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usation as Explanation
- Michael Scriven, "Causation as Explanation", Nous 9 (1975), pp. 3-16.
많은 철학자들은 인과를 비-인과적인 다른 개념(e.g., 필요조건 또는 충분조건 등등)들로 환원하려는 시도를 해왔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어떤 철학자들은, 특히 (신)실증주의자들은 그 실패를 인과 개념 자체의 미성숙성, 부적합성의 증거로 사용하고자 하나 그것은 편견에 불과하다. 인과는 비인과적 용어들로 환원되지 않는, 그럼에도 과학에서 필수적인 개념이다.
스크리븐은 인과 개념을 분석의 출발점으로 다음의 두 가지 자연주의적 분석 방법을 채택한다. 첫째, (철학자들이 아닌) 일상 과학자들이 쓰는 인과 개념을 분석하겠다. (따라서 분석 결과에 대해 과학자들이 동의하지 않는 한 그 분석은 계속 수정되어야 한다.) 둘째, 인과 관념의 몇몇 선입관들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겠다. (물론 이러한 분석은 기존의 철학적 분석들에 비해 "부정확"하거나 "애매"하다는 단점을 가진다.) 이러한 분석 방식이 "애매성"이라는 단점을 가지긴 하지만, 그동안 "체계화"를 위해 "오(誤)표상"의 오류를 범해 온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서는 더 나을 수 있다.
스크리븐은 인과에 대한 두 가지 대표적인 접근을 비판한다. 첫째는 루이스 류의 (반사실적) 필요조건 접근이다. 그러나 인과는 명백히도 결과의 필요조건이 될 수 없다. 둘째, 규칙성 또는 충분조건 접근이다. 그러나 충분조건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허깨비(phantom) 법칙"을 전제해야 한다는 단점을 가진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스크리븐은 화용론적 접근을 시도한다. 스크리븐은 원인에 대한 요청이 길을 묻는 요청과 같다고 가정하는데, 원인에 대한 요청은 특히 단일-요소 설명(single-factor explanation)에 대한 요청과 같다. 즉 한 원인은 한 설명 요소이며, 인과란 설명 요소와 그것이 설명하는 것 사이의 관계이다. 인과는 의사소통의 맥락에서만 적절히 분석될 수 있는데, 예컨대 적절한 (인과적) 설명은 질문자가 모르는 내용을 줄 수 있어야 하며 명세된 의사소통의 맥락에서 적절해야 한다. 그런데, "왜 A인가?"라는 질문에 "B 때문이다"라고 답하고, "왜 하필 B 때문이냐?"라고 묻는다면, "B는 A와 인과적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순환의 문제가 발생하는 듯하다. 인과에 대해 화용론적으로 분석을 했더니, 여전히 인과적 관계라는 말이 제거되지 않은 채 등장하기 때문이다. 스크리븐은 마지막 대답의 "인과적 관계"가 종종 우리의 몇몇 인과 관념들, 예컨대, 조작가능성, 책임성, 영향, 무작위성 등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을 얘기한다. 그러나 인과 개념이 그 중 하나의 개념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이 중 하나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과도한 단순화의 오류를 다시 범하는 것일 수 있다. 다른 개념들로의 환원은 불가능하더라도 다른 개념들과의 관련성을 얘기할 수 있다. 꼭 제거가 선은 아니며 순환이 악은 아니다. 분석은 disapearance만큼이나 display와 관련되어 있다.
요약
도입
과학에서 널리 쓰이는 몇몇 개념들, 설명, 인과, 평가 등은 과학철학의 중요한 흥미로운 분석 대상이지만, 어떤 이들은 그 개념의 중요성이나 적법성을 부정하기도 한다. 예컨대 이들에 따르면, 과학의 임무는 기술(description)이지 설명이 아니며, 인과(causation)에 대한 언급은 미성숙한 과학의 징표이다.[1] 실증주의 또는 신실증주의 과학철학의 기본 개념들을 전제하고 나면, 과학자들이 쓰던 많은 개념들은 쓸모 없거나 정교하지 못한 개념이 된다. 스크리븐은 이런 선험적인 접근에 회의적이다. 그는 과학철학에 보다 평범한 접근을 시도해 왔는데, 그는 과학적 언어를 분석하는 데 한쪽으로 경도된 인식론적 입장에 기인한 (기본 개념) 목록에 기대지 않으려고 한다.
스크리븐이 보기에, 위의 개념들(설명, 인과, 평가)은 구문론적이거나 의미론적이라기보다는 화용론적인 개념이다. 즉 그 개념의 기능(function)은 맥락적 요소들에 기대서만 이해되거나 해명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맥락적 요소들이란 신실증주의자들이 주관적, 심리적, 비논리적이란 이유로 경멸했던 것들이다. 이 세 개념의 기능은 각각이 과학적 담화에서 주목 또는 캡슐화 장치로서 기능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마지막으로 인과는 오직 설명의 특수한 경우로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평가는 오직 기술의 특수한 경우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인과의 중요성
현대 과학에서 '인과'가 필요불가결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다. 첫째, 인플레이션/디플레이션과 같은 경제적 사건의 원인을 둘러싼 논쟁은 비-인과적 용어(e.g., 상관관계)로 번역될 수 없다.(이 번역불가능성은 통제와 인과 사이의 밀접한 관계와 연계되어 있다.) 둘째, 최근 심리학, 교육학, 정치학계의 전문가들은 정책 결정에 필요한 명료한 인과적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실험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이 실험 설계의 핵심적 특징은 실험군과 통제군에 무작위로 피실험자를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논리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무작위성과 인과 사이의 밀접한 연계이다.
마지막으로 보여줄 사례는 물리 과학의 사례로, 이는 과학이 성숙해감에 따라 인과 개념이 불필요해진다고 말한 러셀의 오류를 드러내 준다. 상대성 이론에서 운동(미분)방정식의 해는 소위 "빛 원뿔(light cone)" 안에서만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런데 이는 수학적 필요 때문이 아니라 빛 원뿔 바깥의 해가 사건의 결과가 그 사건보다 선행하게 되는 경우에 대응된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즉 그 해가 실재가 아니라는 견해는 인과의 논리에 관한 특정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이 분석적이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지면서, 경험적 탐구를 위한 일련의 흥미로운 대안적 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사례의 논리적 교훈은 시간적 순서가 원인-결과 관계의 본성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철학적 분석이 과학의 실제 연구에 중요한 귀결을 준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2]
비화용론적 분석과 화용론적 분석의 가정들
어떤 개념이 근본적으로 화용론적인 개념이라면 형식적인(formalistic) 분석에 저항할 것이 분명하다. 인과 개념을 다른 다루기 쉬운(manageable) 형태로 억지로 꿰어 맞추어 환원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 시도들은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이러한 시도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과도한 단순화들이 있었다. 원인은 그 결과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뒤에 오면 안 된다; 결과와 시간적으로 분리되어야 한다; 결과와 시간적으로 인접해야 한다; 시간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공간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결과와 논리적으로 연결되어선 안 된다; 원인은 사건이어야 한다; 과정이어야 한다; (인과는) 결정론을 전제한다; 자유의지를 부정한다; 원인은 결과의 필요조건(또는 필요조건의 한 항)이다; 충분조건이다; 필요충분조건(또는 그것의 한 항)이다; 등등.
스크리븐이 자신의 논의를 시작하기 위한 첫 번째 가정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원인"이란 용어를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대로 분석하려고 한다. 과학자들은 철학적 논증에 익숙하지 않고 반면 철학자들은 직접 과학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분석은 과학자들이 동의하지 않는 한 계속 수정되어야 한다는 약점이 있다. 이러한 단점이 증명의 부담을 옮기긴 하더라도, 그 개념을 실격시키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가정은 다음과 같다. 인과 개념에 대해 위에서 열거된 종류의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접근이 그럴 수 없는 접근에 비해 일단 낫다. 물론 그러한 분석은 기존의 분석에 비해 "부정확"하거나 보다 "애매"하다. 그렇다고 그것이 언제나 단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더 정확한 다른 용어가 사용될 수 있는 경우에 사용했다면 단점이 된다.) 스크리븐은 만약 그것이 과학적 실천에서 진보를 가져다 준다면 과학적 개념 분석에 독자적인 장점이 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또한 그것은 확실히 철학적 장점의 지표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들은 과학철학에 대한 자연주의 또는 비-재구성주의적 접근[3]의 가치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접근은 현상에 대한 과학적 접근과 다르지 않다. 이는 오(誤)표상을 감수하면서까지 체계화에 과도한 비중을 두고 있는 재구성주의 또는 선험적 접근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규칙성 혹은 상관관계 설명은 완전히 명세불가능한 법칙 때문에 곤란에 처해 있으며, 반사실적 분석은 과소결정/과잉결정 문제와 가능/유사 세계 탐구에 관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제 인과에 대한 "자연주의적" (화용론적) 재개념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
중대한 오류들
스크리븐은 반사실주의와 규칙성주의에 의해 각각 받아들여지는 두 주장을 검토한다.
"그 원인이 없었다면, 그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데이빗 루이스(David Lweis)는 흄을 변형시켜 자신의 (반사실적 필요조건) 분석을 만들어 냈다. 김재권은 이것이 너무 방만한 동시에 너무 제한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과소결정의 문제(a, b 모두 일어나고 그것의 결과로 보이는 c가 일어난 경우, a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c는 일어났을 것이며, b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c는 일어났을 것이다. 즉 a도 b도 c의 필요조건이 아니다.)에 대한 루이스의 기본적인 해법은 인과연쇄에 대한 간섭을 전제하고 있다.(즉, a가 b의 인과연쇄를 방해했다면, a는 c의 원인이다. 반대로 b가 a의 인과연쇄를 방해했다면, b는 c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루이스의 해법은 그러한 간섭이 일어나지 않은 경우(a나 b가 서로의 인과연쇄를 방해하지 않은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즉 이 경우 원인(들)은 그 결과의 필요조건이 아니다.[4]
규칙성주의나 상관관계주의 또는 포괄-법칙 이론가들은 "허깨비 법칙"이란 문제에 직면해 있다. 분명 원인은 결과의 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 가능한 최선은 원인이 결과의 충분조건 중 한 요소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 충분조건이 명세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히 완전치 못한 충분조건을 주장하거나 혹은 그 충분조건을 결정지어줄 법칙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이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한 법칙을 말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쉽게 말해, 당신은 실험 상황 C에서 A가 X를 일으켰다고 말하면서도, C에서 무엇이 "본질적"인지 또는 C가 무엇인지 말하지 못할 수 있다.(예컨대, 당신은 시계를 떨어뜨린 것이 고장을 일으켰다고 알 수 있지만,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그런 것인지는 알지 못할 수 있다.) A+C(의 일부)가 X의 충분조건임을 보여주는 가상의 법칙이 과연 존재할까? 있더라도 그것은 기껏해야 통계법칙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진짜 문제가 아니다. 위의 사례가 암시하는 것은, 인과 개념이 (보편 양화 진술로 표현되는) 법칙 개념에 선행한다는 (또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규칙성 분석은 길을 잘못 들어섰다. 충분조건은 실제에서는 불가능하다. 또한 "원리상의 충분조건"은 속 빈 강정이다. 다른 많은 문제가 있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비어있음(essential hollowness)"의 문제는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5]
급진적 대안
스크리븐은 그동안 부차적으로 여겨졌던 질문에서 시작한다. 왜 어떤 것은 스스로를 일으키지 않는가? 왜 원인은 (보통) 이행적인가? 왜 출생은 모든 특정한 사망의 원인이 아닌가? 왜 의사는 종종 죽음의 원인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대신 "늙어서" 죽었다고 말하는가? 왜 "배가 침몰한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물이 찼기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은 왜 좋은 답이 아닌가? 원인이나 결과가 될 수 없는 존재자의 유형이 있는가? 무엇이 "바로 그 원인"을 한 원인 대신에 "바로 그 원인"으로 만들어 주는가? 모든 질문에 답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질문들은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나 표류하지 않도록 해줄 것이다.
화용론적인 모형을 가지고 인과에 접근해 보자. 길을 묻는 질문과 원인을 묻는 질문을 비교해 보자. "파티에 어떻게 가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좋은 답은 그 답과 질문자가 이미 갖고 있는 자원의 결합 정도에 비추어서만 좋은 답이 된다. 예컨대, "우릴 따라 오세요", "파티 소리가 날 때까지 죽 직진하세요", "카렌 집이예요" 모두 그 맥락에 따라 질문자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면 좋은 답이 될 수 있다. 이제 원인에 대한 요청이 길을 묻는 요청과 같다고 가정해 보자. 구체적으로, 그것은 특히 단일-요소 설명(single-factor explanation)에 대한 요구와 같다. 즉 한 원인은 한 설명 요소이며, 인과란 설명 요소와 그것이 설명하는 것 사이의 관계이다.
우리는 설명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 설명은 이해를 운반하기 위한 상징적 수단이다.
- 이해는 적절한 범위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각각의 문제에 대한 개별적 해법을 배우지 않고 얻었을 때마다 얻어진다.
- 이해는 이것이 저런 결과를 산출하는지에 관한 온갖 입력을 통해 얻어질 수도 있다.
- "적절한 범위의 문제"의 결정은 문맥에 따른다.
우리는 설명이 제공할 수 있는 이해의 (가능한) 최대치를 가지고 그 설명의 과학적 형태를 탐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전자기학 교과서의 전문적인 내용에 나오는 전문 용어들을 전혀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일종의 설명이라고 말하곤 한다. 즉 우리는 "설명"을 이해의 운반 수단이 가진 성향적 속성으로 믿는다. 같은 의미에서 "바로 그 설명"은 적절한 청자/독자에게 완전한 이해를 제공할 수 있는 무언가이다. 이러한 규정은 과학적 진술의 형식적 속성의 어떤 조합이 설명 개념을 포착하고 있다는 오해를 초래한다. 그러나 설명 개념의 의미는 그러한 형식적 속성에서 온 것이 아니다. 설명 개념의 의미는 다양한 상황에서 설명이 제공하는 "심리학적" 이해 관념으로부터 전적으로 나온 것이며, 인과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 환자의 호흡기 질환의 원인을 의사에게 요청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의사는 몇몇 조건 중 일부를 만족시키는 답을 찾는다. 그것은 그 조건을 설명하거나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요소여야 하며, 그것은 바로 검토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어야 한다. 오직 하나의 요소가 존재할 때에만, 그 원인 요청에 대한 명백한 답이 나올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원인들 또는 인과적 요소들이라 불릴 수 있는 몇 개의 요소들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오직 하나만이 존재하는 경우를 가정할 때, 바로 그 원인은 그 조건을 정말 설명하는 무언가일 것이다. 환자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가능한 답변의 범위를 좁히기 위한 조건을 살펴 보아야 할 시점이다. 이 조건들은 본질적으로 맥락적이며 의사소통적이다. 즉 그것의 본성은 사건 자체를 봐서는 발견될 수 없다. 물론 인과적 주장이 참인지에 관한 필요조건을 제공해 주는 원인의 "객관적 상관관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이 조건은 너무 약해서, 그것을 언급하는 것은 인과에 대한 분석을 제공한다고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인과 관념과 허깨비 법칙에 호소하지 않고서 그것만으로는 원인과 결과를 구분짓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의사소통 분석이나 인과적 용어 없이 말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은 "그 원인이 일어났다"는 것뿐이다.
이해를 산출할 수 있는 정보 요청의 본성은 적어도 다음의 결과를 고려해야 한다.
- 질문자가 이미 가진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명백히 쓸모없는 일이다. (따라서 설명과 유력한 인과는 비재귀적(irreflexive)이다.)
- 그러나 의사소통의 전체 내용이 기술된 사건(+기타)에만 달려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그 사건은 청자에게 익숙하더라도, 그것이 설명이라는 것은 그에게 정보(즉, 관계적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다.
- 설명되어야 할 현상 X가 다른 현상 P에 의해 설명되고, 그 P가 또 다른 현상 A에 의해 설명된다면, X는 A로 설명되어야 한다. (즉 인과는 일반적으로 이행적이다.)
- X가 P로 설명될 수 있다면, 그 역도 참인지는 열린 질문이다.(즉 인과는 반대칭적인 것은 아니다.)
- 원인과 결과 사이의 구분은 (평범한 분석에서는 구분될 수 없었는데, 이는 사실) 설명되어야 할 현상과 설명을 제공하는 현상(필연적으로 전자와 다를 수밖에 없음) 사이의 구분이다.
- 출생이 사망의 원인이 아닌 이유에 대해 누군가는 모두가 출생과 죽음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지하실에 둔 아이의 장남감 총이 녹이 슨 이유를 물었을 때, 누수 때문이라고 답할 수는 있어도 (아이가 산소와 녹 사이의 관계를 모르더라도) 공기 중의 산소 때문이라고 답할 수는 없다. 즉 모르는 것을 얘기한다고 다 적절한 답은 아니다. 즉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적절한 답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산소 답변이 적절하지 않은 이유는 또다른 이유 때문인데, 그것은 무관성 또는 문제의 구체성 결여 때문이다. 만약 아이의 질문이 다른 총은 녹이 안 슬었는데 지하실에 있던 자기의 총만 녹슬었냐는 질문이었다면, 산소 때문이라고 하는 답변은 이 질문에 무관한 답변이 된다. 즉 설명 요청은 암묵적인 대조와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으며, 이에 대한 이해는 루이스에게서 생겨난 불편한 문제를 다룰 수 있게 해준다.
- 원인으로 불려질 수 있는 존재자(와 비존재자?)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다는 것은 우리가 다양한 것들을 무시했을 가능성을 반영할 뿐이다. 의사는 기침의 원인으로 "지난 주말의 낚시 여행"을 들 수도 있다. 여기서 환자는 모든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기관지염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거나, 알았더라도 자신이 그 경우인지 몰랐을 수도 있다. 혹은 단지 여행 중에 다른 감염자로부터 옮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일 수도 있다.
- 위의 예에서 연결이란 무엇인가? 인과적 연결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분석에서 순환을 완성한 것인가? 결국 인과라는 말이 사용된 "특정한 종류"의 설명이 인과적 설명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설명적인가? 누군가는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환자에게 이해를 제공하는 데 필요한 설명의 문제라고, 즉 환자가 무엇을 몰랐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누군가는 우리는 인과적 설명에서 조작, 통제 가능한 요소를 찾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이 인과 관념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문자적 의미에서는 조작할 수 없는 은하계, 태양계, 또는 미시 사건을 얘기하면서도 인과 관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조작) 관념을 그런 경우에까지 확장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열, 힘, 작인(agent) 같은 개념의 확장을 통해서 말이다. 한 조건에 책임이 있는 요소를 찾는 일은 인과적 설명을 찾는 일이다. 그것은 비-인과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 일은 인과적 설명 개념을 설명의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어떤 통찰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환원주의적이지 않다. 이는 인과 개념을 제거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인과 개념을 이러 저런한 방식(조작가능성, 책임성, 영향, 무작위성 등)으로 준-제거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떤 통찰을 주는 것이지 제거가 아니다. 순환적 정의가 유용할 수 없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인과가 기본 개념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든 것과 같은 종류의 과도한 단순화에 불과하다. 인과는 다른 개념들로 환원될 수 없는 기본적 개념이다. 그러나 그것과 다른 것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조차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분석은 disappearance만큼이나 display와 관련되어 있다.
각주
- ↑ 스크리븐은 약간의 조롱조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그들은 그 개념들에 대한 분석이 어렵다고 포기한 것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어쩌면 위의 개념들의 "반항(recalcitrance)"이 과학철학자로 하여금 그 개념들이 철학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끔 했는지도 모른다.
- ↑ 인과의 중요성은 위와 같은 특정한 적용사례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의 과학적 중요성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그것을 다른 개념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들 때문에, 인과는 일반적 방법론적 절차를 위한 기저로서 인정받지 못해왔다. (때로는 그것의 의미가 과장되어 결정론의 혐의를 받기도 했었다.) 스크리븐은 과학적 절차의 상당 부분이 소거적 설명이나 고장-수리 차트(trouble-shooting chart) 패러다임의 적용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의 한 가지 철학적 중요성은 그것이 반-귀납주의 입장의 충격을 논파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을 발전시키면 실제 과학자들의 매우 강력한 절차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 ↑ 이러한 접근은 (비과학) 언어에 대한 "일상 언어"적 접근과 대응한다.
- ↑ 스크리븐은 인과에 대해 필요조건을 동원하지 않는 가능세계 접근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 ↑ 특정한 인과적 주장은 쉽게 하면서 일반 법칙을 정립하지 못하는 과학자에게, 전자로 의미하는 것이 우리가 모르는 후자+초기조건의 존재에 관한 무언가라고 하는 것은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손에 잡힌 새가 숲에 있을지 모를 가설상의 새보다 가치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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