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chnology and Alchemical Debate in the Late Middle 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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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후기 연금술은 중세 기술 발전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 연금술은 당시 정당한 지식의 분야였는가?

이 글은 13세기 초부터 1315년 연금술의 위기까지의 기간에 걸친 연금술에 대한 논의를 추적하고 있다.

자연과 인공물의 구분은 그리스, 로마, 이슬람의 전통에서부터 시작됐다. 고대로부터, 장인의 생산물, 즉 인공물은 자연을 모방한 모조품으로 여겨졌고, 간통(moichea)이란 말에서 유래한 기계적 기예(mechanical art)는 인공물에 대한 멸시적 관점을 반영한다. 중세의 많은 연금술 저작들은 기계가 자연을 모방한 것이라는 고대의 주장을 수용했지만, 그 기계가 자연을 성공적으로 재현할 뿐만 아니라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3세기 연금술 논쟁

연금술은 로버트(Robert of Ketton)가 모리에누스(Morienus)의 De compositione alchemie를 번역하면서 중세 유럽 사회에 등장했다. 그러나, 연금술은 대학 교과과정을 포함한 어떤 고등교육과정에서도 교육되지 않았다. 스콜라 학자들에 의해 연금술 저작들이 인용되긴 했지만, 분명 연금술은 주변부에 추방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요새인 중세 대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외의 학문을 배척했다는 주장에 대해. 이는 불충분하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로저 베이컨 등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스콜라 학자들도 연금술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 또한 중세 후기의 연금술은 매우 합리적인 학문분과였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장한 많은 위작들로 인해 중세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스스로가 연금술을 했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 학문이기에 배척당했다는 주장은 성립되기 어렵다. ② 학문이 아닌 기술이었기 때문에 배척당했다는 주장에 대해. 연금술은 기술로만 볼 수 없으며, 기술과 과학의 중간 위치로 보아야 마땅하다. 의학도 마찬가지였지만, 의학을 비롯한 여러 실용적인 분과들은 중세대학의 교과과정에 포함되었다.

그렇다면? 12세기 말 13세기 초, 연금술은 정통 과학과 종교의 권위에 의해 배척되었다. (즉, 단지 비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서, 기술이라서가 아니라 그 내용상 정통 학파와 불일치했기 때문) 이에 따라, 대학에서는 연금술은 교육되거나 행해지기 힘들었으며, 지하에서 몰래 행해지게 되었다. 한편, 연금술 지지자들은 자신들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호소하는 위작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술’로서의 정체성과 그 가치를 최초로 가장 확실하게 표명하기도 했다.

13세기 초

1200년 경, 알프레드(Alfred of Sarashel)는 페르시아의 철학자 아비켄나(Avicenna)의 기상학 부분을 번역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상학 4번째 책에 삽입하여 위작을 만들었다. 이로써, 연금술은 즉각적인 권위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오히려 이는 반대자들에게 공격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즉, 연금술사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정합적으로 답애햐 했기 때문이다.

아비켄나의 책에는 알려진 여섯 가지 금속(금, 은, 구리, 주석, 납, 철)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데, 그는 이 금속들이 수은과 황의 다양한 비율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그는 금속의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① 인공물과 자연물과 달리 본질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인간의 기예로는 (그럴싸한 모작은 만들 수 있지만) 더 나은 금속을 만들어낼 수 없으며, ② 금속들 사이의 종을 구별짓는 특별한 속성은 감각 아래 숨어있기 때문에 그것을 모르고는 금속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실 금속들의 차이를 보여주는 속성들 중에는 쉽게 인식할 수 있는 것들(녹는점, 전성, 비중, 색깔)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즉, 아비켄나가 지적한 ‘금속들의 차이를 구별짓는 특별한 속성’은 그러한 것들과 다른 것이었다)

한편, 아비켄나의 주장은 매우 고전적인(반동적인) 논리(자연물이 인공물보다 본질적으로 우수하다)에 근거해 있었다. 이는 연금술뿐만 아니라 기술 전체를 공격하는 논리였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입은 아비켄나의 주장은 이후 연금술뿐만 아니라 자연을 변화시키는 모든 인공적 기술 전체에 반대하는 근거로 이용되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연금술사들은 급진적인 기술관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연금술사들은 인간의 능력이 해방될 수 있음을 주장했는데, 이는 막연한 낙관만은 아니었다. 이는 실제 관찰과 유비추리에 기초해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신플라톤주의화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었다. 이러한 대응은 (이후 위작으로 밝혀진) 헤르메스의 저작에서 잘 드러난다. ① (경험적인 대응) 몇몇 인간의 기술은 자연의 것보다 더 성공적이다. 예컨대, 인공의 녹청(verdigris), 황산(vitriol), 산화아연, 염화암모늄 등은 자연물의 형태보다 더 훌륭하다. 접붙이기 등의 농업기술도 그러하다. ② (논리적인 대응) 금속은 여러 성분을 함유한 가용성의 불연성의 전성 물체이므로, 금속 종간의 차이는 양적 정도의 문제이다.

13세기 중반: 빈센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로저 베이컨

헤르메스의 저작은 13세기 중반 연금술에 관심을 가졌던 세 명의 스콜라 학자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1. 빈센트: 유용성의 측면에서 연금술 옹호. 농업이 식물의 과학에서 나왔듯이. 연금술은 무기물(혹은 광물)의 과학에서 나온 것. 연금술에 대해 무기물(광물)을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화시키는 기술로 규정.
  2.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자연과학 연구의 일부로서 광물학을 연구했다. 그에 의하면, 금속들은 안정적이며, 보통의 상태에서 그들은 다른 금속으로 바뀌지 않는다. 아비켄나를 답습하는 듯하지만, 그는 금속의 종이 인공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아비켄나를 공격했다. 그러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3. 로저 베이컨: 연금술을 스콜라 과학을 개혁하는 수단으로 생각. 의학과 자연철학이 4원소로부터 만들어진 사물에 대한 과학이듯이, 연금술도 그와 마찬가지로 원소에 대한 과학이며, ‘매우 근본적인 것’이라 생각. 아리스토텔레스를 빙자하여 종이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맹비난. 이는 이전 시기에 비해 진전된 연금술 논의를 반영.

13세기 후반의 연금술 논의: 타란토의 폴(Paul of Taranto)

폴은 자신의 저작 Theorica et practica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강조했다. 그는 자연이 지성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지성에 종속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내재적 형식의 기술(농업, 의술)과 외재적 형식의 기술(그림, 조각)을 구분하면서, 우리가 1차적 성질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기술(내재적 형식)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여러 경험적 예시(납 태우면 노란색 코크스, 더 태우면 하얀색 코크스 등)를 통해 금속의 변화를 제시하고, 1차적 성질을 이용하여 그 변화를 설명했다. 그러나, 자신의 성공에 도취.

13세기 후반의 반 연금술 정서와 논의의 결과

토마스 아퀴나스는 연금술사의 행위를 자연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악령에 빗대어 얘기했는데, 기술로써 변형시킬 수 없는 것(특히 금)을 만들려는 시도에 대해, 모두 가짜라고 규정. 특별한 장소의 강조. 헤르메스 저작의 저자는 이에 대해 경험적으로 반박(병아리의 인공 부화)

아퀴나스의 제자 길스(Giles of Rome)는 신학적 맥락에서 연금술 논의. 종교적 맥락에서 연금술 금지(1296년 교황의 칙령. 가짜 금의 판매에 대한 도덕적, 경제적 근거)

연금술 지지자는 이러한 신학적 반대에 신학적으로 대응했는데, 이러한 신학적 환원 경향은 오히려 13,14세기 연금술에 대한 비난을 초래. 그럼에도,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력을 옹호하는 연금술의 매력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으며, 연금술은 이후 많은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