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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후원은 근대 초 유럽사회에서 널리 퍼져있던 "제도"로 다양한 문화 활동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웨스트폴은 후원이 과학혁명의 사회사를 푸는 만능열쇠는 아니지만 당대 가장 만영해 있던 제도라고 이야기하면서, 후원이라는 시각을 통해 과학혁명을 볼 것을 제안한다. 후원을 통한 과학혁명 분석은 과학혁명의 사회적 차원을 잘 드러내 주는데, 그것은 갈릴레오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즉 한 과학자의 행위의 동기와 일탈을 설명해 준다.

후원의 방식: 공식적 체계라기보다는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개인적) 관계

후원은 피후원자에게 단지 경제적 지원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피후원자의 사회적 지위 상승도 가져다 주는 동시에 피후원자가 종사하는 학문분야를 정당화해 주는 역할도 했다. 반대로 후원자는 피후원자를 지원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명성을 높일 수 있었다.

갈릴레오는 메디치의 궁정철학자가 되기 전까지 지속적인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피사와 파두아 대학에 임용되었지만 종신직을 보장받지 못했고 보수는 적었다. 부족한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개인교습을 하고 기구를 제작해 팔기도 했으며 집에 하숙생을 들이기도 했따. 이런 상황에서 갈릴레오는 후원의 필요성을 느꼈고 항상 후원을 염두에 두고 과학활동을 했다.

"메디치의 별"과 후원의 성공

1605년 갈릴레오는 메디치의 후계자였던 코시모에게 수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갈릴레오는 그의 결혼식에 자석을 선물로 보냈는데, (i) 자석은 메디치의 상징에서 왕자를 표현한다는 것과, (ii) 코시모가 지구?우주?(cosmos)와 동의어이고, (iii) 지구는 일종의 자석이라는 것을 절묘하게 이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도 후원을 받는 데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609년에 행운이 찾아왔다. 페르디난드 1세가 죽은 후 코시모가 토스카나 대공을 승계한 것과, 어떤 플란더스 사람이 망원경을 들고 베니스에 나타난 것이다. 갈릴레오는 금새 망원경을 개량하여 20배율의 성능을 자랑하는 망원경을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이 망원경으로 갈릴레오는 천체를 관측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달과 별들을 관착했으나, 곧이어 그 시기 '관측하기 쉬웠던' 목성을 관측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30배율로 성능이 개선된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발견했다. 그는 별의 전령(Sidereus Nuncius)에서 목성의 네 위성을 "메디치의 별"이라 명명한다. 그리고 그 책과 (그 때 그 위성을 관찰한) 망원경을 메디치에 선물함으로써, 그는 대학의 수학교수에서 궁정의 철학자 겸 수학자로 신분 상승을 이루게 된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옹호와 후원 사이의 관계

전령은 분명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옹호하는 저술이었다. 갈릴레오에게 천체 관측의 애초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웨스트폴이 보기에, 갈릴레오의 천체 관측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옹호하기 위한 결정적 증거로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후원을 얻기 위한 도구였다. 즉 애초에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통해 천체 관측을 시작한 것은 코페르니쿠스의 문제를 풀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더 나아가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진지하게 수용하고 옹호하게 된 것은 그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러한 해석이 가능한가?

만약 갈릴레오가 처음부터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뒷받침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면 목성이 아니라 금성을 관측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령에서 금성은 딱 한 번 언급되었고 그것도 위상이 아닌 발광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나중에 카스텔리의 편지를 받고 나서야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뜬 것으로 보인다. 즉 갈릴레오에게 망원경은 일차적으로 후원을 얻어내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갈릴레오의 후원에 대한 강한 욕심과 불안정한 후원 체계

갈릴레오가 후원에 대한 욕심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금성 위상 관측에 관한 에피소드에서 잘 드러난다. 갈릴레오는 카스텔리의 편지를 받기 전까지 금성의 위상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나 카스텔리의 편지를 받은 후 그는 마치 금성 관측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진행된 것처럼 행세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업적으로 독점하려는 이러한 극단적인 태도는 후원체계가 지니는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속성을 보여준다. 한번 후원을 얻었다고 해서 그것이 지속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업적을 내어 후원자에게 선사해야 했던 것이다.

평가

Ariew는 당대의 지적맥락을 검토함으로써,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성의 위상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우주론에 필요하다는 데 일치했으며, 오히려 그것이 관찰되지 않아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우주론의 난점으로 지적되었음을 드러낸다. 스콜라적 체계에서 태양은 빛의 근원으로 여겨졌는데, 이런 견해는 15-6세기를 거치면서 널리 확산되었고 갈릴레오도 이런 견해에 익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우주론에서는 금성의 위상 변화 가능성이 따라 나온다. 물론 금성의 위상 발견이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에 대한 결정적 변칙사례 또는 반례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티코 체계가 아니더라도 금성의 주전원의 중심을 태양 위에 고정시키기만 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즉, Ariew는 금성이 위상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이미 널러 퍼져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관찰은 새로운 천문학의 주된 관심거리가 아니었고, 오히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금성과 화성의 빛의 세기 변화였음을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