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bsolute existence' of phlogiston: the losing party's point of view
BOANTZA, V. D. and O. GAL (2011). "The 'absolute existence' of phlogiston: the losing party's point of view." The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1-26.
커완, 프리스틀리, 니콜슨, 포르크로이 등은 1780년대, 1790년대에도, 심지어는 1800년대에도 플로지스톤의 존재를 주장했다. 저자들에 따르면, 당시 그들은 모두 연소, 하소, 호흡 과정에서 산소와 결합한다는 라부아지에의 생각을 수용했으며, 정량화의 장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주장한 진짜 내용은 무엇이며, 그들이 진짜 변호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논문에 따르면, 플로지스톤의 존재 주장은 연소 시 무언가 방출되는 것이 있다는 것으로서, 이는 플로지스톤의 기능과 성질에 대한 특정한 가설들과 무관했다. 또한 그들이 플로지스톤의 존재를 옹호한 이유는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화학이 도입되면서 사라지게 될 화학 고유의 물질관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1) 질량 측정을 통해서만 구성원소를 밝히는 작업만을 절대적 사실로 간주하는 것에 맞서 화학 분석에서 냄새, 색깔과 같은 화학적 성질들의 증거적 가치 또는 그에 대한 설명의 필요성을 지키려고 했다. (2) 기체들이 단지 여러 종류 있다는 것에서 탐구를 멈추는 것에 맞서 기체의 종류에 대한 설명(플로지스톤의 특정한 양으로 설명)의 필요성을 지키려고 했다. (3) 물질들 사이의 화학 반응을 관장하는 친화성 개념을 균질적인 물리적 힘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에 맞서, 물질마다의 고유한 특성으로서의 친화성 개념을 지키고자 했다. (4) 화학의 복잡하면서도 통일적인 질서를 단순한 가설로 환원하는 시도(그들이 보기에 라부아지에의 단순한 가설은 복잡한 화학 현상들 중 극히 일부만을 설명할 수 있었음)에 맞서 원래의 복잡다단한 질서를 그대로 살려내고자 했다. 요컨대, 플로지스톤 옹호자들은 화학적 물질을 물리적 대상으로 환원하려는 시도에 맞서, 화학 고유의 물질관(각 물질은 고유의 특성을 가진 substance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물질의 성질은 그 substance들에 의해 설명 가능. 화학은 바로 그러한 특성들의 질서를 연구하는 것)을 지켜내려고 한 것임. 그것을 지키는 핵심에 플로지스톤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새로 알게 된 것 : 플로지스톤 옹호자들의 주장과 흥미로운 논변들. (1) 연소나 하소 과정에서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는 것 인정. 그럼에도 방출되는 것 있음. (2) 연소가 산소와의 결합을 뜻한다면, 열과 함께 빨간 불과 빛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라부아지에게도 칼로릭이나 불의 원소, 빛의 원소 필요. 그렇다면 플로지스톤이 라부아지에의 칼로릭이나 불의 원소보다 못한 게 뭐냐? (2) 철의 하소 과정에서 냄새가 남. 냄새가 난다는 것은 무언가 방출된다는 뜻 아닌가? (3) 빨간 기포(?)는 플로지스톤화의 증거 아니겠는가? 베르톨레의 질량 측정에 의한 absolute fact만을 발표할 때, 그는 ‘왜 하필 빨갛게 되었는가'는 설명 안 함. 플로지스톤은 그에 대해 설명! (4) 무게 측정만으로는 화학 분석 완전하지 않음. 무게 측정은 화학반응의 원인까지 보여주진 않음. (5) 라부아지에 물 분해 실험에서는 붉은 finery cinder가 만들어지는데 이것을 산화철이라 부름. 그러나 철을 태운 rust of iron은 검은 색임. 둘은 다른 것 아니겠는가? 성질의 변화 외에 물질 본성의 변화에 대한 증거가 무엇이 있겠는가? (6) 플로지스톤을 분리해내라는 것은 자석에서 자기를 분리해내라는 것과 같은 무리한 요구 (7) 칼로릭의 양이 증가함에 따라 고체, 액체, 기체로 상태 변화하듯이(?), 플로지스톤의 양이 증가함에 따라 기체 종류 변화. (8) 금속 침전에 대한 라부아지에의 산소와의 친화성 표를 이용한 양적 설명 불완전. (9) 라부아지에의 가설의 단순성은 많은 현상에서 불충분.
저자가 묘사한 플로지스톤 옹호자들의 불만은 패러다임 전환기 기존 패러다임을 고수한 진영의 일반적인 반응일까? 새로운 패러다임은 단순하면 인상적인 성공을 보여주지만 모든 것을 설명해주진 못하므로... 그동안 설명되던 것들이 더이상 설명될 수 없게 되며, 때로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되어 버림. 이 과정에서 과거 패러다임 하에서 연구된 수많은 구체적인 지식들은 지워져버리기도 함. 어쩌면 이 논문은 바로 패러다임 전환기의 일반적인 특징을 화학 혁명을 통해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이 논문이 플로지스톤 옹호자들과 라부아지에 사이의 차이를 과장한 것은 아닐까? 라부아지에도 화학적 성질과 물리적 성질 구분하고, 단순한 혼합(aggregation)과 새로운 분자를 만들어내는 화학결합을 구분한 것으로 알고 있음. 당시 라부아지에의 태도는 어쩌면, 물질마다의 고유의 성질에 대해 화학의 중요한 탐구 대상임을 인정함에도 그것의 원인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인정하는 것 아닐까? 그가 보기에 플로지스톤 옹호자들은 무지를 인정하지 않은 채 과거 방식의 설명을 추구한 것. 반대로 플로지스톤 옹호자들이 보기에 라부아지에가 그동안 화학이 잘 수행해오던 설명의 영역을 포기한 것이 될 것. 이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플로지스톤이 필요. 또한 그들이 보기엔 라부아지에 역시도 무리해 보이는 가설(물리적 힘으로서의 화학적 친화성)을 동원하는 것이 오만으로 보였을 것. 이런 가설을 고려했다는 것은 화학적 성질이 어떻게든 물리적 힘에 의해 설명될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나? 열의 전파는 칼로릭 사이의 척력에 의해 설명된다 하면, 열 자체는? 칼로릭의 성질? 색깔은? 점성은? 냄새는? … 이러한 성질에 대한 라부아지에의 태도는? 잘 모르겠음.
한편 기체의 종류나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 플로지스톤의 양을 동원하는 것은 라부아지에식의 태도와 뭐가 다른가? 저자들은 이를 물질의 고유한 성질을 강조하는 것으로 얘기하면서 동시에 라부아지에와는 다른 설명을 추구한 것처럼 묘사한다. 어떻게 다르지? 라부아지에에겐 그냥 다른 종류의 기체들. 프리스틀리에겐 플로지스톤의 양이 다른 기체들. 누가 더 물질의 고유한 성질을 강조하는 것일까? 전통주의자들에게 물질들의 화학적 성질은 설명이 필요한 대상. 라부아지에게 그것은 막다른 끝. 전통주의자는 그것을 고유의 특징을 가진 substance들로 설명 시도. 라부아지에는 substance는 무게 측정법을 통해서만 분석될 뿐, 성질과 무관. 따라서 물질의 성질은 substance로 설명 불가능?