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논증들

ZoLAist's WikiNote
이동: 둘러보기, 검색

Bas C. van Fraassen (1980), “Arguments Concerning Scientific Realism”, The Scientific Imag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Ch. 2, pp. 6-40. reprinted in Martin Curd and J. A. Cover, eds., Philosophy of Science: The Central Issues (New York and London: W. W. Norton & Company, Inc., 1998), pp. 1064-1087.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논증들

바스 반 프라센(Bas C. van Fraassen)

천현득 옮김, 정동욱 수정


과학의 엄격성은 우리에게 자연 자체의 벌거벗은 모습을 우리 마음대로 자연에 입힌 화려한 색상의 의상과 잘 구별할 것을 요구한다.
—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이 1895년 2월 28일 『네이처(Nature)』에 보낸 편지에서 인용.

20세기에 최초의 지배적인 과학철학은 논리실증주의의 일부로서 전개되었다. 그들의 전성기는 2차 세계대전 이전이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이론에 대한 수용된 견해’와 같은 표현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이 발전시킨 견해를 가리킨다.

이 장에서 나는 과학적 실재론을 [옹호하기] 위해 제안된 주요 논증들을 검토하고 비판할 것이다. 이 논증들은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의 일부로서 자주 등장했다. 그러나 그들[과학적 실재론과 논리실증주의 비판]은 분리하여 논의하는 것이 분명 공정할 것이다. 과학적 실재론이 실증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장 쉽게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홀로 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주창하는 대안적 견해 — 전통적인 이름이 없어서 나는 이를 구성적 경험론(constructive empiricism)으로 부를 것이다 — 역시 실증주의 학설과 충돌한다.

1. 과학적 실재론과 구성적 경험론

과학철학에서 ‘과학적 실재론’이라는 용어는 ‘과학 이론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며, 과학 활동이란 진정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나타낸다. 나는 이 입장을 정의하고, 그것의 가능한 대안들을 검토할 것이다. 그 다음 나는 내가 ⋯ 옹호하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특정한 대안을 개략적이고 간결하게 제시할 것이다.

1.1 과학적 실재론의 정식화

과학적 실재론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그 입장에 대한 소박한 정식화는 다음과 같다. 과학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세계에 대한 그림은 참된 것으로, 그 세부사항은 믿을 만하며, 과학에서 가정하는 존재자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또한 과학의 진보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이러한 정식화는 너무 소박한데, 이에 따르면 과학적 실재론자들은 현재의 이론들이 옳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이러한 정식화의 소박함]는 찰스 샌더스 퍼스(C. S. Peirce)와 같은 초기 과학적 실재론자의 철학적 입장이 경험적 발견들에 의해 반박되어 왔음을 뜻한다. 나는 과학이 언젠가는 모든 측면에서 참인 이론에 도달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과학적 실재론자들이 동의할 거라 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학의 성장은 끝없는 자기수정일 수도 있고, 더 나쁜 경우 아마겟돈[인류의 종말]이 훨씬 빨리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박한 정식화에도 올바른 측면이 있다. 그 정식화는 두 가지 주된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i) 과학 이론은 무엇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며, (ii) 과학 활동은 발명과 반대되는 의미에서 발견하는 작업이라고 특징짓는다. 어떤 과학철학이라도 과학 이론이란 무엇이며 또 그것이 하는 일은 무엇인지의 두 가지 물음에 답변해야 한다. 현 시점에서 우리의 과제는 소박한 정식화와 이러한 특징들[두 물음에 대한 답변]을 공유하는 과학적 실재론의 정식화를 찾아내는 것이지, 실재론자에게 수용하기 힘들 정도의 강한 귀결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반론하고자 할 때 풍차로 돌진하지 않으려면[허수아비를 공격하지 않으려면] 가능한 한 약한 진술을 고려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나는 단서로서 몇몇 구절들을 인용할 것인데, 아래에서는 저자들이 논증한 문맥에 비추어 그것들을 검토할 것이다. 윌프리드 셀라스(Wilfrid Sellars)의 정식화는 다음과 같다.

한 이론을 수용할 좋은 이유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 이론에서 가정된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수용할 좋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1]

이것은 인식론의 물음에 관한 것이지만, 셀라스의 입장에서 한 이론을 수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간접적인 통찰을 던져주기도 한다. 브라이언 엘리스(Brian Ellis)는 자신을 과학적 실재론자가 아니라 과학적 존재자 실재론자라 부르는데, 그 역시 셀라스의 정식화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더욱 강한 견해를 정식화했다.

내가 이해하기에 과학적 실재론이란 과학의 이론적 진술들은 실재에 대한 참되고 일반화된 기술이거나 그렇게 의도된 것이라는 견해이다.[2]

이 정식화는 두 가지 장점을 지닌다. [첫째] 그것은 믿을 이유를 언급하지 않고 이론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둘째] 실재론자가 되기 위해 현재 과학 이론이 참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제안을 피한다. 그러나 후자의 이득은 ‘의도’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얻은 것으로, 그것 자체가 수수께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힐러리 퍼트넘(Hilary Putnam)은 자신이 마이클 더밋(Michael Dummett)에게 배웠다고 말하는 한 가지 정식화를 제안한다. (이 구절은 7절에서 다시 인용할 것이다.)

실재론자는 (주어진 이론이나 담론에 대하여) (1) 그 이론의 문장들은 참이거나 거짓이고 (2) 그것을 참 또는 거짓으로 만드는 것은 외부적인 어떤 것이라고 여긴다. 여기서 외부적인 어떤 것이란 (일반적으로) 우리의 감각자료 — 실제적이든 잠재적이든 — 가 아니며, 우리 마음의 구조나 우리의 언어 등도 아니다.[3]

곧이어 그는 리처드 보이드(Richard Boyd) 덕분이라고 말했던 추가적 정식화를 제시한다.

성숙한 과학 이론의 용어는 전형적으로 지칭한다(이 정식화는 리처드 보이드로부터 가져왔다). 성숙한 과학에서 수용된 이론은 전형적으로 근사적 참이다. 동일한 용어는 이론이 바뀐 경우에도 동일한 것을 지칭할 수 있다. 과학적 실재론자는 이 진술들을 필연적 참이라기보다는 과학의 성공에 대한 과학적 설명의 일부로서, 그래서 과학에 대한 그리고 과학이 그것의 대상들과 맺는 관계에 대한 모든 적합한 과학적 기술의 일부로서 간주한다.[4]

이것들이 정의로서 의도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것들은 참이 기본적인 실재론적 입장을 정식화하는 데 틀림없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한 이론을 받아들이거나 수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는 물음에 그 정식화가 답변하고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이제 나는 내가 보기에 앞서의 언급들[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다양한 정식화들]을 이치에 닿게 해주는 동시에 아래에서 검토하려고 하는 실재론자들의 추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한 가지 정식화를 제안할 것이다. 이 정식화에서는 이[비판적 검토]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 이상의 부담을 실재론자들에게 지우지 않을 것이다.

과학의 목표는 이론을 통해 세계가 어떠한 모습인지에 대해 문자 그대로 참인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며, 과학 이론의 수용은 그것이 참이라는 믿음을 요구한다. 이것은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적절한 정식화이다.

나는 이 정식화가 극히 최소한의 것이고 과학적 실재론자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것임을 보임으로써, 이 정식화를 옹호할 것이다. 소박한 정식화는 과학이 참된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얘기하는 반면, 적절한 정식화는 그것이 과학의 목표라고만 얘기한다. 물론 과학의 목표는 개별 과학자들의 동기와 동일시될 수 없다. 체스 게임의 목표는 적을 제압하는 것이지만, 게임의 동기는 명성이나 금전 혹은 영예일 수 있다. 목표가 무엇인지는 그와 같은 일에서 무엇이 성공으로 간주되는지를 결정하고, 이 목표는 온갖 이유로 추구될 수 있다. 또한, 어떤 것을 진정한 목표로 부른다고 해서, 그 목표에 대한 수단일 수도 있는 (또는 아닐 수도 있는) 다른 부수적 목표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성, 정보제공, 예측력, 설명 (역시도) 바람직한 것들이라는 데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어쩌면 나의 정식화는 — 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실재론의 정식화 중에서 가장 약한 정식화를 제시하려 한다는 점에서 — 과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참된 이론의 발견을 필요로만 하는 [다른] 무언가라고 생각하는 철학자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문자 그대로’라는 단어를 덧붙임으로써, ‘적절히 이해되는’ 경우에는 과학 이론이 참이지만 [실은] 문자적으로 거짓이거나 무의미하다는 입장을 실재론에서 배제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규약주의, 논리실증주의, 도구주의와도 일관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에 대해 아래에서 조금 더 이야기할 것이고, 마이클 더밋(Michael Dummett)의 견해를 보다 심층적으로 검토할 7절에서도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내 정식화의 두 번째 부분은 인식론을 건드린다. 하지만 그것은 이론의 수용을 그것의 참에 대한 믿음과 동일시하기만 할 뿐이다.[5] 이로부터는 누구나 그러한 믿음을 갖는 것이 항상 합리적으로 보증된다는 것이 따라나오지 않는다. 오늘날 상당한 논쟁거리가 된 입장인, 합리적인 사람은 토톨로지(tautology, 항진명제) 외에는 어떤 명제에 대해서도 개인적 확률 1을 절대 부여하지 않는다는 인식론적 입장에도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내 생각에 이런 인식론적 입장을 취하는 과학적 실재론자는 드물 것 같지만, 이는 확실히 가능한 생각이다.[6]

단서 조항이 달린 수용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냥(tout court) 수용을 이해해야 한다. 만일 한 이론의 수용이 그것이 참이라는 믿음을 요구한다면, 잠정적인 수용은 그것이 참이라는 믿음의 잠정적 채택을 요구한다. 만일 믿음이 정도를 갖는 것이라면 수용도 그러하며, 이때 우리는 수용의 정도란 그 이론이 참이라고 믿는 어떤 정도를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이론이 근사적으로 참이라는 믿음 — 그 이론을 중심으로 한 [이론들의] 집합에 속한 일부 이론은 (정확히) 참이라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 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렇게 내가 제안한 실재론의 정식화는 개인의 인식론적 신념과는 무관하게 사용될 수 있다.

1.2 실재론의 대안들

과학적 실재론이란, 과학 이론의 구성은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문자 그대로 참인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한 과학 이론의 수용은 그것이 참이라는 믿음을 요구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반실재론이란, 과학의 목표는 문자 그대로 참된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고서도 달성될 수 있고, 이론의 수용은 그것이 참이라는 믿음보다는 약한 (혹은 그 믿음과는 다른)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런 상이한 입장에 따르면, 과학자는 무슨 일을 하는 것인가? 실재론자에 따르면, 누군가가 이론을 제안할 때 그는 그것이 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실재론자에 따르면, 그 제안자는 이론이 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그것을 제시하고, 그것이 어떤 장점들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장점들은 참에 미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경험적 적합성일 수 있으며, 포괄성이나 다양한 목적에 따른 수용가능성일 수도 있다. 실재론을 거부한다고 해서 그 세부 목록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는 자세히 설명될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큰 틀에서의 구분을 가능하게 해주는 핵심 개념에 집중해야 한다.

문자 그대로 참된 이야기라는 생각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첫째] 언어는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야 하고, [둘째] 그렇게 해석되었을 때, 그 이야기는 참이다. 이는 반실재론자들을 두 부류로 구분한다. 첫 번째 부류에 따르면, 과학은 적절한 (그러나 문자 그대로가 아닌) 해석 하에서 참이거나 참을 목표로 한다. 두 번째 부류에 따르면, 과학의 언어는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하지만, 좋은 이론이 되기 위해 그 이론이 참일 필요는 없다. 내가 옹호할 반실재론은 두 번째 부류에 속한다. ⋯

과학의 언어에 대한 문자적 해석 외에 어떤 것도 배제하기로 한 결정은 실증주의도구주의로 알려진 반실재론의 형태들을 배제한다. 첫째, 문자적 해석 하에서, 겉으로 드러난 과학의 진술들은 참이나 거짓이 되는 것이 가능한 진술이다. 둘째, 문자적 해석은 정교해질 수는 있지만 논리적 관계를 바꿀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용어들이 지시하는 바를 식별함으로써 정교해질 수 있다. 현상론적인 열역학의 언어를 통계역학의 언어로 ‘환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기체는 분자들의 집합체로, 온도는 평균 운동 에너지로 식별된다.) [반면] 과학에 대한 실증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이론적 용어는 관찰가능한 것과의 연결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그들에 따르면 형식적으로는 서로 모순되는 두 이론이 사실은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예컨대 한 이론은 모든 물질이 원자들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반면, 다른 이론은 그 대신 보편적 연속 매질을 가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실증주의자들에 따르면, 두 이론의 관찰가능한 귀결들이 일치하는 한 두 이론은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서로 모순되는 두 이론이 ‘실제로는’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다는 얘기는 그 이론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았을 경우에만 성립할 수 있다. 아주 구체적으로 말해, 한 이론에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했다면,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상술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존재한다는 함축을 제거할 수는 없다. ⋯

1.3 구성적 경험론

과학의 언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론을 은유나 직유로 해석해야 한다거나 이론이 ‘탈신화화’ 또는 논리적 형식을 보존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번역’을 거친 이후에야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배제한다. 만일 그 이론에 ‘전자가 존재한다’라는 진술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 이론은 전자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그 이론에 ‘전자는 행성이 아니다’라는 진술도 포함되어 있다면, 그 이론은 적어도 행성 외의 다른 존재자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해결해주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때로는 한 이론적 용어가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수학적 대상을 가리키는지 전혀 분명치 않은 경우도 있다. 예컨대, 고전 물리학에 대한 가능한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은 힘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과 같은 힘이 존재한다’라는 진술은 언제나 어떤 함수의 존재를 주장하는 수학적 진술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과학의 언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학철학적 입장이 모두 실재론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이론에 대한 우리의 인식적 태도나 우리가 이론을 구성할 때 추구하는 목표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단지 이론이 말하는 바를 적절하게 이해하는 것에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근본주의 신학자, 불가지론자, 무신론자는 유일신이나 신들 혹은 천사가 존재한다는 진술을 이해하는 데 (자유주의 신학자는 제외하더라도) 서로 동의할 것이다.) 과학의 언어는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결정한 이후에도, 우리는 좋은 이론이 참이라고 믿을 필요가 없으며, 그 이론에서 가정한 존재자들이 실재한다고 믿을 필요도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과학은 경험적으로 적합한 이론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한 이론의 수용은 오직 그것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는 믿음만을 뜻한다. 이것이 내가 옹호하는 반실재론적 입장의 정식화이다. 나는 그것을 구성적 경험론(constructive empiricism)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정식화는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1.1절의 정식화와 마찬가지로 단서 조항이 필요하다. 게다가, 이는 ‘경험적 적합성’에 대한 해명을 필요로 한다. 당분간은 다음과 같은 임시적인 해명만 제시할 것이다. 즉, 한 이론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는 것은 그 이론이 이 세계의 관찰가능한 대상과 사건에 대해 말하는 바가 참인 바로 그 경우, 즉, 그것이 ‘현상을 구제’하는 바로 그 경우를 말한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러한 이론은 모든 실제 현상에 부합하는 하나 이상의 모형을 가진다. 나는 여기서 말하는 현상이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한다. 즉 그것은 실제로 관찰된 현상이나, 과거나 현재 혹은 미래의 어떤 시점에서 관찰된 현상으로는 포괄되지 않는다. ⋯

[이론의] 수용과 관련하여 내가 실재론과 반실재론 사이에 설정한 구분은 거기에 믿음이 얼마나 관여하는지만을 고려한다. 이론의 수용은 (완전한 수용이든지, 잠정적인 수용이든, 일정 정도의 수용이든) 믿음을 넘어선 무언가를 분명히 요구하는 과학 활동의 한 현상이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주된 이유는 우리가 결코 완벽한 이론을 마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과학자가 한 이론을 수용한다면, 그로 인해 그는 특정한 종류의 연구 프로그램에 몸담게 된다. 그 프로그램은 그가 다른 이론을 수용했을 경우 몸담게 될 프로그램과 다를 수 있는데, 이는 그 두 (매우 불완전한) 이론이 지금까지는 관찰가능한 모든 것에 대해서 서로 동등하더라도 그렇다.

따라서 수용은 믿음뿐 아니라 모종의 다짐(commitment)을 요구한다. 실제 과학자가 아닌 우리의 경우에도, [이론의] 수용은 그 이론의 개념적 밑천들을 통해 미래의 현상들과 대면하겠다는 다짐을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가 설명을 하고자 할 때 사용할 용어들을 결정한다. ⋯ 당신은 한 이론을 수용하지 않고도 그 이론이 인도하는 언어 사용의 맥락에서 논의에 참여할 수 있다 — 물론 수용은 그러한 맥락을 낳는다. 이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적 다짐과 유사한 면이 있다. 물론 결단은 참이나 거짓이 아닌데, 그 다짐은 그 이론이 [언젠가] 정당화될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드러날 뿐이다.

이것은 이론 수용의 실용적(pragmatic, 화용론적) 차원에 대한 예비적인 밑그림이다. 인식적 차원과 달리, 그것은 실재론과 반실재론을 구분하는 문제에서 명시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실재론에 따르면 수용을 위해 요구되는 믿음의 양이 보통 적기 때문에, 반실재론자는 실용적 측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점은 중요한 차이를 나타낸다. 한 이론이 참이라는 믿음이나 그것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는 믿음은 그 이론의 전적인 수용이 정당화될 것이라는 믿음을 함축하지 않으며, 그 역도 성립하지 않는다. 이를 확인하려면, 인류의 미래에 대해 혹은 과학 공동체와 그[과학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영향과 실제적 한계들에 대해 상당히 명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고려해 보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어, 경험적으로 적합한 이론은 사실상 우리가 [지금껏] 받아들여 온 다른 이론들과 쉽게 결합되지 않을 수도 있고, 우리가 성공하기 전에 아마겟돈[인류의 종말]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한 이론이 참이라는 믿음 혹은 경험적으로 적합하다는 믿음이 ‘이상적인 연구 조건 하에서 그 이론의 수용이 결국에는 정당화될 것’이라는 믿음과 동등하게 취급될 수 있는지는 또 다른 질문이다. 내가 볼 때 이 질문은 과학철학과 무관한데, [그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한다 해도 우리가 앞서의 논의를 통해 이미 확립해 놓은 구분이 무효가 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질문은 반사실적 진술들이 객관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이라는 가정도 필요로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이러한 관점에 부정적이다.)

실재론자와 반실재론자가 이론 수용의 실용적 측면에 대해 불일치할 필요는 없어 보임에도, 내가 여기서 그것을 언급한 것은 내 생각에 그들이 전형적으로 그렇게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설명의 요구[3~6절]와 같은 문제를 되풀이해서 만나게 될텐데, 실재론자는 보통 이에 객관적 타당성을 부여하는 반면 반실재론자는 그러한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

2. 이론과 관찰의 ‘이분법’

논리실증주의가 30여년 동안이나 과학철학을 지배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60년에 처음 출간된 『미네소타 과학철학 연구(Minnesota Stud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1권에는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의 논문 “이론적 개념의 방법론적 지위(The Methodological Status of Theoretical Concepts)”가 실렸는데, 이 논문은 여러 면에서 실증주의 프로그램의 정점이다. 그는 과학을 관찰 언어에 연결하여 해석한다. (여기서 관찰 언어란 이론적 용어를 포함하지 않는 자연 언어의 일부로서 가정된 것이다.) 2년 후 미네소타 시리즈에는 그로버 맥스웰(Grover Maxwell)의 논문 “이론적 존재자의 존재론적 지위(The Ontological Status of Theoretical Entities)”가 실렸는데, 이 논문은 제목과 주제에서 카르납의 논문과 정반대였다. 이 논문은 이론/관찰의 구분이 그어질 수 없다는 새로운 실재론자들의 주장을 대표하는 표준적인 논거(locus classicus)가 되었다.

나는 맥스웰의 요점 중 일부를 직접 검토할 것이지만, 먼저 쟁점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을 해야겠다. ‘이론적 존재자’나 ‘관찰적/이론적 이분법’과 같은 표현들은 외관상 범주 착오의 사례로 보인다. 용어나 개념은 (이론을 구성할 목적으로 도입되고 채택되었기 때문에) 이론적이고, 존재자는 관찰가능하거나 관찰불가능하다. 이것이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이분법] 논의를 두 가지 문제로 나눈다. [첫째로] 우리의 언어를 이론적인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가? [둘째로] 우리는 대상과 사건을 관찰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

맥스웰은 두 물음 모두에서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지만, 둘을 주의 깊게 구분하지 못했다. 첫 번째 물음에 대해 그는 윌프리드 셀라스(Wilfrid Sellars)와 폴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가 쓴 유명한 글들에 의존할 수 있는데 나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의 모든 언어는 속속들이 이론에 감염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VHF 수신기’와 같이 최근에 도입된 용어를 제거하기 시작하여 ‘질량’, ‘충격량’, ‘원소’와 같은 이론적재적(theory-laden) 용어들을 제거해 버리고 [더 나아가] 언어 형성의 이전 단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별 소득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방식과 과학자들이 말하는 방식은 [모두] 이전에 받아들여진 이론들이 제공하는 그림에 의해 안내된다. 이미 피에르 뒤엠(Pierre Duhem)이 강조한 것처럼, 이는 실험 보고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증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언어의 위생적 재구성은 불가능하다. ⋯

그러나 이는 우리가 과학적 실재론자여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우리는 모호함에 대해 확실히 그보다 포용적이다. 우리가 어떤 시점에 주어진 어떤 [세계에 대한] 그림에 의해 우리의 언어가 인도되도록 두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우리가 그 그림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태양이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진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지금은 명백히 거부된 그림에 의해 인도받은 것이다. 밀턴이 『실낙원(Paradise Lost)』을 썼을 때, 그가 지나가는 말로 했던 다양한 언급들은 그가 당시의 새로운 천문학적 발견들과 사변들에 관심이 있었음을 분명히 드러내지만, 그는 의식적으로 구시대의 지구 중심 천문학이 자신의 시를 인도하도록 놔둔 것이다. 이는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우리 언어의 이론적재성으로부터 어떠한 즉각적인 결론도 이끌어낼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맥스웰의 주된 논변이 겨냥하는 것은 관찰가능/관찰불가능 구분을 반대하는 것이다. 먼저 그 구분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보자. ‘관찰가능’은 잠정적인 존재자(실재하거나 실재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자)를 분류하는 용어이다. 날아다니는 말은 관찰가능하지만 —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는 그런 것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토록 확신할 수 있다 — 17이라는 수는 관찰불가능하다. 이와 관련된 인간 행위의 분류가 있어야 하는데, 예컨대 [도구의] 도움을 받지 않은 지각 행위가 [곧] 관찰이다. 알려진 힘의 장에서 휘어진 입자의 궤적을 통해 입자의 질량을 계산하는 행위는 질량에 대한 관찰이 아니다.

여기서 (대상이나 사건 혹은 과정과 같은 어떤 존재자를) 관찰하는 일(observing)과 (그것이 이러저러하다는)것임을 관찰하는 일(observing that)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필리핀에서 발견된 석시시대의 사람에게 테니스공이나 자동차 충돌을 보여주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그의 행동, 예컨대 그가 공을 집어 올리고 공을 던지는 등의 행동을 보고 그가 그것을 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테니스공이라고 본 것이 아니며, 그는 어떤 사건이 자동차 충돌이라고 본 것도 아닌데, 왜냐하면 그는 그런 개념을 갖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는 지각을 통해서 그런 정보를 얻을 수 없다. 그는 무엇보다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와 동일한 대상이나 사건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것은 보는 것(seeing)과 무엇임을 보는 것(seeing that) 사이의 애매성을 악용한 말장난일 뿐이다. (⋯ x가 테니스공을 관찰했다고 말하는 것은 x가 그것이 테니스공이라고 관찰했다는 것을 전혀 함축하지 않는다. 후자는 테니스 경기에 대한 어떤 개념적 인식을 필요로 한다.)

맥스웰은 관찰가능성에 대해 두 종류의 논변을 제시한다. 하나는 그런 구분의 가능성을 반대하는 논변이고, 다른 하나는 구분이 가능한 경우에도 그 구분의 중요성을 반대하는 논변이다.

첫 번째 논변은 직접적인 관찰과 추론 사이에 놓인 상황들의 연속성에 근거한다.

원리적으로, 진공을 통해 보기에서 시작하여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하는 연속적인 나열이 존재한다.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창유리를 통해 보기, 안경을 통해 보기, 쌍안경을 통해 보기, 저해상도의 현미경을 통해 보기, 고해상도의 현미경을 통해 보기 등등. 이것의 중요한 귀결은,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관찰’과 ‘이론’ 사이에 임의적이지 않은 선을 그을 수 있는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7]

[그러나] 관찰로 추정되는 행위들의 이러한 연속적인 나열이 관찰가능한 것으로 추정된 것들의 연속성과 직접 대응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어떤 것을 창문을 통해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창문을 열고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목성의 위성은 망원경으로 볼 수 있지만, 목성과 충분히 가까운 곳에 있다면 망원경 없이도 볼 수 있다. 어떤 것이 관찰가능하다고 해서 지금 [당장] 그것을 관찰하기에 조건이 좋다는 것을 자동적으로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원리는 다음과 같다.

만일 X가 [적절한] 상황 하에서 우리에게 제시될 경우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게 되는, 그러한 상황들이 존재한다면, X는 관찰가능하다.

이 원리는 정의라기보다, 단지 오류를 피하기 위한 대략적인 지침일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탐지가능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에서 연속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어떤 것들은 적어도 광학 현미경의 도움을 받아야만 탐지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것들은 아마도 전자 현미경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며, 등등. 맥스웰의 문제제기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관찰가능한 것과 좀더 우회적인 방식을 통해 탐지만 될 수 있는 것 사이의 어디쯤에서 선을 그어야 하는가?

임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 물음에 답할 수 없다고 인정할 경우, 어떤 귀결이 따라나오게 되는가? ‘관찰가능’은 모호한 술어이다. 모호한 술어에는 많은 퍼즐이 있으며, 모호함이 있으면 어떤 구분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많은 궤변들이 존재한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는 근친상간이 비도덕적이지 않음을 논증하는데, 당신의 새끼 손가락으로 당신 어머니의 엄지 발가락을 건드린다고 해서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듯 다른 부분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연 언어에서의 술어는 거의 대부분 모호하고, [그렇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데는 그 술어를 관장하는 논리를 정식화할 때만 빼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8] 모호한 술어라도 그것의 명백한 경우와 명백한 부정적 경우가 있기만 하면 사용될 수 있다. 육안으로 보는 것은 관찰의 명백한 경우이다. 그렇다면 혹시 맥스웰은 우리에게 명백한 부정적 경우를 제시해 보라며 싸움을 걸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나는 어떠한 (비논리적) 용어라도 관찰 용어의 가능한 후보라는 논제를 뒷받침하고자 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보는 것은 내가 보기에 관찰의 명백한 경우이다. 우주비행사가 [목성에] 근접하면 그는 위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개상자 속의 미시 입자들에 대한 소위 관찰은 —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론이 옳더라도 — 내가 볼 때 명백히 다른 사례이다. 그 이론이 말해주는 바에 따르면, 하전 입자가 포화 증기로 가득한 상자를 가로지르면 [그 입자의] 경로 주변에 있는 약간의 원자들이 이온화된다. 만일 이 증기의 압력이 감소되어 과포화되면, 이온들 위에 작은 방울들이 응결되고 이것이 입자의 경로에 흔적을 남긴다. 결과적으로 나온 은회색 선은 제트기가 지나갈 때 하늘에 남겨지는 비행운과 (외양에서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유사하다. 내가 그러한 비행운을 가리키면서 “저기 봐, 제트기가 있어!”라고 말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당신은 “나도 비행운은 봤지만, 제트기는 어딨어?”라고 말하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저기 비행운의 조금 앞쪽을 봐봐 ⋯ 저기! 보여?”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안개상자의 경우에는 이런 대응이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하전] 입자는 안개상자에 의해 탐지될 수 있고 그 탐지는 관찰에 기초해 있지만, 그것은 분명히 입자가 관찰된 경우가 아니다.

맥스웰의 두 번째 논변은 “관찰가능한(observable) 것은 관찰될 수 있는(can) 것이다”의 ‘~수 있는’으로 우리의 주의를 돌린다. 물론 한 대상은 일시적으로 관찰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관찰불가능’은 다소 다른 뜻이다. 그 대상은 그 순간에 실제로 놓여진 상황에서는 관찰될 수 없지만, 보다 호의적인 상황에 놓인다면 관찰될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나는 일시적으로 상처 입지 않을 수 있거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관찰가능’ 또는 (그가 좋아하는 표현인) ‘원리적 관찰불가능’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맥스웰의 설명에 의하면, 원리적 관찰불가능성이란 그 존재자가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관찰될 수 없다는 것을 유관한 과학 이론이 함축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감각기관(예, 전자현미경 눈)을 갖는 상이한 환경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논의의 주제를 바꾸는 눈속임처럼 보인다. 나는 구리로 된 절구와 공이를 가지고 있는데 무게는 대략 1kg 정도 나간다. 그것을 거인이 깨뜨릴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휴대용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휴대용과 콘솔형 레코드 플레이어 사이에 아무런 구분도 없는 것인가? 물리학의 관점에서 인체는 어떤 종류의 측정 장치이다. 그래서 그것은 모종의 선천적인 한계 — 그 세부사항은 최종적인 물리학과 생물학에서 기술되겠지만 — 를 지닌다. ‘관찰가능’에서 ‘가능’은 바로 이런 한계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한계 말이다.

그러나 내가 언급한 것처럼 맥스웰의 논문에는 다음과 같은 다른 종류의 논변도 있다. 현실적인 관찰가능/관찰불가능 구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구분은 전혀 중요치 않다는 것이다. 즉 실재론자에게 문제시되는 것은 과학에서 가정된 존재자의 실재성이다. 그런 존재자들이 관찰가능한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로 분류될 수 있다고 하면, 이는 그들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논리적으로 보면, 전혀 없다. 왜냐하면 ‘관찰가능’이라는 용어는 추정되는 존재자를 분류해줄 뿐, 실제 존재와는 논리적으로 무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맥스웰은 그 이상의 것을 마음에 품고 있었음에 틀림없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드러난다. “나의 결론에 따르면, 특정한 지점에 그어진 관찰적/이론적의 구분선은 우연적으로 설정된 것으로, 우리의 생리적 구조에 따른 함수이며, ⋯ 그러므로 거기에는 어떠한 존재론적 의미도 없다.”[9] 만일 ‘관찰가능’과 ‘존재’가 서로를 함축하는지 여부가 유일한 질문이라면 존재론적 의미는 없다. 둘은 서로를 함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구분이] 과학적 실재론의 질문에 대해서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까?

내가 과학의 목적과 인식적 태도를 통해 과학적 실재론을 정의했음을 상기해보자. 여기서 질문은 과학 활동의 목적은 무엇이며 과학 이론의 수용을 위해 요구되는 믿음의 양을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다. 적절한 형태의 수용[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 이론 전체가 참이라는 믿음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가? 이 질문에 대해 우리에게 관찰가능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커다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사실 우리는 이쯤에서 다음과 같은 답변을 시도할 수도 있다. 한 이론을 수용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고 믿는 것이다. 즉, 그 이론이 관찰가능한 것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참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런 제안에 대해, 대번에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반실재론자가 세계에 대해 믿기로 결정한 바는 그가 어디까지를 자신 — 또는 더 정확히는 인식 공동체 — 의 접근가능한 증거의 범위라고 믿는지에 일부 의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인류를 우리가 속한 인식 공동체로 간주하고 있지만, 인류가 스스로 변이를 일으킬 수도 있고, (지구 안의 또는 지구 밖의 ‘다른 동물들을 개인으로 간주하기’로 하는) 관련된 이데올로기적 또는 도덕적 결정을 통해 다른 동물들을 공동체에 포함시킴으로써 인식 공동체가 확장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내 제안에 따르면, 반실재론자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만일 인식 공동체가 Y의 방식으로 변화한다면, 세계에 대한 나의 믿음은 Z의 방식으로 변화할 것이다.

이것을 반실재론에 대한 반론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 방침이 우리의 접근가능한 증거의 범위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는 독립적으로 [늘] 동일한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요구조건을 제시하는 것이다. 내가 볼 때, 그 조건은 합리적인 설득력이 전혀 없다. 내 생각에, 그것은 철저한 회의주의 또는 도매급 맹신주의를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철학에서 인식론의 주요 질문들을 지나가는 말로(en passant) 종식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일단 다음과 같은 결론만 내릴 것이다. 즉, 무엇이 관찰가능한 현상에 해당되는지가 인식 공동체의 함수라는 것을 (즉, 관찰가능우리에게 관찰가능이라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경험적으로 적합한 — 그 이론의 모형이 관찰가능한 현상에 부합하는 — 이론을 찾는 것에만 몰두하는 것이 외견상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이 대답에서 사용된 경험적 적합성이라는 개념이 진부한 반론들에게 쓰러지지 않으려면 매우 조심스럽게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 그러나 요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관찰가능성이 존재와는 무관하더라도(사실, 그러기엔 너무 인간중심적이다), 그것은 과학에 대한 적절한 인식적 태도와는 여전히 많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3.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

윌프리드 셀라스(Wilfrid Selars), J. J. C. 스마트(J. J. C. Smart), 길버트 하만(Gilbert Harman)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개진된 한 견해에 따르면, 합리적인 추론의 규준은 과학적 실재론을 필요로 한다. 이 주제[과학적 실재론]에 관해 추론할 때 우리가 과학 자체를 수행할 때와 동일한 패턴의 추론을 따르고자 할 경우, 우리가 수용한 과학 이론에 대해 우리가 그것의 참을 주장하지 않는 것은 비합리적인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셀라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생각에, 한 이론을 수용할 좋은 이유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 이론에서 가정된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수용할 좋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10]

이런 종류의 논증에서 호소하는 주된 추론 규칙은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이라는 규칙이다. 이 아이디어는 아마도 퍼스(C. S. Peirce)에게서 처음 나온 것 같지만,[11] 근래에 이 규칙과 그 사용법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주로 길버트 하만이다.[12] 나는 단순화된 버전만을 제시할 것이다. 우리에게 증거 E가 주어져 있고, 몇 개의 가설들, 이를테면 HHʹ을 고려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제 그 규칙에 따르면, 만일 HHʹ보다 E에 대한 더 좋은 설명인 바로 그 경우에 우리는 Hʹ보다 H를 추론해야 한다. (비일관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단서 조항들이 필요하다. 언제나 우리는 이용가능한 모든 증거들에 대한 최선의 포괄적인 설명을 추구해야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일상적인’ 경우에 이 규칙을 따르고 있으며, 만일 우리가 그 규칙을 어디서나 일관되게 따른다면, 우리는 셀라스가 말한 방식을 따라 과학적 실재론으로 인도될 것이다. 그리고 그럴듯해 보이는 ‘일상적인’ 경우들은 확실히 많이 존재한다. [예컨대] 나는 한밤중에 벽 속의 극극거리는 소리와 작은 발의 타닥타닥 소리를 들었으며, 내 치즈가 없어졌다. 그래서 나는 쥐 한 마리가 내 집에 살고 있다고 추론한다. 나는 단지 쥐가 존재하는 것 같은 이러한 외견상의 징조가 계속될 것이라거나, 모든 관찰가능한 현상이 마치 쥐가 있는 것과 똑같다고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쥐가 실제로 있다고 추론하는 것이다.

이런 추론 패턴을 따를 경우 우리는 관찰불가능한 존재자도 믿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과학적 실재론자는 보다 일상적인 맥락에서 우리 모두가 따르는 추론 규칙을 일관되게 따르는 사람일 뿐인 것인가? ⋯

먼저, 우리 모두가 어떠한 추론 규칙을 따른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첫 번째 가능한 의미는 학생이 논리학 연습문제를 풀듯이 우리가 그 규칙을 의식적으로 숙고하여 ‘적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지나치게 문자적이고 지나치게 제한적이다. 분명히 인류 전체는 많은 시간 동안 논리 규칙들을 따르지만, 그 규칙들을 말로 표현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하다. 두 번째 의미는 우리가 의식적인 숙고 없이 그 규칙들에 따라 행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정교하게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데, 왜냐하면 각 논리 규칙은 허용 규칙이기 때문이다. (전건 긍정법은 A와 (A이면 B)로부터 B를 추론하는 것을 허용하지만, 그 대신 (B 또는 A)를 추론하는 것도 금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가 얻은 모든 결론이 그의 전제들로부터 일련의 규칙들을 이용해 도출될 수 있다면, 위의 의미에서 그는 그 규칙에 따라 행동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느슨하다. 이런 뜻에서라면 우리는 언제나 임의의 전제로부터 임의의 결론을 추론할 수 있는 규칙에 따라 행동한다. 그래서 어떤 규칙을 따른다고 말하려면, 그 규칙이 허용하는 모든 결론은 기꺼이 믿으려 하는 반면 그것이 허용하는 것과 상충하는 결론은 믿기 꺼려 해야 — 아니면 문제의 전제들을 의심하거나 — 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특정한 경우에 특정한 규칙을 따른다는 진술은 우리가 무엇을 기꺼이 하려 하고 무엇을 꺼려 하는지에 대한 심리학적 가설이다. 그것은 경험적 가설로서, 자료뿐 아니라 경쟁 가설과도 대봐야 한다. 다음과 같은 경쟁가설을 생각해 보자. 언제나 우리는 증거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고 (즉, 모든 관찰가능한 현상이 그 이론의 말대로라고) 기꺼이 믿으려 한다.

이로써 나는 과학자가 어떤 이론이나 가설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는 많은 사례들을 그 이론의 설명적 성공에 기초하여 확실히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폴 태거드(Paul Thagard)는 그러한 많은 사례들을 이야기한 바 있다.[13]) 내가 과학 이론의 수용을 그것의 경험적 적합성에 대한 믿음과 동일시한다는 점을 상기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과학적 추론의 사례들에 대해 두 가지 경쟁 가설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는 실재론적 견해에 잘 부합하고, 다른 하나는 반실재론적 견해에 잘 부합한다.

벽판 안의 쥐와 같은 사례는 이 경쟁 가설들의 우열을 판가름하는 데 효과적인 증거를 제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쥐는 관찰가능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벽판 안에 쥐가 있다”와 “모든 관찰가능한 현상이 마치 벽판 안에 쥐가 있는 것과 똑같다”는 완전히 동등하다. (우리가 쥐에 대해 아는 것들을 전제할 때) 각각은 서로를 함축한다.

사람들이 추론 규칙을 따라야 하는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정말로 그것을 따르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물론이다. 그러나 쥐 문제를 비롯해 다른 일상적인 문제들을 다룰 때 우리 모두가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 규칙을 따른다는 전제, 바로 이 전제는 근거가 부족하다. 그것은 증거에 의해 보증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증거는 내가 제안한 대안 가설보다 그 전제에 유리한 얘기를 해주진 않기 때문이다. ⋯

4. 설명의 요구의 제한

이 절과 다음 두 절에서 나는 설명력이 이론 선택의 기준이라고 지적하는 실재론 옹호 논변을 검토할 것이다. 이것이 한 가지 기준이라는 것을 내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실재론 옹호 논변은 설명의 요구가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에만 — 즉, 보편적인 규칙성 중 설명되지 않은 것이 하나만 남아있어도 (바로 그것 때문에) 과학의 임무가 미완성으로 간주되는 경우에만 — 성공할 수 있다. 나는 그러한 무제한적인 설명의 요구가 숨은 변수를 요청하게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스마트, 라이헨바흐(Reichenbach), 새먼(Salmon), 셀라스의 저술에서 등장하는 그런 방향의 논변들을 반박할 것이다. 숨은 변수 이론은 20세기 물리학에서 최소한 하나의 주류 학파의 견해와 상충한다. 나는 그런 철학자들도 실재론에 그런 귀결과의 논리적 연결을 부과하려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실재론자의 열망은 전통적 형이상학의 잘못된 이상에서 태어난 것이다.

스마트는 『과학과 철학 사이에서(Between Science and Philosophy)』라는 책에서 실재론을 위한 두 가지 논변을 제시한다. 하나는 실재론만이 옳은 이론과 단지 유용한 이론 사이의 구분을 중요하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론의 사용에 중요성을 두는 견해, 즉 경험적 적합성만 요구하고 진리를 중요시하지 않는 견해를 ‘도구주의’라고 부른다. 그런데 도구주의자는 이론의 유용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코페르니쿠스 가설에 대해서는 실재론자이면서 프톨레마이오스 가설에 대해서는 도구론자인 어떤 (16세기) 사람을 고려해보자. 그가 프톨레마이오스적인 주전원(epicycle) 체계의 도구적 유용성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코페르니쿠스 가설이 행성의 겉보기 운동에 대해 예측하는 것과 거의 같은 예측을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산출할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 가설이 실재론적 참이라는 가정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도구적 유용성을 설명해준다. 만일 모든 이론이 단지 도구적인 것으로만 간주된다면, 어떠한 이론의 도구적 유용성에 대한 그러한 설명은 불가능할 것이다.[14]

마지막 문장의 ‘그러한 설명’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일 어떤 이론도 참인 것으로 가정되지 않는다면, 어떤 이론의 유용성도 다른 이론의 참으로부터 설명될 수 없다. 당연하다. 그러나 만일 그 대신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지구에서 관찰되는 행성들의 운동에 대한 매우 정확한 묘사를 함축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유용성에 대한 덜 좋은 설명을 가지게 되는 걸까? 이 전제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의 가설이 참이라고 가정하진 않더라도, 프톨레마이오스의 보다 단순한 묘사 역시 그러한[지구에서 관찰되는 행성들의] 운동을 매우 근사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을 함축하긴 할 것이다.

그렇지만 스마트는 틀림없이 그런 대응이 문제를 한 걸음 뒤로 물린 것에 불과하다고 반박할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기초한 예측의 정확성은 무엇이 설명해주겠는가? [스마트에 따르면] 만일 내가 그 이론의 경험적 적합성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단지 말뿐인 설명만 제시한 것이다. 당연히 스마트는 자신의 질문을 실제 예측에만 국한시킬 생각이 없다 — 실제로 그가 말하는 예측은 실제 예측과 가능한 예측과 과거에 대한 예측(retrodictions) 모두를 포함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행성과 관련된 모든 관찰가능한 현상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 만일 정말 그렇다면 — 설명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중세의 논쟁으로부터, 우리는 기본적 규칙성은 단지 맹목적 규칙성일 뿐이고 어떤 설명도 갖지 않는다는 유명론적 대응을 불러낼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 반실재론자는 비슷하게 말해야 한다. 관찰가능한 현상이 이러한 규칙성을 보여준다는 것은 — 그 현상들이 이론에 부합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단지 맹목적 사실이고, ‘현상 이면의’ 관찰불가능한 사실들에 의해 설명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 — 사실 그런 설명은 이론의 우수성에도,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스마트의 주된 논변은 정확히 이 점을 건드리고 있다. 그는 같은 장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직접적으로 미시 구조를 가정하고 거시 구조는 간접적으로만 가정하는 이론 T가 있다고 가정하자. 거시적 현상에 대한 통계적이고 근사적인 법칙들은 아마도 단지 부분적으로만 상세히 설명될 것이고, 어떤 경우라도 기본 존재자에 대한 정밀한 (결정론적 혹은 통계적) 법칙에서 도출된다. 이제 우리는 T의 일부이고 T가 거시적 현상에 대해 말하는 것만을 말하는 이론 Tʹ을 고려하자. (Tʹ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는 열린 문제로 남겨둘 것인데, 그 문제는 여기서 전개되는 논증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어나간다.

나는 실재론자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Tʹ의 성공은 원래의 이론 T가 자신이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들에 대해 참이라는 사실, 예컨대, 이론 T에서 가정된 전자 또는 무언가(그것이 무엇이든)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된다는 말이다. 만일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고 T가 실재론적으로 참이 아니라면, Tʹ의 성공은 완전히 불가해한 것이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관찰적 어휘로 기술된 일에 얽힌 무수히 많은 행운들이 모여, 그 일이 마치 이론적 어휘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된 비-존재자들에 의해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가정해야만 할 것이다.[15]

스마트는 다른 구절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우주적 우연의 일치(cosmic coincidence)’에 대해 얘기한다. 관찰가능한 현상의 규칙성은 보다 심층의 구조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주적 규모의 행운과 우연의 일치를 믿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구절들에 함축된 설명의 요구를 정확하게 정식화한다면, 그것의 불합리성이 대번에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명 없이 규칙성을 가정한다는 사실만으로 Tʹ이 빈약한 이론이 되는 경우, T도 나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만일 어떤 종류의 규칙성이 기초적인 것으로서 가정될 수 있는지에 대한 어떤 정확한 제한이 존재하는 경우, 이러한 논증의 맥락은 Tʹ이 T보다 무조건 나빠진다고 생각할 이유는 제공해주지 않는다.

어느 경우든, 행운이나 우연의 일치의 존재를 설명의 부재와 동일시하는 것은 부당하다. 내가 시장에서 내 친구를 만난 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내가 그곳에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고, 그도 왜 그가 거기 왔는지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어떻게 우리가 만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우연의 일치로 부르지만, 그것은 그 사건이 불가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만남을 위해 일부러 시장에 가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16] 과학이 일반적으로 우연의 일치나 우연적 상관관계를 이론적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요구조건은 부과될 수 없는데, 그것은 애초에 말도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설명의 요구를 설득력있어 보이는 용어로 재진술한 것일 뿐, 여기에는 그에 동기를 부여할 만한 내용이 전혀 없다. ⋯[5절 생략]

6. 설명의 제한: 한 가지 사고실험

윌프리드 셀라스는 과학철학에서 실재론의 귀환을 이끈 인물 중 하나로, 지난 30년간의 저술을 통해 체계적이고 정합적인 과학적 실재론을 발전시켜 왔다. 나는 다른 곳에서 그의 견해와 논증들을 여러 번 논의했지만, 여기서는 방금 검토한 바 있는 스마트, 라이헨바흐, 새먼의 논증과 긴밀히 연관된 몇 가지 측면에 집중할 것이다.[17] 일단 셀라스의 방식대로 판을 마련하며 시작을 해보자.

실증주의적 저술들에는 — 셀라스가 성공적으로 허물어뜨린 — ‘계층적 그림(levels picture)’이라는 과학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화된 그림이 널리 퍼져 있다.[18] 이 그림에 의하면, 관찰가능한 단칭 사실(‘이 까마귀는 검다’)은 관찰가능한 일반적 규칙성(‘모든 까마귀는 검다’)에 의해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이는 다시 관찰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만 제한되지 않는 상위의 이론적 가설에 의해 설명된다. 이러한 세 수준은 흔히 사실, 경험 법칙, 이론의 수준으로 불린다. 그러나 셀라스가 지적하듯, 이론은 경험 법칙을 설명하지 않으며, 심지어 함축하지도 않는다 — 이론은 관찰가능한 대상들이 왜 이러한 소위 법칙들을 이러저러한 정도로 따르는지만을 보여줄 뿐이다.[19] 사실, 어쩌면 그러한 경험 법칙은 전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즉 ‘알비노를 제외하면’ 모든 까마귀는 검고, ‘대기압이 정상적이라면’ 물은 100℃에 끓으며, ‘중간에 가로막히거나, 비행기에 줄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떨어지는 물체는 가속되고, 기타 등등. 관찰가능한 수준에서 우리가 발견하곤 하는 것은 명세되지 않은 세테리스 파리부스(ceteris paribus, 다른 조건이 같다면) 조건들[예: 알비노를 제외하면, 대기압이 정상적이라면, ...]에 심하게 의존하는 잠정적인 법칙들뿐이다.

이는, 아직까지는, 방법론적 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일반화를 ‘구제’해 줄 이론을 정말로 바라진 않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도 그것의 엄격한 보편성을 확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상의 미시 구조가 어떤 정확하고 보편적인 규칙성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하는 이론은 그 대상 자체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을 함축해야 한다. 사소하지만, 이는 지금까지의 논점에 대한 나의 대응이다. 그러나 셀라스는 단지 관찰가능한 것에 대한 기술만 있는 것으로는 태생적으로 열등하며, 그러한 불완전성은 (과학의 목적이라는 명목 하에) 현상 이면에 놓인 관찰불가능한 실재를 도입하도록 요청한다고 보고 있다. 이는 다음의 흥미로운 ‘사고실험’에 의해 드러난다.

화학의 어떤 초기 단계에서, ‘황금 시료들과 실험 조건들이 관찰에 의해 결정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황금의 상이한 시료들이 왕수(aqua regia, 진한 질산과 진한 염산의 혼합액)에서 상이한 비율로 용해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고 상상해보자.[20] 또한 화학자들은 상이한 황금 시료들에 대해 서로 다른 미시 구조를 가정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응했다고 하자. 관찰상으로는 예측할 수 없었던 용해 비율의 차이는, 그 시료가 각각 고정된 용해 비율을 갖는 두 (관찰상 동일한) 물질의 (화합물이 아닌) 혼합물이라고 말함으로써 설명된다.

이 사례에서 우리의 설명은 어떤 법칙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그 법칙과 동일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관찰 영역의 대응물[즉, 경험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의 물리적 변수들을 관찰가능한 영역 너머에서 찾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과학은 설명을 목표로 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해야 하며, 그래서 관찰불가능한 미시 구조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셀라스의 주장이다.

우리 앞에는 적어도 세 가지 물음이 놓여 있다. [첫째] 이러한 미시 구조에 대한 가정은 관찰가능한 현상에서 정말 아무런 새로운 귀결도 낳지 않았는가? [둘째] 과학은 — 그 설명 수단이 경험적 예측에 어떤 이득도 주지 않더라도 — 반드시 설명을 해야 한다는 이러한 요구는 정말 존재하는가? 그리고 셋째, 이와 같은 사례에서 과학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미시 구조 그림을 사용해야 할 다른 근거가 있지는 않을까?

먼저, 내 생각에 위의 가상의 화학자들은 분명히 관찰가능한 새로운 규칙성도 상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두 물질은 각각 용해 비율이 xx+yAB이고, 모든 황금 시료는 이 물질들의 혼합물이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 금을 혼합하는 정확성의 한계 내에서 — 모든 황금 시료의 용해 비율이 x보다는 낮지 않고 x+y보다는 높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 두 값 사이에서는 어떤 용해 비율도 허용된다는 것이 따라나온다. 이 중 어떤 것도 상이한 황금 시료가 xx+y 사이의 다양한 용해 비율을 가졌었다는 자료에 의해서는 함축되지 않는다. 따라서 셀라스의 첫 번째 주장은 틀렸다.

셀라스의 사례를 위해, 우리는 용해 비율을 예측할 수 있는 추가적인 방법이 여전히 없다고 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이 다른 관찰가능한 요인에 의존하지 않는 이러한 [용해 비율의] 차이를 설명해야 한다는 정언적 요구가 존재하는가? ⋯ 그런 요구의 한 가지 정교한 형태(라이헨바흐의 공통 원인의 원리)는 자동적으로 숨은 변수를 요구하게 되는데, 이러한 숨은 변수는 비결정론적 이론에 ‘고전적’ 토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셀라스는 숨은 변수의 요구가 양자 물리에서 통용되는 주류 견해와 충돌하게 된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양자역학 이론의 환원불가능하고 법칙적인 통계적 앙상블은 숨은 변수 가정과 수학적으로 비일관적이라는 친숙한 사실”을 언급했다.[21] 그래서 그는 설명의 요구를 실제로는 이론에 숨은 변수를 부가하는 것이 일관적인 경우로만 제한했다. 그리고 일관성은 확실히 논리적 거점을 제공한다.

불행히도 이런 제한은 실패를 막지 못한다. 왜냐하면 숨은 변수가 양자역학을 고전적인 부류의 결정론적 이론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보인 수많은 증명들이 있지만, 그런 증명들은 일관성보다 훨씬 강한 조건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러한 증명 중 하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물리적 변수는 모든 가능한 상태에 대한 측정에서 동일한 통계적 분포를 가질 수 없다는 가정을 사용한다.[22] 즉, 만일 경험적 예측에서 어떤 가능한 차이를 지적할 수 없다면 실제 차이는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한 것이다. 만일 그런 조건들이 제거되고 일관성만이 유일한 기준이라면, 사실 숨은 변수도 도입될 수 있다. 내 생각에, 설명이 경험적 결과에 어떠한 이득[확장]도 주지 않을 경우, 과학적 실재론과는 달리 우리는 과학이 설명에 최우선적인 가치를 두지 않는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그러면 세 번째로 반실재론자는 어떻게 위의 가상의 화학자들이 수행한 절차를 이해할 수 있는지 고려해보자. 그는 내가 세 단락 앞에서 언급한 새로운 경험적 함축들을 지적한 후, 방법론적 이유를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금과 여타의 금속들에 대해 특정한 종류의 미시 구조를 가정함으로써, 우리는 관찰상 구별되는 많은 물질들을 지배하는 한 이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이론은 그런 물질들이 상호작용할 때 성립할 새롭고 확장된 경험적 규칙성에 대한 함축을 가질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단지 희망일 뿐이며, 어떤 가설도 결실을 장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요점은 이것이다. 과학에 부고된 참된 요구는 흔히 얘기되는 설명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관찰가능한 규칙성에 대한 새로운 진술들을 제안하고 과거의 것들을 수정할 것으로 기대되는 상상의 그림에 대한 요구이다. ⋯

7. 악마와 궁극 논변

힐러리 퍼트넘(Hilary Putnam)은 논리와 수학의 실재론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과학적 실재론을 옹호하는 여러 가지 논변들도 개진했다.
『논리철학(Philosophy of Logic)』에서 그는 필요불가결성 논증에 주로 집중했다. 수학적 존재자의 개념은 비기초(non-elementary) 수학에 필수불가결하고, 이론적 개념은 물리학에 필수불가결하다.[23] 그런 다음 그는 파이잉거(Vaihinger)와 뒤앙(Duhem)의 저술에서 발견한 허구주의(Fictionalism)이라는 철학적 입장과 대결한다.
사실상 허구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옳다. 어떤 개념은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아니다. 그것은 그런 개념에 대응하는 존재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경향은 없다. 다만 그런 ‘존재자’가 유용한 허구임을 보여줄 뿐이다.”[24]

이론이라는 말을 써서 주석을 달아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종류의 이론이 과학의 진전(advance)에 필수불가결하다 할지라도, 그 사실은 그 이론이 경험적으로 옳을 뿐 아니라 전적으로(in toto) 참이라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퍼트넘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 입장을 공격하는데, 우선 좋지 않은 허구주의 반대 논변을 비판하고, 그 다음 그 논의로부터 허구주의를 반박하기 위한 자신의 근거를 얻어낸다. 그가 보기에 나쁜 이유 중 주된 것은 검증주의(Verificationism)의 논거이다. 논리실증주의는 검증주의 의미 이론을 고수했는데, 이는 거칠게 말해 한 주장의 전체 인지적 내용, 즉 그 주장에서 유의미한 모든 것은 그것이 어떤 경험적 결과에 의해 검증되거나 반박될 수 있는지 하는 것의 함수라는 관점이다. 그래서 검증주의는 동일한 경험적 내용을 갖는 두 가설 사이에는 어떤 실제적 차이도 없다고 말할 것이다. 세계가 무엇 같은지에 대해 [서로 다르게 말하는] 두 이론인, 러더포드의 원자 이론과 파이잉어의 가설을 고려하자. 후자에는 아마 전자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 이론이 그려내는] 관찰가능한 세계는 마치 러더포드의 이론이 참인 것 같은 세계와 정확히 같을 것이다. 검증주의자는 다음처럼 말할 것이다. 파이잉어의 이론은 러더포드 이론의 부정과 일관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두 이론은 정확히 동일한 것에 해당한다.

글쎄(well), 두 이론은 동일하지 않다. 한 이론은 전자가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다른 이론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관찰가능한 현상이 러더포드가 말한 것과 같을지라도, 관찰불가능한 것에서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실증주의자는, 만일 당신이 그렇게 주장한다면 당신은 자동적으로 회의론의 제물(prey)이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당신은 실험에 의해 증명되거나 논박될 수 없는 [여러] 가능성들을 허용해야 할 것이고, 그래서 당신은 세계가 무엇과 같은지 알 수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worse), 당신이 수많은 기이한 가능성들을 거부할 이유를 갖지도 못할 것이다. 즉, 악마, 마술, 비밀의 힘(hidden power) 등이 기상천외한 결말로 이끌 것이다.

퍼트넘은 이러한 검증주의 논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검증주의에 대한] 그의 대응은 (정말 이상하게도) 검증주의자에 의해 반박된 허구주의에 대해 답변도 산출할 것이다. 회의론의 도깨비를 쫓아내기 위해, 퍼트넘은 현대 (베이즈주의) 인식론을 간략히 도입한다. [이에 따르면] 합리성은 두 가설의 모든 시험가능한 귀결(모을 수 있는 증거를 위한 귀결)이 같다면, 선험적으로 덜 그럴듯한 것(a priori the less plausible)을 수용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우리는 선험적 그럴듯함의 순서(ordering)를 어디서 얻는가? 우리는 개별적으로나 혹은 공동체로서 그것들을 얻는데, 그럴듯함에 대한 한 가지 순서를 수용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경험적 사실을 판단하는 것도 아니고 연역 논리의 정리를 진술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방법론적 입장(stand)을 택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입장을 취할 때에만 악마 가설이 ‘미친’ 것인지 아닌지 말할 수 있고, 나는 내가 택한 입장을 말하는 것이다(그리고 나는 그런 입장을 택한 사람으로서 말하고, 또한 모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으로 택하는 입장을 말하는 것이다).[25]

이런 관점 하에서, 러더퍼드와 파이잉어의 차이, 혹은 퍼트넘과 뒤앙의 차이는 (그들이 악마가 있을법하지 않다는 데(implausibility) 아마 동의하겠지만) 그들이 전자의 선험적 그럴듯함에 대해 불일치한다는 데 있다. 각각은 단지 자신이 채택한 입장, 더 나아가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취하는 입장을 말하는 것인가? 이 얼마나 실망스러운가!

사실상, 상황은 거의 그런 상태이다(not quite go that way). 퍼트넘은 전자에 대한 논의를 악마 논의로 교묘하게 바꾸어 놓고는, 우리가 어떻게 악마의 존재를 배제할 수 있는지 생각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제시된 것처럼, 파이잉어의 견해는 논리적으로 더 약하다는 점에서 러더퍼드의 견해와 다르다. 즉, 그것은 존재 주장에 대한 동의(assent)를 보류했을 뿐이다. 여기서 파이잉어의 견해가 러더퍼드의 것보다 선험적으로 덜 그럴듯할 수 없다는 것이 자동으로 따라나온다. 퍼트넘의 이념적 노력은 기껏해야 비합리성(물론, 퍼트넘 자신의 입장에서 비합리성)에 대한 ‘무신론적’ 반실재론을 고발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을 뿐이고, 다양한 불가지론에 대해서는 사용될 수 없다.

퍼트넘은 한 이론의 참에 대한 증거로서 실재론자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 무엇이 요구되는지 물음으로써, 이러한 노선의 추론을 결론짓는다. “그러나 그러면 ... 한 이론을 믿는 것이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되려면 어떤 추가적 이유들이 요구되는가?”[26] 그는 [필요한 추가적 이유는] 없다고 답한다. 적어도 여기서 그가 이유(reason)라는 것을 경험적 증거나 강력한 논증 어느 한쪽과 동일시한다면 말이다. (쏠리게 하는inclining 이유는 아마도 또 다른 문제일 것인데, 특별히 퍼트넘은 ‘믿지 않으면 비합리적인(irrational not to believe)’이라는 구절보다는 ‘믿는 것이 합리적인(rational to believe)’이라는 구절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퍼트넘은 방금 검증주의를 반박하는 봉사를 해주었기 때문에, ‘없다’는 그의 답변으로는 우리가 비합리적이라고 판결할 수 없다. 조금 전에 그 자신이 이론들이 경험적 내용에서 일치하면서 진리값에서 다를 수 있음을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재론자는 신념의 도약(leap of faith)을 감행해야 할 것이다. 도약하려는 결정은 합리적인 조사를 받겠지만, 그것은 이유나 증거에 의해 결정(dictated)되는 것이 아니다.

이후의 논문
⋯ “수학적 참이란 무엇인가(What is Mathematical Truth)”에서, 퍼트넘은
계속해서 과학적 실재론을 논의하고,
⋯ 내가 궁극 논변(Ultimate Argument)로 부르고자 하는 논변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이 마이클 더밋에게서 배웠다고 말하는 실재론의 한 정식화를 가지고 시작한다.
실재론자는 (주어진 이론이나 담론에 대하여) (1) 그 이론의 문장들은 참이거나 거짓이고 (2) 그것을 참 또는 거짓으로 만드는 것은 외부적인 어떤 것이라고 여긴다. 여기서 외부적인 어떤 것이란 (일반적으로) 우리의 감각자료 — 실제적이든 잠재적이든 — 가 아니며, 우리 마음의 구조나 우리의 언어 등도 아니다.[27]

과학 이론이나 과학적 담론에 한정하더라도, 이 정식화는 내가 제안한 정식화와 매우 다르다. 더밋의 관점에 대한 폭넓은 논의는 이런 용어들에 대한 그의 용법을 유통시켜 왔고, 퍼트넘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논의를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정식화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의 관점에서, 더밋의 용법은 상당히 독특하다. [이에 대한] 퍼트넘의 정식화는 매우 짧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정확하다. 자신의 논문 ‘실재론(Realism)’에서, 더밋은 전통적인 형태의 다양한 실재론들을 특정한 유형의 존재자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논쟁으로 기술하며 시작한다. 그러나 과거의 실재성이나 수학에서의 직관주의와 같은 몇몇 경우를 논의하면서, 그는 핵심 쟁점이 다른 물음에 관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까닭에 그는 새로운 용법을 제안하는데, 그는 그러한 논쟁을 다음과 같이 취급한다.

[실재론 논쟁은] 한 부류의 존재자나 용어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한 부류의 진술에 관련되어 있다. ⋯ 나는 논란이 되는 부류의 진술이, 그것을 알기 위한 우리의 수단과는 독립적으로, 객관적인 진리값을 지닌다는 믿음으로서 실재론을 규정한다. 즉, 그것들은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에 의거하여 참이거나 거짓이다. 반실재론자는 이런 견해, 즉 논란이 되는 부류의 진술은 우리가 그러한 진술에 대한 증거로 간주하는 것을 참조함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견해에 반대한다.[28]

더밋은 곧장 유명론자도 이런 의미에서는 실재론자가 된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다.[29]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추상적 존재자는 존재하지 않고 집합은 추상적 존재자이며 그래서 집합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확실히 집합론의 모든 진술에 한 가지 진리값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반론에 직면할 수도 있다. 만일 당신이 이런 입장을 취한다면 당신은 이런 진술들의 진리값을 결정하기 위한 (즉, 존재 양화된 진술에는 거짓을, 보편 양화된 진술에는 을, 나머지 진술에는 진리표를 적용하는) 절차를 가진 것이다. 당신의 관점에서 이는 그 진리값이 우리의 지식과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분명 당신은, 만일 우리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혹여 우리가 아무런 지식을 갖지 않더라도, 추상적 존재자에 대해서는 사정이 동일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더밋은 실재론을 정의하면서 일반성을 위해 필요조건만을 규정한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양자역학을 논의하면서 우리는, 미시물리학의 입자들이 실재하고 그 입자들은 그 이론의 원리들을 따르지만, “입자 x가 정확한 운동량 p를 갖는다”라는 진술이 참인 임의의 시각 t에 “입자 x는 위치 q를 갖는다”라는 진술은 참도 거짓도 아니라는 견해를 다룬 바 있다. 어떠한 전통적인 의미에서도, 이것은 양자역학에 관한 실재론적 입장이다.

또한, 적어도 이 문단만 보면, 더밋은 이론이 진리값을 지니는 경우 그 이론에 대한 문자적이지 않은 해석을 부주의하게 배제한 것으로 보인다. 그 둘[문자적 해석과 진리값의 소유]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스트로슨이 “1905년의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를 참도 거짓도 아닌 것으로 해석했을 때, 그는 우리 언어에 대한 문자적이지 않은 해석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사람들은 ‘적절히 해석될 경우, 그 이론은 참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 보통 문자적이지 않은 해석으로 물러서는 경향이 있다.[30]

어쩌면 실재론을 둘러싼 논쟁에서 정말 문제시되는 것은 언어에 대한 물음이라는 더밋의 주장은 옳을지도 모른다 — 그것이 진정한 문제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근방에서 심각한 철학적 문제가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가 개진한 논변은 심오하고, 심각하며, 우리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그의 용어 사용법은 전통적인 용어 사용법과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나는 이론적 언어의 모든 진술이 참이거나 거짓임을 함축할 필요가 없도록 (단지 그 진술들이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으면 되도록, 즉 각 진술에 대해 그것이 진리값을 지니게 되는 어떤 조건이 존재하면 되도록) 하면서도, 과학이 그 이론의 참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함축하도록 과학적 실재론을 정의하고자 한다. 그리고 구성적 경험론이라는 반대 입장은 더밋이 규정한 의미에서는 반실재론이 아닌데, 그것 역시도 과학적 진술이 인간의 활동이나 지식에 완전히 독립적인 진리 조건을 갖는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 논쟁이 언어에 대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어쨌든 퍼트넘 자신은 이러한 더밋의 약한 정식화를 뒤따라가지 않는다. 그 논문의 조금 뒤에서 그는 과학적 실재론 자체를 다루면서 자신이 리처드 보이드에게서 빌려왔다고 말하는 용어들로 그것[과학적 실재론]을 정식화한다. 이 새로운 정식화는 내가 궁극 논변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과학적 실재론을 위한 새로운 옹호 논변을 제안하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실재론을 옹호하는 이 논변에 따르면, 그것[실재론]은 과학의 성공을 기적으로 만들지 않는 유일한 철학이다. 성숙한 과학 이론의 용어는 전형적으로 지칭한다(이 정식화는 리처드 보이드로부터 가져왔다). 성숙한 과학에서 수용된 이론은 전형적으로 근사적 참이다. 동일한 용어는 이론이 바뀐 경우에도 동일한 것을 지시할 수 있다. 과학적 실재론자는 이 진술들을 필연적 참이라기보다는 과학의 성공에 대한 과학적 설명의 일부로서, 그래서 과학에 대한 그리고 과학이 그것의 대상들과 맺는 관계에 대한 모든 적합한 과학적 기술의 일부로서 간주한다.[31]

과학은 자신의 성공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에는 다음과 같은 규칙성이 존재한다. 즉 과학적 예측은 규칙적으로 실현된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성 역시도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일단 이것이 충족된다면, 우리는 혹시 최종 심판(terminus de jure)에 이를 수 있을까?

여기서[퍼트넘의 인용문에서] 제공된 설명은 매우 전통적인 것 — 대상에 대한 이론의 ‘적합성’, 즉 관념의 구조를 통한 대상의 구조의 반영 — 으로, [14세기의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도 매우 친숙하게 여길만한 것이다.

그럼, 우리가 과학의 성공에 대한 과학적 설명의 요구를 받아들인다고 해보자. 다만 그 요구를 단지 스마트의 ‘우주적 우연의 일치’ 논변을 재진술한 것으로 해석하는 대신, 왜 우리가 성공적인 과학 이론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는지 하는 물음으로 간주해보자. 스콜라 철학의 모습을 띤 실재론적 설명이 과학적으로 수용할 만한 답변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과학이란 생물학적 현상으로, 한 부류의 유기체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위해 수행하는 활동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점 때문에 나는 매우 다른 종류의 과학적 설명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자신의 천적인 고양이로부터 달아나는 쥐에 대한 두 가지 설명을 대조함으로써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는 이미 이런 현상을 언급하면서 의도에 기반한(intentional, 지향적) 설명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즉, 쥐는 그 고양이가 자신의 천적임을 인식하고, 그래서 쥐는 달아난다. 여기서 가정된 것은 쥐의 생각이 자연 질서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즉 천적 관계는 그의 정신에 올바르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윈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 그 가 자신의 천적으로부터 달아나는지는 묻지 말라. 자신의 천적에 잘 대처하지 못한 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그런 종들[예컨대, 고양이로부터 달아나는 쥐]만 존재하는 이유이다.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나는 현존하는 과학 이론의 성공은 기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과학적 (다윈주의적) 지성에게 놀라운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과학 이론은 무시무시한 경쟁의 삶 속에서, 즉 살벌한 정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직 성공적인 이론 — 사실상 자연의 실제적 규칙성을 파악한 이론 — 만이 살아남는다.[32]

  1. Wilfrid Sellars, Science, Perception and Reality (New York: Humanities, 1962); 97쪽의 각주와 비교해보라. 그의 Studies in Philosophy and its History에 대한 나의 비평(Annals of Science, January 1997에 수록)도 볼 것.
  2. Brian Ellis, Rational Belief Systems (Oxford: Blackwell, 1979), p. 28.
  3. Hilary Putnam, Mathematics, Matter and Metho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5), Vol. 1, pp. 69f.
  4. Putnam, op. cit., p. 73, n. 29. 이 논증은 보이드(Boyd)의 책 Realism and Scientific Epistemology (Cambridge University Press)에 아주 길게 전개된다.
  5. 하트리 필드(Hartry Field)는 ...
  6. 내가 보기에, 보다 전형적인 실재론은 클라크 글리모어(Clark Clymour)의 신간 『이론과 증거(Theory and Evidenc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0)에서 발견되는 종류의 인식론이다. ...
  7. G. Maxwell, "The Ontological Status of Theoretical Entities", Minnesota Studies in Philosophy of Science, III (1962), p. 7.
  8. 모호한 술어의 논리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상당히 많다. 내 생각에 특히 중요한 것으로는 Kit Fine “Vagueness, Truth, and Logic”, Synthese, 30 (1975), 265-300)과 Hans Kamp의 연구를 들 수 있다. ...
  9. Op. cit., p. 15. ...
  10. 주 1을 보라.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관련 항목

blog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