 이것들은 그것들이 전자 정도로 조밀하고, 그 어떤 준비 또는 착색 없이도 투과 전자 현미경에서 나타난다는 점을 단순히 의미한다. 세포 발생이나 세포 질병의 다양한 단계에서 이들 물체의 움직임과 밀도에 기초하여, 그들이 혈액 생물학에서 생하는 중요한 부분을 지닐 수가 있다고 추측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전자 현미경에 의한 인공물일 수도 있다. 한 가지 시험은 다음과 같이 명백하다. 즉 어떤 이는 서로 다른 물리적 기법을 사용해 이 똑같은 물체를 볼 수 있는가? 이 경우에 문제는 곧바로 해결된다. 저분해능 전자 현미경은 고분해능 광학 현미경과 대략 같은 능력을 갖는다. 조밀한 물체가 모든 기법 아래서 나타나지는 않지만, 형광 물질 착색작업 후의 형광 현미경에 의한 관찰로는 드러난다.
적혈구 조각들이 현미경 격자 위에 고정된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격자다. 즉 현미경을 통해서 볼 때 어떤 이는 그 각각의 사각형이 대문자 태크가 붙은 격자를 볼 수 있다. 전자 현미경 사진은 그러한 격자 위에 올려진 조각들로 이루어진다. 특히 두드러진 배열을 갖는 조밀한 물체의 표본은 이어 형광 현미경을 위해 준비된다. 마지막으로 어떤 이는 전자 현미경 사진을 형광 현미경 사진과 비교한다. 어떤 이는 현미경 사진들이 세포의 똑같은 작은 부분을 보여주며, 말하자면, 그것은 그 작은 부분이 P라는 태그가 붙은 격자의 사각형 안에 명백히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형광 현미경 사진 안에 전자 현미경 사진에서 보았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격자와 일반적인 세포 구조와 그 ‘물체’가 배치되어 있다. 그 물체는 전자 현미경에 의한 인공물이 아니라고 추론된다.
두 가지 물리적 과정 — 전자 투과와 형광 재방출 — 이 그 물체를 탐지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과정들 사이엔 사실상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그들은 물리학에서 본질적으로 무관한 부분들이다. 만일 되풀이해 두 가지 완전히 서로 다른 물리적 과정이 동일한 시각적 배치를 산출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일한 시각적 배치가 세포 속의 진정한 구조이기보다는 물리적 과정에 의한 인공물이라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우연의 일치가 될 것이다. ...
격자 논변
나는 이제 과학적 실재론이라는 주제에 관한 어떤 철학자의 얘기에 도전한다. 반 프라센은 우리가 지구 위에 위치해 있을 때 우리는 목성의 달들을 보기 위해서 망원경을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거기로 가서 맨눈으로 그 달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망원경을 통해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반면 우리는 아주 작은 물체에 대해 그와 똑같이 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현미경을 통해서 절대 볼 수 없다고 말한다]. ... 그것은 공상과학 소설이다. 현미경 사용자는 공상을 피한다. 조밀한 물체를 재파악하는 데 사용된 격자를 생각해보라. 아주 작은 격자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들은 육안으로는 좀처럼 보이지가 않는다. 이것들은 펜과 잉크로 매우 큰 격자를 그려냄으로써 만들어진다. 글자들이 격자의 각 사각형들의 모서리에 선명하게 새겨진다. 이어 격자는 사진술을 사용해 축소된다. 현재 표준적인 기법이 되고 있는 것을 사용하여, 결과로 나온 미시사진 위에 금속이 놓이게 된다. 격자는 100, 250, 1000개 단위의 다발로 또는 통으로 팔린다. 그러한 격자를 만드는 절차는 완전히 알려져 있으며, 어떤 여타의 고품질 대량 생산 체계만큼이나 신뢰할 만하다.
짧게 말해, 우리는 상상 속의 우주선에서 목성을 즐기기보다는 일상적으로 격자를 축소시키고 있다. 이어 우리는 거의 어떤 종류의 현미경을 통해서라도 그 아주 작은 원반을 살피고 원래 커다란 규모로 그렸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모양과 글자를 보게 된다. 내가 한 자루의 족집게로 들고 있는 그 미세한 원반이 사실은 태그가 붙은 격자의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고를 심각하게 품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격자를 바로 그런 식으로 존재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현미경을 통해서 보는 바가 참되다는 것을 나는 안다. 제작의 과정이 신뢰할 만하며, 그것은 우리가 그 결과를 그 현미경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임을 나는 안다. 더욱이 그 결과를 어떠한 종류의 현미경으로도 확인할 수가 있는데, 이는 상을 산출하기 위해 다수의 서로 무관한 물리적 과정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치가 나타날 가능성을 어떻게 달리 상상할 수 있겠는가? 현미경으로 보이는 대로, 원반이 태그가 붙여진 격자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거짓인가? 그 커다란 격자가 서로 다른 12가지 종류의 현미경을 통해서 볼 때도 여전히 격자처럼 보이는 어떤 비격자로 수축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13가지의 전적으로 서로 무관한 물리적 과정의 거대한 공모여야 할 것이다. 그 격자에 관해 반실재론자가 되려면 여러분은 현미경의 사악한 데카르트적 악마를 불러내야 할 것이다.
격자 논변은, 적어도 현상론적 수준에서, 과학의 비통일성(disunity of science)에 대한 건전한 인정을 요구한다. 광학 현미경 모두는 평범한 빛을 사용하지만, 간섭, 편광, 위상차, 직접 투과, 형광 등등은 본질적으로 빛의 서로 무관한 현상론적 측면을 이용한다. 만일 광파의 이러한 서로 다른 측면들을 사용해 동일한 구조가 식별된다면, 우리는 그 구조가 모든 서로 다른 물리적 체계들에 의한 인공물이라고 심각하게 가정할 수 없다. 더욱이 나는 이 모든 서로 다른 물리적 체계들이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우리는, 말하자면, 빛의 위상 간섭 특성을 격리해냄으로써, 자연의 몇몇 측면을 순화시킨다. 우리는 원리적으로 한 도구가 어떻게 작동하게 될는지를 정확하게 앎으로써 그 도구를 설계하는데, 이는 바로 광학이 아주 잘 이해되어 있는 과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제품을 디버깅하는 데 여러 해를 소모하며, 마침내 바로 쓸 수 있는 도구를 갖게 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한 특별한 구조를 식별해낸다. 여타의 몇 가지 바로 쓸 수 있는 도구는 전적으로 서로 다른 원리 위에 세워지는데, 이들도 그 동일한 구조를 드러내준다. 데카르트적 회의주의자에 이르지 못한 누구도 그 구조가 표본에 내재하는 것이 아닌 도구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
1800년에 현미경이 섬유의 구조보다는 광학적 체계의 인공물을 주로 노출시켰다는 평범한 근거에서 조직학 실험실에서 현미경을 금지시켰던 일은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분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옳지 않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이 광학적 내용의 준비 과정의 인공물이기보다는 표본 속에 정말로 있는 것인지를 확신하게 되는 일은 혁신적인 현미경에서 항상 문제가 된다. 그러나 1983년의 우리는 1800년과는 달리 그러한 확신을 엄청나게 많은 방식으로 얻고 있다. 나는 ‘시각적’ 측면만을 강조한다. 거기서조차도 나는 아주 단순화하고 있다. 만일 여러분이 몇 가지 서로 다른 물리적 체계를 사용해 구조의 똑같은 기초적인 특징을 볼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것은 인공물이다’보다는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아주 훌륭한 이유를 갖는 것이라고 나는 이야기한다. [물론] 이것은 확실한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상황은 일상적 시각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어느 뜨거운 날에 여러 서로 다른 조망에서 볼 때 아스팔트 길 위에 검은 반점들이 보이되 항상 그 위치에 있다면, 어떤 이는 그 사람이 보고 있는 바가 익숙한 환영이라기보다는 푸들이라고 결론내릴 것이다. 어떤 이는 여전히 틀릴 수 있다. 현미경 사용에서도 어떤 이는 이따끔씩 틀린다. 그럼에도 거시적 지각과 현미경적 지각에서 이루어지는 실수의 종류가 완전히 유사하다는 것은 그냥 우리가 현미경을 통해서 본다고 말하고 싶게 만들 수 있다. ...
과학적 실재론
... 이것이 과학적 실재론에 영향을 미치는가? 우선 그것은 오직 신중한 방식으로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명확히 하기로 한다. 초기에는 반 프라센에 이끌려 광학 현미경으로만 보이는 대상은 관찰 가능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사고했던 어떤 독자를 상상해보라. 그 독자는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대상을 관찰 가능한 존재자의 부류 속에 속한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반 프라센의 반실재론의 주요한 모든 철학적 입장은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광학 현미경으로 본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가 보고 있다고 보고하는 대상은 실재한다는 점이 따라 나오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단지 우리가 실증주의 겸 현상주의의 19세기적 틀에 갖혀서는 안 되고, 우리가 현미경으로 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권고[현미경으로 보고 있다고 보고하는 대상이 실재한다는 결론]는 현미경 관찰에 대한 실재론의 강한 수용을 함축하지만, 그것은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를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있다. 이는 고에너지 물리학에서 가져온 인용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인용에서는 전자, 중성미자 등을 보았다는 명랑한 이야기가 있었다. 물론 그 물리학자는 실재론자이며, 그는 ‘본다’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실재론자임을 드러내지만, 그의 단어 사용법이 그러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논변이 되진 않는다.
그렇다면 현미경 관찰은 실재론을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진 않다.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현미경을 사용해 관찰하는 구조를 정말로 확신하고 있다. 우리의 확신은 부분적으로 수차와 인공물을 체계적으로 제거해내는 데서 우리가 성공을 거둔 일에서 나온다. 1800년에는 그런 성공이 없었다. 비샤는 그의 해부실에서 현미경을 금했는데, 왜냐하면 당시에 어떤 이가 표본 속에 존재한다고 입증될 수 있었을 구조를 관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전반적으로 수차를 없앴다. 즉 우리는 많은 인공물을 제거했고, 여타의 것들을 무시해내며, 탐지되지 않은 가짜를 항상 경계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구조에 관해서 확신하는 것은 우리가 상당히 물리적인 방식들, 말하자면 미시적 주입 같은 것들을 통해 그 구조들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며, 전적으로 서로 다른 물리적 원리를 사용하는 도구들이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표본에서 아주 똑같은 구조를 관찰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찰을 가능케 해주는 도구들을 제작하는 데 사용된 물리학의 대부분에 대한 우리의 명백한 이해도 우리에게 확신을 주지만, 이 이론적 확신은 상대적으로 작은 역할을 한다. 우리의 확신은 그보다는 생화학과의 놀라운 교차점들에 의해서 강화되는데, 그것은 현미경으로 식별되는 구조들이 별개의 화학적 속성에 의해서도 구별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의 확신은 세포에 관한 강력한 연역적 이론 — 그런 것은 없다 — 덕분이 아니라 우리가 현미경에서 현상을 통제하고 창조할 수 있게 해주는 많은 수의 서로 맞물린 낮은 수준의 일반화들 덕분에 만들어진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미시 세계 안에서 돌아다니는 법을 배운다. 버클리의 『시각에 대한 새로운 이론』은 아이의 두 눈에 의한 3차원적 시각에 관해 완전히 참이 될 수는 없겠지만, 현미경이 드러내주는 세계 속으로 우리가 진입할 때 그것은 확실히 올바른 노선 위에 있다.
16장. 실험하기와 과학적 실재론
이 챕터는 Hacking, I. (1982), "Experimentation and Scientific Realism", Philosophical Topics을 재수록하면서 책의 전체 구성에 맞게 수정한 버전이다. 그러나 전체 논지를 파악하는 데는 원래의 논문이 더 나으며, 책의 한국어 번역도 만족스럽지 않다. 이 논문에 대한 요약은 강규태의 페이지를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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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항목
- 바스 반 프라센,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논증들
- 피터 갤리슨의 물질 문화
- Allan Franklin, Are There Really Electrons? Experiment and Reality
- Allan Franklin, Evidence for a New Entity: J.J. Thomson and the Electron
- David B. Resnik, Hacking's Experimental Real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