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entific Pluralism and the Chemical Revolution
Martin Kusch, Scientific Pluralism and the Chemical Revolution, SHPS 49 (2015), 69-79.
장하석이 Is Water H2O?(2012)에서 화학혁명의 사례가 규범적 다원주의를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마틴 쿠쉬(Martin Kusch)는 그럴 수 없다고 비판한다. 쿠쉬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장하석은 플로지스톤 실천체계(system of practice)가 그렇게 일찍 죽을 이유가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쿠쉬에 따르면 그의 논변은 당대 플로지스톤주의자들의 주장을 너무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둘째, 장하석의 다원주의는 실천체계의 공존을 주장하며, 이를 위해서는 화학혁명의 경우 산소 체계와 플로지스톤 체계가 일단 성립해야 하지만, 쿠쉬는 정합적인 체계로서 플로지스톤 체계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셋째, 장하석은 플로지스톤 체계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다원주의를 옹호하고자 하나, 쿠쉬에 따르면 라부아지에 체계로의 전이는 꽤 빨리 이루어졌으며, 특히 장하석은 그러한 "개종"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넷째, 장하석은 이론 수용에 대한 사회적 설명이 이론 수용의 좋은 이유와 공존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사회적 설명을 멀리하려 하지만, 쿠쉬에 따르면 사회적 설명과 이유는 공존할 수 있다.
장하석의 과학적 다원주의와 화학혁명
장하석은 자신의 입장은 "능동적 규범적 인식적 다원주의"로 부른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복잡한 세계의 모든 측면을 하나의 이론 또는 실천체계로 알아낼 수 없기 때문에 "임의의 주어진 과학 분야에서 복수의 실천체계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장하석에 따르면, 다원주의는 "관용의 이익"과 "상호작용의 이익"을 가져다주며, 화학혁명의 사례는 다음의 근거에서 규범적 다원주의를 지지한다. (1) 당대에 플로지스톤 체계를 고수한 학자들이 꽤 많았으며, 당대 플로지스톤 체계를 버리고 산소 체계를 선택할 근거가 부족했다. 장하석은 산소 체계 선택에 대한 사회적 설명들에 거리를 두긴 하지만, 라부아지에의 "공격적 캠페인"을 화학혁명의 "비합리적" 요인으로 지적하는 한편, 라부아지에의 승리가 그 전부터 시작된 "구성주의[compositionism]"(vs. 원리주의[principalism])의 유행에 올라탄 덕분이라고도 설명한다. (2) 산소 체계와 플로지스톤 체계는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둘다 결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두 체계 모두 부분적으로 성공적이었다. 또한 각 실천체계는 상이한 가치 체계(단순성, 정확성, 새로움, 일원주의, 다원주의)를 가진 학자들에 의해 추구되었는데, 우리에겐 특정한 가치 체계를 선호할 근거가 없다. 따라서 두 체계는 모두 추구될 이유가 있었으며 그래야 했다. (3) 플로지스톤 이론이 살아남았다면 전자나 화학에너지를 더 빨리 발견했을 가능성이 있다.
쿠쉬의 비판 1,2,3
첫째, 장하석의 화학혁명 서술은 각 진영의 묘사에 사용한 용어만 보더라도 지나치게 편향적이며 당대 플로지톤 이론가들의 선전을 너무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라부아지에와 프리스틀리의 실험도구의 비용에 기초한 양측 묘사도 편향적이다. 라부아지에의 실험도구가 비싸긴 했지만, 플로지스톤 지지자인 캐번디쉬나 커완 역시 갑부였다. 프리스틀리의 실험실 역시 갑부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그의 여러 실험과 출판은 기구 제작자로서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장하석은 라부아지에의 "무자비한 캠페인"을 지적하고 있지만, 프리스틀리 역시 국제적 네트워크를 동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하석은 라부아지에 이론의 여러 약점을 지적하고 있으나, 라부아지에 이론이 일부 틀렸다는 점만으로는 그의 성취를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장하석의 다원주의는 실천체계의 공존을 주장하지만, 플로지스톤 이론들은 하나의 실천체계로 보기 어렵다. 당대에도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을 "진정한 변덕쟁이"로 묘사하며 비판한 바 있는데, 장하석은 이러한 문제점을 무시하고 있으며, 이를 단지 한 실천체계의 여러 버전으로 둔다고 해결되진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 따르면 "실천체계란 인식적 활동의 정합적 집합"이기 때문이다. 캐번디쉬, 커완, 프리스틀리는 중대한 점에서 이론적 차이를 보였으며, 어느 하나를 "최선의" 버전으로 보기 어렵다. 또한 장하석은 대체로 플로지스톤을 "물질적이나 무게가 없는 유체"로 규정하려고 하나, 이는 당대의 대표적인 플로지스톤 견해와 충돌하며, 이를 진지하게 고려할 경우 플로지스톤의 유지가 전자나 화학에너지의 발견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는 그의 희망은 실질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셋째, 장하석은 플로지스톤 체계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다원주의를 옹호하고자 하나, 쿠쉬에 따르면 라부아지에 체계로의 전이는 꽤 빨리 이루어졌으며, 특히 장하석은 그러한 "개종"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장하석은 산소 이론에 대한 저항자가 많았다는 증거로 (1) "die-hards", (2) "fence-sitters", (3) "new anti-Lavoisierians" 세 부류의 사람들의 목록을 제시한다. 그러나 (1)은 전체 화학자수를 고려하면 그 비율이 적고, 일찍 죽은 사람도 포함하고 있다. 장하석은 (2)에 베르톨레를 포함하고 있는데, 베르톨레가 라부아지에의 일부 주장을 반대하긴 했지만 라부아지에의 지지자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리고 (3)을 플로지스톤 체계의 옹호에 사용하는 것은 근거 없는 제로-섬 게임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장하석의 목록은 탐구자의 "핵심 집단"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으며, 또한 캐번디쉬가 플로지스톤주의자에서 fence-sitter로 변경된 것 자체가 라부아지에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특히, 많은 수의 화학자들이 산소 이론 옹호자로 개종했는데, 장하석은 왜 그들이 플로지스톤 이론을 보리고 산소 이론을 채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쿠쉬의 비판 4 : 합리적 설명 대 사회적 설명
장하석에 따르면, 178-90년대 과학자들은 플로지스톤 이론을 버리고 산소 이론을 선택할 충분한 이유(실험적 근거와 이론적 고려)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쿠쉬에 따르면, 그들은 라부아지에의 입장을 선호할 "간접적" 이유들(즉 진실성의 지표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며, 그 이유들은 실험과 이론과 관련된 "좁은" 이유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러한 분석은 콜린스 등이 제안한 "실험자의 회귀" 개념을 통해 사회적으로 분석될 수 있으나, 장하석은 사회적 설명을 "비합리적"이고 "외적"인 것으로 잘못 간주함으로써 그러한 분석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독일 화학자들의 개종을 분석한 칼 하우프바우어(Karl Haufbauer)의 1982년 논문은 이를 잘 보여준다. 장하석은 하우프바우어의 분석이 순전히 내적이어서 사회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얘기하지만, 쿠쉬에 따르면 하우프바우어의 분석은 진정으로 사회적이다. 1790년대 초 독일에서는 헤름브스타트(Hermbstadt)의 수은회 환원 실험 하나만으로 산소 이론과 플로지스톤 이론 사이의 논쟁이 종결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일단 그들은 (모두 개신교도로서) 지지 이론과 상관없이 서로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고 있었으며, 독일의 플로지스톤주의자들은 (독일의 강한 실험 전통에서) 라부아지에의 실험의 문제점을 찾는 데 집중하고 있었고, 그래서 양측 모두는 논쟁의 범위를 라부아지에의 실험가로서의 신뢰성 문제로 한정했다. 이는 정확히 "실험자의 회귀" 문제였다. 실험의 이론적 사항에 대한 합의가 없으므로, 어떤 실험 결과가 나와야 할지에 대한 합의가 없으며, 어떤 실험 결과가 나와야 할지에 대한 합의가 없으므로 실험가의 실험 능력을 인정하기 어렵다. 실험가의 실험 능력을 인정하기 어려우므로 결국 실험의 이론적 사항에 대한 합의도 불가능하다. 하우프바우어는 이 논쟁의 (사회적) 종결 요인들(출판 전략, 교묘한 공격, 권위 등)을 분석한다. 하우프바우어의 분석은 모두 "사회적"인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