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ls and Represen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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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ghes, R. I. G. (1997). "Models and Representation." Philosophy of Science 64(Proceedings): S325-S336.

물리학에서 쓰이는 모델링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말하는 DDI account에 따르면, 모델링은 세 가지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지시(denotation), 도출(demonstraion), 해석(interpretation)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첫째, 물리적 세계의 요소는 모형에 의해 "유사성에 의존하지 않는 방식으로" 지시되며, 모형은 "그 자체의 내적 동학을 가지고 있어서" 이론적 귀결을 도출(demonstration)해주며, 그 결과는 실제 예측이나 설명을 위해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DDI account는 중층적(위계적?) 모델링의 측면과 잘 어울린다. 왜냐하면 실 세계를 지시하기 위해 제시된 모형은 다시 다른 모형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

요약

이론에 대한 의미론적 관점에 의해 얻은 중요한 통찰 중 하나 : 이론의 진술은 엄밀히 말해 물리 세계에 대한 진술이라기보다는 이론적 구성물에 대한 진술이다. 보통 우리는 그 이론적 구성물을 '모형'이라고 부르고, 그것과 세계와의 관계를 '표상'이라고 부른다. 모든 이론적 모형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세계에 대한 표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단, 모든 표상이 모형은 아니다. (e.g., Vermeer's "View of Delft") 또한 물리학에서 쓰이는 표상이 모두 한가지인 것도 아니다.(e.g., 결정을 공과 막대의 배열로 표상하는 것과 자유낙하를 s=1/2 gt^2 라는 방정식으로 표상하는 것 사이의 공통점은?)

휴즈는 <새로운 두 과학>에서 제시된 갈릴레오의 등가속도 운동 표상 방식을 분석하면서 자신의 DDI account of modeling을 제안하고 옹호한다.(흥미롭게도 갈릴레오는 표상representation이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한다. 예컨대 시간 간격을 세로 선의 길이로, 물체의 속도를 가로 선의 길이로 "표상"한다고 말한다.) "갈릴레오의 전략은 물리학의 문제를 취해서 그것을 기하학적으로 표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의 해답은 기하학적 표상으로부터 읽혀진다. 요컨대, 그는 질문을 바꿈으로써 답에 이르렀는데, 즉, 운동학의 문제가 기하학의 문제가 된 것이다." 휴즈는 이것이 이론적 표상에 대한 일반적 설명을 제공한다고 하면서, 이를 DDI account 라고 명명한다. 즉 이 설명에서 물리학에서의 모형의 사용은 다음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지시(denotation), 도출(demonstration), 해석(interpretation). 갈릴레오의 경우, (1) 시간 간격은 세로선 길이에 의해, 속도는 가로선의 길이에 지시(denotation)되고, (2) 도출(demonstration)은 전적으로 모형 내에서 이루어진다. 기초 기하학은 세 면적 ABC, CBFI, IFPO의 면적이 1:3:5라는 것을 보여준다. (3) 이 기하학적 결과는 다시 운동학적으로 해석된다. 즉 면적 비는 거리의 비로 해석된다.

조심할 점 1 : 표상은 중층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예컨대 등가속도 운동이 그러한 기하학적 방식으로 표상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자유낙하운동이 그렇게 표상되는 것이 적절한지 의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갈릴레오가 등가속도 운동을 기하학적 다이어그램의 직선들로 표상한 것은 일종의 '표상의 표상'이다.

조심할 점 2 : D, D, I가 이론적 표상의 충분조건이거나 필요조건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님. 그렇다기보다는 (1) 이러한 세 가지 활동을 하는 이론적 모형을 검토하면 그것이 제공하는 종류의 표상에 대한 어떠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2) 잘못된 주장으로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임.

지시(denotation)

유사성 이론 반대! : 이론적 모형은 그것의 대상(subject)과 어떤 측면과 정도에서 닮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떤 종류의 모형은 그럴지 모르지만(e.g., 스미턴의 수차 모형과 실제 수차), 그 사례에서조차도 예외는 있다. 그리고 흔히 실제 진자와 이상적 진자 사이의 유사성을 많이들 주장할지 모르겠지만, 추상물로서의 이상적 진자는 물질적 진자와 어떤 명백한 점에서도 닮지 않았다(이 주장은 정교하지 못해서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것 같음). 넬슨 굿맨(Nelson Goodman 1968, 5)의 격언 "denotation is the core of representation and is independent of resemblance"을 상기할 필요 있음. 물리적 시스템에 대한 모형은 "그 시스템을 위한 기호이자, 그것의 상징이자, 지시"일 뿐이다. 갈릴레오의 다이어그램에서 세로선은 시간 간격을 '지시(denote)'할 뿐이다.

이에 대한 가능한 반론 : 지도는 언제나 '존재하는(existing)' '특정한(particular)' 것을 지시하는 반면, 이론은 단지 실제를 포함해 '가능한(possible)' 시스템들의 전체 집합을 다룬다(이론을 지도에 유비한 것으로는 툴민(1953)을 보라.) 이러한 일반성에 비추어볼 때, 표상을 위해 지시를 꼭 필요로 한다는 것은 근거가 필요하지 않은가? 양자역학이 무엇을 지시하는가? 뉴턴 역학이 무엇을 지시하는가?

휴즈의 답변 : 첫째, 어떤 이론은 개별적인 대상을 정말로 표상한다. 예: 우주론, 보어의 수소 원자 이론. 이를 local theory라고 부르겠으며, 그것이 정의하는 모형을 local model이라고 부르겠다. 둘째, 양자역학이나 고전역학과 같이 뚜렷한 지시 대상이 없는 이론이 있긴 한데, 이를 global theory라고 부르겠다. 그럼에도 이 global 이론은 개별 시스템이나 특정 종류의 시스템을 표상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local 모형을 만드는 데 사용되며, 그 시스템을 표상하는 것은 바로 그 local model이다.(global theory는 모형 생산 지침 집합) 요컨대, local theory든 global theory든 둘 모두 local model을 통해 실제 시스템을 표상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며, model은 지시를 필요로 한다. 이로써, "지시 없이는 표상도 없다"는 주장은 지켜졌다.

도출(demonstration)

이론은, 지도와 달리, 항상 'representation-as'이다. "represent A as B"는 primary subject인 A를 이해하는 데, secondary subject인 B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예컨대, 빛의 파동 이론은 빛을 파동 운동으로 표상함으로써, 광학 현상을 파동의 전파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게 해주며, 이로써 빛의 행동을 예측하고 설명하게 해준다. 이러한 특성은 유비 모형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수학적 모형에도 적용된다. 수학적 표상은 단지 이상화나 추상화로만 생각되어서는 안되며, 유비적 표상처럼, 그것은 그 자체의 삶을 가진 secondary subject를 제공한다. 즉 그러한 표상은 그것의 효과가 검토될 수 있는 내적인 동학(internal dynamics)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형의 행동으로부터 우리는 세계에 대한 가설적인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지도에서 이루어지는 표상은 이런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론은 예측을 하거나 설명을 제공해야 한다고 흔히 얘기된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론이 그러한 예측과 설명을 할 수 있는 내적인 동학(internal dynamics)을 가진 표상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수학적 모형이 표준적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수학은 연역적인 자원을 통해 그러한 내적인 동학을 제공한다. 물론 물질적 모형(material model)도 그러한 동학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빛을 탐구하기 위해 추상적인 수학적 모형을 사용해서도 물 흐름 모형을 사용해서도 간섭 무늬 거리가 소스의 간격에 반비례할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다.

수학적 모형의 내적 동학은 기하학과 대수의 혼합에 의해 제공되며, 물질적 모형의 내적 동학은 물 파동의 전파에 관련된 자연적 과정에 의해 제공된다. 컴퓨터 시뮬레이션도 ... 어쨌든 이들 모형은 모두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결과를 도출(demonstrate)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다. (17세기 수학의 정리들이 demonstrated 되었듯이, 오늘날 우리는 실험실에서 물리적 현상들을 demonstrate한다.)

왜 demonstration? (수학적) 모형 내에서 그 귀결은 필연적인 귀결이기 때문. 17, 18세기 자연철학자들은 (실험) 모형을 통해 보여주는 귀결도 수학의 필연적인 귀결과 연속선 상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해석(interpretation)과 모형의 보금자리

모형에서 도출된 결과는 일차적으로는 그 모형내에서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우리의 관심 대상에 대한 결론으르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해석이 필요하다. 어떻게? 헤르츠는 다음과 같이 생각: "[T]he necessary consequents of the images in thought are always the images of the necessary consequents of the things pictured." 즉 모형 내에서 도출(demonstration)을 통해 얻은 필연적 귀결은 실제 세계에 대한 것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조심해야 할 점 : DDI 간단하지 않다. "우리가 기술한 세계에 대한 표상"으로서의 모형, "표상에 대한 표상"으로서의 모형, "global theories에 의해 지배받는 local models"...

첫째, 실제 태양계->뉴턴적인 many-body 시스템->구심력에만 지배받고 행성끼리는 상호작용하지 않는 시스템 (근사적 해를 구하기 위한 테크닉). 왜 이런 이중의 모형화? 이는 도출(demonstration)이 순수 수학적인 연역으로 이루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줌. 각종 근사법과 perturbation techniques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줌. 이는 더 나아가 도출(demonstration)에 필요한 자원이 오히려 이론적 모형의 형태에 영향을 주거나 dictate할 수 있음을 보여줌. 이는 우리가 이론의 방정식을 적용하기 전에 항상 현상에 대한 '준비된 기술(prepared description)'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카트라이트, 1983: 여기서 준비된 기술은 이론적인, 즉 설명항 쪽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준비된 기술을 의미함).

그러나 20세기 물리학의 두 주요 흐름은 새로운 양상을 보여줌 : (1) 광범위한 가설법 사용, 즉 특정 현상 설명을 위한 local models의 사용 (2) 새로운 물질 이론의 등장. (1)과 (2)가 합쳐지기도 함. 예를 들어 금속에 대한 lattice-and-electron-gas model은 금속의 전도성을 설명하기 위한 local 모형이지만, 이는 카트라이트의 '준비된 기술'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는 어떤 의미에서 잘 준비된 기술인데, 즉 피설명항 쪽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준비된 기술이다. 이를 양자역학적으로 설명하려면? 이를 다시 양자역학적 시스템으로 재기술해야 한다. 즉 "표상에 대한 표상"을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 금속 -> lattice-and-electron-gas model -> 양자역학적 모형.

이론적 표상은 위계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관찰 진술, 이론 진술의 이분법 또는 외적 대상, 내적 이미지의 이분법에 기초한 이론관은 이러한 중층적인(?) 이론적 practice를 설명하지 못한다. 반면 DDI는 이러한 위계 구조에 잘 맞아떨어진다. 첫번째 단계의 이론화에 쓰인 모형1은 다시 다음 심층적인(?) 단계에 있는 모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꼭 다음 단계의 모형은 더 심층적인 것이어야 하나?)

전체 요약: 과학적 모형이 제공하는 표상은 어떤 종류의 표상인가? 과학적 표상은 'representation-as'를 제공한다. 즉 그것은 primary subject를 secondary subject, 즉 모형의 방식으로 표상한다. 모형의 내적 동학은 새로운 귀결을 도출(demonstration)해준다. 이러한 종류의 표상은 다른 모형의 subject가 될 수 있다.

평가

지시와 유사 관계

정말 표상에 지시가 가장 중요하고, 지시에는 유사관계가 전혀 필요 없는가? 근거는? 긍정적인 근거를 찾자면, 언어를 이용한 표상의 경우, 어떤 단어가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데 무언가를 닮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림을 이용한 표상은?

우리가 언어 형식과 그림 형식을 매우 중요한 표상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할 때, 언어적 형식만을 전형적인 방식으로 보거나 반대로 그림 형식만을 전형적인 방식으로 볼 근거는 없을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직접 지시 또는 특정 기호와 대상 사이의 자의적인 지시 관계에 의한 표상과 더불어 그림과 대상 사이의 유사 관계에 의한 표상 모두 우리의 기본적인 두 가지 표상 방식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 같다.

즉, 표상에는 두 가지 구별되는 방식이 있는데, 즉 첫째, 지시 관계를 통한 표상과, 둘째, 유사 관계를 통한 표상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표상 방식은 주로 언어를 통해, 두 번째 표상 방식은 주로 그림을 통해 이루어진다.

자의적인 지시와 representation-as 사이의 갈등

저자는 과학적 모형(Model)이 관심 대상(Subject)에 대한 representation-as를 제공한다고 한다. "we represent S as M"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는 S를 M"처럼" 보게 된다. S를 직접 보는 대신 M을 관찰함으로써, M의 귀결을 살피고, 그 귀결을 S에 대한 귀결로 보려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모델링 방식이 유비 모형뿐 수학적 모형에도 적용된다고 말한다. 나는 이 통찰이 매우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는 다름 아닌 전형적인 유비 추론이다. 그런데 이 유비를 설정하기 위해 아무런 유사 관계도 필요 없을까? S와 M 사이에 어떠한 닮은 점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S를 M처럼 보려고 할까? S를 알기 위해 S와 어떠한 닮은 점도 없는 M을 볼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과학자들은 S를 연구하기 위해 아무 M이나 끌어들이지는 않는다. M의 결과를 S의 결과로 해석하여 실제 실험과 확인하기 전에, 과학자는 이미 M이 S의 좋은 대리물이 될 것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어떤 문제 대상 S에 대해서는, 많은 과학자들은 어떤 M이 적절할지에 대해 그것의 귀결을 알아보기도 전에 상당한 합의가 만들어지곤 한다.(Kuhn, "The Second Thought of Paradigm") 이러한 M을 도입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휴즈라면 어떻게 반박? 첫째, 그것은 발견의 맥락에 관한 문제이고, 과학자들 사이에 예측을 확인하기도 전에 모형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다고 그 모형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모형에 대한 정당화는 어디까지나 모형의 예측을 실제 예측으로 해석한 후 그것이 정말 실제와 맞는지 확인한 이후에나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답할 수 있다. 둘째, S와 M 사이의 유사관계가 필요없다는 것이지, 대부분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S와 M이 극도로 다른 극단적인 경우도 허용해야 한다는 원칙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예컨대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시 구절에서 나는 마음을 호수처럼 유비했지만, 둘 사이에 어떠한 유사 관계가 있는가? 어떠한 화가가 이상한 추상화를 그려놓고 그것이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거나 어떤 감정상태를 표현하고 있다고 할 때, 대체 무슨 유사 관계를 찾을 수 있을까? 있다고 하더라도 매우 작은 것 아니겠는가?

휴즈는 지금 가설연역적 방법과 유비 추론을 섞고 있다. 휴즈의 DDI account는 유비 추론과 거의 흡사한 형태의 모습을 제시하면서, 그것의 정당성은 가설 연역법에서 찾고 있다. 즉 DDI의 형태는 유비 추론이지만, 그 자체로는 정당성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자의적으로 지시(denotation)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모형 사용의 정당성은 예측 결과의 일치에 의해서만 사후적으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유비 추론은 "S와 M이 a,b,c에서 유사하므로, M이 (a,b,c로부터) d를 도출할 수 있다면, S도 d를 가질 것이다"라는 형태를 가지며, 따라서 S의 d 도출을 위한 M의 사용은 둘 사이의 a,b,c 유사성에 의해 정당화된다. 즉 M의 사용은 예측 산출 이전에 정당화된다. 물론 a,b,c에서의 유사성은 직접 눈에 보이지 않거나 확인할 수 없어서 단지 가정된 것일 수도 있다. 예컨대 뉴턴이 행성의 궤도 운동을 지표면 위 투사체의 포물선 운동에 유비하여 보기 시작했을 때, 뉴턴은 둘의 운동이 모두 동일한 혹은 유사한 형태의 중력(구심력)에 의한 운동이라는 "유사성을 찾아낸 것이다". 유비추론을 위해 가정된 S와 M 사이의 유사성은 예측 성공에 의해 입증되기도 한다.

요컨대 유비 추론은 확인된 유사성에 의해 정당화되거나 가정된 유사성에 의해 가정적으로 정당화된다. M과 S 사이의 유사성을 무시하고 denotation만을 강조하는 휴즈의 설명은, 첫째, 모형 사용이 사용 이전에 정당화되는 경우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며, 둘째, 예측 성공에 의해 정당화되는 대상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한다. 예측의 성공은 모형 사용 그 자체뿐 아니라 M과 S 사이에 가정되었던 유사성까지 정당화해준다. 셋째, 휴즈는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유사성을 가시화시켜내는 모형의 역할을 간과한다. 결론적으로 M은 S를 자의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때로는 확인된 유사성에 의해, 때로는 가정된 유사성에 의해, 또 때로는 암묵적인 유사성에 의해 S를 지시한다. S에 대한 연구를 위해 S와 아무것도 닮지 않았다고 "가정"되는 M을 도입하는 과학자는 아무도 없다. 창의적인 과학자란 그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유사성을 모형 사용을 통해 그것을 드러내는 과학자이기도 하다. 혁명적인 모형이란 대상과 아무것도 닮지 않은 모형이 아니라, 그동안 대상과 닮지 않아왔다고 생각했던 모형이지만 알고보니 대상과 상당히 닮은 모형이다. 대상에 대해 새로운 모형을 도입하면 우리는 대상에 대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면을 보게 된다. 대상과 모형 사이에 유사 관계가 설정됨으로써 모형에서 보이는 여러 면에 대해 대상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휴즈의 (1) "지시를 위해 유사성은 필요없다"는 주장과 (2) "과학적 표상은 representation-as이다"라는 주장은 갈등의 소지가 있다. (1)의 전형은 언어, 그 중에서도 낱말이다. "사람"이라는 낱말은 분명 그 말소리에서도 그 글자 형태에서도 사람과 닮지 않았다. 우리가 "사람"을 통해 사람을 지시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을 가지고 사람을 지시하기로 한 사회적 약속, 또는 관습 덕분이다. 그런데 낱말은 "representation-as"가 아니다. 반면 빛의 파동이론은 분명 representation-as이다. 빛의 진행을 물의 파동 진행을 통해 보든, 빛의 진행을 수학적 파동 방정식을 통해 보든, 그것은 representation-as이다. 그러나 물의 파동 진행이, 수학적 파동 방정식이 빛을 representation-as 하는 순간, 그것들은 빛의 진행과 어느 면에선가 유사한 것으로 가정되게 된다. 즉 물의 파동 진행은 자의적으로 빛의 진행을 지시하지 않는다. 갈릴레오가 시간을 세로 선을 통해 표상했을 때, 세로 선은 단지 자의적으로 시간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갈릴레오가 시간을 그렇게 표상하는 순간, 그는 시간을 세로선처럼 등간격으로 나뉘어질 수 있는 대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직선과 시간은 그렇게 유사한 것으로 설정된다.

"I represent S as M"라고 할 때, 우리는 S와 M 사이에 확인된 유사성을 사용하거나, 적어도 그 순간 S와 M 사이에 (새로운) 유사관계를 설정한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화가가 "변덕"이라고 이름 붙인 추상화를 상상해보자. 원래는 아무런 유사점이 없을 수도 있을 두 대상이지만, 우리는 그 그림이 "변덕"이라는 마음 상태를 지시한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둘 사이의 유사관계를 설정하게 되고 그렇게 그 그림을 보게 된다. 화가가 설정한 유사관계에 대해 동의를 한다면 그 그림에 공감할 것이고, 그는 그 이후로 "변덕"을 떠올릴 때마다 그 그림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말하고 나니, "지시를 위해 유사성은 필요없지만, 지시를 하고 나면 유사성이 획득된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헷갈리다. -_-;;

위에서 언어는, 특히 낱말은 자의적으로 대상을 지시하기로 약속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낱말에 해당된다. 문장에 이르면, 문장은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을 자의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일단 낱말과 세계 사이의 지시 관계가 약속되면, 문장은 함부로 아무 상황이나 지시할 수 없다. "방 안에 사람이 두 명 있다"는 문장은 정말로 방 안에 사람이 두 명 있지 않은 상황을 지시할 수 없다. 물론 실수로 틀릴 수도 있지만, 화자는 두 명이 있다고 적어도 "가정"할 때에만 그 문장을 그 상황을 표상하는 데 쓸 것이다. 이는 과학자가 연구 대상과 유사하다고 가정한 모형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가 모형과 대상 사이에 가정한 유사성이 틀릴 수 있듯이, 일반 사람들의 쓰는 문장과 세계 사이에 가정한 유사성도 틀릴 수 있다. 그렇지만 아예 유사하거나 맞지 않다고 가정하는 문장을 사용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또 궁금한 점 : "방 안에 사람이 두 명 있다"는 여전히 representation-as 같지 않다. 그냥 ""S" represent S" 또는 "I represent S by "S""이다. 단순한 그림을 생각해보자. 사실적인 풍경화은 그 화가가 그 때 봤을 당시의 풍경을 표상한다. 그렇지만 "the 풍경화 represent the 풍경" 또는 "I represent the 풍경 by the 풍경화"일 뿐이지, "I represent the 풍경 as the 풍경화"는 아닐 수 있다. 과학적인 표상은 모두 "representation-as"인가? "representation-by"와 "representation-as"의 차이는 무엇인가? "representation-by"에 사용되는 문장이나 그림도 모형인가? 갓프리-스미스(Godfrey-Smith), 와이스버그(Weisberg)는 표상을 직접적인 표상과 간접적인 표상으로 구분한 적이 있다. 직접적인 표상에서는 모형이 사용되지 않지만, 간접적인 표상에서는 모형이 사용된다. 모든 문장과 그림이 모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간접적인 표상을 위해 사용될 때에만 모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구분은 잘 이루어지는가? 어떤 문장이나 그림에 의한 표상이 간접적인지 직접적인지 어떻게 아는가? 또 직접적, 간접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실 어떤 문장이든 그림이든 구체적인 묘사가 빠져있거나, 일정정도의 왜곡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문장이나 그림이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기술 또는 묘사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로부터 "세계랑 많이 다른데? 그걸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기술이나 묘사라고 생각하면 그 문장이나 그림은 다 거짓이 되어버릴걸"이라고 추궁당한다면 머뭇거리게 될 것이다. 답은 "근사적 참"이니 이런 식으로 가게 된다. 그러던 중 하나의 해결책이 "그 문장과 그림은 세계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사실은 픽션에 대한 묘사이다"라고 피해간 후, "픽션과 세계가 이러저러하게 닮았을 뿐이다"라고 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어리의 해결책. 그는 이러한 해결책을 통해 과학 속의 대표적인 진술들, 특히 법칙들을 세계에 대한 진술이 아닌 픽션(모형)에 대한 진술(정의)로 바꾸어 버렸다. 기어리의 해결책은 과학자들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과학 교과서의 저자들은 법칙들이 세계에 대한 진술로 생각하고 썼을 수도 있지 않은가? 교과서 속의 법칙은 기어리처럼 해석하면 세계에 대한 간접적인 표상이지만, 어떤 교과서 저자처럼 해석하면 직접적인 표상이 되는 것은 아닐까? "방 안에 사람이 두 명 있다"라는 문장은 실제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진술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우리는 그 문장을 통해 추상적인 방 안에 추상적인 사람 두 명이 있는 픽션을 구성한 후, 그 픽션과 실제 상황과의 관계를 따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 문장은 실제 세계에 대한 간접적인 진술로 해석되는 것이다. 세부묘사가 빠지거나 일정정도의 왜곡이 있는 모든 묘사는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일수도, 세계에 대한 간접적인 묘사일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문장이든 어떤 그림이든 완벽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문장이나 그림이든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 모든 문장과 그림은 세계에 대한 표상으로도, 픽션에 대한 표상(그래서 세계에 대한 간접적인 표상)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표상의 표상"은 모형의 위계질서를 반영하는가?

휴즈는 "표상의 표상"에 대해 얘기했다. S -> M1 -> M2의 순서가 점점 심층적인 모형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얘기했다. 그가 제시한 "실제 금속의 전도 현상 -> lattice-and-electron-gas-model -> 양자역학적 모형"은 그에 잘 들어맞는다. 그러나 그가 다른 구절에서 제시한 "실제 태양계 -> Newtonian many-body model -> 구심력만 작용하고 행성끼리는 서로 상호작용하지 않는 이상화된 모형"은 그 그림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즉 모형에 대한 모형은 꼭 모형의 위계질서를 반영하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