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Engineering to Humanities Philosophy of 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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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철학 사이의 긴장: 대화

공학적 기술철학(Engineering Philosophy of Technology, 이하 EPT)은 기술을 정당화하거나 기술 자체의 본성(기술의 개념, 방법, 인지적 구조, 객관적 발현(manifestation) 등)을 분석하는 데 관심을 가지거나, 이를 확장해 기술 이외의 인간/비인간 영역을 기술적인 항(용어, 기준, 패러다임)으로 설명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이에 따르면, 문화는 기술의 한 형태이거나(Kapp), 국가와 경제는 기술적 원리에 의해 조직되어야 한다거나(Engelmeier and Veblen), 종교적 경험은 기술적 창의성과 통합된다(Dessauer and Garcia Bacca). 이들이 말하는 기술철학이란 기술인이 하는 철학에 가까우며, 기술적 철학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적 기술철학(Humanities Philosophy of Technology, 이하 HPT)은 비기술적인 관점(예술, 문학, 윤리, 정치, 종교 등)에서 기술의 의미를 고찰하고 기술과 비기술적인 인간 영역과의 관계를 검토한다. 인간 경험의 비기술적인 측면을 옹호하고, 비기술적인 기준을 가지고 기술에 대해 질문하고 평가 및 반성한다. 이에 따르면, 기술은 일종의 신화로(Mumford), 인간의 자기-정의(self-definition)으로(Ortega), 존재론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것으로(Heidegger), 또는 총체적인 통제에 대한 위험스런 시도로(Ellul)로 해석될 수 있다. 즉 기술은 실재의 비기술적인 차원과 연결되어 해석된다. 이들이 말하는 기술철학이란 기술에 대한 인문학자들의 철학에 가깝다. HPT는 EPT에서 강조하는 경제 분석과 효용 논리에 반대하는 연약한 생활세계에 존재한다.

물론 엔지니어들도 자신을 휴머니스트로 칭하거나, 자신의 활동을 인간화(humanizing) 작업으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 이들은 인간에 대한 특정 개념에 기초해 있는데, EPT는 그것을 주어진 것으로 보고 그에 대해 별 문제를 삼지 않는다. 인간 세계가 기술 세계가 되었으므로, EPT는 인간의 다른 활동을 그들의 언어로 번역하고자 한다. 사실, 기술적 용어는 그 자체로 기술 문화의 세계의 공용어가 되었다. 반면 HPT는 인간을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간주한다. 이들이 보기에, 기술적 공용어는 최소한의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뿌리없는 특정 시기 특정 장소의 언어일 뿐이며, 그것은 인간의 (다양한) 측면들을 가리거나 줄인다.

이러한 HPT의 대응은 기술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며, 단지 반기술적인 낭만적 자기이해 속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EPT는 HPT에 대해 너무 사변적이며, 매우 좁은 또는 비경험적인 기반에 기초해 있다고 비판할 수 있다. 인문학자들은 기술에 대해 아는 것도 없이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에 대해 HPT는 기술에 대한 상식이나 일상적 경험 지식이 기술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충분히 단단한 기초가 될 수 있으며, 기술의 전문적인 세세한 것에 빠지게 되면 인간의 비기술적인 측면과의 관계를 보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답한다.

기술적 담론에 대한 HPT의 거부는 어느 정도는 자기 방어 행동일 수도 있다. 현대 기술의 힘과 매력은 역사적으로 인문학(humanities)이 자리하고 있던 윤리, 문화, 다양성, 비판 능력을 빼앗는 위협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EPT는 HPT가 비판과 윤리에 대한 관심을 무기로 자신의 비합리성과 그른 판단을 감추고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또 EPT는 HPT에게 그들의 상식적 이해란 것이 역사적으로 조건지워진 것임을 인정할 것을 주장할 수 있다. 분명 오늘날 평범한 사람들도 과학과 기술에 친숙해져 있으며 예전보다 그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전문가와 일반인 사이의 제한된 화해를 위한 어떠한 기반이 조성될 수도 있다. 공통의 문제를 탐구하기 위한 공학 분야와 인문학 분야의 간학문적인 협동 연구는 이런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화해를 위한 두 가지 시도

EPT와 HPT 두 전통 간의 화해 시도가 있었는데, 하나는 공학자 사회에서, 다른 하나는 철학자 사회에서 시도되었다.

VDI의 "인문학과 기술" 위헌회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공학자 및 EPT들의 성장과 반성이 있었고, VDI(Verein Deutscher Ingenieure, 독일 공학자 학회)는 자신의 특별한 책임에 대해 반성하는 기관이 되었다. 1947년 VDI의 재설립과 함께 일련의 컨퍼런스(1947년 "윤리적 문화적 임무로서의 기술", 1950년 "공학자의 책임에 대해", 1951년 "기술 시대의 인간과 일", 1955년 "기술 분야의 인간")가 개최되었고, 1956년 "인간과 기술" 위원회(후에 "전문성과 사회에서의 공학자"로 개칭)를 설립했다.

여기에 속한 기술철학자들은 보통 공학과 철학 모두 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는데, 이들은 이상적인 기술철학자로 철학자 겸 공학자를 생각했다. 이들은 간분야간 협동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기술 세계의 다층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적 일반론자, 철학적 보편론자, 공학과 기술과학의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 기술 이론가, 시스템 분석가 시스템 계획가 모두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1970년 VDI는 "기술 진보의 경제적 사회적 귀결"이라는 공개 컨퍼런스를 조직하여 큰 관심을 얻었는데, 이 컨퍼런스에서는 독일에서 처음으로 "기술 영향 평가(technology assessment)"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이들의 연구 프로젝트는 두 권의 책으로 결실을 맺었고(Moser and Hunting eds., Werte und Wertordnungen in Technik und Gesellschaft (1975), Wertpraferenzen in Technik und Gesellschast (1976)), 이는 기술적 경제적 효율성, 대중 복지, 안전, 건강, 환경의 질, 개인적 자기 개발, 삶의 질 등을 포괄해 기술 영향 평가의 일반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이 가이드라인은 1991년에 VDI-Richtlinien 3780으로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VDI "인문학과 기술" 위원회의 회원들은 연구성과를 여러 형태로 출판했는데, 그중 Frederick Rapp의 Analytische Technikphilosophie (1978)은 이 기술철학 학파(?)의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보여준다. Rapp의 접근은 기술적(descriptive)이고 설명적이었다.[1] Rapp은 기술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제대로 된 형이상학적 해석이 마련되려면 우선 그에 대한 경험적 분석이 잘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기술철학의 최우선 과제는 기술의 복잡성에 주목하여 기술 세계의 정확한 특성과 그것의 작동 방식과 그 귀결을 명료화는 것이었다. Rapp은 10권짜리 기술에 대한 백과사전("기술과 문화", "기술과 철학" 등등)을 VDI를 통해 출판했는데, 이는 Dessauer의 Streit um die Technik의 계승으로 간주될 만하다. Alois Huning은 이 작업에 대해 거의 모든 저자들이 참여했지만, 하이데거, 야스퍼스, 프랑크프루트 학파(e.g., 하버마스)는 빠졌다며 비판했다.

VDI는 기술에 대한 매우 폭넓은 기준을 마련하여 세계에서 가장 넓은 기술 영향 평가 정책을 수립했지만, 기술에 대한 중대한 몇몇 견해는 배제되었다. 즉 VDI 학파가 EPT를 온전히 탈피한 것인지는 의심된다.

기술에 대한 실용적 현상학

VDI 학파와 달리, 기술에 대한 실용적 현상학적 접근은 철학자 사회 내에서 형성되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존 듀이와 돈 아이디, 그리고 두 명의 듀이 해석가, 폴 더빈(Paul T. Durbin)과 래리 히크맨(Larry Hickman)이다.

존 듀이와 Joseph W. Cohen

1800년대 중반 시작된 미국 실용주의 전통에 기술이 준 영향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분명하게 재인식되었다. 철학과 기술의 연결을 다룬 최초의 영어권 논문은 Joseph W. Cohen의 "Technology and Philosophy" (1955)이다. 이 논문에서 그는 기술이 과학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한고 지적하면서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이기 이전에 '호모 파베르'였다고 주장했으며, 넓은 의미에서 기술은 과학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술을 악으로 보는 견해와 기술을 지성과 가치를 분할하는 중립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 모두를 비판했는데, 전자에 대해서는 "전통에 묶여 있는, 시대착오적인 낭만주의"라고 비판했고, 후자에 대해서는 과학자와 공학자로 하여금 가치와 책임에 대해 무관심하도록 합리화하는 것이라 비판했다. 그는 기술은 가치와 밀접하게 묶여 있으며, 이러한 통찰이야말로 기술철학에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이 공헌한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듀이에 따르면, 기술은 지성(inteligence)인 동시에 가치이다. 왜냐하면 "모든 관념은 경험에서 비롯된 문제를 풀기 위한 실험적 조작에 사용되는 지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듀이의 기술철학은 기술을 가치(및 민주주의, 윤리, 예술) 등과 적대적인 것으로도 가치 중립적인 것으로도 보지 않는다. Cohen은 "듀이의 실험적 다원주의"가 기술의 문화에서의 역할에 대해 멈포드보다 더 나은 분석을 제공하며, "도구주의가 모든 문화 영역의 유능한(competent) 반성적 사고의 이름"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또한 "기술과 과학이 그러한 분명한 사고 패턴을 제공한다"고도 주장했다. 즉, 실용주의적 도구주의는 철학에 뿌리를 두긴 했지만, 다른 문화 영역을 기술의 축소된 형태로 보는 정교한 EPT로도도 해석될 수 있다.

Paul T. Durbin

Durbin은 듀이보다 George Herbert Mead로부터 영감을 받아, 실용주의적 기술철학에 방법론적인 동시에 실질적인 발전을 제공했다. Durbin에 따르면, 기술철학은 (1) 좋은 기술사회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기술 + (2) 그에 대한 설득력 있는 논증을 제공해야 한다. "사회 문제에 대한 실험적 방법의 적용"에 대한 Mead의 실용주의적 논증을 진전시켜, 기술 커뮤니티의 일원에게 기술 발전에 따른 사회 문제와 관련한 개혁 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Social Responsibility in Science, Technology, and Medicine (1992)는 그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책이다.

Larry Hickman

듀이의 작업을 재발굴하여 실용주의적 기술철학을 광범위하게 변호한 것은 Hickman의 John Dewey's Pragmatic Technology (1990)이라 할 수 있다. Hickman은 듀이의 기술철학의 핵심을 (1) 도구주의적 인식론과 (2) 이론에 대한 도구의 우선성으로 보았다. 듀이는 The Quest for Certainty에서 "과학의 방법과 기술에서 추구되는 방법 사이에는 논리적 원리상 아무런 차이도 없다"(p. 68)고 말한다.

듀이의 이러한 기술적 지식 이론(technological theory of knowledge) 전근대 과학과 근대 과학을 구분짓는 토대를 제공한다. "그리스와 중세 과학은 대상을 즐기거나 고통주는 것으로 그냥 수용하는 기술(art)이었지만, 현대 실험 과학은 통제의 기술(art)이다." 그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평범한 지각 대상을 (1) 그냥 수용하는 태도와 (2) 그것을 시작점으로 취하는 태도의 차이는 혁명의 징표다. 자연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거나 고통을 주는 그대로 수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있기를 중단했다. 이제 자연은 변경될, 즉 의도적으로 통제되어야 할 무언가가 되었다. 자연은 우리의 필요에 맞게 새로운 대상으로 변화시켜야 할 재료이다.

듀이가 보기에, 모든 반성적 경험은 의미의 further production을 위한 도구이다. 즉 그것은 기술적이다. 모든 앎, 활동이 기술적이라면, 이는 환원주의의 공포를 떠올리게 한다. 이미 The Quest for Certainty의 한 서평은 듀이의 작업을 "철학의 기술로의 환원"으로 평하기도 했다. Hickman은 이런 공격은 많은 도구를 하나의 특정한 종류의 도구, 즉 유기체 바깥의 도구로 환원한다는 비판으로 규정하는데, Hickman(과 듀이)의 대답은 유기체 안과 밖(환경) 사이의 명확한 구획선을 긋기 어렵다는 것이다. 유기체 안에 있지만 외적인 것(공기, 음식 등)이 있는 반면, 유기체 밖에 있지만 내적인 것(작가의 펜, 대장장이의 모루, 도구, 설비, 재산, 친구, 제도 등)도 있다. 후자의 것들 없이 문명화된 삶은 불가능하다.[2][3]

Hickman은 기술결정론의 공포를 재평가하기 위해 실용주의적 기술철학을 사용한다. Hickman은 기술을 "다양한 형태(과학, 예술, 실용기술, 사업, 공학, 정치)의 탐구에 임하는 사람의 구체적 활동과 산물의 총합"으로 정의한다. 여기에 덧붙이기를, 기술이 실패할 경우, 그것은 방법으로서의 기술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비기술적인 목적에 포섭되어 탐구와 시험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고정된 종교적 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적절한 시험가능한 탐구의 자리를 대신해 왔다. 경제적 계급적 이해는 적절한 실험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해 왔다. 즉 기술과 관련한 문제의 원인은 기술이 아니라 비(非)기술이며, 그 해결을 위해 기술은 더 많이 필요하다.

돈 아이디

아이디는 Technics and Praxis: A Philosophy of Technology (1979)에서 기술에 대한 관념론적 접근과 유물론적 접근을 구분한다. 전자는 기술을 응용과학으로 간주하는 반면, 후자는 과학은 이론적 기술로 간주한다. 아이디는 후자의 편을 들면서, 인간-기술-세계 관계에 대한 현상학을 스케치한다. 아이디는 인간의 경험을 연장하거나 구체화하는 기술(예: 돋보기)과 인간의 해석적 반성을 요구하는 기술(예: 온도계)를 구분한다.

아이디에 따르면, 모든 기술-매개적 관계에 기초적인 확대-축소 구조가 있다. 예컨대 돋보기는 미시세계를 확대시키지만, 그것은 시야를 좁힘으로써만 이루어진다. 즉 "모든 확대는 동시에 필연적인 축소를 동반한다. 확대는 극적으로 두드러지지만, 축소는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도구로 개개된 대상은 맨 눈으로 보는 것과 다른 시각에서 보이게 된다. 이에 따라, 아이디는 기술의 중립성 또는 투명성 견해를 비판하는 동시에 프랑켄슈타인 견해도 비판하다. 즉 공고한 기술결정론은 거부하지만, 기술이 가진 (특정 삶의 형태를 진전시키는) 잠재적 경향을 인정한다. 기술은 자연의 이해에 영향을 주는 동시에, 더 나아가 인간의 자기 이해에도 영향을 준다. 즉 "우리는 우리게 투사하는 바로 그 '세계' 위에서 우리 자신을 모형화하게 되며, 기술의 용어로 우리 자신을 해석하게 된다."

아이디에 따르면, 인간은 garden 상태의 비기술적 삶으로 갈 수 없는데, 왜냐하면 지구상에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기술적인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또 아이디는 근대 과학의 탄생에 미친 기술의 중요성을 기술하기도 했다.

아이디는 기술사회의 문화에서 '핵심'이나 '토대'가 사라지는 것을 환영하면서도, "간문화적 관용과 문화적 다원주의의 방식을 지킬 탈-계몽주의 방법을 찾아야 할 필요는 인정한다.

인간 경험에서 기술의 중요성을 보이거나, 실용주의에 매우 친화적이면서 기술 비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것에서 볼 때, 그의 현상학적 기술철학이 정교한 EPT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맑스주의 기술 철학의 질문

맑스는 생-시몽(Saint-Simon)을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로 간주했다. 생-시몽의 주장은 인간 복리를 증진을 위해서 근대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사회의 재조직으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맑스가 보기에, 수사적 기술관료적 관리는 충분치 않았다. 생산 혹은 기술 사회의 재조직은 생산 과정에 대한 구조적 지식에 기반해야 한다. 그 지식은 단지 technical한 것을 넘어선다.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감각적 활동, 즉 실천"이다. 이 활동은 "자연에서 주어진 특정한 재료를 특정한 인간 필요에 맞게 전유한다" 맑스는 헤겔이 "노동을 인간성의 본질"로 파악했음에도 그가 생각한 노동은 추상적인 정신적인 것이었다고 말하면서, 추상적인 노동을 실제 노동으로 바꾸어 헤겔을 거꾸로 세워 바로 잡기 위해서는 정치경제학 비판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정치경제학은 산업혁명과 관련한 기술을 재평가하면서 태어났다. 고전적인 정치학은 부를 억제하고 그 악영향을 제한하는 데 관심을 두었지만,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의 근대 정치경제학은 그 반대로 생산을 극대화하는 정치를 증진하기 위해 부의 본성과 원인을 고찰했다. 맑스는 이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근본 전제조건을 드러내고 그 문제점을 수정하고자 했다.

맑스의 비판은 자본주의 세계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상품의 세계라는 관찰에서 시작된다. 자본론에서 맑스는 기존 정치경제학의 상품 분석이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첫째, 제조(과정)이 언제나 사회적이라는 것을 간과했으며, 둘째, 소비산물을 제조와 사용 과정과 독립된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생산의 요소는 노동, 재료, 노동도구인데, 재료는 과거 생산과정의 산물이며, 노동도구도 마찬가지이다. 즉 중요한 것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들이 만들어지는가와 무슨 도구로 만들어지는가이다. 재료와 도구는 생산 과정에 연결되어 있을 뿐이며, 그 과정이야말로 핵심이다.

정치경제학은 입력과 산출로만 생산을 분석함으로써, 전체로서의 생산 과정을 탐구하는 데 실패했다. 이는 부르주아 계급의 관점에서만 생산을 분석한 것으로, 즉 정치경제학은 제한된 계급의 이해에 묶여 있었다.

맑스는 정치경제학을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해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생산 과정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제안했다. 우선 맑스는 어떻게 노동도구가 도구에서 기계로 바뀌었는가를 검토하는 동시에 어떻게 기계가 (노동이 일련의 생산과정을 따라가게 되는) 특정한 시스템으로 조직하는 경향을 가지는지를 검토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현대 기술 과학(modern science of technology)가 기저에 놓여 있다고 분석했다. 기술 과학은 생산 과정을 구성 기능으로 분석했다. 맑스는 이 "새로운 기술"이 전통적인 숙련과 수공업적 생산을 침식시키고 노동자를 자율적 공장의 공포 아래 위치시켜 노동의 기능이 똑같이 호환가능한 것이 되어버리는 과정을 묘사했다.

노동과정은 기본적으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인간 활동으로, 자연 재료를 인간의 필요에 의해 전유하는 것이다. 이 변화의 인간적 부분은 정신에 있는데, 즉 (노동의) 완전한 결과에 대한 상상에 있다. 문제는 이 사용가치가 자본주의 경제 하에서 교환가치로 대체된다는 데 있다. 교환가치는 특정한 구체적 사용가치에 기초해 있겠지만, 교환가치라는 개념은 생산물을 인간 필요와 목적과 무관하게 재료+노동이라는 입력의 결과로 간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윤은 (최대)교환가치와 입력[최소교환가치?]의 차이에 의해 결정되어, 자본가는 이윤을 위해 기술 개발을 통해 노동을 축소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사용가치가 배후로 사라지는 만큼, 교환가치가 부각된다.

분업에 대한 분석에서, 맑스는 분업을 통한 노동의 기계화(mechanization)이 기계 관련 기술의 기계화(mechanization)의 선행조건임을 보였다. 노동(자)의 소외와 타락(강등)이 사용가치와 분리되어 이윤을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 기술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맑스의 유명한 분석이다.

필요로서의 소비 - 생산활동의 고유한 요소. 원래 생산 안에 있었음. 생산자로서의 인간. 노동자로서의 인간. 그것의 완성은 소외된 자연을 인간화된 세계로 다시 만드는 것에 있다. 객관적 세계에서의 생산은 active species life of humanity이며, 그것의 본질적 힘은 산업의 역사에서 (소외된 형태로이긴 했지만) 드러났다. 맑스는 가끔 기술이 경제에 종속된 것으로 그린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경제를 기술에 종속시킨 것으로 그린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기술이 산업 자본주의의 문제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처럼, 기술은 사회주의 사회를 만드는 데에도 똑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사회화된 기술은 지구상에서 결핍을 일소할 뿐 아니라, 인간성(humanity)의 "species life"로서 철학자들을 괴롭혀왔던 형이상학적 소외를 뿌리뽑을 것이다. 기술은 철학과 종교가 이루지 못한 것을 성취해낼 것이다. 기술은 인간성이 마음이나 천국만이 아닌 이 세계에서 자리잡게 해줄 것이다. 맑스는 기술이 노동자가 다양한 일에 적합하다는 것을 드러내어, 노동자의 다양한 기질을 최대로 발전시킬 것이라 주장했다. 즉 모든 직업이 동등해진다면, 모든 노동자는 그가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즉 생산을 완성(perfection)하게 하고, 생산을 자본주의적 방식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현대 기술은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가능케 할 것이다.

맑스주의의 정치적 유산

과학기술 혁명(STR) 이론. 과학과 기술이 사회적 변화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기존 맑스-레닌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생각.

IR은 기계적 power, 공장 조직에 기반, STR은 자동화와 사이버네틱 원리에 기반. STR은 고등교육 노동자 필요. 인간적. 창조성 극대화. 이러한 입장은 자본주의적 사회 조직에 대한 명시적 비판과 동시에 스탈린주의적 중앙집중화에 대한 암묵적 거부 포함.

정보 개념 중요. 혁명이란 진보적인 질적 변화. 과학혁명이란 "근본적으로 새로운 법칙 현상의 발견"이나 "새로운 방법이나 기술적 방법의 이용"에 의해 일어남. 기술혁명은 "완전히 새로운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과거의 기술적 매체를 새로운 기술적 매체로 교체함으로써" 일어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이 두 혁명이 결합되고 있다는 것. 기술은 과학의 새로운 인지적 방법이며, 과학은 기술에 새로운 원리를 제공한다.

좁은 의미의 STR은 과학과 기술의 혁명적 변화가 수렴해 통합된 과정이 된다는 것. 그러나 기술 혁명은 그 자체로 그에 따른 사회적 혁명 없이 생산 혁명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넓은 의미에서, 새로운 방법의 완전한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생산 과정의 조직의 기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분석으로부터 소련이 이익을 얻는 데 실패한 것은 그 분석 자체의 잘못을 증명해주진 않는다. 오히려 그 실패 결과는 그것의 참을 입증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STR의 사회적 측면을 다루는 어려움 때문에, 러시아 기술철학은 technical한 측면에 집중하여, 새로운 공학의 방법론적 원리를 분석하는 데 집중했었다. 이러한 연구는 EPT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맑스주의의 지적 유산

Max Horkheimer, Theodor Adorno, Herbert Marcuse, Jurgen Habermas. 네오-맑스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주요 인물들은 정치경제학뿐 아니라 "계몽"에도 문제제기. 즉 기술의 오용 원인은 경제뿐만이 아니라 문화에도 있었다고 주장. 계몽은 주관적 이성을 증진 또는 "도구적 이성"을 증진시켰지만, 이성의 새로운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에 관한 객관적 이성(이론)의 가이드라인은 제공하지 않았다. 계몽은 자기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성(인간) 전체가 비난받게 될 것.

마르쿠제는 비주류, 반문화 운동. 대안 과학기술에 대한 아이디어 고안. 서양 과학기술은 그 자체로 지배 논리 함축하고 있으므로, 내적으로 문제가 있음.

하버마스는 이에 반대. 문제는 사회와 이데올로기에 있음. 이 해결을 위해 의사소통행위 이론 고안. 국가는 의사소통 능력을 극대화할 의무 있음.

윌리엄 라이스(William Leiss)는 마르쿠제의 아이디어 변호. 소비사회 꼭 필요한 것 아님. 국가는 빠르게 축적되는 기술 지식을 이용해 시민들이 그들 앞에 놓인 선택지에 관해, 그리고 그 선택지와 자유 및 민주주의의 근본적 가치 사이의 관계에 관해 스스로 알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기술적 운명론에 대한 해독제는 "유식한 시민과 계몽된 공공 정책"이다.

앤드류 핀버그(Andrew Feenberg)는 민주주의 발전의 기회를 개척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술에 대한 일반적 분석과 문화와의 관계 분석. 엘룰과 비슷하게, 현대 기술적 실천의 주요한 측면으로, 탈맥락화, 환원주의, 자동화, 위치지우기를 들었다. 그러나 엘룰과 다르게, 핀버그는 기술의 다양한 가능성을 재배열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안을 제시했다. 예컨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탈맥락화하는 행동, 인간의 사명에 대한 공공의 인식, 기술적 산물의 미적 가치에 대한 투자, 작업에서의 자발적 책임 합의의 추구 등. 이는 분명히 기술을 인문학적 시각 내에서 다시 끌어안는 시도.

인문학적 기술철학의 우선성

HPT가 EPT보다 우선적인 이유 세 가지: (1) 역사적으로 우선 (2) 포괄성 (3) 정신적 연속성.

(1) EPT가 HPT보다 '기술철학'이란 말 먼저 쓰긴 했지만, EPT는 일반 철학의 수사학 전통에 속함.

(2) 첫째, 인지적으로, HPT는 EPT가 결여한 역사적 대안의 지식 포함.

둘째, 기능적으로 making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음. 따라서 자체 정당화 불가능. a를 만드는 것은 b를 위해. b를 만드는 것은 c를 위해. 최종적인 good이 있어야? 정치학은 바로 그런 부분,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의 특성을 정의하는 활동을 하고 있음. 토대없는 인간의 활동의 다양성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주장은 이러한 분석을 뒤엎지는 못하는데, 왜냐하면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만드는 것을 만드는 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니체나 푸코 등의 허무주의자들이 그렇지 않다고 주장을 하긴 하지만, 그것의 진위를 따지는 문제는 HPT의 핵심 문제이기도 하다.

세 가지 인간의 삶의 방식으로 물리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 덕과 명예를 추구하는 삶,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는 삶을 고려할 때, 첫 번째 삶은 두 번째 삶의 의존하며, 두 번째 삶은 세 번째 삶의 의존한다. 첫 번째 삶은 만들기, 즉 공학과 기술에 의존하는 데 인문학적 분석은 두 번째, 세 번째 삶의 방식에 열려 있다. 따라서 HPT는 EPT보다 포괄적이다.

교과서류를 분석해보아도, 공학은 매우 좁은 부분에 집중하는 반면, 인문학은 그보다 훨씬 일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후자는 전자의 논의를 포함할 수 있지만, 전자는 후자의 논의를 포함할 수 없다.

HPT의 낭만주의적 현대 과학기술 비판은 이러한 방식의 포괄성 개념을 끌어들이고 있다. 즉 그들은 공학이 포괄하지 못하는 삶의 영역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 영역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인문학이 필요하다.

EPT가 인문학의 다른 분야에 대해 기술적인 설명을 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논증들을 뒤엎어야 할 것이다.

(3) 정신적 연속성. 소크라테스의 기술자 비판(?) 소크라테스가 장인을 만나 얘기를 나눈 후, 그는 장인이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인정. 그러나 문제점 있음. 장인은 자신이 제일 현명하다고 생각. 이러한 문제는 그들이 가진 지혜를 가림. 소크라테스의 결론은 자신이 가진 지혜는 learned ignorance. 인문학은 끊임없이 새로운 질문 영역을 여는 경향에 의해 규정될 수 있음. 소크라테스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이 지혜를 정말 가지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열어두어야 함. 우리는 그들을 찾아 질문을 해야 함.

기술철학의 주제들

  • 도구, 기계, 사이버네틱 장치 사이의 개념적 구분
  • 발명, 디자인, 생산의 방법론적 논의
  • 공학에 대한 인식론적 분석
  • 인공물과 작업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사색
  • 광범위한 전문화된 기술에 의한 윤리적 문제
  • 기술적 추구의 잡다한 정치, 문화적 분화

소크라테스는 수학적 지식이 여러가지를 만들어내는 데 사용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사람이 그러한 것을 추구하기 위해 그는 그에 관한 모든 윤리적 정치적 문제에 이미 완전히 답해졌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가끔 정의, 선, 경건 등에 관한 질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촌스럽거나 아니면 낭만주의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때로 그러나 귀환이 형식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술철학이 기술적 태도에 대한 철학적 연장으로만 규정되고자 한다면, 실재의 다양한 다른 부분과 떨어져야 할 뿐 아니라 철학이라 주장하기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질문하기는 실제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자 사고의 생생한 본거지이다. 그러나 진정한 질문하기는 지적 농담이기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질문 대상에 깊이 관여해야 한다.

각주

  1. Rapp은 자신의 작업이 " "라고 적었다.
  2. 이러한 방식의 얘기는 도구를 몸의 연장으로 보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3. 모든 삶이 기술적이라면, 기술 개념이 공허해지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