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 There a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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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anson, N. R. (1961), "Is There a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in Feigl and Maxwell (eds.) Current Issu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Holt, Rinehart and Winston. Inc.; reprinted in Brody & Grandy (eds.) Reading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2nd edition, Prentice Hall College, 1989, pp. 398-408.

라이헨바흐는 이론에 대해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을 엄격히 구분하면서, 과학철학이 다룰 대상은 정당화의 맥락뿐이라고 주장했다. 발견의 맥락은 철학이 아닌 심리학이나 사회학의 대상이라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정당화의 맥락에는 "논리"가 있지만, 발견의 맥락에는 "논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핸슨은 1961년 이 논문에서, 발견의 논리가 정당화의 논리와 "논리적으로 구분"되긴 하지만, 분명히 "가설을 제안하는 데"에는 "논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요약

"발견의 논리"라 부를 만한 게 있을까? 대부분은 이에 부정적이다. 발견의 과정은 단지 심리학이나 사회학의 관심사이며, 그에는 "논리적 분석"을 할 수 있는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이다. 퍼스의 생각을 발전시켜보자.

먼저, 발견의 논리가 무슨 논리인지 불명확하다. 쉴러(Schiller)는 "귀납 추론의 논리" 이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한편, 포퍼, 라이헨바흐, 브레이스웨이트 등은 완결된 연구 보고서의 논리에만 관심을 가질 뿐, 처음 가설이 제안되던 맥락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퍼스는 가설의 제안이 합리적인 일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는 처음 어떤 종류의 가설을 제안하는 데 다른 종류의 가설에 비해 좋은 이유 혹은 나쁜 이유를 가질 수 있다. 이 이유는 일단 제안된 가설을 수용하도록 이끄는 이유와 유형상 다를 수 있다. 처음 가설을 제안하는 누군가의 이유가 나중에 그것을 수용하는 이유와 같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퍼스가 과학자들의 발견을 돕는 매뉴얼을 쓰려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한 매뉴얼은 존재할 수 없다. 그들은 여기에 마땅히 발견의 논리라 부를 만한 개념적 탐구거리가 있다고 느꼈다. 물론 발견에 관해 심리학, 사회학, 역사학적인 탐구거리 외에 논리적 탐구의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사전에 전제해서는 안 된다.

다음의 구분을 먼저 보자.

  1. 가설 H를 수용하는 이유
  2. 처음에 H를 제안하는 이유

대다수의 철학자들은 둘 사이의 논리적 차이를 부정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가 가설 H를 수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우리가 H를 참이라 생각하는 것일 것이다. 그럼 가설 H를 처음에 제안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H가 참이라 생각하기 전에 이루어지는 일이다. 아마도 그것은 H가 그럴듯한 추측의 유형으로 만드는 그런 이유일 것이다. 둘 사이의 차이를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 그 차이는 논리적인 것인가? 아니면 "심리적" 또는 "사회학적"인 것인가? 아니면 파이글(Feigl)처럼 "같은 유형"의 정도 차이인가?

위의 구분을 살리기 위해서는 섬세한 수정이 필요하다. 다음의 구분을 보자.

  1. 특정한, 매우 구체화된 가설 H를 수용하는 이유
  2. 성공한 H가 어떤 구체적인 주장을 하게 되든,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어떤 특정 유형의 가설일 것이라 제안하는 이유

여기서 논점은, 어떤 가설이 예측에 성공하기에 앞서 그 가설이 어떤 특정한 유형일 것이라 예상하는 데 좋은 이유를 가질 수 있는가이다. 케플러가 화성의 궤도에 대한 구체적인 가설을 세우기 앞서, 그 궤도가 비원형의 유형일 것이라고 예상한 데에는 분명 좋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그의 "직감"의 문제가 아니다.

여전히 이에는 아직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누군가는 두 이유 사이의 (논리적) 차이를 부정할 수 있다. 즉, 둘 사이에는 심리적인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두 이유는 모두 "그 가설 H가 참일 것이다"라는 이유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설 H를 제안하는 단 하나의 논리적 이유는 자료가 우리로 하여금 그 특정한 H가 참일 것이라 생각하게 만든다는 유형의 이유이다. 예컨대, 케플러가 화성의 궤도가 균일한 원형이 아닌 다른 유형을 환영한 이유는 그것을 천문학적 진리로 수용하는 그의 이유(와 같)다. 그는 먼저 원형 가설에 대해 주전원, 대심, 이심을 단순히 조정한다고 화성의 관측 자료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는 또한 그로 하여금 그 행성의 궤도가 원운동의 결과가 아닌 타원 궤도의 결과라고 주장하게 만든 이유였다. 다른 귀납적 이유들로 그 가설의 참이 입증된 이후에도, 그 애초의 이유는 그 가설 H를 참으로 수용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 이유는 단지 가설 H가 어떤 종류일지를 제안하는 이유만일 수 없다.

이 반론은 매우 강하다. 이를 논박하기 위해 다음의 가설을 보도록 하자.

  • H': 목성의 궤도는 비원형의 유형이다.

케플러가 H'을 제안하도록 이끈 이유는 여러가지이지만, 그에는 H(화성의 궤도가 비원형의 유형이다)가 참이라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 H의 참으로부터 H'을 주장하도록 이끄는 추론은 유비적 추론이다. 그러나 이 유비적 추론만으로는 H'의 참을 확립할 수 없다. 가설연연론자들의 주장대로, H'의 참을 확립하는 것은 관측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 유비적 추론을 추론이 아니라거나 근거 없는 것으로 또는 심리적인 것으로만 볼 수 없다. 케플러의 유비는 분명 좋은 근거가 된다. 그리고 특정한 결론에 이르는 데 무엇이 좋은 근거인지 아닌지는 논리적 문제이다. 따라서 케플러가 H'을 제안하는 이유에 대한 물음은 논리적 문제에 해당한다.

가설의 유형을 예상하는 이유에는 앞서 언급한 유비 외에도 대칭성이 있다.(e.g. 아인슈타인)

이러한 유형의 추론(유비, 대칭성에 의거한 추론)은 귀납 추론과 다르다. 즉, A가 B라는 관찰로부터 "모든 A는 B이다"라는 결론으로 나아가는 추론은 C가 D라는 사실로부터 A와 B를 연결하는 가설은 C와 D를 연결하는 방식과 같은 유형일 것이다"라는 제안으로 나아가는 유비적 추론과 다르다.

유비적 추론도 종국에는 귀납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동의한다. 그러나 이 글은 논증에 사용되는 우리 믿음의 기원에 관해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논증의 논리 그 자체만을 논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이는 앞서 나눈 추론 유형의 구분을 깨지 못한다.

귀납론자들(e.g. J. S. Mill 등)과 가설연역론자들의 문제: 귀납론자들은 발견을 열거적 귀납에 의한 것처럼 잘못 묘사하고 있다. 사실 발견은 열거적 귀납처럼 단순히 이루어질 수 없다. 가설연역론자들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과학적 가설은 사실들의 단순한 일반화가 아니다. 반면, 가설연역론자들은 발견과정을 전혀 해명하지 않은 채, 완성된 이론에서 재구성된 논리만을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자료 및 사실들로부터 이론 및 가설로 향하는 추론을 분명히 행하고 있다. 가설연역론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과학자들은 가설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료에서 시작한다. 이 점에서 귀납론자들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과학 활동은 일반적인 자료에서가 아니라 놀라운 변칙사례에서부터 시작한다. 과학적 물음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그 추론이 사실들의 단순한 열거적 종합이 아니라 모종의 "설명"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발견의 논리는 주어진 맥락에서 어떤 유형의 가능한 설명을 다른 유형에 비해 선호하는 논증 구조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가설의 제안이 설명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가설연역론자들도 잘 지적했으나, 그들은 높은 수준에서 관찰명제로 향하는 추론 외에도 관찰에서 높은 수준으로 향하는 추론도 있음을 간과했다. 가설연역론자들의 설명은 물리학자들이 사설을 잡은 이후에 종종 사용하는 요리법이긴 하다. 그러나, 물리학의 역사에서 그어진 큰 획들은 잡은 가설을 요리하는 부분보다는 그 가설을 잡는 부분에서 잘 보여진다.

물론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는 가설연역론자들의 입맛에 맞게 쓰여졌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얻는 과정은 책에 없다. 역제곱의 힘이 작용할 때 행성의 운동이 어떻게 될까라는 핼리의 질문에 뉴턴은 타원이라고 대답. 그러나 수학적으로 엄밀히 보면 그 답은 원추곡선이다. 왜 뉴턴은 타원이라고만 대답했을까? 아마도 뉴턴은 타원으로부터 역제곱법칙을 얻는 역추론 과정을 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추론과정은 우리도 쉽게 재현할 수 있다. 퍼스는 이를 "귀추적 추론(retroductive reasoning)"이라 불렀다. 도식적으로 보면 이 추론은 다음과 같다.

  1. 어떤 놀라운 현상 p1, p2, p3 ... 등에 부딪힌다.
  2. 그러나 p1, p2, p3 ... 등은 H와 같은 유형의 가설이 있으면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H와 같은 것으로부터 당연한 일로 따라나올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설명될 것이다.
  3. 따라서 H와 같은 유형의 가설을 발전시키는 데 좋은 이유가 있다. 그것을 가능한 가설로 제안함으로써 그로부터 그것의 가정 p1, p2, p3 ... 등이 설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번역

과학적 발견의 논리는 존재하는가? 이에 대한 공인된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포퍼(Popper)가 주장하기를,[1] "내가 보기에, 초기에 어떤 이론을 착안하거나 발명하는 행위는 논리적 분석을 요청하지도 않으며 그럴 여지도 없어 보인다." 다시, "새로운 생각을 가지는 데에 논리적 방법이나 그 과정에 대한 논리적 재구성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라이헨바흐(Reihenbach)가 쓰기를, 과학철학은 "[가설을 제안하는 이유]에 관여할 수 없으며, 오직 [가설을 수용하는 이유]에만 관여할 뿐이다."[2] 브레이스웨이트(Braithwaith)가 발전시키기를, "이러한 역사적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개인적인 사고의 심리학이나 생각의 사회학과 관련된다. 이러한 질문들 중 어떤 것도 여기 있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3]

이러한 부정적인 목소리에 비해, "찬성자"는 다수를 차지하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Prior Analytics II, 25)와 퍼스(Peirce)[4]는 이미 발명된 가설을 뒷받침하는 논증을 분석하는 일 외에도 논리학자를 위한 문제가 과학에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을 비추었다. 그러나 현대 철학자들은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

각주

  1. 각주 1
  2. 각주 2
  3. 각주 3
  4. 각주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