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entific Discovery as Growth of Understanding: The Case of Newton's Gravitation
Maurice A. Finocchiaro, “Scientific Discovery as Growth of Understanding: The Case of Newton's Gravitation”, in Scientific Discovery, Logic, and Rationality.
과학적 발견과 진보를 지식의 증가 및 참으로의 근접으로 보기보다, 이해의 증가 및 문제풀이의 증가로 생각해보자. 그러나 이해의 증가로서의 진보 개념은 뉴턴의 중력 발견 사례에는 쉽게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뉴턴의 중력 이론이 여러 경험적 문제를 풀었을지라도, 중력은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인 원거리 작용을 전제함으로써 오히려 중력을 통해 설명하는 모든 현상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환원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즉 지식은 증가했을지언정 이해는 증가하지 못한 것 같다. 또한 이해의 증가란 아직 이해되지 않은 것을 이해된 것으로 환원함으로써만 가능해보이다. 즉 이해는 더욱더 많은 현상들을 이미 이해된 개념을 통해 이해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과정을 통해 양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이해의 질적 증가라고 부를 만한 것을 배제한다. 만약 우리가 양적 증가만을 채택한다면, 이해의 증가로서의 과학의 진보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뉴턴의 사례를 어떻게 하면 이해의 증가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을까? 뉴턴은 과학 이론이 단지 지식뿐 아니라 이해를 산출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고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뉴턴의 중력 개념은 과학 이론의 개념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방법론적 규범과 갈등을 일으켰다. 뉴턴은 ‘중력(무게)을 물질의 본질적 속성’으로 간주할 경우 이해불가능한 결과(매개 없는 원거리 작용)를 낳는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고, 그래서 그는 중력(무게)을 물질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호이겐스는 중력의 참을 수용했지만, 상호 인력으로서의 중력은 이해불가능한 것으로 거부했다. 라이프니츠 역시 물체의 자연적(이해가능한) 속성이 아닌 인력을 이용한 뉴턴의 설명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즉 뉴턴의 중력 이론은 현상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바꿔주지 못하기 때문에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됐다. 따라서 중력(인력) 개념이 이해가능한 것으로 바뀌지 않는 한 이해의 증가로서의 진보 역시 불가능하다. 중력 개념의 이해불가능성은 설명적 이해불가능성보다는 개념적 이해불가능성에 따른 것으로, 이는 명료화 작업(수학적 정식화)과 기존 이해가능한 개념(접촉 작용)과의 맥락적 비교 작업(일종의 물귀신 작전)을 통해 이해가능한 것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전략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가 지구의 운동의 이해불가능성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을 때, 하이젠베르크가 파동함수의 붕괴와 상보성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을 때, 그들은 바로 이러한 명료화 작업과 기존 이해가능한 개념과의 맥락적 비교 작업을 수행했던 것이다.
피노키아로의 ‘본질적’ = ‘이해가능한’ 으로의 연결 분석은 여러 구멍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