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ysical Science in the Middle Ages
- Edward Grant, Physical Science in the Middle Ages (New York, 1971). 번역: 에드워드 그랜트 지음, 홍성욱, 김영식 옮김, 『중세의 과학』 (민음사, 1992)
요약
A.D. 500년부터 1000년 사이의 과학의 상황
서유럽 과학이 가장 침체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앞섰던 일을 요약하면 (1) 로마제국의 분열과 변형 (2) 기독교의 승리 (3) 게르만의 침략이라 할 수 있다. 강력한 중앙정부가 붕괴하고 (제국의 초창기 몇 세기 동안을 아주 잘 특징지었던) 도시생활이 소멸하면서, 서유럽에서의 지적인 생활이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적당한 정도의 정치적 안정, 도시활동, 후원"이 과학의 추구에 필수적이거나 적어도 도움이 된다고 할 때, 이것의 부재는 그 쇠퇴를 이해하게 한다.
기원후 1세기, 과학에서의 중요한 업적들이 있었다. 3세기까지도. 그러나 언제나 몇몇 중심지에 집중되어 있던 소수의 산물이었던 그리스 과학은 환경이 좋았던 동안만 진보하고 보존될 수 있었던 나약한 활동이었다. 4세기 기독교의 승리, 정치적 불안정 등 환경의 악화는 과학의 쇠퇴를 낳았고, 교회는 그 시대의 대부분의 재능있는 사람들은 교회로 끌어들였으며, 과학은 교회를 위해 봉사하게 되었다.
이교도의 과학과 철학의 잠재적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이교도의 과학과 철학은 교육과정에 스며들었으며, 기독교는 과학과 철학을 일정 정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교육되거나 전파된 과학은 "백과사전식 전통"이었다. 이러한 전통은 로마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백과사전 또는 개요서의 수준은 그리스의 것보다 수준이 낮았으며, 그 대부분은 표절과 몰이해로 점철되었다.(플리니우스의 <자연사>, 솔리누스의 <주목할 만한 사시들의 모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질은 더욱 떨어졌고, 왜곡에 왜곡을 더했다. 이러한 책들을 모두 합치면, 그것이 바로 중세 초기 과학지식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것들은 후세의 저자들에게 서로 모순되고 이해불가능한, 즉 체계 없이 혼란스럽고 앞뒤가 맞지 않는 지식덩어리를 제시했으며, 아랍과 그리스의 자료들로부터 새로운 과학지식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거의 아무도 그 수준 위로 올라설 수가 없었다. 백과사전의 저자들은 고대과학의 갈래갈래 찢어진 잔재들을 보존하고 이해하려 했던 점에서 감사를 받아 마땅하지만, 서유럽에 과학의 암흑시대가 도래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Comment: 그렇다면, 500년-1000년 사이엔 거의 전혀 변화가 없었는가? 다른 정치, 사회, 경제적 변화 및 기술의 발전이라도 살필 필요가 있지 않을까?)
(Comment: 과학이라고 하는 활동이 지속되거나 발전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 이상의 안정적인 연구자 집단이 필요. 그리고 그 집단은 일정한 환경 속에서만 유지 가능. 환경의 변화로 그 집단이 와해되었을 때, 과학지식은 보존은커녕 왜곡되기만 할 뿐. 다른 예로, 시멘트 기술이 전수되기 위해서는 시멘트를 이용한 건설활동이 일정 수 이상 지속되어야 함. 한 두 사람이 알고 있다가 전수가 끊기면, 나중에 다시 발명해야 함.)
과학의 시작과 번역의 시기 : A.D. 1000년에서 A.D. 1200년까지
그리스 과학의 핵심을 접하지 못하고서는 서유럽 세계는 라틴어 백과사전 수준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8세기와 9세기 동안 아랍인들이 당시 존재했던 그리스 과학의 큰 부분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여기에 그들의 업적을 더하고 있었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비잔틴 제국에서는 그리스 과학이 계속 읽혀지고 연구되고 있던 동안, 서유럽에서는 초보적인 백과사전식 과학만을 갖고 있었다. 1000년까지 이 전통에 더 첨가된 것은 거의 없었다.
10세기 말, 제르베르는 스페인 북부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몇몇 아랍의 저술들을 얻어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과학을 필수적인 교양과목으로 강조했다. 11세기와 12세기를 지나면서 수도원 학교를 대신해서 성당학교가 세워졌다.(12세기 후반에는 대학 출현) 이러한 학교의 환경 속에서 세속적이고 과학적인 분야들에 대한 지적 흥미가 자라났으며 고대의 저작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가 철저히 연구되었고, 그것은 우주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와 함께 고대의 지혜에 대한 거의 신앙과 같은 존경심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대의 저술은 찾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유럽의 학자들은 직접 번역 사업을 진행하기 시작했으며, 진짜 번역의 홍수는 스페인에서의 회교도 후퇴 및 시실리 패배 이후 12세기(1125년과 1200년 사이)에 일어났다. 닥치는 대로 번역했지만, 과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저작이 압도적이었다. 갈레노스의 <의술>,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 알크와리즈미의 <대수학> 등등.
13세기는 번역 이후 흡수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세부적인 보완과 상당한 변형의 시기가 있었다. 15세기 초까지 중세의 스콜라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관에 기초를 두는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과학 자체 내에서 제기된 많은 구체적인 비판들에 의해 보완되어 최고의 발전을 이루었다. 17세기에 관심을 가지고 해결된 많은 '문제'들이 중세의 학자들에 제기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없이는 과학혁명이 일어났을 리 없다.
중세 대학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사조의 영향
1200년에 이르면 파리, 볼로냐, 옥스퍼드의 대학들이 학문적 중심지로 크게 번성했다. 이들 대학이 자연스럽게 출현한 것은 12세기를 통해 라틴어로 번역되었던 새로운 지식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대학은 서유럽이 방대한 양의 새로운 지식을 정리하고 흡수하고 확장하는 제도적 수단이었으며, 그 후 몇 세대를 통해서 공통된 지적 유산을 형성하고 전하는 도구였다.
대학의 필수 교양과정은 논리학, 물리학, 우주론, 천문학, 수학 등(3학: 논리, 수사, 문법; 4과: 천문, 음향, 기하, 대수)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를 이수해야만 고급 학부인 법학, 의학, 신학 학부에서 공부할 자격이 생겼다. 이같이 논리학과 과학이 모든 고등교육의 필수교과였던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표준적인 교육방법은 <질문들>의 형태였으며, 이 형태는 사실상 스콜라 과학의 토대였다. 정교한 논리를 바탕에 둔 엄격한 논술 형식의 학습법은 오캄, 뷔리당, 오렘, 알베르 등에 의해 몇몇 중요한 이탈을 시작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13세기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은 신학자들의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몇가지 단정적인 결론은 크게 문제시되었고, 몇 차례의 금지령이 선포되었다.
- 세계는 영원한 것이다 -> 신의 창조 부정
- 어떤 우연적 속성이나 성질은 물질적 실체와 별도로 존재할 수 없다 -> 성만찬 교리에 위배
- 자연의 과정들은 규칙적이고 불변이다 -> 기적 배제
- 영혼은 육신이 죽은 후에는 살지 못한다 -> 연혼불멸의 믿음 부정
그러나, 1215-1255년 사이의 금지령은 사실 실행되지 않았으며, 자연철학에 대한 공개적인 연구가 허용되었다. 실제로 여전히 아베로에스는 "우리들의 주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들의 철학자"로 추앙받았다.
한편 아베로에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많은 학자들(신학자 포함)에게 이중진리적 경향이 확산되었다. 이는 철학과 신학을 분리하는 시도로, 이를 믿은 학자들은 신앙적 진리와 자연적 진리가 독자적으로 성립하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명식의 태도는 신학자들에게 불만이었으며, 결국 1277년 파리 주교 탕피에는 "219개 명제들에 대한 유죄선고"를 내렸다. 유죄선고된 많은 명제들은 신의 능력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후 신학자들은 이러한 명제들에 대한 철학적 증명의 불완전성을 보임으로써 신의 능력에 가해진 제한을 풀어주고 신의 절대적 능력을 옹호하고자 했다.
특히 오캄은 신의 절대적 능력을 복원시키는 과정에서 급진적 경험주의 또는 유명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인식론에 이른다. 상당히 회의적인 인식론을 통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확실성을 깎아내릴 수 있었다.(e.g. 확실한 인과관념에 대한 의심. 본질에 대한 의심, 귀납에 대한 의심) 즉, 이러한 태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조건부 진리로 격하시킬 수 있었으며, 새로운 '가설적 설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자연관의 기초를 무너뜨리기를 원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다만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결론들을 "가능성의 차원"으로 떨어뜨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한편, 교양과정의 교수들은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적 경험주의(귀납의 인정)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학의 분위기는 "현상 구제"를 강조했으며, "상상에 의하면"이라는 가설적 어법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렇다면, 1277년 유죄선고는 과학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일까? 이에 대해 뒤엠과 코아레는 상반된 의견을 제시한다. 피에르 뒤엠 논제: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철학의 확신을 무너뜨림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표현과 탐구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근대 과학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다. 코아레 논제: 실제적 변화 일으키지 못함. 둘 중 무엇이 맞는지는 결론에서 다시 논의하겠음.
운동의 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절대적 무거움/가벼움 개념 핵심. 운동에 대한 인과적 설명(4원인). 운동을 위해서는 동인 또는 원동력 필요. 자연스러운 운동의 제1원인은 물체의 발생인과 동일. 자연스러운 운동과 강제적 운동 구분.
-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법칙 : 속도(V)는 저항력(R)에 반비례하고 원동력(F)에 정비례.
그러나 F가 R에 비해 너무 작아지면 물체가 안 움직이는데 이는 어떻게 해명? 14세기 여러 제안들(e.g. 브래드와딘의 지수법)이 등장했지만, 이들은 이 대안적인 방식을 실제에 적용하진 않았다.
물체가 최초의 동인과의 접촉을 잃은 후에도 계속 운동하게 하는 힘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매질이 운동의 근원이었다. 즉, 매질은 운동의 원동력이자 동시에 저항인 셈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서 매질이 소멸하면, 즉 진공 속에서는 운동이 성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한대의 속도 또는 또는 순간적인 운동을 허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 모두에게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6세기에 필로포누스는 매질의 필요성을 부정했는데, 아밤파체, 아베로에스도 이에 동의하였고,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에 찬성했다.
자연스러운 운동에 대한 해답으로 "내적 저항" 개념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 개념을 이용하면 혼합 물질의 경우에 설명이 잘 되었다. 또한 진공에 대한 정당화에도 유용했다. 그렇다면 순수한 물질은? 몇몇 학자들은 순수한 물질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브래드와딘, 알베르 등은 두 개의 성분비율이 같은 물체는 진공 속을 같은 속도로 낙하한다고 결론내렸는데, 이는 이후 갈릴레오의 생각에도 영향을 주었다. 갈릴레오는 내적저항을 이루는 물질의 성분비율 대신 단위 부피당 무게, 즉 비중으로 낙하 속도를 설명했다. 즉, 비중이 같은 물체는 같은 속도로 낙하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후 이는 비중에 상관없이 같은 속도로 낙하한다는 입장으로 확장된다. 즉, 절대적 가벼움/무거움의 개념이 사리진 것이다.
보네투스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말한 바 있다. "강제된 운동에서 어떤 비영구적이고 일시적인 형상이 운동하는 것 속에 부여되어서, 이 형상이 남아 있는 한 진공 속에서의 운동이 가능하지만 이것이 사라져 버릴 때에는 운동이 정지한다." 이러한 입장은 필로푸누스의 "부여된 힘", 이슬람의 "마일"로 발전되어, 중세 서유럽에서도 로저 베이컨, 아퀴나스, 프란시스쿠스 등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뒤에 남은 힘"이라는 뜻으로서, 이후 뷔리당은 이를 "임페투스"라 명명했다. 그는 '속도 곱하기 물질의 양'이 물체의 운동을 지속시키는 임페투스의 척도로 제시했는데, 이는 운동의 원인에 해당하는 값으로 운동의 양인 운동량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들은 운동의 원인을 외부적인 것에서 내부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관성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한한 직선운동이라는 관념은 유한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우주 속에서는 불합리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 때문이다. 다만, 무한하고 영원한 원운동은 쉽게 인정되었다.
속도의 누적적 증가는 임페투스의 축적된 증가분으로 설명되기도 했다. 약간의 실수들. 중세 학자들은 속도에 대한 정확한 '정량적' 정의를 제시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성질과 속도의 강화와 수축>과 같은 저술들에서 잘 나타난다. 파리의 오렘, 영국 머튼 칼리지의 학자들은 균일한 운동, 균일한 가속운동, 순간속도 개념을 정의하고 평균속도 정리를 유도해 내기도 했다. 즉, 운동학(동역학?)에 수학적, 정량적 연구방법이 도입된 것이다. 이로써 운동의 수량화가 가능해졌다. 갈릴레오가 이끌어 낸 자유낙하 법칙의 수학적 토대는 이미 갈릴레오 이전에 마련되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운동에 대한 분석을 자연에 적용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분석을 추상적이고 가상적인 운동에 대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자연에 그러한 운동이 실제로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반면 갈릴레오는 이러한 가상적 정의와 방법을 자연에 적용했다.
지구, 하늘 그리고 그 바깥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은 중세 기독교의 성경과 신학과 (대부분) 양립 가능했다.
"지구가 운동한다"는 주장은 뷔리당과 오렘으로부터 논랄 만한 정도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지구의 운동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상당히 정식화할 수 있었지만, 어느쪽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경험적으로 선택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이들은 "현상 구제" 또는 "설명"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어느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련의 인상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견해를 고수했다. 이들은 이성을 교란시키기 위해 이성을 사용한 회의주의자라 할 수 있다.
지구무게 중심의 이동에 따른 운동가능성에 대한 고찰, 천구의 단순화 시도도 이루어졌다. 이심원, 주전원에 대한 물리적 실체 논쟁(사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기술적인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음)도 있었는데, 보통 아리스토텔레스의 천구 이론은 물리적 진리의 개연성을 주장하는 데,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현상을 구제하는 데 이용되었다. 즉 둘 다 인정한 셈이다.
천구 밖 진공 논쟁, 세계의 복수성 논쟁과 같은 가상적인 질문도 던져지고 답해졌다. 아마 이러한 가상적인 질문들은 1277년 이전에는 논의되지 않았을 것이다. 충족이유의 원리에 의해 진공의 무한함은 어쩔 수 없는 결론으로 받아들여졌다. 신의 외연 및 차원 논쟁, 진공의 차원 논쟁도 이루어졌다. 즉, 상식과는 달리 중세 말 학자들은 진공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후 17세기에는 3차원 진공이 상당히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결론
중세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나 견해들의 맹목적인 반복이나 사소한 보완은 아니었다. 중세 스콜라 과학(철학)은 기독교 교리에 비추어보아 만족스럽지 못해보이는 (특히, 신의 능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처럼 보이는 종류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임페투스, 우주 외부의 진공, 세계의 복수성, 지구의 회전과 같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으며, 수학적 방법(평균속도정리 등)을 고안해냈다.
그러나, 16,17세기까지는 이와 같은 노력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세계관을 재구성하거나 대체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가진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는 고도로 통합된 구조였기에, 결정적인 어떤 부분의 부정은 나머지 부분까지 붕괴시킬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중세에 이루어진 수많은 첨가와 변형은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어떤 변형들은 서로 무관하거나 부조화스러웠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과 양립불가능해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이러한 시도는 1277년 금지령의 여파 속에서 발전되었다. 이 금지령은 아리스토텔레스 과학과 철학의 속박을 약화시켰으며, 그것의 확실성과 신념에 손상을 입혔으며, 14세기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게 하는 추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모험적인 변형은 자연에 직접 적용되기보다는 "가설적인 형태"로 고려되었다. 즉, 이들의 목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 외의 대안이 논리적으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그보다 더 낫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Comment: 아마도, 새롭고 급진적인 대안은 "이럴 수도 있다" 식의 비실재론적, 도구적 고려 속에서 더 풍부하게 등장할 수도 있을 듯. 이론의 실재성을 고려하지 않는 극단적인 실증주의 또는 유명론 하에서 더 다양한 설명 모형과 방법들이 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변형들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는 17세기가 되어서야 대체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지연이 되었는가? 스콜라 과학은 물리적 실재에 대한 추구가 아닌 논리적인 정합성이 주된 목적이었으며, "현상 구제"에 만족했다. 물리적 실재에 대한 진지한 고려를 하기 전까지 과학혁명은 오지 않았으며, 이러한 태도는 코페르니쿠스에 이르러서야 나타났다. (Comment: 내 생각엔, 대안이 될 수 있을만한 다양한 모형이 일정정도 나타나기 전까지는 새로운 모형에 대해 실재성을 부여하는 자신감도 나타나지 못할 것 같다. 맹목적인 실재론은 오히려 보수적인 경향을 띨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학혁명은 그동안 쌓인 대안적 모형에 대한 자신감의 산물일 수도 있지 않을까?)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이론(일주운동, 연주운동)을 단지 '가설'만이 아닌 실제 사실이라 진지하게 믿었으며, 이러한 태도는 갈릴레오, 뉴턴에게 이어져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를 뒤엎고 완전히 새로운 물리학 체계를 만들어내는 추동력이 되었다. (Comment: 실재론적 태도가 과학혁명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예컨대, 코페르니쿠스 우주 체계에 대해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우주 체계가 맞다는 자신감 또는 신념은 그에 걸맞는 총체적인 물리학 체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불굴의 노력을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감은 아무 때나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중세에는 실제론적 태도가 없었는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실재론자였다. 그러나 금지령이나 그것이 만들어낸 유명론적 태도가 없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중요한 비판을 가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물리학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 활발히 제시된 14세기에는 오히려 물리적 실재론이 그 빛을 잃었다. 유명론자들은 우주론과 물리학, 특히 운동학에서 흥미있고 잠재적으로 중요한 가설적인 결과들을 대부분 만들어냈다. 만약, 그들이 그 결과들을 물리적 실재에 적용했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를 파괴했을 수도 있었었을 것이다.(Comment: 과연 그럴까? 그러한 실재론적 태도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아직 연구자의 수나 대안적 자원의 수가 부족하지 않았을까? 내 생각엔 르네상스 시기는 되야 그런 조건이 만족될 듯하다. 이 시기 문헌의 수나 연구자의 수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다. 아마도 14세기의 연구결과도 이때 대폭 확산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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