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Origins of the Special Theory of Relativ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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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크게 두 가지 설명 ─ 첫째, 선행 과학자들의 작업과의 단절, 즉 일종의 돌연변이로 보는 설명(불연속성 강조)과 둘째, 선행 과학자들의 작업의 완성으로 보는 설명(연속성 강조) ─ 으로 나뉜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세 편의 논문 -- (1) 빛에 대한 양자이론 (2)브라운 운동 (3) 특수상대성 이론 -- 은 완전히 다른 영역의 문제를 다룬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의 일반적인 문제 즉 복사압의 동요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세 편의 논문은 형식이 완전히 동일하다. (1) 비대칭성 또는 미적 부조화에 대한 진술로 시작하여, (2) 일반적인 원리를 제안한 후,(3) 그 연역적 귀결로써 비대칭성을 제거한다. (4) 그리고 실험적으로 검증가능한 예측을 간략히 제안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즉,RT를 비롯한 아인슈타인의 세 논문은 최대한 일반적인 최소한의 근본적인 가설을 가정하여 문제를 풀기 위한 시도라는 것이다. 로렌츠의 로렌츠 변환을 다룬 1904년 논문은 (11개의 임시변통의 가설을 포함한) 특수한 가설들로 가득한 반면, 아인슈타인의 RT 논문은 단 두가지의 가정(광속불변과 상대성 원리)만으로 이전의 이론들을 혁신적으로 종합해냄과 동시에 임시변통의 가설들을 몰아낸다. 이러한 점에서, 아인슈타인의 작업은 뉴턴 물리학에 대한 근본적인 혁명으로도 볼 수 있지만 방법론적으로는 뉴턴의 프린키피아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저지는 둘이 공통적으로 공간과 시간의 본성을 물리학의 핵심문제로 보았다는 점에 관심을 가지고, 아인슈타인의 RT가 시공간의 지위를 신의 감각에서 추상적 관찰자의 감각으로 옮길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에게 푸앵카레와 로렌츠의 영향은 어느 정도였을까? 저자는 Whittaker의 '아인슈타인의 1905년 RT에 관한 논문은 푸앵카레와 로렌츠의 상대성 이론의 완성일 뿐'이라는 언급해 대해 자세하게 검토하고 있다. Whittaker는 아인슈타인이 1904년의 푸앵카레의 논문과 1903년 로렌츠의 논문을 발전시켜 1905년의 RT를 완성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몇 가지 확인된 사실을 늘어놓는다.

  1. 1900년대 초에 전기역학에서 발생하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해 많은 과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다는 점은 사실이다.(1903-1905 년동안 ANNALEN DER PHYSIK 에만 유사한 주제의 논문 8편 실렸음) 아인슈타인 또한 자신의 작업은 연속적인 과학활동의 일환이었음을 강조했다.
  2. Whittaker가 언급한 푸앵카레의 1904년 논문에는 새로운 상대성 원리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당시의 기본 법칙 또는 원리들 사이에서 발생히는 어려움을 정확히 지적했을 뿐이다("속력에 따라 관성이 증가하고 빛의 속도가 건널 수 없는 한계가 되는 완전히 새로운 역학을 구성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언급이 있긴 하다).
  3. 로렌츠의 1903년 논문은 없고 1904년 논문만 있을 뿐이다.
  4. (외적 근거에 의해) 아인슈타인은 1904년의 로렌츠의 논문을 읽지 않았다.
  5. (내적 근거에 의해) 로렌츠는 맥스웰 방정식의 공분산을 얻기 위해 로렌츠 변환식을 '가정'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반대로 2개의 가정으로 로렌츠 변환식을 도출해낸다. 또한 각주 어디에도 로렌츠는 등장하지 않고, 변환 공식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다르며, 식의 표현 규약의 선택이 서로 다르다.
  6. 엄밀히 말해, 로렌츠의 논문은 상대성 이론에 대한 논문이 아니다. 여전히 로렌츠는 논문에서 갈릴레이의 상대성 원리를 가정하고 있다.
  7. 로렌츠는 자신의 변환식이 느린 속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요약해보면, 로렌츠는 (기대와 다른 결과를 보여주는) 실험적 사실의 공격에 맞서 배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뛰어난 선장이라면, 아인슈타인의 작업은 배를 옮겨타는 것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각성한 자의 창조적인 행위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저자는 로렌츠보다는 푸앵카레의 사례를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푸앵카레는 당시 물리학의 위기 상황을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부정함과 동시에 공간상으로 떨어진 두 점에서의 동시성을 부정했으며, 새로운 틀, 특히 (좌표계의) 변환 하에서도 변하지 않는 물리학 법칙의 형식을 모색했디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푸앵카레의 노력이 아인슈타인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앵카레가 아인슈타인의 RT에 대해서는 곱게보지 않았다는 점은 이상하다.

저자는 푸앵카레가 절대주의를 버리긴 했지만, 여전히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의 어딘가에 계속 남아있었다고 지적한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상대성 이론에 대해 기존의 themata를 교체하는 핵심가설(thematic hypotheses)로 여긴 반면 점진주의자로서의 푸앵카레는 여전히 기존의 themata가 길잡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한 물리학은 그 교체될 수 없는 themata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푸앵카레를 비롯한 19세기 말의 물리학자들은 물리학의 일반법칙들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서 에테르를 부여잡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테르를 포기해야 한다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당시 물리학자들을 당황케 했음이 분명하다. 에테르가 사라진 우주에 대해 저자는 코이레의 구절을 인용한다.

"뉴턴의 신은 intelligantia supra-mundana가 되었다. 그는 신으로부터 모든 속성을 물려받았으나 ... 신은 제거되었었다"

우주에서 신이 사라진 상황에 대해, 저자는 객체를 봄으로써 다시 주체 자신을 보게 될 수밖에 없든 상황이라 묘사하며, 시대적으로 실존주의와 실증주의의 결합이 이에 조응한다고 덧붙인다.

지금까지 푸앵카레와 로렌츠의 영향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이지만 젊은 아인슈타인에 미친 다른 사람들의 영향은 어느 정도였을까? 아인슈타인의 1905년 논문의 스타일은 매우 독특했다. 고립된 그가 어떻게 그러한 관점, 질문, 방법을 얻게 되었을까? 저자는 1905년 논문의 첫부분에 등장하는 '맥스웰 이론의 비대칭성' 언급을 단서로 그 기원을 추적해간다.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을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집에서 책으로 공부를 했을 텐데 그렇다면 누구의 책으로 공부했을까? 헬름홀츠, 볼츠만, 헤르츠 등의 저작을 통해 맥스웰 이론을 공부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특히 저자가 주목한 사람은 푀플(Foppl)이다.

푀플의 물리학의 토대에 대한 깊은 관심, 마흐로부터의 영향과 상대운동에 대한 강조는 아인슈타인과 닮아 있었으며, 특히 맥스웰 이론을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아인슈타인 논문의 첫구절이 정확히 표현되어 있었고, '자석과 도체가 함께 움직이면 어떻게 되겠는가?'와 같은 사고실험이 소개되어 있었다. 저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아인슈타인이 푀플의 저작을 읽었다는 사료를 찾아내면서 아인슈타인에게 미친 푀플의 영향을 디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학교와 다른 방식으로 물리학을 밀고 나가는 데에 용기를 주었고, 둘째, 독특한 방식으로 당대의 물리학자들을 소개해주었다. 또한 푀플은 아인슈타인 논문의 (1) 물리학과 철학의 혼합 (2) 근본문제가 시공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통해 성취된다는 점의 승인 (3) 사고실험에 대한 강조와 실험에 대한 비관심을 잘 이해하게 해준다. 아웃사이더 저자의 책이 아웃사이더 학생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개연성이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